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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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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공화국 국기

남아프리카공화국(Republic of South Africa)은 남아프리카에 있는 나라이다.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에 자리한 나라이다. 줄여서 남아공이라고 부른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아프리카 남부 해안선 2,798킬로미터를 점하고 있으며, 남대서양인도양에 동시에 국경을 걸치고 있다. 북부에는 나미비아, 보츠와나, 짐바브웨가 있으며, 동부와 북동부에는 모잠비크에스와티니가 있고, 내부에 내륙국인 레소토가 자리하고 있다.

개요[편집]

역사[편집]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인류 유적지를 가지고 있을 만큼 인간이 거주한 지 오래된 국가이다. 고고학자들은 가퉁 지방에 있는 동굴들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인간 유골들 중 하나를 발견하였으며, 그 외에도 여러 지방들에서도 거주지 유적, 사냥터 유적, 인간 유골들을 다수 발견한 바 있다. 고고학자들은 이를 토대로 당시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적어도 약 3백만년 전부터는 남아프리카에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호모 에렉투스, 호모 로데시엔시스, 호모 에르가스테르, 호모 하빌리스, 호모 날레디 등이 살고 있었으며, 또한 현생 인류의 직접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도 함께 살고 있었다고 여기고 있다. 현생 인류는 아프리카 남부에 최소한 17만년 이상 살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이후 남아프리카에서는 철제 농기구와 무기를 사용하는 반투족이 점차 퍼져나가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4세기와 5세기 사이에 현재 보츠와나와 짐바브웨 사이에 있는 림포포 강 남부까지 빠르게 이르렀으며, 이후 이 곳에 본래 살고 있던 코이코이족과 산족들을 흡수한 후 끊임없이 남진을 계속하였다. 반투족들 가운데 가장 빠른 속도로 남진한 부족 그룹은 코사족으로, 그레이트피시 강까지 도달하며 철기 문화를 퍼뜨리고 토착 민족들을 흡수해들였다.

포르투갈 탐험대[편집]

유럽인들이 처음으로 남아프리카 지역에 도착했을 즈음, 남아프리카에 거주하고 있던 원주민들은 대부분 약 1,000여 년 전쯤에 아프리카 타 지방에서 이주해온 반투족들이었다. 이들은 크게 코사족과 줄루족으로 나뉘어 살고 있었던 것이다.

1487년에는 포르투갈인 탐험가인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유럽인으로서는 최초로 아프리카 남부에 원정을 떠났다. 12월 4일, 그는 현재 나미비아 지역에 있는 왈비스 만에 상륙하였고, 이후 그는 아프리카 대륙 서안을 따라 남진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1488년 1월 8일 이후에는 격렬한 폭풍에 가로막힌 탓에 해안가에서 바다쪽으로 떠밀려 나와, 아프리카 최남단을 보지 못하고 그대로 아프리카 동부 해안가로 이동하였다. 다만 1488년 5월에 다시 포르투갈로 돌아가기 위하여 길을 가고 있던 도중에는 아프리카 최남단을 발견하는 데에 성공하여, 이 곳에 ‘폭풍의 곷’이라는 이름을 새롭게 붙였다. 디아스의 이야기를 들은 당시 포르투갈의 왕 주앙 2세는 그가 개척한 항로가 부와 황금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확신, 아프리카 최남단의 이름을 ‘희망봉’이라고 다시 이름붙였다.

네덜란드 식민화[편집]

17세기 초 즈음에 포르투갈의 해상력이 점차 약화되어가기 시작하자, 그 대신 영국과 네덜란드의 상인들이 서로를 제치고 인도와의 향신료 거래를 독점하기 위하여 경쟁을 벌였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1601년부터 남아프리카 지역에 새로운 무역 기지를 건설하기 위하여 조사 작업을 벌이기는 하였으나, 결국 세인트 헬레나 섬을 새로운 무역 기지로 삼았다. 네덜란드는 한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선박이 희망봉에 몇 달동안 좌초했던 1647년부터 본격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 좌초한 선박의 선원들은 이 곳에서 신선한 물과 고기를 얻어냈고, 워낙 토질도 좋았기에 채소도 길러내어 자급자족할 수 있었는데, 이들이 네덜란드로 구조되어 돌아간 이후 그들은 희망봉의 식민지화 잠재력에 대하여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하였던 것이다.

