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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쉐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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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쉐보레(Louis Chevrolet)
쉐보레(Chevrolet)

루이스 쉐보레(Louis Chevrolet)는 스위스계 미국인으로 유명한 경주용 자동차 레이서이며 1911년 설립된 쉐보레 자동차 회사의 공동 설립자이며 1916년에 설립된 프론테낙 자동차 회사의 설립자이다.[1] 루이 쉐보레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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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루이스 쉐보레는 1878년 12월 25일 스위스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 조셉 펠리시엔 쉐보레는 스위스에서도 시계 제조 중심지였던 뉴샤텔의 칸톤 라쇼드퐁에서 일하던 시계 제작자였다. 하지만 1886년 쉐보레 일가는 프랑스 동부에 위치한 보느(Beaune)로 이주를 했다. 보느는 프랑스 와인의 주요 산지 중 하나로 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집안 형편 탓에 루이스 쉐보레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와인 생산 공장에서 일을 시작하였다. 와인공장에서는 와인을 다른 통으로 옮겨 담는 디캔딩 과정의 속도를 높여주는 펌프를 설계했는데 이때부터 아버지에게 영향을 받는 기술적인 감각이 발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전거를 좋아해서 10대에는 자전거 수리점에서 인턴으로 일했으며 여기서는 변속기의 구조를 개선하는데 몰두했으며 1895년부터 1899년까지 로빈 메카닉샵(Roblin mechanics shop)에서 일했으며 기술적인 재능과 기계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루이스 쉐보레에게 더 큰 꿈을 심어줬고 루이스 쉐보레는 결국 1900년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다.

루이스 쉐보레는 1901년 뉴욕에서 스위스 이민자의 엔지니어링 회사에서 잠시 근무하고 디온 부턴의 프랑스 자동차 제조사의 브룩클린 영업부로 이직했다. 1905년에 그는 수자네 트레이유스(Suzane Treyvous)와 결혼하고 피아트에 의해 고용되었다. 1907년 쉐보레는 필라델피아에 있는 더 오토카 컴퍼니(The Autocar Company)에 의해 고용되었으며 그의 레이싱 경력은 뷰익을 위해 운전하면서 계속되었고 뷰익의 주인 윌리엄 듀런트의 친구이자 동료가 되었다. 1991년 윌리엄 듀런트와 쉐보레를 설립하고 두 사람은 사업상의 분쟁으로 3년도 채우지 못하고 쉐보레는 주식을 매도하고 형제들과 회사를 설립하였다.

루이스 쉐보레는 여러 번의 사업 실패에도 10기통 레이디얼 엔진의 특허 신청은 포기할 수 없었으나 시대는 어렵고 몸도 좋지 않았다. 1933년 그는 다시 엔지니어로 일을 시작하였으며 회사는 바로 미국 디트로이트에 위치한 쉐보레 생산라인이었다. 쉐보레가 설립되고 루이스 쉐보레가 22년 동안 회사를 떠나 있던 사이 이미 쉐보레는 800만 대가 넘는 차량이 출고되었을 정도로 거대한 기업이 되어 있었다. 복귀할 당시 쉐보레에는 함께 창업했던 듀란트는 없었으며 듀란트는 이사회에서 두 번째로 쫓겨나면서 창업했던 듀란트 모터스 폐업으로 힘들었던 시기였다. 1935년에는 특허 승인이 났지만 이미 1934년부터 루이스 쉐보레는 뇌졸증을 앓아 사업을 할 여력은 물론 일을 제대로 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1941년 6월 6일 63세의 나이로 디트로이트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2]

주요 활동[편집]

루이스 쉐보레의 뷰익 소속의 선수 시절

모터스포츠[편집]

