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남한산성

해시넷
이동: 둘러보기, 검색
남한산성(南漢山城) 성벽
조선시대에 그린 지도

남한산성(南漢山城)은 대한민국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에 있는 남한산을 중심으로 하는 산성이며 경기도의 도립공원이다. 광주시에 거의 전부가 있지만, 성남시와 하남시에도 영역을 뻗으므로 3개 지자체에 걸친 성곽이다. 성남 쪽에서 들어가는 게 접근성이 좋기에 남한산성의 극히 일부만 걸친 성남시에서도 남한산성을 많이 홍보하곤 한다.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으며, 경기도에서 도립공원으로 관리한다.

삼국시대부터 있었고 조선 인조 때 손을 보았는데, 해발 497m인 청량산(淸凉山)을 서쪽 끝으로, 해발 514m 벌 봉을 동쪽 끝으로 하여 긴 장방형 돌로 쌓았다. 서쪽은 경사가 가파르고 높아서 험난하며, 다른 쪽은 능선이 긴 반면, 성안은 낮고 평평한 분지 형상이다. 북한산성과 함께 한양을 지키는 2대 산성이었다.

개요[편집]

과거 한양을 지키던 4대 요새 중 하나인 남한산성을 품은, 남한산성도립공원이 있다. 북쪽의 개성, 남쪽의 수원, 서쪽의 강화, 동쪽의 광주였다. 동쪽의 광주에는 남한산성이 있었다.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24km, 성남시에서 북동쪽으로 6km 정도 떨어져 있는 남한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길이는 총 12.4km(본성 8.9km, 외성 3.2km, 신남산성 0.2km), 높이는 7.3m이다. 원래 2천여년 전,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백제의 시조 온조의 왕성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한산주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기록도 있다. 그 옛터를 활용하여 후대에도 여러번 고쳐 쌓다가, 조선조 광해군 때(1621) 본격적으로 축성하였다 한다. 석축으로 쌓은 남한산성의 둘레는 약 12km이다. 자연석을 써 큰돌을 아래로, 작은 돌을 위로 쌓았다. 동서남북에 각각 4개의 문과 문루, 16개의 암문을 내었으며 동서남북 4곳에 장대가 있었다. 성 안에는 수어청을 두고 관아과 창고, 행궁을 건립했다. 유사시에 거처할 행궁은 상궐 73칸, 하궐 154칸, 좌전 26칸으로, 모두 252칸을 지었다. 80개의 우물, 45개의 샘을 만들고 광주읍의 행정처도 산성 안으로 옮겼다. 이쯤되면 남한산성의 중요성과 성안이 유치 가능 인구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산성이 축조되고 처음으로 시행(인조 17년, 1639)된 기동 훈련에 참가한 인원만 해도 12,700명이었다. 그러나 지금 성내에 남아 있는 건물은 불과 몇 안 된다. 동.남문과 서장대, 현절사, 연무관, 장경사, 지수당, 영월정, 침괘정, 숭렬전 이서 장군사당, 보, 루, 돈대 등이 남아있다. 그 중 4대문과 수어장대, 서문 중간쯤의 일부 성곽은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남한산성은 사적 제 57호와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역사[편집]

세운 시기와 주체에 대해선 2가지 주장이 엇갈린다. 백제한성을 수도로 삼던 때 세웠다는 것, 다른 하나는 신라가 쌓았다고 하는 주장성(晝長城)이라는 의견이다. 백제 때 쌓은 성이란 주장은 이미 조선 초기부터 꾸준히 나왔다. 한강 유역에 도읍을 정한 백제는 내 · 외 여건 때문에 하북위례성-하남위례성-한산-한성 등 여러 차례 천도를 단행하였다. 남한산성이 전략상 요충지이기 때문에, 조선 시대 사람들은 백제 왕도 중 하나이리라 생각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餘地勝覽)》 · 《대동야승(大東野乘)》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여지도서(輿地圖書)》 · 《대동지지(大東地志)》 등, 대부분 조선 시대 책들은 백제 고성이라고 적었다. 다만 발굴조사 결과 신라 계통 유물은 나왔지만 백제 계통 유물이 마땅히 발견되지 않는 것은 약점이다.