1652년에 희망봉 항로를 발견한지 대략 150여 년이 지났을 때, 얀 반 리베크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도움을 받아 희망봉에 나중에 케이프타운의 원형이 되는 첫 식민기지를 건설하였다. 당시 식민기지에는 스스로를 ‘자유시민’이라고 부르는, 해외 네덜란드 식민지에 거주하며 동인도회사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다수 모여 살고 있었다. 네덜란드의 상인들은 인도네시아, 마다가스카르, 동아프리카 등의 지역에서 수많은 노예들을 실어왔고, 이때부터 점차 이들간의 혼혈들이 발생하며 남아프리카 지역은 인종적으로 매우 다양한 사회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기독교와 네덜란드어를 자연스레 받아들이며 남아프리카 지역의 새로운 민족으로 점차 자리매김하였다. 네덜란드인들은 점차 남서쪽으로 확장하며, 그 곳에 본래 살고 있던 코사족들과 코사 전쟁을 벌였다. 이들은 그레이트피시 강 근처에 있는 비옥한 목축지를 얻어내기 위하여 서로 싸움을 벌였는데, 이때 최전방지에서 농사를 지으며 새로운 땅을 개척했던 네덜란드계 농부들은 스스로를 ‘보어인’이라고 불렀다. 보어인들은 점차 느슨한 형태의 자경단을 조직하기 시작하였고, 코사족들을 쫒아내기 위하여 인근 코이산 족들과도 연합을 맺었다. 네덜란드와 코사족은 몇 십년 동안 잔인하고 참혹한 전투를 시시때때로 벌였고, 약탈이나 강간이 일어나는 경우도 허다했다.

영국 식민화[편집]

1795년과 1803년에 대영제국은 프랑스 1제국이 아프리카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1795년과 1803년 사이에 케이프타운을 침공하여 점령하였다. 1803년에는 바타비아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잠시나마 다시 네덜란드의 영토로 인정받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은 1806년에 다시 영국령으로 편입되었다. 나폴레옹 전쟁이 영국의 승리로 끝나자, 케이프타운은 공식적인 영국령으로 인정받았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대영제국 공식 영토로 국제적인 공인을 받았다. 1818년 즈음부터는 영국인들이 점차 케이프타운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으며, 대부분이 유럽인 노동자들의 수를 확충하고 코사족들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한 목적으로 정부 차원에서 들여온 자들이었다. 19세기 초반, 줄루족들은 샤카 줄루의 지도 하에 힘을 키우고 영토를 넓혀갔다. 샤카 줄루가 벌인 전쟁으로 인하여 남부 아프리카에서는 부족간의 전쟁이 일어났고, 대략 100만 명에서 200만 명의 원주민들이 죽어 1820년대 아프리카 남부 지역에서는 인구밀도가 대단히 희박해졌을 정도였다. 이후 줄루족에서 파생된 마타벨레족은 음질리카즈 왕 아래에 거대한 제국을 세우기도 했다. 1800년대 초, 영국 당국에 의해 쫒겨난 많은 네덜란드 이민자들, 즉 보어인들은 케이프타운에서 뻗어나오기 시작하여 인근 트란스발, 오렌지 자유국, 나탈 등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세력을 확장해나가며 보어 공화국, 나탈 공화국, 오렌지 자유국, 남아프리카인 공화국 등을 세웠다.

1867년에는 이 곳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었고, 1884년에는 금 광산이 발견되어 엄청난 규모의 경제 발전과 인구 증가가 시작되었다. 이 광물들의 발견으로 남아프리카 지역의 중요성을 깨달은 영국은 이 곳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였고, 이 때문에 원래의 흑인 거주민들과 네덜란드계 보어인들, 그리고 새롭게 이주해들어오는 영국인들 사이에서의 갈등은 점차 커져만 갔다. 1876년 5월 16일에 남아프리카인 공화국의 대통령이었던 토마스 버거스는 인근 흑인 부족들에게 전쟁을 선포하였는데, 이 전쟁에서 남아프리카인 공화국은 흑인들의 맹렬한 공격으로 완패하였으며, 결국 강제로 평화협약에 조인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버거스 대통령은 국내 인기를 완전히 잃었으며, 결국에 1877년 4월 12일에는 영국에게 주권을 양도하였다. 1878년과 1879년에 영국은 원주민들을 상대로 끊임없이 공세를 펼쳤으나 계속 실패하였고, 1879년 11월에 2,000명의 영국 병사들과 보어인들을 동원하고 나서야 이들을 꺾을 수 있었다. 1879년에 일어난 줄루 전쟁은 영국과 줄루 왕국 사이에서 일어난 대격돌이었다. 캐나다 지역에서 카나본 경이 미국 인디언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자, 영국 정부는 이같은 전술을 비슷하게 잘 활용하면 줄루족들도 꺾을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헨리 바틀 경을 보내 줄루족의 공격을 명령하였는데, 이 전쟁에서 줄루족은 이산들와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는 등 용맹을 떨쳤으나 결국 영국군의 무기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패배하고 말았다.

