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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궁과 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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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궁과 월지(慶州東宮과 月池, Donggung Palace and Wolji Pond, Gyeongju)
동궁과 월지(慶州東宮과 月池, Donggung Palace and Wolji Pond, Gyeongju)

동궁과 월지(慶州東宮과 月池, Donggung Palace and Wolji Pond, Gyeongju)는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위치한 경주 월성의 별궁 터이다. 신라가 멸망한 후 이곳에 기러기오리가 날아와 기러기 안(雁)자와 오리 압(鴨)자를 써서 예전엔 안압지(雁鴨池)로 불렀다가, 유물 발굴 결과 신라시대 때 '월지'라고 불렸다는 것이 확인되어 2011년에 경주 동궁과 월지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동굴과 월지는 2000년 12월 경주역사유적지구에 포함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개요[편집]

동궁(東宮)과 월지(月池)는 경주시에 위치한 통일신라 시대 궁궐 유적이다.

신라의 별궁으로, 신라의 태자가 사는 곳이었다. 왕이 사는 법궁인 경주 월성과는 북동쪽으로 접해 있으나 현재는 원화로에 의해 갈라져 있다. 또한 황룡사의 남서쪽에 있다. 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과도 아주 가깝다.

궁궐은 신라 때는 수십 개 전각이 늘어서 있었지만 지금은 1, 3, 5호 건물지 3개만 복원한 상태다. 또한 이곳의 심벌은 월지라는 이름의 인공 호수인데, 사실 궁궐의 이미지보다는 과거 통칭이었던 '안압지'라는, 월지 호수와 누각으로서 훨씬 잘 알려져 있다. 이 인공 호수는 신라 왕궁 안쪽의 친수 구역으로 경복궁의 경회루처럼 풍류와 연회 장소로 만든 곳이다.

대표적인 고대 한국 건축물 중 하나이며, 통일신라 정원의 원형이 잘 보존되었고 건축 양식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들이 많이 나왔다. 보통 한국의 다른 고대 유물들은 무덤에서 출토된 것이 많은데 문제는 죽은 자를 위해 부장하는 물건들은 실제로 일상에서 사용한 물건과는 다른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 곳에서 나온 유물의 특징은 문고리, 옷걸이, 가위, 빗, 출퇴근 카드로 쓴 목간, 젓갈 제조일자 꼬리표, 각종 실제로 쓴 그릇 등 온갖 실생활 용품이 많이 나왔다는 점이다.

명칭[편집]

동궁과 월지는 안압지라는 명칭으로 알려져 있었다. 신라가 멸망한 후 월지는 관리가 안된 채 방치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폐허가 된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들이 날아들자 조선의 묵객들이 안압지(雁鴨池)라는 이름을 붙였다. 안압지라는 명칭은 조선 초기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과 《동경잡기》등에 나타나고 있다.

1980년, 안압지에서 발굴된 토기 파편 등으로 신라시대에 이 곳이 월지(月池)라고 불렸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는 신라 왕궁인 반월성(半月城)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며, 임해전의 이름도 본디 월지궁이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동궁을 임해전(臨海殿), 즉 바다에 면한 건물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으며, 여기에서 안압지는 바다를 상징한다.

2011년 7월 안압지에서 경주 동궁과 월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현지안내문
안압지 서쪽에 위치한 신라 왕궁의 별궁터이다. 다른 부속건물들과 함께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신라 경순왕이 견훤의 침입을 받은 뒤, 931년에 왕건을 초청하여 위급한 상황을 호소하며 잔치를 베풀었던 곳이기도 하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문무왕 14년(674)에 큰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에 3개의 섬과 못의 북·동쪽으로 12봉우리의 산을 만들었으며, 여기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전해진다.『삼국사기』에는 임해전에 대한 기록만 나오고 안압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데,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에서 “안압지의 서에는 임해전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현재의 자리를 안압지로 추정하고 있다.
일제시대에 철도가 지나가는 등 많은 훼손을 입었던 임해전 터의 못 주변에는 회랑지를 비롯해서 크고 작은 건물터 26곳이 확인되었다. 그 중 1980년에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곳을 포함하여 서쪽 못가의 신라 건물터로 보이는 5개 건물터 중 3곳과 안압지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보상화무늬가 새겨진 벽돌에는 '조로 2년(調露 二年, 680)'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임해전이 문무왕 때 만들어진 것임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대접이나 접시도 많이 나왔는데, 이것은 신라무덤에서 출토되는 것과는 달리 실제 생활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해전은 별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며 안압지는 신라 원지(苑池)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역사[편집]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아주 멋지고 다양한 건축물들이 많다.

