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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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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프랑스어: Montréal, 영어: Montreal) 또는 몽레알캐나다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이자 퀘벡주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이기도 하다. 1642년에 '마리아의 도시'라는 뜻의 빌마리로 설립된 이 도시는 도시 중심의 봉우리가 세 개로 이루어진 루아얄산 (Mont-Royal, 몽루아얄)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몬트리올은 어원과 이름이 똑같은 몬트리올섬과 몇 개의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있는데, 그 중 가장 큰 섬은 비자르섬이다. 몬트리올은 캐나다 수도인 오타와에서 동쪽으로 196km 떨어져 있고 퀘벡 주도인 퀘벡에서 서쪽으로 258km 떨어져있다.

개요[편집]

  • 행정 단위: 캐나다 퀘벡주 도시
  • 시정부소재지: 275, rue Notre-Dame E.
  • 면적: 365.65 km2
  • 인구: 1,704,694명 (2016년)
  • 지역번호: 514, 438
  • 정부 공식 홈페이지: https://montreal.ca/

지도[편집]

역사[편집]

오슐라가에서 모피 무역까지[편집]

몬트리올은 1642년에 세워졌지만 몬트리올에 살던 원주민들의 역사까지 감안하면 몬트리올의 역사는 한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세인트 로렌스 강 유역에 인류가 살던 흔적은 선사시대인 6천여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원주민들이 그 이전에 자리잡았을 가능성도 있으나 아직까지 별다른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서양인들이 도착하기 전 몬트리올 지역에는 세인트 로렌스 이로쿼이 족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던 것으로 파악된다. 휴런족이나 이로쿼이족과 함께 세인트 로렌스 이로쿼이 족은 이로쿼이어족으로 같은 언어적 계통의 사람들이지만 혈통이 다른 것으로 파악된다. 세인트 로렌스 이로쿼이 족은 1300년대 그 이전에 근처에서 살던 종족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이 되며, 이들은 주로 한 곳에 머무르면서 옥수수, 콩, 애호박, 담배를 재배하는 등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다. 또한 주식으로 물고기를 잡고 사냥을 하였으며, 알곤킨 족 수렵인과 수시로 교역하였다.

이로쿼이 족은 나무로 된 끝이 뾰족한 울타리로 둘러싸인 마을에서 살았고 몇몇 큰 마을에는 인구가 천 명도 족히 넘었다. 마을 근처에는 농지가 있었는데 10년이나 20년 뒤에 농지가 비옥하지 못해 쓸모가 없게 될 때 근처에 있는 새로운 마을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자크 카르티에의 관찰도 이와 비슷한데, 몬트리올의 '첫 마을'로 불리는 오슐라가 (Hochelaga)가 정확히 어디에 위치해있는 지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몬트리올 지역을 서구인들이 처음으로 발견한 때는 1535년 10월, 프랑스의 항해가이자 탐해가인 자크 카르티에[1]의 발견을 통해 이루어진다. 카르티에는 하루도 채 안되는 기간에 여기에 머무른 것으로 파악되며 그의 관찰을 통해 오슐라가가 어떻게 생겼는지 간략하게 설명한다. 카르티에에 따르면, 오슐라가는 산자락 근처에 있었다. 산자락을 따라 비옥한 경사로에 농사를 지었고 산 정상에는 멀리까지 바라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산은 루아얄 산 (Mont Royal) 이라고 한다. 마을은 동그랗고 피라미드같이 생긴 나무 담장에 둘러싸여 있었다고 한다. 오슐라가가 어디에 있는지는 아직까지는 모르지만 맥길 대학교 근처에 발견된 이로쿼이 족 유적지가 오슐라가라는 설이 있고 또다른 설은 몬트리올과 라발 사이의 프레리강을 건너 우트르몽 지역에 살았을 거라는 설도 있다.

