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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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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고향(故鄕)이란 태어나서 자라고 살아온 곳 또는 마음속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장소를 말한다.[1]

요약[편집]

고향은 태어나서 자라고 살아온 곳 혹은 마음속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장소이다. 나의 과거가 있고 정이 든 곳으로, 일정한 형태로 나에게 형성된 하나의 세계이다. 이처럼 시간·공간·마음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불가분의 관계로 굳어진 복합된 심성을 담고 있다. 산천이라는 자연을 포함시켜 고향산천이라고도 하며, 생물학적 탄생과 일치시켜 어머니와 같이 보기도 한다. 다정함·그리움·안타까움 등의 정감은 여기서 비롯된다. 타향살이·귀향·낙향·실향·향수 등 고향과 관련한 많은 말들은 사소하지만 서로 다른 복합적인 심성을 담고 있다. [2]

역사[편집]

건국 신화의 고향[편집]

우리나라 건국신화의 주인공인 단군신화의 단군(檀君), 고구려 건국신화의 고주몽(高朱蒙), 백제의 비류(沸流)와 온조(溫祚), 신라의 박혁거세(朴赫居世), 석탈해(昔脫解)와 김알지(金閼智), 그리고 가락국의 김수로왕(金首露王) 등은 외지에서 들어오는 외래인이며, 먼저 살던 주민과 연합을 하여서 새 나라를 건설한다. 그런데 이 후기 외래인은 강력한 문화(철기문화·농경문화 등)를 소유하면서 대개 “하늘에서 하강한다.”는 천손 하강(天孫下降) 모티프를 제시한다. 위에 든 인물 중 석탈해는 바다에서 오고 온조의 비류는 남하하는 변형이 있지만 그 본래 모습은 천손 하강이다.

삼국·고려·조선시대의 고향[편집]

외교상의 인질(볼모)이나 전쟁 중의 포로는 고향을 강제로 상실한 불행한 무리이며, 망국의 비운 속에 적국으로 끌려간 포로는 고향과 고국을 함께 잃은 자이다. 한 예로 백제가 망하였을 때 의자왕을 위시하여 약 1만 3000명이 당나라에 포로로 끌려갔고 그들은 거의 다 귀국하지 못하였다. 그들의 재능은 파묻히고 치욕은 가득하고, 그러다가 중국인이 되고 그들을 잃은 백제는 재기할 수가 없었다. 일본으로 탈출한 백제 망국민의 일부는 바다에서 죽고, 일부는 일본 땅에 가서 고생을 하며 뿌리를 내려서 일본 사람이 되고 말았다. 고향의 상실이 조국의 상실이며, 혈연의 단절로 발전함을 볼 때 고향이 곧 생명이 된다고도 하겠다. 그 뒤 빈번한 외적의 침입으로 우리 동포가 외국에 끌려가는 일도 있었고, 한반도 내의 정치적인 변동으로 숱한 실향이 생겼다. 고려가 건국하면서 신라 왕족이나 후백제 중심 세력을 개성 방면으로 이주시킨 것이 그 한 예가 된다. 한반도를 침략하였던 외국인이 여기에 정착한 예도 있고, 외국인이 망명 혹은 경제적인 이유로 우리나라에 정착하여 고향을 새로 정하고 살아온 예가 족보 시조 이야기에 드러나기도 한다. 멀리 귀양을 갔다가 그곳에 정착한 경우나 생계와 전쟁 피난 때문에 어느 섬에 들어와 개척하여 터전을 마련한 예도 있다. 이것은 그들을 입도조(入島祖)나 입향조(入鄕祖)로 칭하는 후손에 의하여 족보에 또한 드러난다. 고향의 상실과 신설은 결국 국가 사회의 변동에 따른 개인의 생존방식에 의한다.

일제강점 이후의 고향[편집]

8세기 말 백제와 고구려가 패망한 이후 20세기 일제에 조선왕조가 강점을 당하기까지 1,000여 년간 우리 한반도에는 외국으로 나가야 하는 고향 상실이 곧 고국 상실로 직결되는 일은 없었다. 그동안은 이 땅 안에서, 같은 문화와 혈통(동족) 안에서 고향 상실이 거론될 뿐이었는데, 1910년을 전후하면서 일제가 이 땅에 진출하여 강점의 야욕을 보이자 고향 상실 문제가 국외 이주로 확대되었다. 또, 의병의 일부가 만주로 가고, 일제강점기시대에는 중국·소련·미국 그리고 자의든 타의든 일본으로 가서 눌러 사는 동포가 많았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외국에 나갔던 동포가 귀국 및 귀향을 하기도 하였고, 기회가 없어서 현재까지 실향민으로 남기도 하였다. 이들이 실향 제1세대인데, 광복 40년이 지나자 사망하거나 노쇠하여서 2세와 3세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다시피 하였다. 2세와 3세는 그 몇 십 년 살아온 나라를 조국이라 하여서 국적을 바꾸며 새로운 고향을 만들게 되었다.