신라시대[편집]

문무왕(文武王)이 674년에 궁전 경주 월성의 동쪽에 호수를 만들고, 679년에 같은 위치에 동궁을 별궁으로 짓고 여러 건물의 이름을 새로 지었다. 이 시기는 나당전쟁이 당나라의 도독부 공식 철수와 공격 포기로 사실상 마무리되면서 기나긴 삼국통일전쟁이 마무리되고 평화 시대가 시작되면서 정궁인 경주 월성이 규모가 협소했던 것을 확장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였고, 동궁은 태자가 거처하는 곳이 되었다. 죽어 동해의 용왕이 되었다고 믿어진 문무왕이 만든 곳이라 그런지 용왕에게 제사를 올리는 용왕전(龍王殿)이라는 건물이 있었고 용왕에 대한 제사는 출토된 신심용왕(辛審龍王) 유물로도 증명되었다.

697년과 769년, 881년 등 대신들을 모아 잔치를 벌인 기록이 있으며 804년과 867년에 대대적으로 중수했다. 후삼국시대인 931년에는 고려 태조를 초대해 잔치를 베풀기도 했다.

신라시대 당시의 구조와 건축물[편집]

동궁에서 호수와 가장 인접한 곳에 임해전(臨海殿)을 세웠고, 여기서는 호수를 바라보며 연회를 즐기는 장소로 쓰였다. 신라가 멸망하기 직전인 931년 왕건이 서라벌을 방문했을 때 경순왕이 왕건을 임해전에서 접대하기도 했다. 특이점으로 임해전의 건물 구조는 탑이 없는 것을 제외하면 전형적인 사찰 가람 양식이다. 실제로 호수 안에서 불상과 불교 관련 유물이 좀 나오기도 했는데, 신라는 왕실과 석가모니 가문을 동일시할 정도로 불교와 왕실이 밀착해 있었으므로 왕실 건축도 영향을 받은 듯하다. 동궁에는 임해전을 비롯해 건물 27동의 건물이 확인되고 있는데, 임해전, 사정부, 소년감전, 예궁전, 동궁아관, 동궁아, 어룡성, 세택, 급장전, 월지전, 승방전, 포전, 월지악전, 용왕전 등이 있었다. 현재는 건물 3채만 복원했고, 나머지는 울타리를 쳐놓고 주춧돌만 보존한다. 동궁과 월지에 가 보면 입장 후 호수까지 가는 길에 건물 터들을 볼 수 있다. 궁궐의 바닥은 경주 월지 보상화무늬 전과 같은 전돌을 보도블럭처럼 깔아서 포장했다.

동궁의 동쪽에 있는 호수 월지(안압지)는 별궁인 동궁에 붙어 있는 일종의 유원지로, 거대한 인공 연못에 조경을 해놓고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임해전(臨海殿) 전각의 이름에서 보듯 호수는 바다를 형상화해서 만들었다. 좁은 호수를 넓어 보이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를 고려하였다. 서쪽과 동쪽의 높이를 다르게 하고, 동쪽의 해안선을 구불구불하게 만들어 어디에 서서 봐도 호수 전체가 보이지 않도록 했다. 신라 때부터 연꽃을 식재했지만 연꽃이 무제한으로 번식하여 수면을 뒤덮어 좁아 보이게 됨을 방지하고자 물 안쪽에 우물 정(井)자형으로 귀틀을 만들고 그 안에만 연꽃을 심었다. 하지만 현대 복원 과정에서 이를 고려하지 않아 호수 여기저기에 연꽃이 만발해졌다.

월지에는 가장자리가 곡선과 직선이 섞인 연못이 있고, 연못 안에 크기가 서로 다른 섬 3개를 만들어 섬 안에는 각종 진귀한 식물과 동물들을 풀어 놓았다고 한다. 모두가 여기에서 키우던 동물인지 그냥 고기를 먹고 뼈다귀를 호수에 내던져 버렸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호수 속을 조사했을 때 소, 말, 돼지, 개, 노루, 산양, 사슴, 멧돼지, 꿩, 오리, 닭, 거위, 기러기 등의 뼈가 출토되었다.