1603년, 사뮈엘 드 샹플랭[2]이 현지 가이드와 함께 세인트로렌스강을 따라 라신 급류까지 향하게 되었다. 현지인의 도움으로 몬트리올 지역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알게 된 샹플랭은 퀘벡을 설립한 지 3년 뒤인 1611년, 섬 근처에서 모피 무역을 하면서 몇 주를 보내면서 섬 지역 일대를 탐험하게 된다. 이후 샹플랭은 몬트리올섬에 오늘날의 푸앵타칼리에르에 모피 교역소를 짓는 것에 관심을 두게 된다. '몬트리올'이라는 이름은 1613년 샹플랭이 그린 지도에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후 몬트리올은 원주민들과 프랑스 무역가들간의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몬트리올이 영구적인 정착지가 된 이유는 이로쿼이 족 때문이기도 하다. 샹플랭은 알곤킨족과 휴런족과 동맹을 맺어 이로쿼이족에 맞서 싸우게 되는데, 이로쿼이 족, 특히 모호크족은 굉장히 호전적이였고 네덜란드 상인들과 연맹해서 세인트로렌스강 일대를 점령하려는 목적이 뚜렷했기 때문에 라신 급류가 있는 몬트리올의 지정학적인 이점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알곤킨-휴런족과 이로쿼이족 간의 전쟁은 1642년에 정세가 안정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빌마리[편집]

몬트리올에 정착지를 세우는 프로젝트를 먼저 구상한 건 프랑스 라플레슈의 세금 징수원이였던 제롬 르루아예르 드 라도베르시에르였다. 독실한 가톨릭계 신자였던 그는 1635년에 몬트리올에 선교 목적의 정착지를 세우는 방안을 먼저 생각했고 이후 1639년, 그가 슐피스 회를 세우려는 파리의 장자크 올리에 신부를 만나면서 계획이 점점 구체화되었다. 이후 둘은 몬트리올 노트르담 회를 결성해 누벨프랑스의 원주민들을 가톨릭으로 개종할 목적으로 몬트리올에 선교지를 세우기로 하였다. 이들은 모피 무역에는 별다른 관심은 없었으며 순전히 종교적인 목적으로 프로젝트에 임했다.

노트르담 회는 장 드 로송이 소유하고 있던 땅을 사들이고 정착지를 운영할 사람을 찾게 된다. 이후 노트르담 회는 군인이였던 폴 드 숌므데이 드 메종뇌브를 정착지 주인으로 삼고 잔 망스도 몬트리올로 데려와 오텔디유 병원을 짓고 정착지의 회계 담당자로 일하게 된다.

1642년 5월, 첫 항해에 실패를 겪은 메종뇌브 일행은 이후 퀘벡 총독 몽마니와 함께 몬트리올을 향해 배를 띄우게 되었다. 일행은 5월 17일에 도착하고 기도회 끝에 몬트리올 정착지가 설립되었다. 몬트리올의 설립은 이로쿼이 족에게 위협을 가했다. 몬트리올의 존재를 알게 된 이로쿼이 족은 몽레알리스트 (The Montréalistes)를 포로로 잡고 몇몇 사살하기까지 하였다. 이후 정착지 사람들은 이로쿼이 족의 습격에 대비해 성벽 안에 살게 되었다.

1651년, 메종뇌브는 프랑스로 돌아가 새로운 정착민을 받게 되고 이후 1659년까지 프랑스에서 새로운 피를 수혈받게 되었다. 1653년에는 교육자인 마게리트 부르주아를 포함한 젊은 여성들이 도착했으며, 몬트리올은 정착민들이 필요한 학교와 병원이 생기게 되었다. 한편 생폴 가에는 집이 몇 채 생기게 되었고 세인트로렌스 강변을 따라 코뮌이라는 곳에서 주민들이 동물을 방목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로쿼이 족의 습격은 1650년대 말에 계속되었고 이후 프랑스 모피인들이 몬트리올 서쪽의 페이당오 (Pays d'en haut) 에서 오대호 지역의 원주민들에게 모피를 가져오는 수법을 쓰게 되었다.

1663년, 누벨프랑스 회사가 누벨프랑스 통치를 그만두고 프랑스가 직접 통치하게 된다. 이에 따라 자원과 인력이 떨어진 노트르담 회는 폐지되고 프랑스에서 직접 군대가 파견되었다. 이로쿼이 족이 완전히 물러나진 않았지만 몬트리올은 간만의 평화를 만끽하게 되었다.

