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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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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경포대와 경포호
강릉 경포대

경포대(鏡浦臺)는 강릉을 대표하는 명승지 중 하나로 강원도 강릉시에서 동북쪽으로 7km 지점, 언덕 위의 누대(樓臺)로, 정면 5칸, 측면 5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관동팔경의 하나이다. '경포대'라는 명칭은 '경포', 즉 '유리같이 맑은 호수'에서 따온 말이다.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의 유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었으며, 2019년 12월 30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2046호로 지정되었다.

경포대는 고려 충숙왕 13년 당시 강원도 안렴사 박숙이 현 방해정 뒷산 인월사 옛터에 창건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이후에는 현 위치로 옮겨지었다고 전해지지만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경포대에는 율곡이이 선생이 10세 때 지었다는 경포대부를 비롯하여 숙종의 '어제시' 및 유명한 문장가로 알려진 강릉부사 '조하망'의 '상량문' 등 여러 명사의 글들이 있다. 또한, 경포대는 비교적 높은 장소에 지어져 경포호수와 경포해수욕장을 조망할 수 있다.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경포8경과 경포월삼은 천하의 장관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경포대에서는 노송에 둘러싸인 고요한 호수를 바라볼 수 있으며, 동해의 드넓은 바다 풍경과 시원한 풍광은 보는 이를 하여금 감탄사를 자아내게 한다. 경포대는 정면 다섯 칸 측면 5칸 규모인 단층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익공 양식에 2고주 7량 가구이며, 연등천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포대 주변 관광지로는 오래된 소나무 숲과 벚나무가 어우러진 경포호가 위치하고 있으며, '경포호'를 동해로부터 분리시키고 있는 해안사주는 경포해수욕장을 이루고 있다.

강원도 유형문화재[편집]

관동팔경의 하나로 경포호수 북쪽 언덕에 있는 누각이다. 고려 충숙왕 13년(1326)에 건립되었으며, 그 뒤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수리를 하였다고 한다. 태조(재위 1392∼1398)와 세조(재위 1455∼1468)는 친히 이 경포대에 올라 사방의 경치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앞면 5칸·옆면 5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경포대는 마루의 높이를 달리하는 입체적 평면을 하고 있는데, 1899년 군수 정헌시에 의해 중수가 이루어지면서 남쪽과 북쪽에 누마루를 가설하고 득월헌(得月軒)과 후선함(候仙檻)이라 하였다. 이름인 '경포대' 전자체 현판은 유한지의 글씨이고, 해서체 현판은 이익회의 글씨이다.

내부에는 숙종이 직접 지은 시와 율곡 이이가 10살 때 지었다는 '경포대부'를 비롯한 유명인들의 글이 걸려있다. '제일강산'은 주지번의 글씨로 알려져 있는데 '제일'과 '강산'의 글씨체가 다른 것으로 볼 때 '강산'은 뒷날 다른 사람이 써 넣은 것으로 보인다.

누각 주위에는 소나무와 상수리나무들이 알맞게 우거져 운치있는 경관을 이루고 있다.

보물 지정 사유[편집]

「강릉 경포대」는 1326년(고려 충숙왕 13) 창건 이후 한차례 이건과 수차례 중수 기록이 대부분 자세히 남아있으며, 특히 창건 이전의 기록도 남아있어 경포대의 시대별 변화과정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정면 5칸, 측면 5칸의 대형 정자이다.

고려 중기 김극기의 「경포대」라는 시와 「강릉팔영」, 그리고 고려 말 안축의 「관동팔경」, 그리고 조선시대 송강 정철의 「관동팔경」등 지역 내외를 막론하고 많은 시인 묵객들이 경포대를 찾아 자연 풍광을 음미하며 학문을 닦고 마음을 수양했던 유서 깊은 장소이다.

경포대는 일반 누정과 달리 내부 공간의 특성에 따라 의미를 부여한 마루를 기능에 따라 3단으로 구성하였으며, 누마루를 2단으로 구성한 것은 유례가 없으며, 특히 가장 높은 누마루의 형태가 머름대 형식을 취했고 아래의 누마루는 계자난간을 가설한 형식 또한 유례가 없는 독특한 구성이다.

  • 머름대: 창문 아래 높은 문지방인 머름 밑에 가로 지른 나무
  • 계자난간: 위로 올라갈수록 밖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난간으로 계자다리(鷄子多里)가 난간대를 받치고 있음.