섬의 곡선이 교묘하게 처리되어 절대 한 곳에서는 그 전체 모습이 다 보이지 않음이 특징이다 보니 별 달리 지루한 것이 없다. 월지 등장 이후 이런 자연스러운 굴곡이 있는 연못 형상이 한국뿐만 아니라 비슷한 시기 일본 나라 쪽 연못에서도 유사점이 보이는데, 아마 이걸 본 일본 관료들이 일본에 있는 백제계 조경가들을 이용해서 만들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통일전쟁 직후에 만든 곳이라 고구려와 백제계 장인이 참여했을 것이라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1970년대 발굴을 위해 호수의 물을 빼자 거대한 석축이 드러났는데 큰 돌을 벽돌 모양으로 가공해 가지런히 쌓고 석축 주위에 보호석을 깐 것은 고구려의 산성 양식과 유사하고, 출수구에서는 궁남지와 같은 연못 조경을 발달시켜온 백제 양식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전 황룡사 목탑 건축에도 백제 장인 아비지가 참여했음을 보면 구삼국 출신 장인들이 모두 참여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호수의 물은 북동쪽에 있는 북천의 물을 인공 수로로 끌어오는데 신라시대에 만든 입수구 장치가 지금도 남아 있다. 여기에도 여러 과학적 장치가 있는데, 물이 호수로 떨어지기 전에 거북이 등껍질을 음각한 듯한 두 개의 수조를 지나게 되어 있어 북천 물에 섞여온 자갈과 흙들은 이 수조에서 거르고, 입수구의 물이 떨어지는 곳에는 판판한 돌을 깔아서 침식과 흙탕물이 되지 않도록 했다. 물이 떨어져 흐르는 곳 바로 앞에 작은 인공섬을 만들어 물살을 느리게 하고 자연스럽게 물이 흐르도록 했다. 서남쪽에는 호수 물이 빠져나가는 배수구가 있는데 나무 마개 3개로 호수의 높이를 조절했다.

월지의 형태가 동아시아의 지도를 표현했다는 견해도 있다. 실제로 가서 보면 잘 알기 어렵지만 공중에서 바라보면 관람자가 서는 곳(서쪽) 기준에서 봤을 때 호수의 윤곽선이 상당히 중국 동해안부터 한반도로 이어지는 해안선과 유사하다. 중국은 대충 큰 땅덩어리 정도로 처리했지만 한반도 부분 해안선은 상당히 유사하다. 이에 따르면 위에서 말한 섬 3개는 제주도, 일본 등을 표현한 것이라고. 지도 모양으로 만든 게 맞다면 세계 최초의 입체 지도라고 하며, 동아시아 전체를 표현한 지도 중 실물이 남은 가장 오래된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보다도 600년 이상 오래된 셈이다. 국립경주박물관의 월지관에도 월지 해안선 지도설 이야기를 실어놓았다. 물론 한반도 지형처럼 우연히 닮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건 인공 호수라. 다만 뚜렷한 기록이나 물증이 없어 가설로만 남았다.

신라이후[편집]

:1950년의 월지와 임해정.

신라가 멸망한 후 점점 관리가 소홀해졌다. 또한 《고려사》를 비롯한 여러 기록들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고려가 삼한을 통일한 뒤부터는 멸망한 신라 왕조의 유산과 흔적을 없애기 위하여 동궁의 전각들을 무너트리거나 강제로 훼철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 때문에 오히려 후대에 이르러 동궁의 건물과 목재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고려시대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난 구한말에는 건물들은 터만 남고 호수 정도만 덩그러니 남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임해정이라는 전각을 새로 지은 적이 있으며, 결국 이는 복원을 위해 1977년에 북쪽에 있는 황성공원으로 옮겨졌다. 임해정의 현재 이름은 호림정이다.

발굴[편집]

일제강점기에 안압지를 조사하여 만든 평면도.
동궁과 월지의 항공사진. A 건물지가 표시되어 있다.
동궁과 월지 발굴조사 현황 및 구역별 위치도.

일제 강점기[편집]

동궁과 월지 부근에 대한 최초의 조사 자료는 후지시마 가이지로가 1929년부터 2주 동안 경주의 신라시대 도성지와 사지를 조사한 내용을 담은 《조선건축사론》에 실려 있다. 이 때 월성의 건축에 대한 내용에서 안압지와 임해전지에 대해 간단히 다루고 있다. 이 글에서는 월지에 접한 건물지 1동을 임해전지로 비정하고 신라시대 궁전에 대해 알 수 있는 유일한 예 로 언급하였으며, 임해전지와 안압지를 《삼국사기》 기사에 등장하는 동궁이나 월지와 구분하여 병렬적으로 나열하였다.

