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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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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촌

기지촌(基地村)은 병영(兵營)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변에 서비스업 중심의 생활권을 형성하는 군사취락 지역을 말한다. [1]

개요[편집]

기지촌의 연원은 신라시대의 진촌(鎭村)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군사취락이 형성된 것은 근대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광복 이전에는 일본군을 상대로 그 주둔지였던 신용산·나남(羅南)·진해 등지에서 발달하였다. 6·25전쟁 이후에는 미군을 대상으로 부산의 하야리아 및 텍사스, 경기도의 운천·포천·문산·양주와 파주의 용주골, 평택의 쑥고개, 동두천 등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이들 주요 미군주둔지에는 수복과 더불어 기지촌이 발생하기 시작하였고, 미군의 외출과 외박이 허용된 1957년부터 급격히 번창하기 시작하였다.오늘날의 기지촌은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 온 미수복지의 피난민·영세민·성매매 여성·군노무자·군납업자·상인 등이 모여들어 새롭게 형성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기지와 연관된 소비적인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다.이들 지역에는 주둔 군인을 대상으로 한 각종 특수 유흥업소가 즐비하고, 미군 매점(PX)을 통한 외래품의 유출로 암시장이 형성되는 등 특수한 기능과 형태의 촌락으로 발달되고 있다. 이러한 기지촌은 병영지라는 단일 인자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형성, 발달하고 있기 때문에 근래에 와서 주한미군의 감축 및 철수로 기지촌은 급격히 쇠퇴하거나, 서비스 기능이 소멸하는 등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2]

대한민국 기지촌 탄생 배경[편집]

1990년대 이후에는 한국 여성 대신 인신매매된 필리핀인, 러시아인 등의 외국 여성이 주한 미군을 상대하게 되었다. 1994년부터 오늘까지 기지촌과 한국성매매사업장에는 필리핀 및 동아시아의 이주여성들이 한국정부가 발급해 주는 E-6비자(예술흥행사증)를 통해 들어올 수 있는데 이들 여성들은 한국의 기지촌에서 성 착취 인신매매 피해자로서 살아가다가 귀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미군인 남자친구, 업주와 프로모터, 또는 손님으로부터 임금착취나 체불, 온갖 폭력에 시달리거나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것이 일상이었다. 2005년, 기지촌 여성의 90%는 러시아 여성과 필리핀 여성이었다. 2005년 5월 20일에 클럽을 상대로 한 재판에서 승소한 필리핀 여성은 필리핀에서 한국 기업의 가수로 고용되었지만 한국에 오자마자 감금되어 미군을 상대로 한 성매매를 강요당했다고 밝혔다. 여성들은 주스를 많이 팔지 못하면 주스바의 주인들에게 성매매를 강요당했으며 여성들이 성매매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미군 병사와 결혼하는 것뿐이었다.

​2010년에 미국 국무부는 미군 기지의 부근에서 가혹한 상황에 처한 여성들을 두고 현재 한국에서 행해지는 인신매매 중 하나라고 보고했으며 필리핀 대사관은 필리핀 여성에게 성매매를 강요하는 행위를 감시하며 '워치리스트'를 작성했다. 필리핀 정부는 필리핀 여성들이 주한미군 기지 가까이에 있는 주스바에서 일하는 것을 승인하지 않기로 하였지만 여전히 필리핀 여성의 기지촌 유입은 지속되고 있다. 오늘날의 기지촌은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 온 저개발 국가의 피난민·영세민·성매매 여성·군노무자·군납업자·상인 등이 모여들어 새롭게 형성된 경우가 대부분이며 이들은 기지와 연관된 소비적인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다. 여전히 이들 지역에는 주둔 군인을 대상으로 한 각종 특수 유흥업소가 즐비한 등 특수한 기능과 형태의 촌락으로 발달되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3]

대한민국 기지촌 특징[편집]

