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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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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보물 제850-3호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는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1861년 제작한 한반도지도이며, 지도첩이다. 3건이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2008년에는 대동여지도 목판이 대한민국 보물 제1581호로 지정되었다. 근대적 측량이 이루어지기 전 제작된 한반도의 지도 중 가장 정확한 지도이다. 청구도의 자매편으로 내용의 첨삭이 이루어졌다.

개요[편집]

대동여지도는 '대동(大東)'인 우리나라 전체를 '수레[輿]에 땅을 담듯이' 그린 지도이다. 1861년(철종 12) 김정호(金正浩)가 오랫동안 축적된 지도 제작 기술을 바탕으로 하여 완성한 것으로, 현존하는 전국 지도 중 세로 6.6m, 가로 3.8m로 가장 크다. 「대동여지도」를 전시하기 위해서는 3개 층 이상의 공간이 필요할 정도이다. 그러나 지도는 한 장이 아니라 분첩절첩식(分帖折疊式)으로 제작되어 원하는 일부만 가지고 다니면서 열람할 수 있다.

「대동여지도」는 목판본으로 제작되었으며, 체제·구성·채색·표장(表裝) 등에서 조금씩 차이가 있다. 국내외에 50여 종이 전해지고 있다. 신유년(1861) 간행된 판본이 20여 종이고, 일부는 갑자년(1864, 고종 1) 판본이거나 미상인 경우이다. 또한 필사본도 10여 종 확인된다.

소장처별로 보면, 국내에는 1861년 간행된 보물 850-1호(성신여대 박물관 소장본), 보물 850-2호(서울역사박물관 소장본)와 1864년에 간행된 보물 850-3호(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등을 비롯하여 35종이 있다. 이 중 성신여대 박물관 소장본은 현재 전해지는 판본 중 가장 초기의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국외에는 일본, 미국 등에 20종 정도가 확인된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앞으로 더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한편, 「대동여지도」의 판각에 쓰였던 피나무 목판(보물 1581호)도 12장 남아있다. 크기는 가로 43㎝, 세로 32㎝, 두께 1.5㎝ 내외이다. 이 중 하나는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의 표제(標題)가 한 면에 새겨져 있고, 나머지 11개는 양면에 지도가 조각되어 있다.

조선시대 지도 제작의 흐름[편집]

조선 전기에는 대체로 국가가 주관하여 지도를 제작하였다. 1402년(태종 2) 의정부 관료들이 주도하여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를 만들었고, 1454년(단종 2) 수양대군(首陽大君)은 예조참판 정척(鄭陟)과 강희안(姜希顔) 등의 집현전 관료들을 대동하고 삼각산에 올라가 도성의 지리를 살피고 나서 서울 지도의 초본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리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같은 목판본 지리지(地理志)도 국가에서 편찬한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민간에서도 지도의 제작 및 수요가 늘어났다. 일단 목판본 지도가 증가하면서 일시에 많은 지도 제작이 가능했고, 목판 기술이 향상되면서 「도성삼군문분계지도(都城三軍門分界地圖)」, 「수선전도(首善全圖)」, 「해좌전도(海左全圖)」 등 정교한 지도들이 나올 수 있었다. 더욱이 대축척지도가 만들어지면서 지도의 크기도 커졌다.

군사적 목적으로 그려진 관방지도(關防地圖)나 특정 지역을 그린 성곽지도(城郭地圖)·궁궐도(宮闕圖)·봉수도(烽燧圖) 등 다양한 지도들도 제작되었다.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달에 힘입어 회화식 지도들도 만들어졌고, 휴대용으로 만들어진 수진본(袖珍本) 지도도 증가했다. 전국 혹은 도 단위에서 군현지도집이 제작되는 사례가 많아지면서 지방의 실정을 파악할 수 있는 지역 단위의 지도들도 나왔다.