이와 같이 시대적 상황을 공간과 해당 부재가 흔적으로 지니고 있는 경포대는 조선시대의 것뿐만 아니라 근현대사의 과정을 모두 담고 있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조선후기의 정자로서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므로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

명승 지정[편집]

강릉 경포대와 경포호(江陵鏡浦臺와 鏡浦湖)는 2013년 12월 30일 대한민국의 명승 제108호로 지정되었다.

강릉 경포대는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로 고려말 충숙왕 13년인 1326년 지중추부사 박숙정에 의해 창건된 누정건물로 안축의 《경포대신정기》(鏡浦臺新亭記) 기문(記文)에 "옛날 영랑선인이 놀던 곳이며 정자가 없어 비비람이 치는 날 놀러 왔던 사람들이 곤욕스럽게 여겨 작은 정자를 지었다"라고 하여 창건목적을 밝히고 있어 역사성이 높다.

또한 창건 당시 이전시대의 주춧돌과 장대석이 발견되어 훨씬 이전시대부터 이 곳에 정자형태의 건물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강릉지역 누정 기록으로 신라 성덕왕대 순정공(純貞公)과 관련이 있는 임해정과 술랑선도(述朗仙徒)와 관련이 있는 한송정을 통하여 현존하는 경포대와 더불어 강릉 지역의 누정문화의 시원이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는 역사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관동팔경 중 하나인 경포대(鏡浦臺)는 지형·지질적 가치가 뛰어난 자연석호인 경포호와 함께 동해안의 빼어난 절승지로 예부터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다녀간 명승지로서 명사들의 수많은 시·서·화가 있어 역사문화경관적 가치가 높다.

경포대와 경포호의 자연풍광을 관동팔경에 비유한 경포팔경과 호해정을 중심으로 한 팔경, 김극기의 강릉팔영 등이 전해져 오고 있으며, 천혜의 자연경관을 조망하며, 심성을 수양하는 곳일 뿐 아니라 풍부한 문학적 소재성 등 문화적, 경관적 요소가 결합된 누정으로 장소적 가치가 매우 높은 곳이다.

영조 22년(1746년) 김상성(金尙星, 1703~1755)이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화원들에게 강원도 절경을 그리게 한 후 친한 사람들에게 시를 지어 완성한 작품이 관동십경(關東十景)인데 그 중의 경포대 그림은 경포대와 경호를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부감법으로 그린 것으로, 경호는 경포대를 경계로 하여 내호와 외호로 구분하고 있으며, 호에는 낚시를 하는 늙은 어부와 갈매기의 한가로운 모습을 볼 수 있으며, 호수와 바다가 경계되는 곳에는 백사장과 함께 현재의 죽도봉이 그려져 있고, 초당과 경포대 뒤쪽에는 소나무 사이로 꽃들이 만발하여 봄날의 정취를 감상할 수 있으며, 멀리 강문 너머로 보이는 동해 바다에는 아침해가 떠오르는 일출모습과 함께 햇살을 받으며 바람을 타고 흘러가는 돛단배를 그리고 있어 경포호의 옛 자연환경 및 인문 환경을 알 수 있어 가치가 높다.

정철(鄭澈, 1536-1593)의 관동별곡(關東別曲)에서 경포대를 관동팔경 중 으뜸이라 했으며, 경포 대에 저녁이 되어 달빛이 쏟아지면 하늘, 바다, 호수, 그리고 술잔과 임의 눈동자 등 다섯 개의 달을 볼 수 있는 동해안 제일의 달맞이 명소이다.

경포대 정자 내에는 율곡 이이가 10살때 지었다는 「鏡浦臺賦」를 비롯하여 숙종어제시, 조하망의 상량문 등 여러 명사의 시문현판은 인문학적 가치가 높다.

강릉 경포대는 고려말 1326년 지추부학사 박숙정이 방해정 뒷산의 인월사터에 세웠던 것을 1508년에 강릉부사 한급이 현재 자리로 옮겼고 여러차례 중수를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춘 약 680여년의 역사성을 지닌 누정건축물이며, 경포호와 더불어 탁월한 역사문화적 경관성을 지닌 곳이다.

강릉 경포대는 16세기 이후 지방 재지사족(在地士族)이 주체가 되는 별당식 정자 형태로 전환되는 누정건축 양상의 변화를 고찰할 수 있는 중간적 의미를 갖는 정자로서 건축역사학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동인시화》(東人詩話) 설화 홍장(紅粧) 고사는 경포대에서의 홍장과 강원감찰사 박신과 애틋한 사랑의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어 구전문학의 가치가 높은 곳이다.