1701년 8월, 아메리카 북동쪽의 1,300명의 미주 인디언들이 몬트리올과 통합하여 (이에 따라 1200여명의 거주민 구성) 각각 다른 부족 및 프랑스인들과 평화 조약을 세우기 위해 왔다. ‘몬트리올의 위대한 평화(La Grande Paix de Montreal)’는 그 명칭의 모습처럼 누벨 프랑스의 모피 무역을 저지했던 적대감의 막을 내렸다. 이 시대의 도시에는 2000명이 넘는 주민이 있었다.

이 도시는 또한 모피 무역(La traite de fourrures fur trade[1])에 중요한 중심지로 성장했다. 이는 또한 Louis Jolliet, La Salle, La Vérendrye와 Duluth같은 프랑스 탐험가의 내지 탐험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목재 성벽은 1725년부터 세워졌다. 1732년 9월 16일의 매우 강력한 지진에도 불구하고, 도시는 계속 번성하여 1740년 성벽을 재건축하였고 1760년 9월 8일, Lévis 백작이 Jeffrey Amherst경의 지휘 하의 영국군을 불러오기 까지 프랑스령으로 유지된다.

영국 식민지 지배와 산업화[편집]

1759년 불어권 도시 몬트리올은 거주민 5000명이 넘게 된다. 1760년 영국 침공 이후, 몬트리올은 프랑스 지방의 도시들과 상당히 유사했다. 인구의 중심과 대다수가 모두 프랑스인이었다. 하지만 프랑스계 사람들은 침략 하에 있었고, 부유 계층은 대다수 영국계였다. 프랑스어가 거의 보편적으로 쓰이는 언어였음에도 불구하고, 신문, 포스터와 프랑스 상인의 간판까지 영어로 쓰여졌다.

도시의 빠른 성장은 1824년 라신 운하의 건설로 항해선이 섬 남부의 라신 급류를 탈수 있게 되면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장인 수공업은 더 발전된 산업화에 조금씩 자리를 내어주었다. 19세기 후반부는 철도 산업의 빠른 성장과 더불어 철도 회사 캐네디언 퍼시픽 (CP) 1880년도에 이 도시에 본부를 두면서 캐나다의 철도 중심 도시가 된다.

각종 전염병과 대형 화재를 겪는 동안, 광활한 오지의 중심지인 몬트리올에서 견고한 상업, 차후 산업 및 대다수 영국계 부르주아 계층이 성장한다. 한편, 1837-1838년 ‘애국자의 저항 (Rébellion des Patriotes)’ 시기에 정치적인 위기를 겪는다. 1843년부터 가제트 지에 반감적인 기사에 선동된 영국인 반역자들의 방화 이전의 1849년까지 캐나다 연합 국회가 이 도시에 있었다. 이 화재는 국립도서관까지 확산되어 누벨 프랑스의 수많은 서재를 파손시켰다.

동시대의 은행 및 다른 금융기관의 강력한 성장은 몬트리올이 20세기 초반부에 캐나다 금융의 중심지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퀘벡 연방주의자 간 확산된 생각은 20세기 후반부 몬트리올의 독립주의자(분리주의자)들의 힘의 종착점에서 캐나다의 대표적 경제적 대도시라는 명의를 실추하여 토론토에 유리하게 되기를 바랐다. (Paul-André Linteau, Montréal, Boréal, 1992, science politique). 한편, 퀘벡 주 독립주의자들에 따르면 이러한 전환의 원인은 세인트 로렌스 강 의 수로 건설로 오대호 근방 온타리오 주에 폭발적 경제 성장 및 토론토의 급성장에 유리한 일부 연방 정치경제적 요소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지리[편집]

캐나다 퀘백주에 있는 도시로 남부의 세인트로런스강 어귀의 몬트리올섬에 있는 캐나다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다.

인구[편집]

프랑스어권 퀘벡주에서 가장 큰 도시로, 몬트리올 주민의 절반 이상이 프랑스계 캐나다인이다. 또한 영국계는 20% 이상이다. 소수민족으로 이탈리아, 그리스, 포르투갈, 아이티, 베트남계의 주민들과 화교 등이 살고 있으며, 대한민국 유학생재외국민도 거주하고 있다.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다.

각주[편집]

  1. 자크 카르티에〉, 《위키백과》
  2. 사뮈엘 드 샹플랭〉, 《위키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북아메리카 같이 보기[편집]

북아메리카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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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메리카 도시 1
북아메리카 도시 2
북아메리카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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