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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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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원(金昌源) 전 신진그룹 회장

김창원(金昌源, 1917년 ~ 1996년 5월 3일)은 신진자동차 대표 겸 신진그룹의 회장을 지낸 사람으로, 한국 자동차공업과 기계공업의 선구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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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편집]

김창원은 1917년 충청남도 공주(公州)에서 출생하였으며 1953년에 일본에서 와카야마 상업학교(和歌山縣 商業學校)를 졸업하였다.

1950년대 초반에 형 김제원(金濟源) 씨와 함께 대전에서 자동차부품 피스톤 링 제조사 한국이연(韓國理硏)을 설립하였으며 1955년 2월에 부산 전포동에서 자동차 수리와 개조를 추진하는 신진공업사(新進工業社)를 설립하고 대표이사를 맡았다. 1965년 11월에 경기도 부평에 있는 부실기업 새나라자동차㈜의 부평공장을 인수하고[1] 1966년에 신진자동차공업(新進自動車工業, Shinjin Motor Company)으로 상호변경을 추진한 뒤 이의 대표이사로 되었으며 1966년 1월에 일본 토요타자동차와 기술제휴를 추진하고 SKD방식으로 '코로나'(Toyota Corona) 승용차를 생산하였다.

1967년에 상공부의 자동차 산업 계열화 정책에 따라 하동환자동차를 계열사로 편입시켰으며 회사의 성장에 덕 입어 신진자동차운전학원(1968년), 한국기계공업(1968년), 경향신문(1969년), 신진장학회(1969년), 신원개발주식회사(1969년), 신진자동차공업고등학교(1970년), 한국카이사알미늄, 대원안전유리공업, 대원강철공업, 코리아스파이서공업(1971년), 신진지프(1974년) 등을 잇달아 세우면서 그룹을 만들었다.

1971년에 일본 토요타와의 기술제휴가 청산되면서 미국 제너럴모터스와 손을 잡고 신진자동차 부평공장을 GM코리아로 분사시켰으며 1973년에 오일쇼크에 따른 신원개발의 경영악화에 따라 GM코리아의 신진자동차 보유지분을 한국기계공업과 함께 산업은행에 양도하고 GM코리아는 1976년 11월에 새한자동차로 상호가 변경되었다.[2] 1975년부터 신진자동차 판매, 현대기아, 하동환자동차, 대원안전유리, 신진알미늄, 경향신문 등을 매각처분하였으며 1978년에 신원개발을 삼성에 양도하였다.[3]

GM코리아를 내놓게 되면서 미국의 아메리칸모터스(AMC)와 손을 잡고 1974년에 신진자동차의 지프부문을 합자회사에 편입시켜 신진지프모터스를 설립하였으며 1979년에 아메리칸모터스가 물러선 뒤 회사의 완전소유주로 되면서 상호를 신진자동차로 하였다가 1981년에 거화자동차로 사명변경을 추진하였다. 1984년에 미화 41만4천 달러의 불법유용 혐의로 구속되면서 거화자동차 회장에서 해임되었으며 1984년에 거화자동차를 동아자동차공업(현 쌍용자동차)에 양도하고 1985년에 코리아스파이서를 성신양회에 양도하였다.

그 뒤로는 신진학원(신진과학기술고등학교)과 조그만 수산회사를 운영하면서 평범하게 살다가[4] 1996년 5월 3일에 서울삼성의료원에서 79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장지는 천안공원묘지로 하였다.[5]

사업경력[편집]

1950년 ~ 1965년[편집]

1950년대 초반에 형 재원(濟源)씨와 함께 대전에서 자동차부품 피스톤 링 제조사 한국이연(韓國理硏)을 설립하였으며 1955년 2월에 부산 전포동에서 자동차 수리와 개조를 추진하는 신진공업사(新進工業社)를 설립하였다. 1957년에 사명을 신진공업으로 변경하였으며 1958년에 유엔 한국재건단 운크라(UNKRA) 자금[6] 지원을 받아 공장을 확장시키고 1962년에 대중형 자동차 조립공장 인가를 얻어 미군에서 불하받은 4/3톤 군용트럭 폐차 새시를 재생하여 규격화된 마이크로버스를 만들었으며 출시된 신진 H-S-J 25인승 미이크로 버스는 일명 노랑차 혹은 마이클로 불리면서 엄청찬 판매고를 자랑했다. 1963년에 미군 지프 등의 재생부품을 이용하고 새나라 자동차의 디자인(닛산 블루버드 P310)을 따서 세단승용차 신성호(新星號)를 개발하여 승용차 제작인가를 취득하였으며 재생부품의 사용에 따른 조악한 품질과 특유의 수작업 원가로 판매실적은 별로 올리지 못했다.