한편, 18세기 전반 정상기(鄭尙驥)는 지도에 백리척(百里尺)을 사용함으로써 지명·도로 등을 세밀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정상기의 후손들, 즉 아들 정항령(鄭恒齡), 손자 정원림(鄭元霖), 증손자 정수영(鄭遂榮) 등은 대대로 완성도 높은 지도 제작을 위해 매진하였다. 이외에도 신경준(申景濬), 정후조(鄭厚祚) 등의 지도 제작자들이 활약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성과 역시 김정호의 지도 제작에 큰 영향을 끼쳤다.

지도 제작 과정[편집]

김정호는 신분, 생몰연대 등이 분명하지 않을 정도로 개인 이력이 잘 드러나 있지 않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19세기 지리 관련 자료를 많이 확보하고 연구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최한기(崔漢綺)가 지은 「청구도제(靑邱圖題)」에 따르면, '김정호는 20세 무렵부터 지도와 지리서에 대해 연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20대 이후 평생의 연구를 거쳐 『동여도지(東輿圖志)』 , 『여도비지(輿圖備誌)』[최성환(崔惺煥)과 함께 제작], 등의 지리지를 편찬하였다. 이러한 지리지 편찬은 지도 제작과 상호 보완적인 관계라 할 수 있다. 지리지 편찬을 하면서 지도 역시 다수 제작하였다. 그리고 그는 동일 계열의 지도를 여러 번에 걸쳐 편찬한 끝에 마지막으로 「대동여지도」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대동여지도」와 같은 걸작이 나오게 된 데에는 김정호의 선행 작업이 기반이 되었다. 그는 1820년대부터 기존 지도의 장점을 모아 전국 지도를 만들기 시작해서 「청구도(靑邱圖)」를 세 차례 편찬하였다. 참고자료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등의 지리지와 신경준 등의 지도를 주로 활용하였다. 당시 김정호가 가장 주력했던 점은 많은 사람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대축척지도의 제작이었다. 그 결과 지금의 지도책처럼 책장을 넘기며 지도를 열람할 수 있도록 「청구도」를 제작하였다. 각 「청구도」가 동일하지는 않지만, 김정호는 10리 간격으로 거리를 표기하거나 여러 지도 정보를 기호로 표기하는 등의 보완을 해나갔다.

그가 「청구도」를 바탕으로 「대동여지도」라는 새로운 이름의 지도를 만들기 시작한 때는 1850년대 전반기이다. 우선 축척 212,000:1의 「대동여지도」(14책)를 제작하였는데, 이후 몇 차례 수정을 거치며 축척이 다른 「대동여지도」를 만들어 나갔다. 그러다가 축척 166,000:1의 조선 전도 「동여도」(23책)를 만들었고, 1861년(철종 12)에 「동여도」의 내용을 일부 수정한 166,000:1(혹은 160,000:1)의 「대동여지도」(22첩)을 목판본으로 제작하였다. 1864년(고종 1) 또 다시 수정을 거친 「대동여지도」를 간행하였다.

대동여지도의 구성[편집]

대동여지도는 프로토타입 동여도와 마찬가지로 가로 80리, 세로 120리를 한 개의 방안(方眼)으로 하여 한 개 면(面)으로 하고, 2개 면은 한 개 도엽(圖葉)인 목판 한 장에 수용하였다. 그러므로 대동여지도는 전체 지도 도엽은 목판 121매이고, 제책하였을 때의 면수는 213면이다. 그러나 여기에 부록 격인 지도유설·도성도·경조오부도 등이 첨가되었기 때문에 실제 도엽은 126목판 이고, 전체 면수는 227면이다. 전체 크기는 가로 19판, 세로 22층(22첩이라고 표시하기도 한다)이며,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가로 360센티미터, 세로 685센티미터이다. 이는 지도의 대량 보급을 염두에 둔 제작 기법으로, 동서 19판을 연폭으로 남북 22첩을 계속 인접하면 한반도 전체의 지도가 되게끔 하였다. 한편 서울역사박물관 소장본은 21첩인데 이는 다른 간본의 제22첩에 수록된 제주도 부분이 제21첩의 추자도의 서쪽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21첩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한편 한양이, 〈청구도〉에서는 두 면에 걸쳐 있었는데, 〈대동여지도〉에서는 한 면의 중앙 부위에 위치하여 한양을 둘러싼 경계가 모두 수용되었다. 이는 당시의 수도권의 지역적 범위를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대동여지도〉에서는 각 층의 도엽을 동에서 서로 연폭(連幅)으로 길게 잇고 이것을 병풍식으로 접어 모두 22층으로 하는 분첩절루(分帖折壘) 또는 분첩절첩(分帖折帖)의 방법으로 제책하여 지도첩이 되게 하였다. 이때 책의 크기는 가로 20센티미터, 세로 30센티미터로서 당시 서지류의 크기와 비슷하게 만들어 책처럼 보관할 수 있다.