주장성이란 주장은 《삼국사기》에 근거한 것이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직후 당나라와 맞붙은 나당전쟁이 한창 벌어지던 문무왕 12년(672), 만에 하나 당나라 군대를 임진강 선에서 막지 못할 경우, 바로 다음 방어선으로 활용하고자 남한산 주위에 둘레 4,360보 규모로 성을 쌓았는데, 그 이름이 주장성(晝長城)이었다. 남한산성이 신라 주장성이라는 설 역시 《세종실록지리지》 등 옛 자료에서 언급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최근 수행된 남한산성 행궁지 기단과 그 주변 지역 발굴조사 결과 신라계 유물이 출토됨으로써 남한산성은 신라 주장성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 후 임진왜란 중인 선조 28년(1595) 남한산성 자리에 다시 성을 쌓았고, 광해군 13(1621)에 개수했다. 인조 2년(1624)에는 인조가 총융사 이서에게 명하여 다시 개축했다.

정묘호란 이후 후금과 강화를 맺고는 재침에 대비하여 개조되었다. 개조 완료 후 광주목 읍치(邑治)가 성내로 이전되었으며 다시 광주부로 승격되었다. 이는 기본인 수도 방어 목적 외에도 행정 중심지이자 유사시 임시수도로서 기능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조선 시대에는 광주성이라고도 불리었다.

주요한 전투로는 병자호란에서 인조가 숭덕제의 군대를 상대로 벌인 농성 전이었다. 병자호란 때 결국 함락되었다는 점 때문에 입지가 요새로서 탈락이고 심지어 평지성과 다를 것이 없다는 선입견이 대중에게 널리 퍼졌다. 막상 가보면 산세는 지금도 험준하고, 급히 도망쳐 들어간 데다가 방산비리까지 겹쳐 물자도, 병력도 부족한 상황에서 막강한 청군의 서양식 화포에 얻어맞으면서도 한 달 이상을 버텨냈음 자체가 방어능력을 입증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밑에서 남한산성을 보면 청나라군이 물리적으로 함락하지 못한 이유가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공방전 40여일 동안 청군은 수차례 대규모 공격에도 불구하고 돌파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성 내부 물자가 고갈될 때까지 포위를 풀지 않으면서 서서히 조선군을 조였다. 결국은 식량이 다 떨어지고 강화도가 함락된 탓에 항복했다.

병자호란 이후 피비린내 나는 처형장이 되어버렸다. 특히 천주교인들이 순교한 장소인데, 신해 박해 때부터 천주교인들이 갇히기 시작했고 신유박해의 한덕운을 시작으로, 1839년 기해박해에는 김덕심, 김성우 형제 등이 순교했다. 제일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건 1866년 병인박해 때이다. 정은, 그의 종손 정양묵, 그리고 기해박해에 순교한 김성우의 모든 가족이 체포당해 순교했다. 현재 알 수 있는 마지막 순교자는 이치재다.

이후에도 군사상 요충지로 광주 군청이 안에 있었으나, 항일의병으로 산성과 행궁 내 군기 고와 수호사찰을 불태우고 방화하여 대부분 건축물이 사라졌다.

1917년에 군청이 경안으로 이전한 뒤로는 서서히 쇠락했고, 방화로 터만 남아 있던 남한산성 행궁도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산성 일부와 함께 완전히 매몰됨에 따라 소실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정말 완벽하게 매몰되어 유구 상태가 굉장히 훌륭했다. 이를 토대로 1975년부터 성벽을 복원하기 시작했고, 행궁 복원은 2002년부터 시작되어 2014년 마무리되었다.

주요 문화유적[편집]

좌익문

남한산성의 4성문[편집]

동문(좌익문)[편집]

산성의 남동쪽에 있는 문이다. 좌익 문이라고도 부르는 이유는 왕이 행궁터를 중심으로 남쪽을 보고 나라를 다스리기 때문에 동쪽이 왼쪽이 되어 그렇다고 한다. 남문과 함께 사용빈도가 가장 높은 문이다. 동문은 일반 벽돌에 비교해 덜 가공된 약 2배 정도 크기의 것을 사용하여 쌓았다. 다른 문에 비해 낮은 지대에 축조했기 때문에 성문을 지나는 길에 계단을 만들었으며,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물자의 수송은 수구 문 남쪽에 있는 11 암문이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현재 이 문은 보수공사로 인해 헐려있다. 남한산성 4대문 중에서 유일하게 도로 때문에 한쪽 성벽이 끊겨 있다.