루이스 쉐보레가 캐나다로 이민을 결정한 건 더 많은 자동차 기술을 익히고 프로 드라이버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자동차 회사였던 프랑스 드 디옹-부톤(De Dion Bouton)의 엔지니어로 고용되면서 미국 뉴욕으로 다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이후 1905년에는 피아트(Fiat)에서도 비슷한 일을 했다. 루이스 쉐보레는 유년시절부터 자전거 경기와 모터스포츠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모터스포츠에 대한 갈증은 실제 참가로 이어졌고 평균 시속 109.7kkm 기록해 국제 모터스포츠계의 유명 인사가 됐다. 신인 드라이버가 곧바로 스타가 된 셈이다. 이를 눈 여겨본 뷰익 모터스포츠팀은 1908년 루이스 쉐보레를 드라이버로 고용했다. 바로 여기서 윌리엄 듀란트와의 만남이 처음 시작된다. 루이스 쉐보레는 뷰익에서 디자인을 배우고 엔진 설계도 시작하면서 드라이버지만 엔지니어의 역할을 해내며 역량을 키워갔다.

쉐보레 설립[편집]

쉐보레 클래식 식스

루이스 쉐보레를 영입했던 듀란트는 과도한 야심이 문제라는 주주들의 반발로 1910년 돌연 GM에서 쫓겨났다. GM으로 복귀가 가장 이상적이지만 복귀를 못하더라도 새로운 사업을 성공시켜야 했던 듀란트는 루이스 쉐보레에게 함께 자동차 회사를 설립하자는 제안을 했다. 듀란트는 GM에서 축출됐으나 여전히 자본이 충분한 백만장자이자 사업가였고 뷰익에서 일하던 루이스 쉐보레도 자동차 시장에서 더 큰일을 하고 싶어 제안을 동의하고 1911년 11월 3일 그의 나이로 만 33세가 되던 해 자신의 이름을 딴 쉐보레를 설립하였다. 쉐보레로 브랜드를 만들게 된 것은 당시 루이스 쉐보레의 명성이 워낙 높았고 발음도 좋아 듀런트가 직접 제안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년 만에 개발한 쉐보레 클래식 식스(Classic Six)는 전기 시동장치와 헤드램프를 탑재했는데 이 기능들은 당시 최고급 차량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사양이며 4.9L 6기통 5인승 투어링 모델로 시속 105km까지 주행이 가능했고 2,510달러의 가격에 불티나게 팔렸다. 하지만 루이스 쉐보레와 듀란트의 동업은 사업 3년도 채우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드라이버이자 엔지니어 출신인 쉐보레는 모터스포츠에서 성적을 낼 고성능 자동차를 만들고 싶어 했지만 사업가였던 듀란트는 대중에게 판매할 차량을 원했기 때문이다. 결국 듀란트가 1913년 루이스 쉐보레의 지분을 인수하면서 루이스 쉐보레는 자신의 이름과 로고 등을 회사에 남겨둔 채 쉐보레를 떠났다.

기타 사업[편집]

쉐보레 지분을 매각한 루이스 쉐보레는 1914년 형제들과 함께 포드 모델 Ts의 레이싱 부품을 만들기 위해 프런테낙(Frontenac Motor Corporation)을 설립했다. 루이스 쉐보레는 프런테낙을 통해 알루미늄을 대폭 사용한 바디에 차동기어 잠금장치(LD) 같은 기술을 접목해 당시에는 혁신적인 차량을 제작했다. 루이스 쉐보레는 모터스포츠에서도 순위권을 유지하며 순조로운 출발을 알렸다. 그러나 함께 회사를 만든 개스톤 쉐보레는 1920년 인디애나폴리스 500 경기에 참가해 우승까지 했으나 후반기 레이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후 루이스 쉐보레는 1926년 아더 쉐보레와 함께 쉐브롤에어(Chevrolair 333)이라는 회사를 설립해 경비행 엔진을 개발하기도 했으나 형제간의 사이가 틀어지면서 다시 문을 닫게 되었으며 인디애나 폴리스에서 쉐보레 에어 카 컴퍼니(Chevrolet Air Car Company)를 차리기도 했지만 경제 위기로 폐업을 해야만 했다.

각주[편집]

  1. "Louis Chevrolet", "wikipedia"
  2. 양봉수, 〈쉐보레, 모터스포츠에 대한 창업주의 열정 속에 태어난 브랜드〉, 《오토트리뷴》, 2021-01-29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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