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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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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루(慶會樓, Gyeonghoeru Pavilion)
경회루 기단부
경회루 누각 내부
경회루 야경
경회루 설경

경회루(慶會樓, Gyeonghoeru Pavilion)는 경복궁에 있는 누각으로, 조선시대에 연회를 하거나, 외국의 사신(나라의 명을 받고 다른 나라로 파견되는 신하)을 접견하던 곳이다. 지금의 청와대 영빈관에 해당된다. 1985년 1월 8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224호로 지정되었다. 경회는 경사스러운 연회를 뜻한다.

개요[편집]

경회루는 경복궁 근정전 서북쪽 연못 안에 세운 누각으로,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경복궁을 처음 지을 때의 경회루는 작은 규모였으나, 조선 태종 12년(1412)에 연못을 넓히면서 크게 다시 지었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돌기둥만 남은 상태로 유지되어 오다가 270여 년이 지난 고종 4년(1867)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경회루도 다시 지었다. 연못 속에 잘 다듬은 긴 돌로 둑을 쌓아 네모 반듯한 섬을 만들고 그 안에 누각을 세웠으며, 돌다리 3개를 놓아 땅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앞면 7칸·옆면 5칸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누각건물에서 많이 보이는 간결한 형태로 꾸몄다. 태종 때 처음 지어진 경회루는 성종 때 고쳐지으면서 누각의 돌기둥을 화려하게 용의 문양을 조각하였다고 전해지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이후 고종대에 다시 지으면서 지금과 같이 간결하게 바깥쪽에는 네모난 기둥을, 안쪽에는 둥근기둥을 세웠다. 1층 바닥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고 2층 바닥은 마루를 깔았는데, 마루의 높이를 3단으로 각각 달리하여 지위에 따라 맞는 자리에 앉도록 하였다.

경복궁 경회루는 우리 나라에서 단일 평면으로는 규모가 가장 큰 누각으로, 간결하면서도 호화롭게 장식한 조선 후기 누각건축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소중한 건축 문화재이다.

역사[편집]

경회루의 2층은 바깥부터 외진-내진-내내진의 3중 구조를 지닌다.
《경회루전도》에 나타난 경회루의 구조. 삼재의 구주와 십이지상의 위치가 드러난다.

조선 초기 경복궁 창건 당시에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편전 서쪽 습지에 연못을 파고 작은 누각을 세웠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누각은 기울어지고 너무 좁아서 실제적으로 활용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처럼 버려진 연못과 경회루를 다시 세운 것은 태종 때의 일이었다. 『태종실록』에 의하면 태종은 먼저 1411년(태종 11) 8월 22일 박자청(朴子靑)에게 경복궁 수리를 명하면서 '북루 아래에 못을 파라'고 지시하였다. 이때부터 연못 정비와 경회루 재건 공사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에는 경회루 재건 공사가 완료되었다. 태종이 하륜(河崙)에게 명하여 작성케 한 『경회루기(慶會樓記)』에 따르면, 태종 12년(1412) 2월 태조 때 세운 누각을 본 태종은 '아버지께서 창업한 후 처음 세운 것인데 벌써 이렇게 되었는가? 농사철이 가까워져 오니 노는 자들을 시켜 빨리 수리하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고 한다. 경회루 재건 공사 역시 당시 최고의 건축가였던 공조판서 박자청이 맡았다. 공사가 끝나고 경회루가 완공된 것은 1412년 4월 2일이며, 『태종실록』에는 완공 당시의 경회루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새로 큰 누각을 경복궁 서쪽 모퉁이에 지었다. 공조판서 박자청에게 명하여 감독하게 하였는데, 제도가 굉장히 커서 앞이 탁 트이고 시원스럽다. 또한 연못을 파서 사방으로 둘렀다. 궁궐의 서북쪽에 본래 작은 누각이 있었는데 임금이 좁다고 하여 명하여 고쳐 지은 것이다.