서문(우익문)[편집]

우익문

산성 동쪽 모서리 부분의 450m 지점에 있다. 동문이 좌익 문이므로 서문은 우익 문이라고 부른다. 경사가 급하여 물자를 이송하기는 어려웠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병자호란 때 성문을 넘으려는 청군과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그리고 인조가 소현세자와 함께 서문을 통해 청나라 진영으로 가서 화의를 맺고 항복을 하기도 했다.

서문 인근에 전망대가 있는데, 위례신도시와 롯데월드타워, 한강, 그리고 남산 서울타워를 모두 조망할 수 있다. 특히 롯데월드타워와 한강, N서울타워와 남한산성 서문이 일렬로 정렬되어 있어 옥수동 달맞이 공원, 응봉산 팔각정과 함께 서울의 야경 포인트로 유명하다.

남문(지화문)[편집]

지화문

성의 서남쪽 곡저부의 해발 370m 지점에 있다. 왕이 다니는 문에 걸맞게 4 대문중에서 가장 크고 웅장하다. 인조도 병자호란으로 남한산성으로 들어올 때 이 문을 통해서 들어왔다. 지금의 문루는 1976년 초석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새로 보충하여 복원하고 현판을 단 것이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동문과 비해 비교적 그 규모가 크다. 장초석을 사용하여 기둥 높이는 낮지만, 건물의 전체 높이는 약간 더 높다.

북문(전승문)[편집]

전승문

성곽 북쪽의 해발 365m 지점에 있으며, 북문을 나서면 계곡으로 난 길을 따라 상사 창리로 이르게 되는데 조선 시대에 수운으로 옮긴 세곡을 등짐으로 이 문을 통해 산성 안으로 운반했다. 전승문이라는 명칭은 1779년(정조 3)에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고 지어진 이름이다.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인데 현재 편액은 걸려있지 않다. 무지개 모양의 홍예 식 문이며, 홍예기 석 위에 홍예 돌 10개를 쌓아 구축하였다.

여담으로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항전할 때 인조와 김자점의 독촉으로 이시백이 조선군 300명을 이끌고 남한산성 북문으로 나와 싸우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청나라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군사 300명이 모두 전멸한 일을 기려 패하지 말고 모두 이기자 해서 북문의 이름이 전승문이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남한산성 행궁[편집]

남한산성 행궁 전경

광주 행궁, 남한산성 행궁이라 불리는 행궁은 1626년 6월 총융사 이서의 계책에 따라 완성된 것이다. 조선 시대의 남한행궁은 유사시 왕이 피난할 수 있도록 준비된 예비 궁궐이었다. 남한산성의 행궁에 대한 발굴조사가 1999년부터 한국토지공사 박물관에 의해서 시행되었다. 2007년까지 총 8차에 걸친 조사에서, 신라 시대 대형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통일신라 시대 대형 건물터는 동서 약 18m, 남북 53.5m 총 290평의 매우 큰 규모로, 안학궁의 외전이 정면 11칸 49m, 측면 4칸 16.3m로 약 242평이라는 것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굉장한 규모임을 알 수가 있다. 건물의 규모로 인해 궁궐로 쓰였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으나, 두꺼운 벽과 방충을 위한 시설이 갖추어진 건물의 구조를 볼 때 대체로 창고로 쓰였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같이 발견된 기와는 크기가 매우 큰데 무게가 보통의 기와의 4배가 넘어 암기와는 한 장이 약 19kg이고, 숫키와는 약 15kg이나 된다. 이것은 조선 시대의 중기와가 약 4 kg, 3.3kg인 것에 비하면 상당한 무게이다.

수어장대[편집]

수어장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였다가, 2021년 12월 27일에 보물로 승격 지정받았다. 남한산성에 구축된 5장대 중 하나이다. 5장대 중 동장대를 제외한 4장대는 17세기 말엽까지는 단층 누각 건물의 형태로 남아 있었지만, 18세기 중엽에는 5장대 모두 파괴되어 터만 남아 있었다. 그 후 18세기 중후반에는 서장대와 남장 대를 2층 누각 형태로 건립하여 19세기 후반까지 남아 있었지만, 현재는 서장대인 수어장대만이 남아 있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서쪽 주봉인 청량산 정상에 세워져 있으며 지휘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세워진 누각이다. 성내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다. 왼쪽에는 청량당이 있으며, 뒤편에는 우물이 있어 장대에서 근무하는 장졸에게 물을 공급했다고 한다.