1970년대[편집]

안압지가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1975년의 일이다. 경주시는 당시 방치되어있던 안압지를 1974년 11월부터 정화사업을 통해 깨끗이 정리하기 시작한다. 이 때 경주사적관리소가 담당하여 호수 중심부에 2 m 가량의 트렌치를 내고 조사를 실시한다. 그러나 조사 도중 12월 16일에 명문 기와 등 다량의 신라시대 유물이 드러나게 되고, 문화재위원회 및 문화재 관리국에 이를 보고하여 경주고적발굴단이 1975년 3월 24일부터 본격적인 발굴을 시작한다.

발굴조사는 크게 연못에 대한 조사와 연못 주변 건물지 조사로 나누어 실시되었다. 연못에 대한 발굴조사는 1975년 3월 24일부터 다음 해인 1976년 3월 25일까지 만 1년간 지속되었으며, 연못 주변 건물지 발굴조사는 1976년 5월 10일부터 그 해 12월 30일까지 실시되었다. 이 때의 발굴 내역은 1978년 《안압지 발굴조사보고서》로 출판되었다.

월지 서편과 남편에서 일련의 건물지들이 확인되었으며, 이 때 서편의 A건물지에 대한 발굴기록을 정리한 것이 2018년에 보고서로 발간되었다.

21세기[편집]

2007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동궁과 월지 북동쪽 일대에 대한 중장기 발굴조사 계획을 수립하였으며, 그 결과 동궁과 월지의 영역과 동궁 내 대형 건물지군, 담장, 배수로 등 동궁 관련 시설을 확인하였다. 이중 일부 구간에 대한 조사성과를 2012년과 2014년에 각각 《경주 동궁과 월지 Ⅰ》과 《경주 동궁과 월지 Ⅱ》로 공개하였다.

2020년에는 《경주 동궁과 월지 Ⅲ》보고서에서 동궁과 월지 북동쪽 지역 중 '가'지구에 대한 조사내역을 발표하였다.

'가'지구는 약 6,500m²면적으로, 월지 북동쪽으로 지나가는 동해남부선 철로 북쪽 공간에 해당한다. 남북 담장을 중심으로 2기의 대형 적심 건물지와 깊이 10m가량의 대형 우물, 창고시설로 추정되는 줄기초[주해 1] 건물지 등이 발굴된 곳이다.

《경주 동궁과 월지 Ⅲ》에는 ‘가’지구 안에 있는 담장으로 나눠진 공간들과 그 공간 안의 건축유구의 구조와 배치 등에 대한 조사 결과가 주를 이루었다. 크고 작은 건물지 40동과 담장, 우물, 배수로 등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각종 생활시설, 기와와 벽돌, 토기와 도기, 금속유물 등 591점의 선별된 유물이 수록됐다.

특히, 조사구역 남쪽에서 확인된 29호 건물지는 화장실 건물 내에 변기시설, 오물 배수시설까지 함께 발굴되어 신라 왕궁의 화장실 유구인 것으로 확인됐다. 화장실 유구는 초석건물지 내에 변기가 있고, 변기를 통해 나온 오물이 잘 배출되어 나갈 수 있도록 점차 기울어지게 설계된 암거(暗渠)시설까지[주해 2] 갖춘 복합 변기형 석조물이 있는 구조이다. 이와 같은 변기형 석조물은 신라에서는 불국사에서, 백제에서는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확인된 바 있다. 변기형 석조 구조물은 양 다리를 딛고 쪼그려 앉을 수 앉는 판석형 석조물과 그 밑으로 오물이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타원형 구멍이 뚫린 또 다른 석조물이 조합된 형태이며, 구조상 변기형 석조물을 통해 내려간 오물이 하부의 암거로 배출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고급석재인 화강암을 가공하여 만든 변기시설과 오물 제거에 수세식 방식이 사용된 점, 변기 하부와 오물 배수시설 바닥에 타일 기능의 전돌(쪼개어 만든 벽돌)을 깔아 마감한 점에서 통일신라 왕궁에서 사용된 고급 화장실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로 이해된다.