그런데 경회루 착공 시점이 하륜의 『경회루기』에는 1412년 2월로 되어 있고, 『태종실록』에는 1411년 8월 22일 연못을 파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어 약간 오차가 있다. 『경회루기』는 완공 후 바로 지은 글이기 때문에 시간의 오차가 생길 확률이 매우 적다. 따라서 1411년 8월 22일 경복궁을 수리하라는 명령을 받고 먼저 연못을 파기 시작하면서, 경회루 착공을 위한 설계와 자재 확보 및 기초공사를 동시에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즉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본격적으로 경회루 착공에 들어간 것이 2월로 생각된다. 이러한 준비 없이 경회루 건물을 2월에 착공하여 불과 두 달 만인 4월에 완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모든 공사가 완료된 후 4월 11일 태종은 경회루에서 공사에 참여한 인원들을 초청하여 준공 기념 연회를 베풀었다. 그리고 5월 16일 태종은 새 누각의 이름으로 경회(景會)·납량(納凉)·승운(乘雲)·과학(跨鶴)·소선(召仙)·척진(滌塵)·기룡(騎龍) 등의 이름을 제시하면서 하륜에게 정하라고 하였다. 이에 하륜은 임금과 신하 간에 서로 덕으로써 만나는 것을 의미하는 ‘경회’를 선택하고 6월 4일 기문(記文)을 지어 올렸다. 그리고 6월 9일에는 세자에게 명하여 경회루 편액을 큰 글씨로 쓰게 하였다. 7월 19일에는 연못을 판 일꾼들에게 왕이 저화 1천장을 내려 위로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외국 사신이 조선에 왔을 때 조선의 자존심을 보여줄 수 있는 대표적인 건축물이 완공된 것이다.

태종은 경회루를 지은 이후 신하들에게 '내가 이 누각을 지은 것은 중국 사신에게 잔치하거나 위로하는 장소로 삼고자 한 것이지 내가 편안하게 놀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하륜은 『경회루기』를 지어 올릴 때 누각이 갖는 갖가지 의미를 조목조목 밝히면서 이곳을 애용하는 왕들에게 의미심장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왕들이 이 누각을 애용하면서 국가를 안정하게 운용하고 신하들을 대함에 있어 포용과 총명함, 경외심을 가질 것이며,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정신으로 정사를 펴 인재를 등용하고 간사한 무리는 멀리하라는 경계의 의미를 경회루 건물의 구조물 하나하나에 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경회루는 왕들의 통치철학을 담은 건물이며, 살아 있는 교훈을 전해주는 건물이라는 점에서 그 진정한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경회루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서 점차 퇴락하여 갔다. 성종 때 중수되었다. 이때 경회루 돌기둥에 꽃과 용을 새겼다. 이후 연산군 때 경회루 연못의 만세산에 갖가지 궁궐 모형을 만들어 놓고 금은보화로 장식하였으며, 연못에 황룡주(黃龍舟)라는 배를 띄우고 놀기도 하였다. 이것을 중종이 반정 이후 모두 철거하였으며, 이로써 경회루는 다시 본모습을 찾아갔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화려했던 경회루 누각은 화재로 흔적마저 사라지고 돌기둥만이 폐허로 남게 되었다.

폐허로 변한 경복궁을 다시금 중건한 것은 고종이다. 흥선대원군이 실시한 강력한 왕권강화 정책의 일환으로 시작된 중건 공사는 많은 사람들의 희생 끝에 마무리되었다. 비록 옛날처럼 돌기둥에 용과 꽃을 조각하는 화려함은 좇지 않았으나 그 위엄만은 과거 못지않게 웅장함을 되찾았다. 과거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쓴 현판은 소실되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지금의 현판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제자인 위당(威堂) 신헌(申櫶)의 글씨를 걸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다행히도 경회루는 파괴되지 않았다. 경복궁 대부분의 건축물들이 일제의 손에 사라지고 근정전과 경회루만이 남았다. 다만 이때 경회루 주위에 있던 담장은 모두 훼손되어 없어졌다.