숭렬전[편집]

숭렬전 전경

백제의 시조 온조왕의 사당으로, 팔 전 중의 하나이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남한산성에 피난 갔을 때, 꿈에 웬 사람이 나타나 "적이 높은 사다리를 타고 북쪽 성벽의 봉암(蜂巖)을 오르는데 어째서 막지 않는가?"라고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놀란 인조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그는 "나는 성주 온조대왕이다."라고 하였다. 곧 잠에서 깬 인조는 온조왕에게 들은 대로 즉시 성의 북쪽을 살펴보게 했다. 그랬더니 과연 청군이 봉암을 오르고 있어 그들을 물리쳤다. 이렇게 온조왕의 은혜를 입은 인조는 병자호란이 끝나 한성으로 돌아간 후 남한산성에 온조왕의 사당을 짓고 봄, 가을로 정성껏 제사를 올렸다. 이는 온조왕사(溫祚王祠)라 불렸다. 온조왕사는 온조왕 묘, 백제 시조 묘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참고로 인조는 이괄의 난 때 공산성으로 피난 간 적도 있는데 공산성은 백제의 2번째 수도인 웅진성이었던 곳이다.

1779년 8월, 정조는 남한산성에 방문한다. 정조는 봉암에 올랐다가 당시 수어사였던 서명응에게 병자호란 당시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서명응의 동생 서명선이 인조의 꿈에 온조왕이 나타났던 이야기를 하였다. 정조가 남한산성에 온조왕의 흔적이 남아 있냐고 묻자 서명응은 남한산성 행궁 뒤에 있는 청량산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였다. 청량산은 온조왕이 첫수도 하남위례성을 만든 뒤 방어를 위하여 성을 쌓았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그때부터 정조는 온조왕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졌고 온조왕사에 대해서도 더욱 격식을 갖추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이후 1795년 9월, 광주 판관 이시원이, 고구려의 사당인 숭령전이나 고려의 사당인 숭의전도 모두 이름이 있는데 유독 백제의 사당만 이름이 없으니 편액을 하사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정조는 숭렬전(崇烈殿)이란 편액을 하사하면서 온조왕에 대한 제문을 본인이 직접 작성하여 내려보냈다. 그리고 매년 음력 9월 5일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이렇게 온조왕사는 정식으로 국가가 제사를 받드는 사당인 숭렬전이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도 설화가 있다. 제문을 준비하고 있던 정조의 꿈에도 온조왕이 나타난 것이다. 꿈에 나타난 온조왕은 정조의 인품과 그의 업적들을 칭찬하면서 혼자서는 쓸쓸하니 다른 국왕들의 사당처럼 명망 있는 신하를 같이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잠에서 깬 정조는 온조왕의 청을 받아들여 남한산성 축성에 공로가 컸던 총융사 이서를 숭렬전에 같이 모시게 하였다. 온조왕과 이서는 무려 1,600여 년의 시간 차이를 가진 인물들로 이렇게 숭렬전은 이 두 사람이 함께 모셔진 독특한 사당이 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남한산성이 온조왕의 도읍지로 알려져 있었는데 실제 하남위례성의 유적으로 유력한 풍납토성, 몽촌토성과 남한산성 간 거리가 멀지 않기 때문에 백제 초기 수도에 대한 대략적인 위치 개념은 조선 시대에도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청량당[편집]

청량당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이다. '맑고 시원하다'라는 뜻을 가진 청량이라는 산봉우리에 세워진 건물이다. 산성을 쌓을 당시 동남쪽 책임을 맡았던 이회(李晦)가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수어장대에서 참수형을 당한 후, 그의 억울함이 밝혀지자 그 혼백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이회 장군의 영정뿐만 아니라 서북쪽 책임자인 벽암(碧岩) 각성 대사와 이회 장군의 부인 송씨(宋氏)의 영정도 함께 모셔져 있다. 이회 장군, 벽암 대사, 이회 장군 부인의 초상화는 한국전쟁 때 없어진 것을 다시 봉안한 것이다.

현절사[편집]

현절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호이다. 병자호란 후 심양에 끌려가 충절을 지키다가 그곳에서 비운을 맞은 삼학사(三學士)인 오달제, 윤집, 홍익한의 영혼을 모신 사당이다. 이들은 소현세자, 봉림대군과 함께 청에 인질로 끌려가 충정을 지키다가 결국 1638년(인조 15)에 심양의 서문에서 처형되었다. 후에 좌의정 김상헌, 이조참판 정온의 위패도 함께 배향되었다.