1965년 11월에 경기도 부평에 있는 부실기업 새나라자동차㈜의 부평공장을 인수하였다.[1]

1965년에 신진자동차는 토요타자동차가 아닌 미쓰비시 자동차와 기술제휴를 시도하였으나 추진 과정에 시험견본의 명의로 수입한 콜트 100대를 판매한 사연으로 콜트 사건이 터져 더 추진하지 못하였다. 콜트 사건은 신진자동차가 면세조건을 적용하여 시험용 견본으로 수입한 100대 콜트를 고가로 판매한 뒤 판매한 자동차 대금을 정치권 자금으로 넣었다는 소문으로 전국 언론이 들썽했던 사건이다.[4]

1965년 ~ 1980년[편집]

1966년에 신진공업을 신진자동차공업(新進自動車工業, Shinjin Motor Company)으로 상호변경을 추진하였다.

미쓰비시와의 기술제휴는 실패하였으나 토요타자동차와 인계가 되어 기술제휴를 추진하게 되었으며 1966년 1월에 SKD방식으로 1,500cc의 '코로나'(Toyota Corona) 승용차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 말까지 한국에서 승용차 독점생산을 추진하였으며 '코로나' 붐을 일으킨 자동차업계의 거물로 성장하였다. 이 시기에 생산한 차종으로는 승용차 코로나(Corona), 크라운(Crown), 경차 퍼블리카(Toyota Publica), 픽업트럭 랜드크루저, 토요타 중형 트럭, 토요타 DB100C 중형 버스, 이스즈 BR20 대형 버스, 대형 히노 TC 트럭, 히노 중형 트럭, 히노 RC320TP 등이 있었다.

1960년대 중후반부터 급속한 성장을 배경으로 여러 인수합병을 추진하면서 사세를 키웠다. 1967년에 상공부의 자동차 산업 계열화 정책에 따라 하동환자동차를 계열사로 편입시키고 1968년 9월에 건설중장비, 공작기계, 엔진 등 중공업 제품을 생산하는 공기업 한국기계공업[7]을 인수하였으며 1971년에 트랜스미션/액슬 제조사 코리아스파이서공업(Korea Spicer Ltd)을 설립하고 1973년에 신진알루미늄을 인수하였다. 이외에도 대원안전유리공업, 대원강철공업 등도 설립하였다.

자동차 사업과는 무관하게 1968년에 서울양평동에 신진자동차운전학원을 세운 뒤 1970년에 신진공업고등학교로 개교하였으며 1969년에 경향신문을 인수하고 신진장학회를 세웠으며 토목건설회사 신원개발주식회사를 설립[8]하고 부동산건설업으로 진출하였다.

1970년대에 진입하면서 토요타자동차가 중국진출을 목적으로 중국 국무원총리 저우언라이(周恩来) 4 원칙에 따라 신진자동차와의 제휴를 청산하게 되면서 신진자동차는 제너럴모터스와 손을 잡게 되었으며 50:50의 출자비율로 4,800만 달러 자본금의 GM 코리아를 설립하게 되었다. 신진자동차는 부평공장을 분사하여 GM 코리아에 편입시켰으며 1972년부터 시보레 1700, 카미나, 카라반, 레코드 1900, 중형 GMC C시리즈 트럭, 이스즈 TDX50E트럭, 이스즈 TX트럭, 새마을 픽업 등을 생산하였다. GM에서 개발한 차종이 한국 도로 사정과 어울리지 않으면서 판매실적은 별로 안 좋았다. 1974년 2차 오일쇼크가 터지면서 계열 건설사 신원개발이 경영악화에 시달릴 때 한국기계공업과 GM코리아에 보유하고 있던 신진자동차의 지분을 산업은행에 양도하였으며 GM코리아는 후에 새한자동차로 상호가 변경되었다. 1978년에 대우그룹이 산업은행의 지분을 인수하고 제너럴모터스와의 경영권문제의 합의를 보게 되면서 새한자동차는 1983년 1월부터 대우자동차(현 한국GM)로 출범하였다.[9][10]