경포대의 보름[편집]

경포대는 이를 관동팔경 중에 으뜸이라 극찬한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關東別曲)과 고려사 중에 있는 한송정곡(寒松亭曲) 등 수 많은 옛 작품 속에 등장해 그 아름다움을 증명하고 있다. 특히 경포대에 오르면 펼쳐지는 시야에서 선명하게 보이는 달 때문에 동해안 달맞이 명소로도 알려졌다. 호수와 바다에 인접한 경포대는 달맞이에 적합하다. 경포대에 전해 내려오는 설 하나는 해가 저문 경포대에 무려 다섯 개의 달이 뜬다는 내용으로, 다음과 같다.

경포대에 오르면 다섯 개의 달을 찾을 수 있다.
첫째는 희고 선명한 하늘의 달
둘째는 아른거리는 경포호수의 달
셋째는 일렁이는 동녘 바다의 달
넷째는 술잔에 담긴 달
마지막은 님의 눈에 비친 달이다.

기발함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야기. 누군가와 함께하는 경포대 달맞이에 대해 충분히 기대를 하게 된다. 한껏 운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줄 것도 틀림없다. 달에 취해 한껏 흥이 오르면 그를 벗 삼아 경포대에 걸린 여러 명사의 시도 읊어보자. 그중에는 율곡 이이가 10세 무렵 지었다는 '경포대부(鏡浦臺賦)'도 찾을 수 있다. 경포를 찾는 많은 이들 중 경포대에서 만월을 보는 행운을 얻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더구나 다섯 개의 달을 찾는다면 그해 달맞이는 제대로 했다고 볼 수 있는 동시에, 그 행운을 두고두고 곱씹게 되겠다.

경포대 및 주변 관광[편집]

강릉 경포대 제일강산 현판
누각내부에 걸려있는 시판들
전면 현판, 옆면 현판

경포대 주변에는 경포해수욕장과 경포호포가 주변관광지로 위치하고 있으며, '경포해수욕장' 일대는 특히 해가 바뀌는 1월 1일에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일출을 보기 위해 방문하므로 미리 숙박지를 예약해 두기를 바란다. 또한, 경포호와 인접한 초당동의 초당두부는 강릉의 별미로 강릉 관광객에게 적극 추천하는 음식으로 꼭 먹어보길 바란다.

  • 경포대 내부

문화재 내부는 대부분 출입이 통제되어 있으나 경포대 누각은 누구나 밀접하게 접촉이 가능하다. 내부에 깔려 있는 마루에 오른 뒤 앉거나 혹은 선 채로 자유롭게 경포호수를 비롯한 주변 풍광을 맘껏 감상할 수 있다. 경포대 마루는 3단으로 깔려 있다. 누각 정면인 호숫가 쪽 마루는 한단이 높고, 그 양쪽 끄트머리에 다락방처럼 각각 단을 더 높였다. 누각을 찾는 이들이 관람을 편이하도록 층을 달리해 놓은 것이다. 2단 마루나 다락마루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호숫가를 바라보면 절로 시심이 솟구치는 것 같다. 경포대 현판은 정면뿐만 아니라 입구 쪽 옆면 위에도 각각 서체가 다르게 붙어 있다. 옆면은 조선 후기 명필 유한지가 전서체로 쓴 것이고, 앞면은 조선 후기 문신 이익회가 해서체로 쓴 것이다. 또한 내부 여기저기에는 조선 숙종 임금이 직접 지은 어제시(御製詩)와 율곡 선생이 어린 시절에 썼다는 '경포대부'(鏡浦臺賦) 등 시판들이 여럿 붙어 있다.