1688년(숙종 14)에 광주유수 이세백의 주도로 세워졌으며, 1693년 봄에 현절사라는 이름으로 사액하였다. 사당은 본당과 좌우에 있는 부속건물을 합하여 3동으로 구성되었는데, 산등성이에 축조되었기 때문에 본당과 부속건물이 단을 이루고 있고, 단 위에는 담을 둘러 그 중앙에 솟을대문을 내었다. 지붕 양식은 홑처마를 두른 맞배지붕이며 이출목 이익공의 주심포 형식이다. 본당 좌우의 방풍 막은 아래를 직선으로 자르고 있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크기이며 정면 각 칸에는 4쪽의 여닫이 격자문을 달았다. 솟을대문이 2개 있는데 밖의 것은 사당을 출입할 때, 또 하나는 본당과 부속건물을 구분하는 담의 중앙에 위치하여 본당을 출입할 때 사용했다. 대문은 여닫이 2쪽 문으로 2개의 대문 모두 태극무늬가 그려져 있다.

부속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인데 본당과 같이 맞배지붕과 홑처마 양식의 건물이다. 2동의 건물이 모두 중앙의 1칸에는 우물마루가 배치되고 좌우에는 2쪽 여닫이 격자문을 한 방이 있고, 자연석을 주춧돌로 한 단아하고 소박한 인상을 주는 건물이다.

침쾌정[편집]

침쾌정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호이다. 건립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무기 제작을 관장했던 사무소로 추정된다. 정확한 명칭은 "창을 베개 삼는다"는 뜻인 침과정으로, 현재는 침괘정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연무관[편집]

연무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호였다가, 보물로 승격되었다. 연무란 무예를 펼쳐 보인다는 뜻으로 군사들의 무술을 연마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이곳에서 군사훈련과 무술 시합을 열어 뛰어난 인재를 뽑아 중앙으로 보냈으며, 맞은 편에 과녁이 있어 활쏘기 연습도 이루어졌다. 정조 재위 3년인 1779년 8월에 문무과 과거시험을 이곳에서 거행하고 장사들에게 술과 음식을 베풀었다고 한다. 인근의 활터가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곳이다. 남한산성 순교성지도 있으며, 천주교 수원교구에서 관리하고 있다.

봉암성 & 한봉성[편집]

봉암성 & 한봉성

외성 역할을 한다. 정비가 거의 되어있지 않아 옛 성벽의 정취를 느끼러 오는 사람들이 찾는다. 군데군데 여장이 그대로 남아 있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관광 정보[편집]

탐방로[편집]

  • 1코스 (거리 3.8Km / 소요시간 1시간 20분)

산성로터리 – 북문(0.4km) – 서문(1.1km) – 수어장대(0.6km) – 영춘정(0.3km) – 남문(0.7km) – 산성로터리(0.7km)

  • 2코스 (거리 : 2.9km / 소요시간 : 60분)

산성로터리 – 영월정(0.4km) – 숭렬전(0.2km) – 서문(0.7km) – 수어장대(0.6km) – 산성로터리(0.9km)

  • 3코스 (거리 : 5.7km / 소요시간 : 2시간)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 현절사(0.1km) – 벌봉(1.8km) – 장경사(1.5km) – 망월사(1.1km) – 동문(1.0km) –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 4코스 (거리 : 3.8km / 소요시간 : 1시간 20분)

산성로터리 – 남문(0.7km) – 남장대터(0.6km) – 동문(1.1km) – 지수당(0.5km) – 개원사(0.3km) – 산성로터리(0.6km)

  • 5코스 (거리 : 7.7km / 소요시간 : 3시간 20분)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 동문(0.6km) – 동장대터(1.1km) – 북문(1.6km) – 서문(1.1km) – 수어장대(0.6km) – 영춘정(0.3km) – 남문(0.7km) – 동문(1.7km) –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요금[편집]

남한산성 입장요금

2007년 1월 1일부로 남한산성 입장요금이 폐지되었다.