이 지도의 제작에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참고하였으며, 위도 측정에 다소 오차는 있으나 서양 지도학의 영향을 직접 받지 않고 한국의 전통적인 지도학을 대성한 것이다.

목차[편집]

대동여지도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있다.

  • 1-2면: 속표지. 간행연도, 제목, 제작자가 서술되어있다.
  • 3-4면: 지도유설(地圖類說)에서는 지도의 목적과 효용을 기술한다.
  • 5-6면: 전국 팔도 군현 통계
  • 7-8면: 축척을 표시한 방안표(方眼表)
  • 9-10면: 온성을 포함한 함경북도 최북단 및 범례인 지도표(地圖表)
  • 11-12면: 한양과 그 주변을 그린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
  • 13-14면: 한양을 세밀하게 묘사한 도성도(都城圖)
  • 이후: 지도

지도의 표기[편집]

함경도 옆에 표시한 대동여지도의 지도표. (제1첩 10면)

제1첩의 10면에 표기된 '지도표'에서는 지도에 사용된 범례를 적고 있다. 여기서는 총 14개의 항목을 22개의 서로 다른 기호로 표기하였고 채색도 하였는데, 이 때 사용된 색과 채색법은 지도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세계 지도학 통사(The History of Cartography)》에서 〈한국의 지도학(Cartograhpy in Korea)〉 부분을 집필한 미국의 지도학자 개리 레드야드(Gari Ledyard)는 《대동여지도》가 조선의 지도학적 명확성을 향상시켰다고 평가한다.

  • 대동여지도의 1면은 동서 80리, 남북 120리의 영역을 담고 있으며, 지도 전체로는 동서 1,520리, 남북 2,640리이다. 이때 축척은 약 1:216,000이다. 이는 〈청구도〉의 남북 2900리보다 260리의 차이를 보이는데, 〈청구도〉에서 공백 및 여백으로 표시한 부분을 〈대동여지도〉에서는 생략하였기 때문이다.
  • 산줄기는 봉우리와 능선을 따라 이어 그렸다.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끝나는 백두대간을 하나의 줄기로 표기하였다.
  • 도읍은 원으로 표기하고 원 안에 이름을 표기하였다.
  • 주요 도로를 표기하고 10리마다 거리 표시를 하여 도읍간 거리를 알 수 있도록 하였다.
  • 지도표(지도식)을 두었으며, 산천·해도(海島)·영아(營衙)·읍치(邑治)·성지(城池)·진보(鎭堡)·역참(驛站)·창고·목소(牧所)·봉수·능침(陵寢)·방리(坊里)·고현(古縣)·고진보(古鎭堡)·고산성(古山城)·도로 등을 나타냈다.
대동여지도 산.png
이 그림에 대한 정보
산줄기는 굵은 줄로, 높은 산은 위로 솟은 톱날 모양으로 표현했다. 이름난 산이면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예: 한라산 백록담과 그 주변

대동여지도 강 표기.png
이 그림에 대한 정보
배를 타고 수송을 할 수 있는 강이면 푸른 색으로 두껍게, 그렇지 않으면 중간 굵기의 선으로 표시했다.