1945년 광복 이후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경회루 북쪽, 물이 들어오는 용머리 조각이 있는 바로 옆에 작은 누각을 세웠다. 육각정으로 만들어진 이 정자는 연꽃 향이라는 의미를 간작하고 있는 하향정(荷香亭)이다. 광복 이후 나라가 혼란한 시기에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에서 낚시를 즐겼다고 하는데 진정 고기를 잡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 테고, 국정과 관련된 수많은 고민들을 안고 연꽃과 대화를 하면서 마음을 추스르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1997년 11월 경회루 연못의 물을 빼고 청소하는 과정에서 청동으로 만든 용이 발굴되었으며,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지난 1999년 지붕 일부를 해체 수리하였고, 현재는 제한적이지만 일반에게도 경회루에 올라가 주변을 살펴볼 수 있도록 개방하고 있어 옛왕들이 누렸던 경치 감상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경회루 동쪽 담장에는 경회루로 들어갈 수 있는 세 개의 문이 있고, 모두 돌다리가 놓여 있다. 제일 남쪽에 있는 문이 자시문(資始門)으로 다른 돌다리보다 폭을 넓게 하여 왕이 갈 수 있는 어도를 두었다. 가운데 문은 포용하고 너그럽다는 뜻의 함홍문(含弘門)이며, 가장 북쪽에 있는 문은 대인을 만나 봄이 이롭다는 뜻의 이견문(利見門)이다. 모두 고종 5년(1868)에 만들어진 문이지만 현대에 와서 복원하였다. 세 벌로 조성된 돌다리의 돌난간과 네 귀에는 짐승 모양의 조각이 장식되어 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없는 코끼리 모양도 있다.

경회루 연못은 남북 113m, 동서 128m의 네모난 연못이다. 연못 동쪽에 위치한 방형의 커다란 섬 위에 세워진 정면 7칸, 측면 5칸의 규모의 2층 누각 건물이 경회루다. 누각 둘레에는 장대석으로 축대를 쌓아 기단을 만들었고, 돌 기단 둘레도 돌난간을 둘렀으며, 모퉁이마다 돌로 조각한 12지신상을 장식하였다. 또 돌난간은 하엽동자(荷葉童子)와 팔각의 돌란대로 구성되었다.

기간의 서쪽으로는 계단을 두어 연못에서 배를 탈 수 있도록 하였다. 건물 아래층 바닥에는 네모난 전돌을, 위층 바닥에는 긴 나무판자를 깔았다. 동쪽과 서쪽에는 아래에서 위로 오르내릴 수 있게 계단을 두었다. 1층 천장, 2층 마루의 귀틀 밑 부분은 소란우물천장으로 꾸미고 화려하게 단청을 해 놓았다. 경회루 서쪽에 있는 네모난 섬 두 개는 당주(當洲)이며, 이곳에는 소나무를 심었다.

경회루 1층의 경우 화강암으로 민흘림을 한 높은 사각 돌기둥이 외부 둘레에, 원형의 돌기둥이 내부에 배열되고 있고, 2층 부분은 나무기둥으로 조형되어 있다. 1층과 2층 바닥은 모두 바깥보다 안쪽의 바닥을 조금씩 높였다. 이것은 건물 공간 사용의 위계를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 특히 2층의 누마루 공간은 그냥 평면이 아니고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안으로 들어갈수록 조금씩 마루가 높아지게 만들었다. 이를 외진(外陳), 내진(內陳), 내내진(內內陳)이라고 한다. 물론 제일 안쪽이 임금이 앉는 위치다.

세 공간 사이에는 분합문(分閤門)이 달려 있어 문을 닫으면 세 공간이 완벽하게 구분된다. 반면에 들쇠로 문짝을 들어 올리면 전테 공간이 확 트이면서 사방을 조망할 수 있게 된다. 추운 겨울에는 문을 닫고 연회를 베풀 수 있으며, 여름이나 낮에는 문을 열어 사방의 경치를 즐기면서 모임을 가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2층 둘레로는 계자난간을 설치했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마치 사진액자 틀과 같은 모양을 만든 화려한 낙양각(洛陽閣)을 장식하였다. 여기서 바라보는 풍경은 각각의 낙양각 하나하나가 곧 그림을 그려 놓은 액자와 같다. 북쪽으로는 북악, 서쪽으로 인왕산, 남쪽으로 남산을 멀리 볼 수 있으며, 동쪽으로는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의 궁궐 지붕들이 겹겹이 펼쳐져 한 폭의 그림과 같다. 낙양각 사이로 펼쳐지는 자연을 감상하는 것이야말로 경회루에서 즐길 수 있는 최고의 풍경이다.

경회루의 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인데 내부 공간의 규모에 비해 매우 거대하다. 팔작지붕의 내림마루·추녀마루·용마루는 모두 회반죽으로 양성을 하였는데, 용마루 양 끝에는 취두를, 내림마루와 추녀마루가 만나는 부분에는 용두를, 추녀마루 위에는 용두와 잡상을 배열하였다. 잡상의 숫자도 서울의 궁궐 건물 가운데 가장 많은 열한 개를 배열하였다.

