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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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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독일어: München, 영어: Munich)는 독일 바이에른주의 최대 도시이자 주도이다. 이 도시는 알프스 북부의 이자르 강가에 위치한다. 뮌헨은 독일 내에서 베를린함부르크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도시이다.

현재 뮌헨은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로, 최고의 이민 희망 지역으로 손꼽혀오곤 하였다. 2011년, 머서의 삶의 질 조사에서 뮌헨은 4위에 랭크되어 있었다. 2thinknow가 162개의 항목을 기준으로 실시한 경제 및 사회 혁신 지수에서, 2010년에 조사된 289개의 도시 중 15위를 기록하였고, 독일 국내에서는 5위에 랭크되었다. 2010년, 모노클은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뮌헨을 선정하였다.

개요[편집]

  • 행정 단위: 독일 바이에른주 주도
  • 면적: 310.43 km²
  • 인구: 1,484,226명 (2019년)
  • 지역번호: 089
  • 정부 공식 홈페이지: https://www.muenchen.de/

뮌헨이라는 도시명의 유래는 옛 고산 지대 독일어로 "수도승들의 공간"이라는 뜻을 가진 무니헨(Munichen)에서 유래하였다. 이 도시를 건립한 자들은 베네딕트 칙령 당시의 수도승들이다. 그에 따라, 뮌헨의 휘장에는 수도승이 새겨져 있다. 뮌헨의 시 고유색은 신성 로마 제국을 상징하는 흑색과 금색으로, 루트비히 4세 시절부터 채택하고 있었다.

역사[편집]

중세 마을에서의 출발[편집]

역사적 기록으로 미루어 문서에서 언급된 가장 이른 시기인 1158년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문서는 아우크스부르크의 서명을 받았다. 1180년 작센과 바이에른 대공인 벨프 가가의 하인리히 사자공이 지배할 무렵, 이자르 강에 베네딕트 수도원 인근으로 다리를 건설하였다.

1175년, 뮌헨은 도시로 승격되어 성곽이 건설되었다. 1180년 하인리히 사자공이 도시에 들어섰고, 오토 1세가 바이에른과 뮌헨의 대공이 프라이징 대관 자리도 차지하였다. (비텔즈바흐와 그의 후예는 바이에른을 이후 1918년까지 지배하였다.) 1240년, 뮌헨의 지배권은 1255년까지 오토 2세가 가져갔고, 바이에른 영지가 둘로 나뉘자, 뮌헨은 오버바이에른의 중심이 되었다.

1314년, 루트비히 4세가 독일의 왕으로 선출되었고, 1328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는 뮌헨에 소금 독점권을 부여하였고, 추가적인 소득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하였다. 15세기 말, 뮌헨은 구시가지에 대규모 고딕 건축물이 조성되었고, 뮌헨의 최대 고딕 성당이자, 현재의 프라우엔키어헤가 1468년을 기점으로 20년에 걸쳐져 건설되었다.

통일된 바이에른의 수도[편집]

1506년 바이에른 왕국이 통일된 이후, 뮌헨은 그 통일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예술과 정치적인 면에서 뮌헨은 법정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6세기, 뮌헨은 독일 르네상스의 핵심 도시였었다. 빌헬름 5세는 예수회의 위탁을 받아 르네상스의 중심이 된, 미하엘즈키어헤를 건설하였고, 흑맥주로 유명한 호프브로이하우스를 1589년에 건설하였다. 1609년에 뮌헨에 가톨릭 제후연맹이 들어섰다. 1623년, 30년 전쟁에서 뮌헨은 선거후인 막시밀리안 1세가 선제후가 된 뒤의 거처였으나, 1632년에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이곳을 점령하였다. 1634년과 1635년 사이, 림프절 페스트가 유행하였을 때, 시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하였다. 바이에른은 이후 바로크 문화의 중심이 되었으나, 1704년에서 1742년까지 합스부르크 왕가[1]의 지배 하에 고통받아야 했다.

1806년, 바이에른 신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도시 내에 의회, 뮌헨과 프라이징의 대주교구가 위치하였다. 20년 뒤,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대학교가 뮌헨으로 이전하였다. 다수의 뮌헨 최고 건물들이 바이에른 신왕국의 처음 세 왕들에 의해 지어졌다. 이후, 루이폴트 왕자 시대에 이루어, 예술과 문화에 있어서 뮌헨은 발전의 정점을 찍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편집]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 독일이 식량과 연료의 수급에 차질을 겪게 되자, 뮌헨에서의 삶은 텁텁하게 되었다. 1916년, 프랑스의 공습 당시, 세 차례의 폭격이 있었다. 종전 후, 뮌헨은 정치적 반란이 잦았다. 1918년 11월, 혁명의 전야에 루트비히 3세의 가문은 도시에서 탈출하였다. 쿠어트 아이스너, 초대 공화국 총리가 안톤 그라프 폰 아어코 아우프 팔레이에 1919년 2월에 암살되자, 바이에른 공산당이 창단되었다. 공산당이 집권하자, 뮌헨에서 거주한 적이 있던 블라디미르 레닌[2]은 전보를 보내려 했으나 1919년 5월 3일에 자유군단에 의해 실패하였다. 다시 공화국이 된 이후, 뮌헨은 나치즘의 아돌프 히틀러아돌프 히틀러〉, 《위키백과》</ref>와 같은 극단적 정치가들의 소굴이 되었다.