6·25 이후의 고향[편집]

1945년 광복 후 한반도는 남북을 가릴 것 없이 좌우 대결로 극심한 혼란을 빚었는데, 북에서 공산치하에 환멸을 느끼거나 신변의 위협 때문에 남하한 사람이 많았다. 1950년 6월 25일 공산군의 남침으로 인하여 300만에 이르는 대대적인 실향민이 발생하였다. 이것은 북한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되어서 북한 인구는 줄고, 남한 인구는 전쟁 중의 인구 손실을 보충할 만큼 되었다. 멀지 않아 북한이 수복되면 귀향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타향에 와서 노력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생존본능에서 남하 초기에는 고향의식보다 살아가는 데 치중하여 왔다. 그러나 몇 년 몇 십 년이 흐르자 어쩔 수 없이 남한을 고향으로 삼고 각지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런데 서해 쪽인 평안도나 황해도의 실향민은 서해 쪽에 많이 살며, 동해 쪽인 함경남북도와 강원도 북부에서 남하한 사람은 동해안에 많이 산다. 인천·서해 5도(백령도·대청도·소청도·연평도 등)에는 전자가, 강릉·속초에는 후자가 많이 산다. 조금이라도 고향이 가까운 곳에서 살고자 한 것이다.

도시화와 고향 상실[편집]

6·25는 극심한 파괴였다. 이 파괴는 단시간에 복구가 되어야 하였고, 많은 사람이 생존을 위해서 복구와 신설(건설)에 몰두하여야 하였다. 시급한 의식주 문제를 해결할 여건은 농촌보다 도시가 유리하였다. 전쟁의 피해가 집중적으로 컸던 만큼, 그곳의 연고가 없이 살아야 하였던 이북 피난민과 도시 근처에서 도시처럼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본래 도시민과 함께 도시에 정착하여 복구 사업을 하게 되었다. 정부는 급속도로 도시를 정비하여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투자를 하였다. 도시는 사람이 많고 일거리가 많고 돈이 많으며 정부의 정책 활동이 집중되어서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상업·공업·교통·유통·교육·정보산업·언론매체·무역 등등에서 농촌과 같은 농한기와 농번기 같은 완만한 반복 교대가 아니라, 후퇴가 없는 전진과 발전이 지속될 것이다. 똑같이 전쟁의 피해를 입은 국토였지만 몇 년이 지나자 도시는 활기를 띠고 농어촌은 정돈 상태에 들어갔다. 땅에서 농업 소출을 하는 것은 1년에 한 번이다. 지출은 다양하게 확대가 되는데 수입은 매우 완만하고 소량이었다. 정부의 시책으로 큰 도시집중 현상을 일으켰고, 그래서 돈이 있고 살기 좋고 교육 환경이 유리한 도시로 몰려들었다. 전쟁의 파괴를 복구하고 새로 건설하는 단계에서 수출입 산업으로 경제 규모가 확대되자, 인력이 도시에서 급속히 요구되고 농촌 인구의 도시집중화가 일어났다. 그리하여 인구면에서 도시 증가와 농촌 축소의 대비가 점점 극심해졌다. 결국, 이북 실향민 상태와 같은 전후 남한의 실향민이 속출하게 된 것이다.[2]

고향의 기준[편집]