  • 인구구성은 생산연령층(15∼64세)의 인구율이 높다. 특히 성매매 여성이 많이 집중되어 20∼29세의 여자 연령층이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여초현상(女超現象)을 나타내는 것이 기지촌 인구구조의 특징이다.
  • 산업별 인구구조는 1950년대 이전에는 순수한 농촌이었다. 그 뒤, 기지촌 형성을 배경으로 하여 농가인구율이 급격히 낮아지고, 상업·서비스업 등 3차산업 인구율이 급증하였다.
  • 인구밀도는 전국 읍지역 평균치인 499명/㎢ 을 넘고, 전국 시·도 평균밀도인 1,967명/㎢ 보다 높은 곳도 13개 리나 된다.
  • 주민구성은 토착민의 구성비가 매우 낮고, 대체로 기지촌 발달과 더불어 성매매 여성을 비롯한 미수복지 피난민과 각지에서 모여든 이농 영세민으로 이루어져 있다.따라서 매우 복합성을 띠는 이질집단으로 구성된 기지촌에서는 지역적 유대 및 지역주민간의 결속이 매우 어렵고, 또한 전통적인 윤리관이나 가치관이 많이 퇴색되어 있다.
  • 기지촌의 상가는 전형적인 우리나라 중소도시의 상가유형과는 겉모양과 성격이 다르다. 상호는 거의 영어와 한글 혼용이며, 음식점·클럽·홀을 중심으로 하여 양복점·기념품점·전자제품·레코드점 등이 특징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또한 이러한 상가를 둘러싸고 서둘러 지은 건축물이 무질서하게 불어나 과밀지역을 형성하고 있다.
  • 군사도로와 통일로의 확장 또는 포장으로 수도와 연결되어 지역발전이 촉진되고 수도통근권을 형성하기도 한다. 그에 따라 토지이용이 고도화되어 땅값이 오르는 등 공간구조에 큰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색문화지대는 지금은 주한미군의 감축으로 과거보다 경기가 많이 위축되어 있다.[2]

대한민국 기지촌 역사[편집]

1950년대[편집]

한국 전쟁 직후, 1954년 치안국보안과 통계에 따르면 전체 성매매 여성은 17,300명이었으며 그중 상당수는 미군을 상대했다. 더 나아가, 1962년에는 2만 명 이상의 성매매 여성이 65,000명의 미군을 상대하였으며 1977년에는 9,935명의 미군을 상대하였습니다. 1957년에 접어들면서, 한국정부와 미국정부는 안전한 성병방지대책을 고심하던 중 <성병방지대책위원회>을 조직하게 되었다. 이후, 제4차 회의에서는 성매매 여성을 집결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어 이 결정에 따라 미8군에서는 서울에 접객업소 10개소, 인천에 댄스홀 12개소, 부산에 댄스홀 2개소를 설치하였습니다. 그 결과, 1957년에 보건사회부 산하 성병진료소 89개소 중 절반에 가까운 43개소가 미군기지가 집중되어 있는 서울, 부산, 대구, 파주, 양주, 평택 등 6개 지역에 위치하게 되었다.

동두천의 경우, 인구 1만여 명의 작은 농촌 마을이었으나 동두천이 기지촌으로 자리매김하면서 1955년에 인구가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나 21,377명에 이르며 훗날 ‘리틀 시카고’라고까지 불리게 되었다. 1950년대 소규모 촌락들에선 전후 농업 등 생산 관련 산업이 몰락하고 미군기지가 들어오면서 소비 중심적 산업으로 경제구조가 재편되었다. 기지촌에는 미군 전용 홀, 세탁소, 이발소, 미장원, 양복점 등이 생겼고, 미군부대 안에는 정규직 근로자들과 하우스보이나 세탁과 청소를 전담하는 일용직 여성 노동자 등 임시직 근로자들이 일했다. 기지촌의 한국인 대다수는 생계를 전적으로 미군에 의존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성매매를 기반으로 한 서비스업과 상업이 발달했다. 이후 한국 정부는 기지촌의 성매매 구조를 지속적으로 관리감독하고 외화벌이의 수단으로 체계화하였다.

1960년대[편집]

1961년 5월 박정희 군사정권이 군사쿠데타를 통해 집권하며 기지촌에는 또 다른 주요한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박정희 정권은 사실상 여성의 몸을 관광 자원으로 만들었으며 이전 정권과 달리 암묵적 지원이 아닌 적극적 개입을 통해 기지촌을 재구성했다. 먼저, 정부는 기지촌을 특정 구역으로 지정하였는데요. 1961년 ‘윤리 행위 방지법’ 제정으로 한국에선 성매매가 금지되었지만, 기지촌은 예외였다. 그 이유는 바로 외화벌이 때문이었다. 기지촌은 정부가 허락한 합법적인 성매매 업소였다. 정부는 기지촌 성매매 산업을 성매매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정부 주도 외화벌이 사업이라며 칭송했다.

