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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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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축(家畜, domestic animal)은 인류가 야생동물을 길들이기, 개량한 것으로 인류생활에 유용한 동물을 통틀어 이른다. 주로 축산물을 제공하고, 사역에 이용된다. 조류에 속한 것을 가금이라하여 이를 제외하고 포유류 만을 좁은 뜻의 가축이라 하기도 한다.

현재 세계에서 가축으로 취급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포유류에는 ·당나귀··물소·면양·염소·낙타·순록·돼지··고양이·토끼, 조류에는 닭·칠면조·거위·집오리·화조·집비둘기·메추리, 어류에는 잉어·금붕어, 곤충류에는 누에·꿀벌 등이 있다. 보통 가축이라 할 때는 어류와 곤충류를 제외하고 포유류와 조류만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조류에 속한 것을 가금(家禽)이라 하여 이를 제외하고, 포유류만을 좁은 뜻의 가축이라 하기도 한다.

과거에는 지금처럼 과학기술이 많이 발전하지 않아서 현재의 버스지하철, 비행기를 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연 그대로 존재하는 가축을 이용해서 이동을 하곤 했다. 가축을 이용하여 이동을 하던 시기보다 더 옛날에는 가축을 통한 이동을 생각하지 못하고 오로지 식용으로만 사용했다고 한다. 사람을 이동시켜주는 가축에는 주로 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굳이 말을 이동하는데 이용한 이유는 인간을 태울 수 있는 좋은 체격과 다른 동물에 비해 빠른 속력으로 오래 달릴 수 있는 좋은 지구력, 비교적 높은 지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말의 일률은 500~590w 정도 되는데 소의 경우 390w~450w정도 된다고 한다. 인간의 일률이 60w정도 되는걸 보면 매우 높은 일률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말의 장점 때문에 과거의 과학 기술이 부족했던 사람들은 말을 이용해서 이동을 하곤 했었다.

과거 우리 나라의 가축 생간은 마산(馬産)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할 정도로 말은 일찍부터 군사용이나 교통수단으로 중요한 가축으로 간주되어 왔다. 역사 기록상으로 볼 때, 우리 나라 말의 사육 기원은 기원전 108년, 즉 지금으로부터 2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지금의 재래마는 전부 소형마로서 '스키토시베리아'문화의 유입에 따른 타르판(Tarpan)계의 중형마가 시초가 되어 북방의 몽고마나 아랍 계통의 영향을 받으면서 내려와 정착된 우리 고유품종이다.

이동수단으로 이용했던 가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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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의 조개무덤에서도 기원전 100년경의 것으로 보이는 소의 유골이 발견된 바 있다. 우리 나라에서 소는 주로 농사를 짓는 데 이용되고, 수레를 끌거나 짐을 싣는 데에도 이용되었다.

고구려에서 300년경에 소달구지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나 416년 신라의 눌지왕이 소달구지를 백성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교육하였다는 것 등도 소가 역용(役用)으로 이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처음에 소는 시체를 나르는 데 이용되다가 물건을 운반하거나 농사에 쓰이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 지증왕 때인 498년에는 소로 농사를 짓는 것이 경주 일대의 농민에게 실용화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역용 이외에 식용으로도 이용되었을 것이다. 소는 매우 귀중한 짐승으로 옛날에는 소의 소유 정도에 따라 부유함을 나타내기도 하였으며, 남의 소를 죽이거나 손상을 입힌 사람을 노비로 삼는 벌을 주어 백성들의 재산을 보호하였다.

신라시대에는 소의 전염병이 유행하면 논·밭갈이를 사람이 대신하기도 하였으며, 소의 도살을 금지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세조는 목장을 많이 만들었고 우경을 장려하였으며, ≪양우법≫이라는 책을 만들어 소의 이용과 증식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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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에는 진한 사람들이 을 탔다는 기록이 있고, 350년경의 고구려벽화 중에는 말이 수레를 끄는 그림이 있으며, 신라 문무왕 9년에는 전국에 174개 소의 목장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군용이나 교통에 이용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의 재래마는 부여의 명마(名馬)와 과하마(果下馬), 고구려의 삼척마(三尺馬), 예(濊)와 백제의 과하마처럼 왜소한 품종이었다.

고려시대에는 몽고·만주 등을 거쳐 유입된 호마(胡馬)와 재래종인 향마가 있었다고 한다. 또, 1273년 고려 원종 이후에 원나라에서 유입된 서역마와 재래마가 교잡되어 제주도말이 생겼는데, 조선시대에 본토 또는 북방에서 수입된 말에 의하여 혈액이 혼합되면서 오랜 시일에 걸쳐 체격이 왜소화되었다는 설도 있다.