경회루 건물은 아무런 원칙 없이 세워진 것이 아니다. 모든 기둥 하나하나에 유학적 세계관과 철학이 담겨 있다. 예컨대 1층 돌기둥의 경우 안쪽에는 둥근 기둥을 배치하고 바깥쪽에는 네모난 기둥을 배치하였는데,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전통 우주관을 담고 있는 것이다. 2층의 나무 기둥도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2층 누마루의 외진, 내진, 내내진 공간도 각각 의미하는 바가 다르다. 가장 안쪽인 내내진은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상징하고, 이를 둘러싸고 있는 기둥 여덟 개는 천지 만물이 생성되는 기본인 『주역』의 팔괘(八卦)를 상징한다. 내진은 모두 열두 칸인데, 1년 열두 달을 상징하고, 매 칸마다 네 짝씩 열여섯 칸에 달린 문짝 64개는 『주역』의 64괘를 상징한다. 그리고 외진을 둘러싼 24칸은 1년 24절기와 24방(方)을 상징한다. 이와 같이 경회루에 사용된 기둥 수, 칸 수, 창 수, 계단 수, 부재 길이에 이르기까지 계절과 시간 및 음양과 주역의 원리를 적용하여 당시 유가의 세계관을 건축 형식으로 담아낸 것이 경회루이다. 이러한 내용은 1865년 정학순(丁學洵)이 쓴 『경회루전도』, 즉 「경회루36궁지도(慶會樓三十六宮之圖)」에 잘 나타나 있다.

경회루는 단일 평면으로는 거대한 규모의 건물을 물 속에 인공으로 조성한 섬에 세웠으면서도 그 기초를 견고히 하여 건물이 잘 견디게 처리한 점, 거대한 건물을 이익공의 간결한 법식으로 처리하면서도 왕실의 연회 장소로 합당하게 잘 치장한 점, 2층 누에서 주변 경관인 인왕산·북악산·남산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게 처리한 점, 1층 건물 주변을 돌며 네모난 연못의 물과 삼을 바라보며 감상토록 한 점 등이 다른 누각에서는 찾아볼 수조차 없는 빼어난 점들이다.

건축[편집]

1867년에 재건한 현 경회루의 단면도.

경회루의 구조는 전형적인 대량식 구조지만, 1층 기둥이 전부 화강암인 점이 특징이다. 2층은 외부와 통해 있는 외진과 내부 공간인 내진, 그리고 가장 중심에 있는 중궁 부분으로 구분된다. 각 공간 사이마다 문이 달려 있으며, 문을 전부 들어올려 한 공간으로 만들 수도 있다. 외진과 내진 그리고 중궁은 바닥의 높이가 달라 단을 이루고 있는데, 이것은 자리의 높고 낮음을 나타내어 가장 안쪽으로 갈수록 지위가 높은 사람의 공간임을 나타낸다. 외진과 내진에는 궁궐 건축답게 천장을 개판(蓋板)으로 막고 있다.

경회루의 바깥 돌기둥은 네모나고 안쪽 돌기둥은 둥근데 이는 땅은 모나고 하늘은 둥글다라는 천원지방(天圜地方) 사상을 나타낸다. 그리고 전체 기둥은 총 48개로 바깥기둥이 24개 안쪽 기둥이 24개인데 이는 24개절과 24방을 의미한다. 그리고 경회루 주위에는 네모난 인공 연못과 둥근 모양의 섬 2개를 만들었는데, 이 또한 천원지방을 형상화 한 것이다. 거기다가 연못 주변에 담장을 둘러서 일반인들이 바라보지 못하게 했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훼손했고 문화재청에서 2000년대에 북쪽과 동쪽 담장을 복원했으나 서쪽과 남쪽 담장은 관람객들의 관람 문제로 복원하지 않았다.

각 지붕 끝에는 잡상이 11개 올려져 있다. 이는 옆에 위치한 법전인 근정전에 올려져 있는 잡상 7개보다 많은 개수다. 과거 일제강점기에 촬영한 사진을 보면 근정전 잡상은 11개가 올려져 있으나 현재는 7개가 올려져 있다.