1923년, 히틀러와 그의 지지자는 뮌헨에 집결하여 맥주홀 폭동을 일으켜 바이마르 공화국을 전복하여 정권을 잡으려 했다. 이 폭동에서 진합당한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은 히틀러가 체포되고 잠시 힘을 잃었다. 당시 나치당은 뮌헨 밖에서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후 뮌헨은 1933년에 히틀러가 수상에 오르며 다시 나치의 본거지가 되었다. 나치는 첫 강제 수용소를 도시에서 북서쪽으로 16 km 떨어진 다하우에 건설하였다. 나치는 자신들의 이념을 퍼뜨리기 위해, 뮌헨을 개혁의 중심지 (Hauptstadt der Bewegung)라고 불렀다. 나치당(NSDAP) 본부 건물은 뮌헨에 위치하였고, 다수의 퓌러바우텐 (Führerbauten, 총통의 건물) 들이 왕의 광장 (Königsplatz) 에 다수 지어져 있었으며, 이들 중 일부는 현재까지도 존재한다.

이후 프랑스영국 등과의 협정을 체결하였고, 결국 이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졌다. 네빌 체임벌린 영국 수상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 합병을 인정하였고, 그의 안일한 행위는 제3제국의 욕망을 더욱 불태우게 만들었다.

뮌헨은 1942년 6월에 결성되어 1943년 2월까지 활동했던 백장미 결사대의 중심지였다. 이들의 주축 요원들은 체포되어 뮌헨 대학교에서 한스 숄과 소피 숄의 전단지 배부 이후 처형되었다.

전쟁 당시 이곳은 연합군의 집중 포격을 받았다. 뮌헨은 6년간 무려 71번이나 공습을 당하였다.

전후[편집]

1945년 미군의 점령 이후, 뮌헨은 다른 서독의 폐허가 된 도시들에 비해 꼼꼼히 재건되었다. 그에 따라 뮌헨은 옛 도로를 살려 재건되었다. 1957년, 뮌헨의 인구는 100만명을 넘었다.

1972년, 하계 올림픽이 뮌헨에서 개최되었다. 이 올림픽 당시 이스라엘 선수가 팔레스타인의 테러 단체인 검은 9월단에 암살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 외에도 몇명의 이스라엘 선수단이 인질로 잡히기도 했다.

다수의 뮌헨 시민들은 상류층에 속한다. 머서의 삶의 질 조사에 따르면 삶의 질 수준이 상위 10위에 꾸준히 들었으며, 2007년 조사에서 8위를 차지하였다. 머서는 뮌헨의 땅값을 세계 39위에, 독일 1위로 랭크하였다. 뮌헨은 IT, 생명공학, 출판 등의 영역에서 경제적으로 중추적인 부분을 담당한다. 공해도는 낮지만 2006년에 시의회에서 미세입자 농도에 대해 회의를 한 바 있었고, 그린피스를 비롯한 환경 단체가 공해 문제 해결을 촉구하기 위해 집회를 열기도 하였다.

현재, 뮌헨은 함부르크나 베를린 등의 다른 독일 대도시들에 비해 범죄율이 낮다. 이 높은 삶의 질과 안정서에 대해 영미권 시민들은 뮌헨을 "장난감 마을" 이라고 부른다. 한편, 현지인들은 뮌헨에 "100만 마을" (Millionendorf) 라는 별명을 붙였다. (독일어로 "dorf"는 작은 마을을 의미한다. 인구가 100만이 넘지만 도시가 아닌 마을 같은 정취를 가지고 있음을 비유한 별명이다.)

지리[편집]

뮌헨은 알프스 산맥 북부 끝자락에서 50 km 북쪽의 오버바이에른 현 해발 520m 고지대에 위치한다. 인근에 이자르 강과 뷔름 강이 흐른다. 도시를 둘러쌓인 곳은 알파인 산맥 입구지대이다. 도시 북쪽은 모래로 된 부싯돌 지대로, 더이상 알프스의 지질활동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곳이며, 시 남부는 빙퇴석 지대로, 알프스의 지질 영향이 현재 일어나는 곳이다. 이 중간에는 하빙성 지대이다. 이곳의 퇴적 지대는 앏아서, 지하수가 자갈 표면을 침투하여 늪지대를 뮌헨 북부에 조성하였다.

뮌헨은 인근 알프스 산맥의 영향을 받은 대륙성 기후를 보인다. 도시의 위도와 알프스 북쪽 기슭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강수량이 높은 편이다. 간혹, 폭풍우가 예상되지 않은 시점에 퍼부어지기도 한다. 또한, 일교차와 연교차도 큰 편이다. 알프스를 넘어온 바람이 푄 현상에 의해 겨울에도 급격하게 온도가 상승할 수도 있다.

뮌헨은 12월부터 3월까지가 겨울이다. 뮌헨의 겨울은 대체로 춥지만, 가끔가다 푹풍우가 내리기도 한다. 연최저 평균 온도는 1월의 -2.2 °C이다. 겨울에는 몇주간 눈이 쌓이기도 한다. 반대로 연최고 평균 온도는 7월의 24.0 °C이다. 여름은 5월에서 9월까지 지속된다

인구[편집]

2007년 7월을 기준으로, 뮌헨의 인구는 134만명이었으며, 이들 중 30만 129명이 독일 시민권을 가지지 못한 외국인들이었다. 시내에는 터키계와 발칸계 단체가 발달되어 있다. 가장 인구가 많은 외국인은 터키인 (43,309) 이었고, 알바니아인 (30,385), 크로아티아인 (24,866), 세르비아인 (24,439), 그리스인 (22,486), 오스트리아인 (21,411), 이탈리아인 (20,847) 이 그 뒤를 이었다. 뮌헨의 외국인 37%가 유럽 연합 국가들 출신이다.

지도[편집]

각주[편집]

  1. 합스부르크가〉, 《위키백과》
  2. 블라디미르 레닌〉, 《위키백과》

참고자료[편집]

  • 뮌헨〉, 《위키백과》
  • 뮌헨〉, 《나무위키》

같이 보기[편집]

서유럽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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