고려시대에는 말을 키우기 위한 목장이 123개 소가 있어 군용, 궁실의 식용, 수렵과 통신 등에 이용하였으나 농경에는 별로 이용하지 않았다. 조선 중기 이후부터는 말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어 목장도 없어졌다가 민족항일기 이후 일본군에 의해서 대형의 개량종이 증가하게 되었고 농업에도 이용하게 되었다.

1915년 강원도 회양군 난곡에 목장을 설치하여 사육, 번식시킴과 함께 좋은 말을 개량하기도 하였으며, 함경북도 경원에서는 종마목장을 세워 군용말을 생산하였다. 1920년에는 우리의 재래종에 일본산을 교배하여 '신조선종'이라는 품종을 만들기도 하였다.

≪동의보감≫에는 말젖이 갈증 해소에 좋다고 되어 있으나, 말고기의 식용은 대중화되어 있지 않고, 내장을 이용한 기록도 없다. 다만 말고기의 포(脯)는 옛날 일부층에서 이용하였다고 한다.

말 사육두수의 변천을 보면, 1910년도에 4만 5000여 두가 사육되던 것이, 제2차세계대전이 본격화되면서 일제의 군수용말 증식계획으로 1944년에는 8만 4000두까지 증가하였지만, 1945년 광복이 되면서 3만 4000두로 크게 감소하였다.

그 뒤 도로교통 및 철도의 발달과 자동차 등 운송수단의 급증과 함께 말 사육은 가속적으로 감소하게 되었고 국민경제 향상으로 쇠고기의 생산이 필요하게 되면서 말 생산은 소 사육에 압도되어 더욱 위축되었다.

1980년대 초에 불과 3,000여 마리에 불과하던 말은, 경제가 성장하고 레저스포츠를 즐기는 인구의 증가와 함께 승용 또는 경주용 개량마가 도입 사육되면서 그 수가 불어나, 1999년 말 현재 국내에는 약 8,400마리가 사육되고 있는데, 이 중 약 5,000마리가 재래마인 소형조랑말로서 제주도에서 사육되고 있다.

그나마 혈통이 흐려지고 숫자도 감소일로를 걷게 되자 정부에서는 멸종을 막기 위하여 혈통의 순도가 높은 일부 제주마를 천연기념물 제347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기에 이르렀다. 장차 국민소득과 생활이 여유를 가지게 되면서 승마·경마 등 오락용으로 인기가 더해 가면서 승용마의 사육두수는 계속 증가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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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자들에 따르면 최초의 가축은 개로서 약 1만 2천년 전에 이미 사육되었고, 소·말·돼지·면양·염소 등은 1만여 년 전에 가축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개는 과거에 수렵, 목축 등 인간의 생산활동을 보조해주는 일꾼으로 활동하는 대신 인간으로부터 먹이를 제공받고 천적으로부터 보호를 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개는 인간의 기호에 맞게 보다 온순한 성격과 작은 체격을 가진 동물로 개량되어 왔다. 그 결과 오늘날 개는 대형견에서 소형견에 이르는 다양한 아종이 파생되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인간의 기호에 맞게 개량된 결과 개는 일부 대형견을 제외하고 자연에서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전적으로 인간에게 의존하여 생존을 영위하는 동물로 변화되었다. 일부 대형견을 제외하면 애완견으로 길러지는 중소형견들은 자연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먹이를 구하여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실제로 인간에게 길러지다가 유기되는 유기견의 경우 상당수가 유기 후 인간에게 구조되지 않으면 며칠 만에 굶주림 등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늘날 개는 더이상 인간의 생산 활동에는 기여하지 않으며, 인간이 제공하는 식량, 거주지, 의료 서비스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여 삶을 연명하며, 개 자신의 번식 의지와 무관하게 인간의 의지에 의해 번식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개는 사람에게 친숙한 동물이기에 여러 문화권에서 개와 관련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한국에도 여러 이야기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은 바로 '오수개' 이야기다. 술에 곯아 들판에 누워 잠든 주인곁에 있다가 들판에 불이 나자 냇가로 가서 자신의 털을 적셔 불을 꺼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고 주인을 구했다는 이야기이다.

최근 사람과 교감하는 능력을 타고난다는 실험 결과가 나왔다.

썰매를 끄는 개를 썰매견도 있다. 시베리아와 북아메리카에서 운송 수단으로 썼었으나, 오늘날에는 여흥으로 쓰인다. 몸무게는 27-48kg이고 힘이 세어 썰매를 잘 끈다. 꼬리에 눈이 얼어 붙어 굳지 않도록 꼬리를 말아 등 위에 올려 놓고 다닌다.

이뉴이트들의 이동수단 중 하나로 사냥개이자 자가용이 되기도 하는 동물로 유일하게 이동수단이 되는 식육목으로 아문센이 남극점을 정복하기 위해서 사용하기도 했다.