제2차 보어전쟁[편집]

케이프타운에서 쫒겨난 네덜란드계 백인들이 세운 보어 공화국들은 1차 보어전쟁에서는 지역 지형에 기반한 게릴라 전법을 잘 활용하여 성공적으로 영국군을 막아내었으나, 2차 보어전쟁에서 영국군이 압도적인 병력과 더 정예병들을 이끌고 돌아오자 결국 엄청난 피해를 내고 영국에 점령당했다. 이때 27,000여 명에 달하는 보어인 여성들과 어린아이들이 영국 강제수용소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립[편집]

보어 전쟁이 끝난 이후, 남아프리카 지역에 살고 있던 백인들은 점차 반영국 정책을 펴면서 영국으로부터의 자치와 독립을 요구하였다. 이 시기에 인종차별은 사회적으로 만연하였으나, 1879년의 원주민 거주법령 등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정부 법령으로까지 제정되어 있지는 않았다. 2차 보어전쟁이 끝나고 약 8년 후, 영국 의회는 1909년 5월 31일에 남아프리카 연방을 만들어 남아프리카 지역에 더 큰 자율성을 부여하였으며, 트란스발, 나탈, 케이프타운, 오렌지 자유국을 모두 남아프리카 연방에 포함시켰다. 이들 지역은 각각 트란스발주, 나탈주, 케이프주, 오렌지 자유국주가 되었다.

1913년에 제정된 원주민 토지법은 흑인들의 토지 소유권을 크게 제한하였고, 흑인들이 소유한 토지의 비율은 전체 국토의 7% 밖에 되지 않았다. 또한 혼혈인들이 소유한 토지들도 크게 줄었고, 이 모든 토지들은 이후 영국 등에서 이주해온 백인들의 차지로 돌아갔다. 1931년에 남아프리카 연방은 영국 본토로부터 완전한 자치를 허가받았고, 영국 정부는 더 이상 남아프리카에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1934년에는 남아프리카당과 국민당이 합쳐져 연합당을 결성하였으며, 이들은 아프리카 혼혈들과 백인들 사이의 타협점을 찾고자 했다. 1939년에는 남아프리카 연방이 영국의 동맹으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며 영국의 편에서 싸우는 것에 대한 말이 많던 연합당에서 내분이 일어났고, 당도 결국은 쪼개졌고 국민당은 연합당에서 분리되어 나왔다.

1948년에 국민당은 선거로 권력을 장악하였다. 국민당은 네덜란드와 영국의 식민기부터 시작된 인종차별정책을 강화하였으며, 모든 국민들을 백인, 흑인, 아시아계 3분류로 나누어 각각의 권리와 자유를 엄격히 제한하였다. 전 국민의 20%도 안되는 백인들은 압도적 다수의 흑인들을 지배하였으며, 후에 ‘아파르트헤이트’라 불리는 거대한 인종차별정책이 사회 전반적으로 시행되었다. 당시 남아프리카에 살던 백인 상류층들은 아프리카 최상위 삶의 질을 영유하였으며, 거의 제1세계에 맞먹는 경제 소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하류층인 흑인들은 교육, 소득, 주거, 복지 등 모든 분야에서 차별받았으며, 백인들과 비교했을 때도 훨씬 더 비참한 삶을 살았다.

공화국 수립[편집]

1961년 백인들만의 국민 투표에 의해 개헌이 되어 영국 여왕의 통치를 벗어나 대통령을 세우고 공화국이 되었다. 당시 대통령은 상징적인 지위였고 총리에게 실질적 권한이 있었으나 1983년 다시 한번 개헌이 되어 총리직을 철폐하고 대통령이 모든 권한을 갖게되었다. 1961년 공화국 수립시 여타 영 연방 국가들의 반발로 영 연방에서 탈퇴되었다가 1994년에 다시 복귀했다.