1969년에 신진자동차공업은 미국 카이저사와 기술제휴를 추진하여 첫 한국산 지프 "CJ-5"를 생산하였으며 사업을 유지하다가 GM코리아를 내놓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 뒤 1974년에 카이저를 인수한 아메리칸모터스(AMC, American Motors Corporation)와 50:50의 출자비율로 합자회사 신진지프모터스를 설립하였다. 지프사업부문을 신진지프모터스로 편입시켰으며 1979년에 아메리칸모터스가 물러난 후에 다시 신진자동차로 하였다가 1981년에 주식회사 거화(巨和)로 사명을 변경하였으며 1982년에 코란도 브랜드를 공개하였다.[11]

1975년에 하동환자동차공업이 그룹에서 분리되었으며 이는 후에 동아자동차공업㈜으로 상호변경을 추진하였다가 1988년 3월에 쌍용그룹에 양도하면서 쌍용자동차로 되었다.[12] 1975년에 신진알미늄을 율산실업에 양도하였으며 이는 후에 효성그룹에 인수되어 효성알미늄으로 되었다가 1988년에 효성금속에 합병되었다.[13] 1978년에 신원개발을 삼성그룹에 양도하였으며 이는 1979년에 삼성종합건설에 합병되었다. 1980년에 대원안전유리공업도 한국유리공업에 양도하였다.

1981년 ~ 1996년[편집]

정리해야 할 사업들을 전부 정리하고 김창원은 지프 전문인 ㈜거화와 자동차부품회사인 코리아스파이서 및 신진학원은 사수하려고 작정하였다. 하지만 본인이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카지노 도박으로 23만 달러를 탕진한 사실이 적발되면서 1984년 11월에 검찰에 구속되었으며 이로 인해 거화그룹은 흑자도산을 하였다. 거화자동차는 1984년 12월에 원 하동화자동차공업에서 발족한 동아자동차에 넘어갔다가 1986년 9월에 쌍용자동차에 흡수되었으며 코리어스파이서는 1985년에 성신양회에 넘어가 코리아정공㈜로 되었다가 2000년에 현대자동차의 계열사인 위아(WIA)(옛날 기아중공업)에 매각되었다.

토요타와의 기술제휴를 청산하게 만든 저우언라이 4원칙[편집]

저우언라이 4원칙은 중국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周恩来)가 1969년 4월 19일에 중국 방문을 온 일본 자민당 마츠쿠라 겐조(松村謙三)와의 회담에서 일본업체들이 중국과 각서 무역(memorandum trade)을 추진하는데 관련하여 제시한 중국측의 입장이었다. 엄격하게 말하면 4가지 원칙이 아니고 중국거래에 제한을 받는 업체부류를 가리켰다. 중국 거래에 제한을 받는 업체들의 범위에는 (1) 대만, 한국과 거래하는 일본업체, (2) 대만, 한국에 대규모 투자가 있는 업체, (3) 미국베트남라오스를 침략할 때에 군수품을 제공한 업체, (4) 재일 미국 합자기업과 미국 자회사 등이 들어 있었다.

회담에서 저우언라이는 중일 외교관계가 수립이 안 되어 있는 상황에서 양국은 정상적인 인원교류의 추진이 어려우며 꼭 추진이 필요하다면 3개 전제조건을 지켜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이는 (1) 일본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해야 한다. (2) 대만과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 (3) 미제국주의를 추종하여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14]

각주[편집]

  1. 1.0 1.1 1boon, 〈들어는 봤나 ‘새나라 자동차’, 그때 그 시절 자동차 이야기〉, 《카카오》, 2018-06-12
  2. 한국지엠〉, 《위키백과》
  3. 머니그라운드, 〈대우건설 이어 재계 순위 13위 올랐던 기업이 4년 만에 부도난 이유〉, 《뉴스트림》, 2020-09-10
  4. 4.0 4.1 신진자동차〉, 《나무위키》
  5. 부음 김창원 전 신진그룹회장 별세 향년 79세〉, 《한경닷컴》, 1996-05-03
  6. 국제연합한국재건단(國際聯合韓國再建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7. 한국기계공업〉, 《Encyves Wiki》
  8. 신원개발회사발족〉, 《매일경제 뉴스》, 1969-09-16
  9. 박카수와빵, 〈GM대우 와 쌍용자동차의 전신인 신진 자동차〉, 《네이버 블로그》, 2020-05-06
  10. 한국지엠〉, 《위키백과》
  11. 한국 최초의 SUV, 코란도를 돌아보다〉, 《모토야》
  12. 쌍용자동차〉, 《나무위키》
  13. 율산그룹〉, 《나무위키》
  14. 翟新, 〈周恩来和松村谦三的五次访华〉, 《理论中国网》, 2016-12-12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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