낙타[편집]

기원전 6세기나 7세기경에 아시리아 인들이나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이집트에 소개된 낙타는 그 당시까지 쓰이고 있던 을 대신해, 사막을 지나다니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었다. 등 위의 육봉에 지방을 저장해 수일간 음식을 먹지 않고도 견디는 낙타는, 콧구멍을 자유롭게 개폐하는 등 사막 생활에 더없이 적합한 동물이었다.

낙타는 중국과 고비 사막, 아프가니스탄 등에 사는 털이 많은 쌍봉낙타와 아프리카, 아라비아, 소 아시아, 페르시아, 서북인도 등에 사는 털이 짧은 단봉낙타로 구분된다. 이집트에 사는 낙타는 털이 적은 단봉낙타이다.

낙타의 목과 발은 길며, 발가락은 2개로 측지가 전혀 없다. 앞니가 위턱에 있고, 송곳니가 상 · 하 양턱에 나 있으며, 또 위가 3개의 주머니로 되어 있다. 또 뿔이 없으며, 눈썹은 길고 2열로 되어 있어서 모래먼지가 들어가는 것을 방지해준다. 그런가 하면 나뭇잎이나 가지를 먹고, 가시나무도 잘 먹는다. 수일 간 먹지 않고 일을 할 수 있는데, 이때 지방덩어리인 육봉이 점점 작아져서 납작해진다. 육봉에 있는 지방을 분해해서 부족한 영양분을 보충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낙타의 등뼈는 육봉의 굴곡에 따라 구부러져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척추동물과 마찬가지로 일직선이다.

이와 같이 낙타는 사막에서 음식물의 공급 없이도 장기간 버틸 수가 있고, 사막에서 자라는 가시 돋친 식물을 먹을 수 있는, 강한 생명력을 가진 동물로 인간에게 매우 유용한 가축이 되었다. 비록 움직임은 말처럼 빠르지 않으나, 인간이 낙타를 소유하고 사육할 수 있게 되면서 부터 낙타에 의지해 넓은 사막을 횡단하며 생활할 수 있었다.

거기다가 낙타는 영리하면서도 충실하고 순종적인데다 지구력 또한 대단했다. 말이나 다른 동물은 도저히 버틸 수 없는 모래 바람, 뜨거운 태양 따위의 혹독한 기후조건에서도 사람을 태우고 120㎞까지 갈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똑바로 서 있기조차 힘든 사막에서 낙타는 150㎏의 짐을 실을 수도 있다. 길이 나쁘지만 않으면 더 무거운 짐도 실어 나른다.

이집트 역사에서 낙타의 역할은 지대했다. 낙타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달라지기도 했고, 이집트 상인들은 낙타 덕분에 남쪽으로 아프리카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슬람이 나일 강 유역에서 서아프리카로 전파될 때에 낙타는 마치 대양을 건너는 배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아프리카의 이슬람 팽창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사막의 삶에 필수적이고 유용한 낙타지만 사실 낙타는 토끼를 보고 놀라고, 파리를 보고도 울부짖으며, 자갈 무더기만 봐도 내빼는 대단한 겁쟁이다. 늘 흠칫거리며 슬픈 듯한 표정으로 살아가는데, 기이한 것은 죽을 때가 되면 스스로 모래 위에 조용히 드러누워 죽음을 기다린다는 점이다.

낙타는 죽어도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가죽은 벗겨져 여러 용도에 쓰이고 고기는 음식으로 먹는다. 특히 베두윈들에게 젖을 주고 삶의 동반자가 되어준다. 이렇게 낙타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사람을 위해서 봉사한다. 그러나 대체로 사람들은 이런 낙타에게 애정을 베풀지 않는다. 오히려 도살장에 끌고갈 때까지 채찍질을 가할 따름이다.

지금도 낙타는 이정표가 없는 사막에서 여행자에게 길을 안내해준다. 이집트의 사카라나 멤피스, 기자 부근에서 피라미드나 고대의 유적지들을 순방하려면 낙타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초에 거란인이 타고 온 낙타 54필을 만부교 아래에 매어 굶어죽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1922년 창경원 동물원 개원 당시에 수입하였으며, 1955년 암스테르담동물원에서 다시 한 쌍을 수입하였다. 현재는 각 동물원에서 관람용으로 사육하고 있다.

노새[편집]

노새는 암말과 수탕나귀 사이에서 이종교배로 태어난 동물이다. 유전적으로 열성형질을 가지고 있어 불임 등으로 후손을 남기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노새와 달리 수말과 암탕나귀 사이에 태어난 잡종은 '버새'라고 한다. 한자어로는 나(騾)라고 한다.