핵무기 개발과 포기[편집]

1960년대 이후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1970년대 들어서는 이웃의 앙골라, 모잠비크와 적대관계가 되자(앙골라는 나미비아 독립운동을, 모잠비크는 아프리카 민족회의를 지원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난국을 타개할 목적으로 핵무기 개발에 착수, 1980년대 말까지 총 6기의 핵무기를 개발했다. 다만 개발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도중에도 추가 핵무기 생산계획이 대통령에 의해 취소되는 등 내부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었으며, 1989년 당선된 클레르크 정권은 핵확산금지조약 가입과 핵무기 폐기를 추진, 1991년까지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보유한 모든 핵무기를 폐기했다.

국제사회의 제재[편집]

세계적으로 악명높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으로 인해서 국제사회의 제재 및 통제를 받아왔으며 결국 유엔으로부터 1945년 가입 이래 강제축출되고 지위권마저 박탈되어서 한동안 안보리이사회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넬슨 만델라 정부가 출범하여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폐지되면서 유엔에 재가입되어서 복권되었고 안보리이사회에서도 다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비정치기구인 국제 올림픽 위원회와 국제축구연맹으로부터도 이러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여파를 주게되어서 1960년 로마 하계올림픽을 마지막으로 그 이후 대회부터 참가가 정지되었으며 1992년 바르셀로나 하계올림픽부터 참가지위를 회복하여 다시 참가하였고 월드컵에서도 아프리카 지역예선에 출전이 제한되었다가 지위를 회복하여 다시 출전하게 되었다.

정권 이양[편집]

1990년대에 들어서 국내외 여론의 압박에 못이긴 국민당정권은 인종차별정책폐기를 선언하고 1990년 상징적으로 흑인 운동가 넬슨 만델라를 석방하여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흑인계의 정치단체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로의 정권이양의 발판을 마련했다. 1994년 남아공사상 첫 보통선거가 치러지고 아프리카민족회의가 집권하여 첫 흑인대통령으로 넬슨 만델라[1]가 선출됐다.

지리[편집]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국토의 대부분이 고원으로 되어 있다. 대서양과 인도양 두 대양에 걸친 2500킬로미터가 넘는 해안선을 가지고 있다.

오렌지 자유국주와 나탈 경계에는 드라켄즈버그 산맥(최고봉 타바나 은틀레니아는 표고 3,482미터)이 있다. 케이프주의 내륙 대지의 남쪽은 해안선과 병행해서 달리는 표고 2,000∼2,700m의 산맥이 있다. 해안 지방과 하천 유역은 농업에 적합하다. 남아프리카 최대의 오렌지 강이 국토의 중앙을 횡단하여 대서양으로 흘러들고 있으며, 그밖에 림포포 강, 발 강 등이 있다.

기후[편집]

기후대는 전체적으로 내륙 지방은 반건조 기후이지만, 지역별로 변화가 커서, 동쪽 지대는 온난 습윤 기후와 나미비아 부근의 칼라하리 사막으로부터 모잠비크와의 국경 부근의 아열대 기후, 남서쪽 해안 지대는 지중해성 기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남반구에 위치하고 있어 4계절이 대한민국과 반대이며, 습한 지역보다는 건조한 지역이 많다. 과도한 목장으로 인한 사막화가 진행 중이다. 남서부는 겨울에 비가 많은 지중해성 기후, 북동부는 아열대성 기후이다. 트란스발의 고저에는 겨울에 서리가 내리며 여름에는 적당한 양의 비가 내린다. 강우량은 서에서 동으로 갈수록 많아지며 여름 6개월 동안에 집중된다.

인구[편집]

나이지리아의 인구는 2016년 까지 55,653,654명이다. 본래 이 지역에 살던 원주민은 반투족과 호텐토트 족 그리고 부시먼 족이었으나, 호텐토트 족과 부시먼 족은 반투 니그로 족과 유럽인에게 쫓겨 칼라하리 사막 주변으로 옮겨 갔고, 지금은 주로 보어 족과 영국계의 백인이 거주한다. 백인은 전체 인구의 약 20%를 차지하고 있지만 정치·경제적인 실권을 쥐고 있으며, 아파르트헤이트[2]가 철폐되기 이전에는 흑인에 대해서는 철저한 인종 차별 정책을 사용했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인구 대부분이 스스로를 아프리카 흑인이라고 밝혔지만, 이는 문화상으로나 언어상으로나 균일한 집단이 아니다. 주요 민족은 줄루족, 코사족, 바소토족(남 소토), 바페디족(북 소토), 벤다족, 츠와나족, 총가족, 스와지족, 은데벨레족 등이다. 줄루족, 코사족, 바페디족, 벤다족 등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만 있다.