'가'지구에서 나온 인골의 DNA 조사와 분자유전학적 분석 결과, 같이 출토된 각종 동물(사슴, 개, 소, 남생이, 상어 등)의 뼈와 식물(밤나무, 복사나무, 잣나무, 참외 씨앗 등)의 유체 조사도 이루어졌다. 이로써 인골 분석을 통해서 당시 살았던 사람들이 벼, 보리, 콩 등의 작물과 단백질을 얻기 위해 소, 개, 사슴 등을 섭취했던 결과를 확인하는 등 당시 사람들의 식생활을 알 수 있었으며, 동·식물유체 분석을 통해 인근에 서식하던 동물들과 소나무 숲으로 이뤄진 주변 식생 등도 추정하였다.

한편,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2018년에 '가'지구에 대한 기본정비계획을 마련하여 해당 유적 내 중요 유구에 대한 정비·활용안을 관련 지자체에 제안한 바 있으며, 2020년부터 '나'지구 발굴조사를 시작할 것이라고 밝혔다.

유적[편집]

월지[편집]

연못의 발굴조사는 연못 호안의 석축유구를 확인하는 것과 출토유물을 확인하는 것을 목표로 진행되었다. 발굴에 앞서 동궁과 월지의 주변은 현황대로 기록되었고, 이 실측도에 따라 먼저 연못 서안西岸으로부터 남북 폭 2.5m의 트렌치 120개소를 설정하였다. 발굴조사는 설정된 트렌치 구간에서 실시되었다. 발굴조사와 함께 연못 전 구역에 동서 및 남북 의 기준점 및 기준선 설정 측량작업도 이루어졌다. 기준점은 남북 및 동서가 각 10m로 구획되어 10m 방안이 되도록 하였다. 방안으로 구획된 각 트렌치 사이에는 1m폭의 둑을 남기고 서안 북쪽으로부터 남쪽을 향하여 조사를 진행하였다. 이렇게 발굴이 진행되면서 각 트렌치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고 연못 호안주변에서 석축이 노출되기 시작하여 알 수 없었던 호안석축의 축조공법과 그 내용이 확인되었다.

건물지 기단 석축은 물에 잠긴 부분과 물 위에 노출된 부분의 축석 기법이 다르다. 물에 잠긴 부분은 모두 괴석塊石으로 면만 골라 쌓았으며, 수면 위에 노출된 부분은 대부분 길고 높은 장대석을 정연하게 맞추어 쌓았다. 그러나 장대석 기단 석축은 거의 파괴되어 밑에 한·두 단만 제 위치에 남아 있다. 건물지 주위 연못 속에는 장대석 외에 주좌가 있는 초석들이 다수 흐트러져 있었고 돌난간 부재도 출토되었다.

연못의 남동 모서리에서는 2단 수조水槽로 구성된 입수구를 확인하였다. 수조 양 쪽에는 넓적한 판석을 깔고, 그 아래는 3단으로 구분하여 물 흐름에 변화를 주었다. 입수구 쪽 계단식으로 쌓아 올리고 연못 바닥에는 큰 판석을 깔았다. 출수구는 중도의 동북모서리에서 확인되었다. 호안 석축 면에 장대석을 기초로 놓고 그 위에 높이 1.8m의 장방형 판석을 세우고, 판석에 상중하 세 개의 구멍을 뚫어 물높이를 조절하였다.

또한 크기가 다른 세 개의 섬이 확인되었다. 대도는 연못 남쪽에 있으며, 중도는 대도와 대칭 방향인 연못의 서북쪽에서 확인되었다. 소도는 못의 한 가운데에서 약간 남쪽으로 치우친 곳에 위치한다. 대도에서 소도까지의 거리는 102m, 대도에서 중도까지의 거리는 160m이다. 세 섬은 전부 연못 안에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다. 높이 1.7m 내외로 쌓은 석축 위에 흙으로 가산假山을 만들고 그 위에 자연괴석 등을 놓았으며, 석축 아 래에는 큰 냇돌을 등간격으로 놓아 호안 석축을 받치고 있는 형태로 축조되었다.