현존하는 전통 건축 중 최대의 크기

근정전의 크기는 정면 30 m에 측면 21 m, 높이 22.5 m(기단 제외)지만, 지금의 경회루는 정면 34.4 m, 측면 28.5 m, 높이 21.5 m로 현존하는 한국의 단일 목조 건축 중 부피가 가장 크다. 칸 수 역시 근정전이 정면 5칸 측면 5칸으로 총 25칸인 데 반해 경회루는 정면 7칸에 측면 5칸, 총 35칸이다. 다만 한 칸의 길이는 건물에 따라 다 다른 만큼 칸 수만 가지고는 건물의 크기를 확실하게 비교할 수는 없다. 경회루 근처의 수정전은 정면 10칸에 측면 4칸으로, 무려 40칸이나 되지만 실제 크기는 그다지 크지 않다.

경회루는 이 정도 크기가 조선 말의 목재 여건상 지을 수 있는 최대의 건물이었다는 추측을 하게 해주는 건물인데, 소모되는 부재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다른 건물과 차별화된 점이 보이기 때문이다. 우선 팔작 지붕의 삼각형 수직 벽면인 박공의 비율상 크기가 굉장히 크다. 근정전과 비교해봐도 두 건물의 크기 차이 이상으로 박공 차이가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박공의 크기를 늘려 그만큼 박공 아래에 있는 처마 지붕의 길이를 줄이려고 했던 것이다. 비가 들이치는 박공은 작을수록 좋은데, 통상의 비율을 어기면서까지 크게 만들었음은 그만큼 처마에 쓸 긴 목재를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삼림자원이 고갈된 조선 말에서는 충분한 목재를 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평가[편집]

경회루는 단일 평면으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누각건물이다. 이와 같이 거대한 규모의 건물을 물 속에 인공으로 조성한 섬에 세웠으면서도 그 기초를 견고히 하여 건물이 잘 견디게 처리한 점, 거대한 건물을 이익공의 간결한 법식으로 처리하면서도 왕실의 연회장소로 합당하게 잘 치장한 점, 2층 누에서 주변 경관으로 인왕산·북악산·남산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게 처리한 점, 1층 건물 주변을 돌며 연못의 물과 섬을 바라보며 감상토록 한 점 등은 높은 평가를 받는다.

관람[편집]

경복궁을 답사할 때 경회루로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정전인 근정전에서 서쪽 문으로 나가 경회루를 보고 나서 편전을 보기도 하고, 반대로 사정전과 강녕전(康寧殿)을 보고 경회루로 가기도 한다. 어떠한 방법으로 가든 별 문제는 없지만, 조선시대에는 강녕전과 교태전에서만 경회루로 갈 수 있었다. 경회루는 왕과 왕비의 후원이자 왕족들의 공간으로,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경회루를 연못 일대 어느 곳에서나 감상할 수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연못 주위로 담장이 둘러쳐져 있었기 때문에 밖에서 경회루의 장관을 감상할 수는 없었다.

기타[편집]

  • 해질녘에 경회루 동쪽 측면에서 서쪽을 바라보는 풍경이 장관이다.
  • 화재를 방지하기 위하여 연못에 청동 용 2마리를 넣었다는 기록이 있다. 1997년 연못 공사를 위해 연못의 물을 뺐을 때 하향정 근처에서 1마리가 발견되어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되었지만, 나머지 한 마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 연산군 시절에 창경궁에 옛 경회루를 본 따 큰 누각인 서총대를 지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서총대는 중종 때 철거되었다. 그리고 그 앞에 연못을 팠는데, 그것이 오늘날 남아있는 춘당지인 듯하다.
  • 안의 연못이 고여있다고 생각되지만 사실 안에 여러 곳에서 샘물이 솟아나오고, 빠져나가는 곳이 있어서 물이 썩지 않았고, 배수 시설도 잘 갖춰져 있어서 호우에도 물이 범람하지 않았다고 한다.
  • 돈이나 물건 따위를 함부로 마구 써 버린다는 단어 '흥청망청'이 경회루와 연관 있다. 조선 시대 연산군이 '흥청'이라는 기생들을 모아놓고 경회루에서 술잔치를 벌이던 것이 유래이다.
  • 이승만 대통령이 경회루 북쪽에 하향정이란 사설 정자를 만들었는데 철거 논란이 있다.
  • 대한민국 건국이후로도 대통령 취임기념이나 외교행사에 연회장으로 사용되었다.

동영상[편집]

지도[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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