예: 북한강·남한강·경안천의 합류지점 (지금의 팔당호)

도로
가는 줄을 그리고 십리마다 표시했다.
영아(營衙)와 진보(鎭堡)
영아(營衙)와 진보(鎭堡).png
이 그림에 대한 정보
영아는 군영을, 진보는 전방·해안 등에 배치한 진지를 말한다. 각각 크고 작은 사각형으로 표시하며 성이 있을 때에는 빨간 테두리를 그렸다.

예: 경상좌수영(큰 사각형)과 동래 근처의 진들(작은 사각형)

읍치(邑治)
읍치.png
이 그림에 대한 정보
노란 원으로 표시하고 성이 있을 때에는 빨간 테두리를 그렸다.

예: 녕변 철옹성

성지(城池)
성지(城池).png
이 그림에 대한 정보
성과 해자 등을 말한다. 산성(山城)과 관성(關城)을 구분해서 표시했다.

예: 칠곡 가산산성, 삭주 막령진 주변의 성곽

역참(驛站)
역참.png
이 그림에 대한 정보
노란 원 안에 세로줄을 그렸다.

예: 삼례역

창고(倉庫)
검은 사각형으로 표시하고 성이 있을 때에는 빨간 테두리를 그렸다.
목소(牧所)
나라에서 말을 기르는 곳이다. 빈 사각형 안에 ‘牧’으로 표시했다.
봉수(烽燧)
봉수.png
이 그림에 대한 정보
산 위에 붉은 삼각형으로 표시했다.

예: 최북단인 온성 미전보 주변의 봉수대들

능침(陵寢)
능침.png
이 그림에 대한 정보
왕릉을 말한다. 붉은 원으로 표시했다.

예: 선정릉(위)과 헌인릉(아래)

방리(坊里)
빈 원으로 표시했다.
고현(古縣)
고현.png
이 그림에 대한 정보
검은 원으로 표시하고 성이 있을 땐 붉은 테두리를 그렸다.

예: 경주 옆의 상성

고진보(鎭堡)
고진보.png
이 그림에 대한 정보
검은 삼각형으로 표시하고 성이 있을 땐 원으로 테두리를 그렸다.

예: 안산의 구 초지진 (현종 때 강화도로 옮겼다.)

고산성(古山城)
고산성.png
이 그림에 대한 정보
산 모양 안에 흰 원으로 표시했다.

예: 영춘 옆의 온달산성석굴

지도의 축척[편집]

〈대동여지도〉를 비롯한 김정호가 제작한 지도는 100리를 1척(尺)으로, 10리를 1촌(寸)으로 한 백리척(百里尺) 축척의 지도이다. 그러나 당시의 1촌 1보(步)가 현재의 몇 센티미터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므로 이를 바탕으로 축척을 계산하기는 어렵다.

종래에는 조선 시대의 10리를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4킬로미터로 계산하여 축척을 1:160,000으로 보았다. 그러나 《대동지지》와 《속대전》에서는 "주척(周尺)을 쓰되 6척은 1보이고 360보는 1리이며 3600보는 10리로 된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것을 이용하여 이우형(李祐炯)·성남해(成南海) 등은 축척을 1:216,000으로 보았다. 위의 문장을 확장하면, 1리는 21,600촌이며, 백리척에 맞추어 비교하면 1촌으로 10리, 곧 216,000촌(=3600(보)×6(척)×10(촌))을 나타내게 된다. 이는 곧 이론상의 축척이 1:216,000임을 뜻하며, 실제 축척도 그와 비슷하다.