건물지[편집]

연못 발굴조사 완료 후 연못 주변의 서편 및 남편 건물지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연못 서편 건물지에 대한 조사에서는 서쪽 호안 석축과 접한 5개의 독립된 건물지와 그 서편으로 독립된 건물지 여섯 개를 비롯하여 문지門址와 장랑지長廊址 등 많은 건물지와 배수로 시설이 확인되었다. 각 건물지는 회랑廻廊으로 둘러싸이거나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고, 중심 건물지 좌우로는 익랑으로 이어져 있다. 회랑으로 둘러싸인 건물 배치는 남북으로 긴 장방형으로 그 속에 다시 세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어 조선시대 궁궐 배치와 아주 유사하다. 서쪽의 호안 석축에 돌출되어 노출된 다섯 개의 건물지는 연못 내의 세 개 섬과 굴곡진 호안을 바라볼 수 있어서 연회나 휴식을 위한 건물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연못의 남편에서는 크고 작은 13개의 건물지와 9개의 원장垣墻 시설이 확인되었다. 연못 남쪽 호안 석축으로부터 약 30~60m 떨어진 범위에서 확인되었으며, 동서 범위는 120m에 걸쳐 조사되었다. 대부분의 건물지는 독립건물지이거나 상호 관련된 것으로, 대규모의 독립 건물과 장랑長廊 형식의 건물지, 그 부속 건물로 추정하고 있다. 그 외 중복 건물지와 소규모이거나 규모가 불분명한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이 때 동서 200 m, 남북 180 m의 대형 연못과 건물지군이 확인되었으며 '월지月池'라는 명문이 새겨진 유물과 '동궁東宮'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유물이 다수 출토된다. 또한 679년인 의봉4년개토儀鳳四年皆土라 적힌 기와 역시 출토되어 그 조성 시기를 알 수 있었다. 이는 《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서편 건물지 중 A건물지에 대한 보완조사가 2018년에 이루어졌는데, 정면 7칸에 측면 4칸짜리 건물로, 중심부에 적심이 발견되지 않아 정전의 기능을 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또한 장경호가 발굴되어 그 연대가 7세기 중후엽으로 동궁의 축조시기와 일치함이 확인되었다.

유물[편집]

의봉사년개토가 적혀있다.
주령구의 발굴 당시 모습.

동궁과 월지에서 유물은 주로 연못 서편에 있는 5개소 건물지를 중심으로 연못 안쪽 반경 6미터 거리 내의 바닥 토층인 갯벌층에서 출토되었다. 유물의 종류는 크게 와전류瓦塼類, 토기류土器類, 금속류金屬類, 목제木製·칠기류漆器類, 철제류鐵製類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수량은 총 3만여 점에 달한다.

이 유물들 중에서 가장 많이 출토된 것은 단연 와전류이다. 기와편에 보이는 문양의 종류는 100여 종이 넘으며 전돌 역시 20여종에 달한다. 그 외에 치미편鴟尾片을 비롯하여 귀면와, 이형와 등 5,700여 점이 출토되었다. 와전류는 주로 서편 건물지 아래 연못 바닥면에서 수습하였으며, 보상화문 전편塼片 중에는 측면에 "조로2년 한지벌부군 약소사.....3월 3일 작강調露二年漢只伐部君若小舍.....三月三日作康"이라 음각된 문양전도 있어서 불확실했던 보상화문전의 제작 연대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또 암키와 등 문양에 양각으로 "의봉4년개토儀鳳四年皆土"라 새겨진 명문 기와가 출토됨으로써 기와의 제작연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외에 모서리 암키와, 곱새기와, 회첨 막새 등의 특수기와도 출토되었다.

목칠류도 1,100여 점 이상 확인되었다. 목재류에는 목선과 건축부재, 묵서명 목간木簡, 주령구 등이 있고 칠기로는 쟁반형 칠기류, 찬합 등이 있다. 목선은 연못 동안 중심부 북편 호안석축 아래 연못 바닥면에서 뒤집힌 채 완형으로 출토되었다. 배의 크기는 길이 5.9m, 너비 1.2m, 높이 60cm 가량이다. 이 목선은 장목 3편을 길이로 연접시켰는데, 선수船首와 선미船尾 부근에서 빗장을 끼우듯이 연결시켰다. 빗장목은 참나무이고 목선은 소나무이다. 완형의 목선 외에도 3점의 목선편이 더 확인되었고, 목제 노櫓가 다수 출토되었다.

이 외에 주사위, 남근, 용도 미상의 목편들이 상당 수 출토되었다. 주사위는 크기 5×6.5cm의 14면체인데 각 면마다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또한 길이 17cm, 직경 3.8cm의 목조 남근이 완형으로 출토되었다.