  • 출생장소를 기준으로 할 경우 성장기 연고지 다음으로 대중적인 기준. 자기 가족관계등록부 중에서 "기본 증명서"의 "출생" 칸에 기록된 출생장소(흔히 병원). 다시 말해, 물리적인 출생지. 서류상의 출신지(한국의 경우 기본 증명서에 표기된 출생지)와 동의어다.
  • 출생등록 지를 기준으로 할 경우 자기 주민등록표 초본에 최초로 등재된 집 주소. 출생지와 영유아기 성장기마저 다른 경우(예를 들어 광명시민의 자녀로서 서울 고대구로병원에서 출생한 경우)에는 최초 주민등록지가 실질적 의미의 출신지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 성장기 연고지를 기준으로 할 경우 현재 제일 대중적인 기준. 주로 초중고 재학 당시 거주지나 학교 소재지로 하는 편. 이쪽은 본인 출생지나 부모 출신지보다는 자신이 성인이 되기 전까지 성장 과정에서 자신의 지역 정체성 형성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곳(즉 성장기 중 가장 오래 지낸 곳)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 부계 선대의 고향을 기준으로 할 경우 위의 2개 항목과 부합된다.
  • 본적지를 기준으로 할 경우 본적지는 아버지 및 선조의 출신지와 연관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차남 이하의 자녀가 타 지역으로 이주하여 혼인한 경우 본적지가 바뀌는 경우가 많았기에 애매한 측면이 있다.[3]

민요 시가와 가요에 나타난 고향[편집]

민요 「아리랑」의 고향은 고향을 떠나지 말라는 것이 주종이다. 고향에는 부모·임·인정 같은 불변의 요소가 있는데 어찌하여 낯설고 물선 곳으로 야속하게 가는가라는 만류와, 그래도 떠나는 사람에 대한 원망과 아쉬움이 들어 있다.「아리랑」의 이별은 쓰리고 아린 심정이기에 아리다라고 하여 아리랑(쓰리고 아림이 합쳐서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이라고 한 것으로 추측된다.)이라는 말이 되었다고 어원을 추정한다면 고향은 그 쓰라림이 치유되는 곳이 된다. 그 시각적인 치유 요소가 그림(회화)으로 형성이 된 것이고, 청각적으로 표현이 된 것이 기록문학과 구비문학이다. 김소월(金素月)의 「진달래꽃」과 고려가요의 「가시리」·「서경별곡」은 결국 고향에 있는 임에게 떠나지 말아 달라는 당부인 것이다. 고려가요 「청산별곡」은 고향을 잃은 유랑의 무리가 부른 내용이다. 청산에 가서 살까, 바다에 가서 살까? 깊은 산중에서 절대 고독 속에 살까, 억울하게 돌을 맞고 살아가야 할까? 무엇을 먹고 무엇을 보고 어디에다가 정을 붙이고 살까? 이러한 고뇌를 담고 있는데, 이것은 다 고향을 떠나서 유랑하기 때문이다. 뿌리가 뽑힌 나무가 어찌 온전할 것인가, 고향을 떠난 사람이 어찌 평안할 것인가를 뜻한다.[2]

한국인의 고향 특징과 의미[편집]

한국인의 고향은 국내에 있을 때는 낳아서 자란 부모가 계신 고을이 되며, 국외에 나가 있을 때는 그 고을과 조국이 다 해당이 된다. 생사와 종교에 관해서는 이승일 때도 있고 저승일 때도 있다. 신화에서는 조상이 사는 북쪽이 고향이 되며 성스럽고 존경이 가는 땅이다. 이처럼 고향의 정의는 다양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고향은 고향집·고향 마을·고향산천·고향 사람들로 나타나는 시골의 정든 모습이며, 고향에 살고 있다면 아름답게 보존하거나 훌륭하게 발전시킬 일이며, 객지에 있다면 자랑하며 지원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대의 도시집중화 현상과 6·25로 인한 북한 동포의 남하, 그 이전의 일제 침략으로 인한 해외이주 등으로 고향은 심적으로는 영원한 구심점이 되지만 현실적으로는 실향상태가 발생하여 여러 가지 갈등을 양산하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변하는 한국의 시대상과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한국인의 심성이 예리한 대비를 한다고 하겠다. 이 심성은 회화·시가·소설·가요 등으로 다양하고도 절절하게 표현이 되었다. 돌아가야 한다는 당위와 갈 수 없다는 현실의 간격 속에 고향은 존재한다. 이 고향을 다시 찾아보겠다는 각오가 크면 클수록 지방과 도시가 고루 발전할 것이다. 또한 남북한의 통일이 촉진될 것이며, 해외 교포와 국내 동포 사이의 접촉이 일어나서 국가가 발전할 수 있을 것이며, 한국의 특수성과 세계의 보편성을 띤 예술작품이 생산될 수 있을 것이다. 곧, 한국인의 고향의 특징과 의의는 긍정적이며 생산적이라고 본다.[2]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고향〉, 《네이버 국어사전》
  2. 2.0 2.1 2.2 2.3 고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고향〉,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 고향〉, 《네이버 국어사전》
  • 고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고향〉, 《나무위키》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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