정부는 국내 총 104개소에 있는 특정 윤락 지역(용산역, 영등포역, 서울역 등 전국 46개 집결지역과 이태원, 동두천, 의정부 등 32개 기지촌 포함)을 윤락행위의 단속을 면제해 주는 적선지구로 지정하였다. 정부는 윤락 지역을 일반인 거주 지역으로부터 격리하고 기지촌 여성들의 집단화를 유도하면 이들이 포주의 착취로부터 자발적 방어권을 행사할 수 있고 성병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는 명분을 제시했다. 다양한 제도적 장치의 마련을 통해 1960년대 기지촌은 국가 경제성장의 주요한 발판으로 공고화되었다. 기지촌 여성들은 신체검사(성병 검사)를 거쳐 군 보건소와 미군 헌병대에 등록하고 ‘홀’에 전속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1964년에 등록된 성매매 여성 19,986명 중 10,681명(53.10%)이 경기지역에 밀집해 있었으며 전체 성매매 여성 중 과반수가 미군 주둔과 연관되어 있다는 암묵적인 사실이 드러났다.

1970년대[편집]

1970년대에는 청와대 공무원들이 정기적으로 기지촌에 가서 여성들을 모아놓고 국익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고 격려를 하곤 하였다. 1973년 민관식 당시 문교부 장관이 조국 경제 발전에 기여해 온 소녀들의 충정은 진실로 칭찬할 만하다고 말해 논란이 된 적도 있는데 1971년 제3공화국은 정부 각 부처 차관이 참석하는 기지촌 정화위원회를 구성하여 기지촌 활성화 정책을 펼쳤다. 이는 당시 한국 정부가 기지촌 여성을 한미동맹을 공고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1990년-2000년대[편집]

1990년대 이후에는 한국 여성 대신 인신매매된 필리핀인, 러시아인 등의 외국 여성이 주한 미군을 상대하게 되었다. 1994년부터 오늘까지 기지촌과 한국 성매매 사업장에는 필리핀 및 동아시아의 이주여성들이 한국 정부가 발급해 주는 E-6비자(예술흥행사증)를 통해 들어올 수 있는데 이들 여성들은 한국의 기지촌에서 성 착취 인신매매피해자로서 살아가다가 귀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미군인 남자친구, 업주와 프로모터, 또는 손님으로부터 임금착취나 체불, 온갖 폭력에 시달리거나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것이 일상이었다. 2005년, 기지촌 여성의 90%는 러시아 여성과 필리핀 여성이었다. 2005년 5월 20일에 클럽을 상대로 한 재판에서 승소한 필리핀 여성은 필리핀에서 한국 기업의 가수로 고용 되었지만 한국에 오자마자 감금되어 미군을 상대로 한 성매매를 강요당했다고 밝혔다. 여성들은 주스를 많이 팔지 못하면 주스바의 주인들에게 성매매를 강요당했으며 여성들이 성매매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미군 병사와 결혼하는 것뿐이었다.

2010년에 미국 국무부는 미군 기지의 부근에서 가혹한 상황에 처한 여성들을 두고 현재 한국에서 행해지는 인신매매 중 하나라고 보고했으며 필리핀 대사관은 필리핀 여성에게 성매매를 강요하는 행위를 감시하며 '워치리스트'를 작성했다. 필리핀 정부는 필리핀 여성들이 주한미군 기지 가까이에 있는 주스바에서 일하는 것을 승인하지 않기로 하였지만 여전히 필리핀 여성의 기지촌 유입은 지속되고 있다. 오늘날의 기지촌은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 온 저개발 국가의 피난민·영세민·성매매 여성·군노무자·군납업자·상인 등이 모여들어 새롭게 형성된 경우가 대부분이며 이들은 기지와 연관된 소비적인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다. 여전히 이들 지역에는 주둔 군인을 대상으로 한 각종 특수 유흥업소가 즐비한 등 특수한 기능과 형태의 촌락으로 발달되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3]

대한민국 기지촌 문제점[편집]

국내에서 위안부 문제가 꾸준히 회자되면서 위안부의 실상이 밝혀지기 시작하자, 기지촌에서도 6.25 전쟁 때부터 여성을 강제로 데리고 와 성범죄를 일으킨게 뒤늦게 드러나면서 논란이 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많이 알지 못하는 경우가 드러나고 있다. 상술된 아메리카타운도 물론 그냥 도시는 아니고, 구조 특성상 양공주에 대한 성매매 허브와 연계될 수밖에 없었다. 2022년 9월 29일 대한민국 대법원은 정부가 1950년대부터 기지촌에서 성매매를 조장하고 운영에 관여한 점을 인정하고 인권침해를 당한 피해자들에게 정부가 배상을 하라고 판결했다.[4]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기지촌〉, 《네이버 지식백과》
  2. 2.0 2.1 기지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3.0 3.1 대한민국 통일부, 〈한국 역사 속 감춰진 그늘, 기지촌을 아시나요〉, 《네이버 블로그》, 2021-08-10
  4. 기지촌〉,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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