  • 교통
  • 택시 : 강릉역 > 약 4.9km (약 10분) 경포대 입구. 강릉버스터미널 > 약 5km(약 10분) 경포대 입구
  • 버스 : 강릉역 건너편 202번 > 약 11.3km(약 42분) 경포대 정류장. 강릉버스터미널 202번 > 약 7.7km(약 30분) > 경포대 정류장
  • 위치 : 강원도 강릉시 경포로 365 (저동)
  • 운영 : 연중무휴 09:00~18:00
  • 입장료 : 무료
  • 주차 : 가능
  • 식당 및 숙박업소 : 주차장 주변에 여럿 있음.
  • 문의 : 강릉시 문화예술과 033) 640-5118
  • 경포대 충혼탑 : 나라를 위해 희생한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의 넋을 기리는 장소이다. 이곳은 호국보훈의 달 6월 현충일에 추념 행사가 열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 경포호 주변 정자 : 경포호 주변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정자만 대략 12개다. 활래정, 해운정, 금란정, 방해정, 호해정, 천하정, 상영정, 창랑정, 경호정, 석란정, 취영정, 월파정 등이 그 이름들이다. 이 중에는 해운정 같이 호수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 쉽게 찾아보기 힘든 정자도 있다. 호숫가에 이렇듯 정자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것도 보기 드문 풍경이다.
  • 경포호를 한바퀴 도는 자전거도로와 산책로 : 자전거를 타고 경포호 주변을 두 바퀴 돈다. 한 바퀴는 정자가 자리를 잡고 있는 주변 도로를 따라서, 한 바퀴는 호숫가 자전거도로를 따라서. 정자를 감상하는데, 한 번은 코앞에 두고서, 또 한 번은 먼발치서 바라다본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상당히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 정자들을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뜰에서부터 하늘로 살짝 휘어져 올라간 처마 끝까지 모두 낡고 퇴락한 분위기를 지울 수 없다. 하지만 빛이 바랜 낡은 정자일수록 오래 묵은 장처럼 깊게 삭은 맛이 배어나오기 마련인지라 낡고 퇴락한 모습조차 정겹게 느껴진다.
  • 허난설헌 생가 : 경포호를 돌고 나서 '허난설헌 생가'로 발길을 돌린다. 사방이 탁 트여 있는 정자가 활동이 자유로운 남자들을 위한 공간이라면, 허난설헌 생가는 조선시대 한평생 '규방' 속에 갇혀 살아야 했던 여자들의 갇힌 세계를 떠올린다. 두 공간이 담장 너머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모르긴 해도, 규방 속 여자들이 느껴야 했을 갈증이 경포호만큼이나 깊고 넓었을 것이다. 허난설헌 생가는 호수 동쪽 다리 건너 울창한 솔밭에 터를 잡고 있다. 솔밭 사이로 난 좁은 오솔길을 따라 들어가면, 그리 크지 않은 기와집이 한 채 나온다. 이 집이 허난설헌이 태어나 7세가 될 때까지 살던 곳이다. 허난설헌은 초당 허엽의 딸로, 아버지와 형제들이 모두 문장으로 이름이 높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8세에 시를 짓는 등 천재적인 시재를 타고 났다고 전한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이 그의 동생이다. 허난설헌은 그 시대 남자로 태어났다면 허균 못잖은 문장가가 되었을 터였다. 그러나 남성 중심 사회인 조선시대에 여자로 태어난 죄, 시대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채 현실도피적인 삶을 살다 간다. 그 시대에 여성의 이름으로 시를 짓는다는 건 일종의 사회적 일탈이었다. 그는 결국 1589년(선조22년) 27세 꽃다운 나이에 요절한다. 조선에서는 별다른 빛을 보지 못했던 시들이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명나라에서 <난설헌집>이라는 제목으로 간행돼 격찬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시에서는 젊은 나이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한 조선 여인의 애상이 진하게 묻어 난다.
  • 경포호 : 경포호(鏡浦湖)는 강원도 강릉시 저동, 운정동, 초당동, 강문동에 걸쳐 있는 석호이다. 경포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경포호는 수면이 거울같이 청정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바다와 이어지는 자연 석호이다. 가장 자리의 평균 수심이 2~3m정도이고, 중심부는 1m 내외의 수심을 이루고 있다. 조선 중기의 문인이었던 정철은 경포대에서 바라보는 경포호에 뜨는 달에 반하여 관동팔경 중 이곳을 으뜸으로 쳤다고 한다. 호수 한 가운데에는 월파정과 새 바위가 있으며, 새 바위엔 우암 송시열이 쓴 '조암'이란 글씨가 남아 있다.
  • 경포해수욕장 : 강원도 강릉시 강문동과 안현동에 위치한 동해안 최대의 해수욕장이다. 이름은 인접한 석호인 경포대에서 따왔으며, 피서철에는 하루 평균 50만명의 피서인파가 몰리기도 한다. 경사가 완만하며 수질이 깨끗하고 모래의 질이 곱다. 경포해변 일대는 1982년 6월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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