노새는 당나귀의 영향으로 말과 당나귀의 중간크기 정도이며 당나귀처럼 긴 귀와 짧은 목을 가진다. 털빛은 주로 암갈색이며 갈기나 꼬리의 털은 말과 비슷하다. 또한 어깨, 다리 등에 무늬줄이 있는 경우도 많다. 대부분의 암컷은 번식력이 없다. 수컷 또한 번식능력이 없는데, 외관상 정소(精巢)는 정상적이나 정충은 생성과정 중 발육이 정지되어 수정 능력이 있는 정충이 생성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강인한 체력으로 농경에 많이 사용되었다. 지구력이 강하여 체격에 비하여 많은 짐을 운반할 수 있어 산악지대에서는 노새를 중요하게 활용하고 있다.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은 시기에 편리함을 준 동물이며 부지런하고 성실함을 상징하기도 한다. 하지만, 고집과 하찮음을 나타내는 부정적 의미도 가지고 있다.

민간에서는 꿈에 나귀와 노새가 말을 죽이면 술과 밥을 얻게 되고, 나귀와 노새가 사람을 물면 재물을 얻는다는 말이 전해진다. 속담에 "가을바람은 노새 귀를 뚫는다."라는 것은 매서운 가을바람을 빗대는 말이다. 또한, "아비 모르는 건 노새다.", "노새 고집이다." 등 다소 안 좋은 의미로 쓰인 속담들도 있다.

노새는 조선시대 장거리 이동 시의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당나귀[편집]

말과에 속하는 가축이며 나귀라고도 한다. 한자어로는 여(驢)라고 하며, 장이(長耳)·한려(漢驪)·위(衛) 등의 별명이 있다. 학명은 Equus asinus이다. 당나귀는 야생의 당나귀를 가축화한 동물로서, 대형과 중형의 두 종류가 있다. 대형인 경우 키가 140∼150㎝, 몸무게는 350∼450㎏에 이른다. 털빛은 회백색이 많으나 붉은색·갈색도 있다. 등에는 어깨에서 꼬리의 끝까지 짙은 줄이 나 있으며, 어깨에는 뚜렷한 무늬가 있다.

당나귀는 말과 달리 이마에 털이 없고, 꼬리에도 하반부에만 긴 털이 있고 상반부는 짧은 털로 덮여 있어서 소의 꼬리와 비슷하다. 또, 당나귀의 귀는 말보다 길고 크다. 그리고 말은 다리에 부선(附蟬)이 있지만 당나귀는 앞다리에만 있다. 또, 눈주위·입·하복부 및 다리의 안쪽은 모두 흰색이다.

임신기간은 364일이며 소나 말보다 일찍 성장하여 포아도당나귀의 경우 3년이 지나면 성장이 정지된다. 체격이 좋고 체력이 강하며 외부의 변화에 대한 저항력이 강하여 열악한 조건에서도 자기 능력을 잘 발휘하는 특성이 있어서 수송수단으로 중요시되었다. 과 같이 많은 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 점도 장점이다.

당나귀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 권2의 48 경문대왕조(景文大王條)에 나타난다. 이 기록에 의하면 왕의 귀가 갑자기 자라서 당나귀의 귀와 같아졌는데, 이 사실을 오직 복두장(幞頭匠) 한 사람만이 알고 있다가 죽기에 이르러 도림사(道林寺) 대나무숲에 들어가 우리 임금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쳤다는 것이다. 그 뒤 바람이 불면 이 소리가 대밭에서 들렸다고 한다. 이 기록은 삼국시대에 이미 당나귀가 사육되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당나귀는 말보다 덜 빠르고 덜 위험한 동물로 인식되어 교통수단으로 이용되었다. 『경도잡지(京都雜志)』에도 유생들은 당나귀를 타기 좋아하며, 조관들도 이용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당나귀는 행세하는 사람의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었기 때문에 '도련님은 당나귀가 제격이다.'라는 속담이나 '나귀를 구하매 샌님이 없고 샌님을 구하매 나귀가 없다.'는 속담이 생겨났다. 또한, 자기에게 만만히 보이는 사람에게 함부로 할 때는 말을 잘 듣지 않는 당나귀의 근성에 빗대어 '나귀는 샌님만 업신여긴다.'라든가, '당나귀 못된 것은 생원님만 업신여긴다.'는 속담을 쓴다. 당나귀는 해학담의 소재로도 등장한다.

성질이 더럽고 상황판단력이 뛰어나 명령을 거부하고 말에 비해 간지가 없고 너무 작아서 사람을 태우기 적합하지 않고 군사용으로 쓸 수 없었다고 한다.

참고자료[편집]

  • 가축〉, 《두산백과》
  • 〉, 《나무위키》
  • 사막의 배, 낙타〉, 《네이버 지식백과》
  • 노새〉,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당나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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