주령구

주령구(酒令具)는 1975년에 출토된 정사각형 면 6개와 점추이 육각형 면 8개로 이루어진 14면체 주사위이다. 정사각형 면의 면적은 6.25평방센티미터, 육각형 면의 면적은 6.265평방센티미터로 확률이 거의 1/14로 균등하게 되어 있다. 재질은 참나무이다. 각 면에는 다양한 벌칙이 적혀 있어 신라인들의 음주 습관의 풍류를 보여주고 있다. 출토된 진품은 서울연구소에서 유물 보존 처리도중 목질을 경화하는 장치에서 기기 오작동으로 화재가 발생해 불타 소실되었다.

복원 및 논란[편집]

1976년까지의 복원을 통해 알게 된 건물지의 위치와, 획득한 자재들을 토대로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은 동궁과 월지의 복원을 시작한다. 이 때 3개의 전각을 복원했는데 이후 더 복원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현재는 안압지의 세 전각이 우선 복원된 상태인데, 일부에서는 복원을 잘못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전각의 구조는 그럭저럭 원형의 모습을 최대한 반영하여 복원한 것 같지만, 예를 들면 안압지에서 출토된 화려한 금속 장식물들을 전혀 활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라시대의 궁궐 건축물은 금속 장식물로 사치를 부리는 것을 경계했던 조선시대와는 달리 서까래나 난간 끝에 일일이 금동으로 된 장식 마개 등을 달았고, 덕분에 햇빛이 비치는 날은 건물이 금빛으로 번쩍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물들이 출토되어 버젓이 경주박물관 월지관에 전시중임에도 불구하고 복원된 건물에는 하나도 쓰이지 않았다. 기와의 경우 섬세하게 조각된 장식기와를 활용한 것은 좋지만 마무리가 좀 어설픈 편이다. 단청의 경우에도 논란이 되는데, 일반적으로 고려 말~조선시대부터 유행한 상록하단 단청을 입혀놨기 때문입니다. 다만 발굴된 단청 항아리에 녹색 안료가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상록하단의 경향이 삼국시대에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고 신라시대에 어떤 단청을 칠했는지에 대한 확실한 자료가 없어서 이 부분은 결론이 안 나는 상황이다.

경주시는 2010년부터 630억원 정도를 들여 신라왕경복원사업의 일환으로 동궁과 월지 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유네스코 역시 상기한 바와 마찬가지로 충분한 고증이 없는 현 상태에서 무리한 복원을 추지하는 것에 대해 반대의견을 표출했다.

관람안내[편집]

  • 이용시간: 09:00~22:00(※매표 및 입장 마감시간: 21:30까지)
  • 휴 무 일 : 연중무휴
  • 이용문의 : 054-750-8655
  • 반려동물 입장 불가
  • 주차장 만차 시 인근 황룡사 역사문화관 및 박물관 주차장 이용 가능
  • 입장료 : 어른 3,000원 군인/청소년 2,000원 어린이 1,000원

교통안내[편집]

버스
  • 서울-경주
  •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서 하루 8회(08:10〜22:00) 운행, 약 3시간30분 소요.
  • 동서울종합터미널에서 하루 6회(08:40〜19:00) 운행, 약 4시간 소요.
-경주고속버스터미널 건너편 경주고속·시외버스터미널 정류장에서 11번·602번·604번·605번·607번 일반버스 이용, 동궁과월지 정류장 하차.
-경주고속버스터미널 건너편 경주고속·시외버스터미널 정류장에서 60번·61번 일반버스 이용, 황남초등학교 정류장 하차, 월정교까지 도보 약 800m.
  • 문의: 서울고속버스터미널 1688-4700 고속버스통합예매 동서울종합터미널 1688-5979 시외버스통합예매시스템 경주고속버스터미널 054)741-4000 경주시외버스터미널 1666-5599
기차
  • 서울역-신경주역, KTX 하루 17~20회(05:15~21:30) 운행, 약 2시간10분 소요.
신경주역 정류장에서 700번 좌석버스 이용, 동궁과 월지 정류장 하차. 신경주역 정류장에서 60번·61번 일반버스 이용, 황남초등학교 정류장 하차,월정교까지 도보 약 800m.
  • 문의: 레츠코레일 1544-7788
자가운전
  • 동궁과 월지: 경부고속도로 경주 IC→약 5km 직진→배반네거리에서 시청 방면 좌회전→박물관네거리에서 250m 직진, 우회전→동궁과 월지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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