다른 지도와 비교[편집]

김정호가 제작한 세 지도, 곧 〈대동여지도〉와 〈청구도〉, 〈동여도〉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청구도〉가 필사본이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오류를 막으려고 〈대동여지도〉는 목판본으로 만들어졌다. 이때 〈대동여지도〉의 주기(註記)의 수는 〈청구도〉의 15,485개에서 13,188개로 줄었으며, 이는 총 2,297개 줄어들었다. 다만 몇몇 주기, 곧 하천·누정(樓亭 : 누각)·진보(鎭堡)·포(浦, 항구)·부곡(部曲)·교(橋, 다리)·평주(坪洲)·목장·리(里) 항목은 늘어났다.

〈동여도〉는 현존하는 지도 가운데 가장 자세하며, 또한 이 지도는 〈대동여지도〉를 판각하기에 앞서 제작한 선행 지도이기도 하다. 주기 내용을 비교하면, 산악·하천·방면 항목은 〈동여도〉가 〈대동여지도〉보다 훨씬 많으나, 역원·창(倉)·진보 등의 항목은 두 지도의 기재 내용이 비슷하다. 전체적으로는 〈동여도〉가 총 18,376개로 〈대동여지도〉의 총 13,188개보다 5,548개나 많다.

대동여지도의 특징[편집]

〈대동여지도〉는 한국 고지도를 집대성한 최고의 옛 지도이다. 이 지도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 목판본으로 만들어 필사할 때 생기는 오류를 막고 대량 생산이 가능하게 했다.
  • 지도표(지도식)를 사용하여 지도의 주기 내용을 간결화하고 옛 지도를 근대화했다.
  • 분합이 자유롭게 22첩으로 만들어 상하를 잇대면 도별 지도도 되고 전부 연결하면 전국도가 되도록 제작하여 이용하기 편리하며, 접으면 책 크기로 되어 휴대하기 편하도록 제작하였다.
  • 전통적인 지도 제작법인 배수(裵秀)의 6체(六體)에 따랐으며, 방안도법을 이용하였고, 확대와 축소를 할 때 서양의 과학기술을 가미하여 지도의 정확성을 높였다.

주기 내용이 많아 정보가 풍부하다.

  • 10리마다 점을 찍어 여행할 때 이정을 알기 쉽게 하였다.
  • 정확한 해발고도는 알 수 없지만 대략적인 높낮이 구분은 크고 작음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 배가 뜰 수 없는 하천은 표시하지 않는 등 군사적, 상업적으로 유용한 지도였다.

목판[편집]

멸실되었던 것으로 여겨지던 대동여지도의 목판이 1995년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발견되었다. 이 목판은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목판과 함께 제작된 것으로 11매로 가로 43cm, 세로 32cm의 목판에는 양면에 표제 및 24도엽이 판각되어 있는데, 〈대동여지도〉의 전체 126도엽 가운데 5분의 1에 해당한다. 목판의 재질은 피나무이며, 목판에는 교정된 흔적이 있는데 1861년(철종12) 초간본 완성 이후 여러 차례 오류를 시정하였다. 목판은 1864년 인쇄되었던 고종원년 갑자본의 원형으로 판단된다. 숭실대학교에서 가지고 있는 판목은 함경도 함흥지방의 것으로 성불사, 철산, 삼장산이 판각되어 있다.

목판의 빈 공간을 활용하기 위해 지도의 여러 면을 판 하나에 몰아넣은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대동여지도의 7층 1면(북청군 남부) · 8층 6면(룡천군 서부) · 13층 6면(황해도 남부의 섬들)은 목판 하나에 같이 새겨져 있다. 또한 대동여지도의 판본 중에는 무의도가 강릉 앞바다에 잘못 찍혀 있는 것이 있는데, 이를 통해 13층 1면과 5면이 같은 목판에 새겨져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7층 1면  
8층 6면  
13층 6면  

방송 출연[편집]

2015년 5월 24일에 방영되었던 TV쇼 진품명품(1000회 특집)에서 25억원이라는 역대 최고의 감정가를 기록하여 이전 전일상영정및한유도(2011년 7월 24일 814회)가 세웠던 기록 15억원을 갈아치웠다.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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