남한산성행궁 관람요금
어른 (만19세~만64세) 어른 (만19세~만64세) 청소년

(만7세~만18세)

청소년단체 (30인 이상)
2,000원 1,600원 1,000원 800원
남한산성행궁 관람시간
구분 기간 관람시간
하절기 04월 – 10월 10:00~18:00
동절기 11월 – 03월 10:00~17:00

※ 매주 월요일은 휴궁.(공휴일 제외)

※ 관람 종료 30분 전까지 매표 가능

주차장 요금 (후불)
차 종 요 금 월 정기

주차료

이륜차, 1000CC미만 승용차

※ 스파크,레이,모닝 등

평일 1,500원 25,000원
공휴일 2,500원
1000CC이상 승용차,소형 승합차(15인승 이하),

소형화물차(1톤 이하)

평일 3,000원 50,000원
공휴일 5,000원
중․대형 승합차,화물차

(공휴일은 주차 불가)

평일 6,000원
10,000원

※ 20:00~09:00 무료

※ 30분 이내 출차 무료

교통[편집]

  • 주소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남한산성로 731 (우)12700
(지번)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158-1

대중교통[편집]

성남, 광주방면
출발지 유형 노선 소요시간 안내
모란역 버스 52 39분 – 모란역 2,3번 출구 승차 → 남한산성(종점) 하차

– 모란역, 모란시장입구, 풍생중고교 승차 → 남한산성(종점) 하차

모란역 버스 9 64분 – 모란역 2,3번 출구 승차 → 남한산성(종점) 하차

– 모란농협, 모란연세의원 승차 → 남한산성(종점) 하차

을지대학교 버스 9 30분 – 을지대학교 승차 → 남한산성(종점) 하차
광주시청 버스 15-1 53분 – 밀목, 광주시청 앞 승차 → 남한산성(종점) 하차
경기광주역 버스 15-1 58분 – 경기광주역 승차 → 남한산성(종점) 하차
산성역 버스 52, 9 9-1(휴일) 26-43분 – 산성역 승차 → 남한산성(종점) 하차
남한산성역 버스 9 30분 – 상원초교 승차 → 남한산성(종점) 하차
서울방면
출발지 유형 노선 소요시간 안내
잠실역 지하철 + 버스 8호선 19분 – 잠실역 승차 → 산성역 하차
52, 9, 9-1(휴일) 25분 – 산성역 승차 → 남한산성(종점) 하차
서울시청 지하철 + 버스 2호선, 8호선 61분 – 을지로입구역 승차 → 잠실역 환승 → 산성역 하차
52, 9 9-1(휴일) 26-43분 – 산성역 승차 → 남한산성(종점) 하차
사당역 지하철 + 버스 2호선, 8호선 61분 – 사당역 승차 → 잠실역 환승 → 산성역 하차
52, 9 9-1(휴일) 26-43분 – 산성역 승차 → 남한산성(종점) 하차
경기남부방면
출발지 유형 노선 소요시간 안내
안양역 버스 333 63분 – 안양역 승차 → 모란역 2,3번 출구 하차
52, 9 39분-64분 – 모란역 2,3번 출구 승차 → 남한산성(종점) 하차
수원역 버스 2007 75분 – 수원역 승차 → 모란역 2,3번 출구 하차
52, 9 39분-64분 – 모란역 2,3번 출구 승차 → 남한산성(종점) 하차
수원역 지하철 + 버스 분당선 61분 – 수원역 승차 → 모란역 하차
52, 9 39분-64분 – 모란역 2,3번 출구 승차 → 남한산성(종점) 하차
용인시청 지하철 + 버스 에버라인, 분당선 64분 – 시청, 용인대역 승차 → 기흥역 환승 → 모란역 하차
52, 9 39분-64분 – 모란역 2,3번 출구 승차 → 남한산성(종점) 하차

자가용[편집]

출발지 노선 소요시간 안내
경기광주 IC 18분 10.41 km 중부고속도로(13.3km) → 희안대로(2.6km) → 남한산성로(7.2km)
신갈 IC 41분 31.01 km 경부고속도로(12.8km) →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10.3km) → 남한산성로(4.5km)
양재IC 37분 17.43 km 헌릉로(8.1km) → 수정로(0.9km) → 남한산성로(4.5km)
모란역 26분 9.7 km 산성대로(2.2km) → 수정로(2.1km) → 남한산성로(4.5km)
평촌 IC 37분 28.45 km 서울외곽순환도로(20.6km) → 헌릉로(2.5km) → 남한산성로(4.5km)
북수원 IC 51분 31.80 km 과천봉담도시고속화도로(4.9km) →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14.1km) → 수정로(3.8km) → 남한산성로(4.5km)

동영상[편집]

지도[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이 남한산성 문서는 한국관광지에 관한 글로서 검토가 필요합니다. 위키 문서는 누구든지 자유롭게 편집할 수 있습니다. [편집]을 눌러 문서 내용을 검토·수정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