다른 집단은 거주지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이웃 나라와 겹친다. 바소토족은 레소토의 주요 민족이다. 츠와나족은 보츠와나의 다수 민족, 스와지족은 에스와티니의 다수 민족이다. 은데벨레족은 짐바브웨의 마테벨렐랜드에도 사는데, 거기서의 민족 명칭은 ‘마테벨레’이다. 하지만 이들은 사실 샤카의 탄압을 빗겨가기 위해 그곳으로 떠나 정착한 줄루족의 후예로 줄루어를 쓴다. 총가족은 모잠비크 남부에도 거주하는데, 거기서는 샹간족으로 알려져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중심으로 아프리카 남부에 많이 거주하는 네덜란드계 백인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 인구 중 60%를 차지하며 남아프리카의 실권을 잡고 있다. 이들을 보어인이라고 하며, 이들 백인은 대부분 네덜란드인, 독일인, 프랑스의 위그노, 영국인, 아일랜드인 등 식민 이주자의 후손이다. 언어상으로는 아프리칸스어를 사용하는 집단과 영어를 사용하는 집단으로 크게 나뉜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이민해 온 소수 집단은 다른 언어를 쓰기도 한다. 백인 인구는 낮은 출산율과 국외 이민으로 줄어들고 있다.

컬러드(Coloured, 유색인)란 명칭은 동아프리카와 중앙아프리카에서 들여온 노예, 당시 희망봉 주변에 살던 원주민인 코이산족, 원주민인 아프리카 흑인, 네덜란드인/아프리카너인과 영국인을 비롯한 백인, 자바인, 말레이인, 인도인, 마다가스카르인, 그 외 포르투갈인과 버마인을 비롯한 여러 유럽·아시아인 등 다양한 집단이 혼혈된 후손을 이르는데,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대부분 아프리칸스어를 쓴다. 코이산족이라 불리는 이들은 피부색이 옅고 키가 작다는 데서 함께 묶어서 다루는 두 집단을 함께 일컫는다. 이들은 유럽인이 ‘호텐토트’라 부른 농경인 코이코이족과 수렵 채집인 부시먼이다. 또 더 최근에 들어온 유색인 집단도 있는데, 옛 로디지아(현 짐바브웨)와 나미비아에서 들어온 유색인과 인도와 버마에서 인도와 버마의 독립 이후 희망봉을 찾아온 영국인-인도인, 영국인-버마인 혼혈인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시아인은 대부분 인도계이다. 상당수는 19세기에 당시 나탈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동부 해안의 사탕수수 농장에 일하러 온 계약 노동자이다. 약 10만 명쯤 되는 화교도 살고 있다.

언어[편집]

영어를 비롯하여 북소토어, 벤다어, 소토어, 스와티어, 아프리칸스어, 남은데벨레어, 줄루어, 총가어, 츠와나어, 코사어 등 총 11개의 공용어가 있다. 공용어가 아닌 언어를 모어로 쓰는 인구는 전체 인구의 2% 이하이다. 대부분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람들은 다중언어 구사자들이다. 1910년부터 1925년까지는 영어와 네덜란드어가 공용어였으며, 1925년에는 아프리칸스어[3]가 공용어로 추가됐고 일상 생활에서는 사용자가 크게 줄어든 네덜란드어를 대체했다. 1984년에는 네덜란드어가 공용어에서 빠져 1994년까지는 영어와 아프리칸스어 두 언어가 공용어였다.

1994년부터 아프리카 민족회의가 집권한 뒤로 영어가 정부에서 주요 언어로 쓰이고 있으나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람들은 어떤 목적으로든 토착어 사용에 다소간 자부심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상업에서는 영어와 함께 아프리칸스어가 주로 쓰이며 두 언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화자가 가장 많다.

언어학적으로 봤을 때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공용어는 두 개의 서게르만어군 언어와 아홉 개의 반투어군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반투어군 가운데 남은데벨레어와 줄루어, 코사어는 응구니어에 속하고, 북소토어와 소토어, 츠와나어는 소토츠와나어에 속하며 총가어는 츠와롱가어에 속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지도[편집]

남아프리카공화국 주변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넬슨 만델라〉, 《나무위키》
  2. 아파르트헤이트〉, 《나무위키》
  3. 아프리칸스어〉,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남아프리카 같이 보기[편집]

남아프리카 국가
남아프리카 도시
남아프리카 섬
남아프리카 바다
남아프리카 문화
남아프리카 주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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