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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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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버마어: မြန်မာ [mjəmà], 영어: Myanmar)는 동남아시아의 국가이다. 정식 국호는 미얀마 연방공화국(버마어: ပြည်ထောင်စု သမ္မတ မြန်မာနိုင်ငံတော်, 영어: Republic of the Union of Myanmar)이다. 미얀마는 북서쪽으로 방글라데시인도와 접하고 있으며, 북동쪽으로는 중국, 동쪽과 남동쪽에는 라오스태국이 자리하고 있고 남쪽과 남서쪽에는 안다만 해와 벵골 만이 있다. 미얀마는 동남아시아 본토 내에서 가장 면적이 거대한 국가이며, 면적으로는 아시아에서 10번째로 거대한 국가이며 최대 도시는 양곤이다.

개요[편집]

미얀마 국기
  • 수도: 네피도
  • 면적: 676,578 km2
  • 인구: 54,995,829명 (2017년)
  • 공용어: 미얀마어
  • 정치체제: 단일 국가 군사정부
  • 임시 대통령: 민쉐

지도[편집]

역사[편집]

선사 시대[편집]

현재 미얀마 지역에서는 약 75만 년 전부터 호모 에렉투스가 거주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생 인류의 직접적인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는 약 기원전 2만 5천년 전쯤에 미얀마 지역에 살기 시작한 것으로 밝혀져 있다. 기원전 1만년과 6천년 사이에 가공된 석기와 재배된 곡물류 잔해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그때 쯤에 신석기가 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신석기 시대에 그려진 벽화들도 다수 발견된 바 있다.

청동기는 기원전 1500년 정도에 시작되었고, 구리를 청동으로 제련하는 법이 개발되었고 쌀을 재배하고 돼지 등을 기르는 일을 시작하였는데, 이는 세계적으로도 가장 빠른 편에 속한다고 한다. 또한 사가잉 지방에서도 이 시기의 인간 유골들과 정착지의 유적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기원전 500년 즈음에 철기 시대가 도래하였고, 현재 만달레이 남부 지방에서 철기들이 다수 제작되기 시작되었다. 또한 쌀의 막대한 인구 부양력을 바탕으로 거대한 도시들과 마을들이 다수 생성되었고, 기원전 500년과 200년 사이에는 중국과의 교역도 시작하였다. 초기 미얀마 문명은 중국뿐만 아니라 태국 지방과 인도 지방과도 교역을 하였으며, 서로 간의 문화를 주고 받으며 발전을 거듭하였다.

초기 도시국가[편집]

기원전 2세기 즈음, 미얀마 중부 지역의 첫 도시국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현 윈난성에서 이주해온 쀼족들이 이민과 정착을 거듭하며 미얀마 중부에 정착하여 마침내 거대한 도시들을 짓고 국가를 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쀼족의 문명은 인도와의 무역을 통하여 인도에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이 시기에 미얀마 문명의 근간을 이루는 불교도 유입되었다. 또한 쀼족의 문화는 후대의 미얀마 왕조들 대부분에게 바탕이 되어주며 미얀마 문화의 근간을 놓았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9세기경에 여러 도시 국가들은 점차 몸집을 키워 미얀마 각지로 뻗어나갔다. 쀼족의 도시국가들은 중부 지대를 점령하였고, 남부의 몬족들의 도시국가들은 남부 해안선을 따라 서남부 지방을 정복하였다. 그러나 750년경, 쀼족은 중국 윈난성 지방의 왕국인 남조에 멸망당하며 일대의 정치 균형이 깨졌고, 이 빈자리를 9세기 중반 경 이주해온 버마족들이 바간 지역에 소규모 정착지를 세우며 점차 채우기 시작한다. 버마족들의 왕국은 10세기 후반까지도 그저그런 규모의 왕국들 중 하나였으나, 점차 발전을 거듭하며 미얀마 전체를 아우르는 대국으로 성장을 이어간다.

버간 왕국[편집]

버마인들은 1050년대부터 1060년대까지 꾸준하게 인근의 왕국들을 병합하며 성장세를 이어나갔고, 결국 아노야타 왕의 재위기에 공식적으로 바간 왕조를 개창하며 인근 지역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바간 왕조는 이후에도 확장을 계속하여 12세기와 13세기에는 캄보디아 지역의 크메르 제국과 함께 동남아시아의 양대 산맥을 이룰 정도로 국력이 강성해졌다. 상좌부 불교도 점차 마을 수준으로 곳곳이 확산되기 시작하였으나, 고유의 힌두교, 민족종교, 대승불교도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는 있었다. 바간 왕조의 귀족들과 왕실 인사들은 바간의 수도 자체에만 1만 개가 넘는 불교 사찰들을 지었고, 수많은 문화재들을 만들어내며 문화를 찬란히 꽃피웠다. 그러나 13세기 말 경, 몽골인들이 지속하여 침공해 들어오며 1287년에 바간 왕국은 4백여년 만에 무너지게 된다.

무려 4백 여년이나 미얀마 일대를 지배해오던 바간 왕조가 망하자, 이후 약 250여 년 동안은 수많은 왕국들이 난립하며 16세기까지 혼란기가 지속되었다. 몽골족들과 함께 들어온 산족들은 자신들의 왕국들을 세우며 미얀마 북서부 지역과 동부 지역을 장악하였고, 14세기 말 경 즈음에 이르자 산족계의 왕국들은 잉와 왕국과 한따와디 왕국, 이 2개의 왕국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미얀마 서쪽에서는 정치적 분열이 지속되었고, 잠시 통일 왕조가 들어선 적도 있으나 벵골 술탄국의 보호령으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14세기와 15세기에 잉와 왕국은 미얀마를 통일하기 위해 대전을 일으켰으나,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이때 잉와를 제치고 한따와디 왕국이 전성기를 맞았고, 잉와는 갈수록 쇠락해갔다. 결국 1527년 경에는 잉와 왕국이 멸망하였고, 산족들이 1555년까지 미얀마 상부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바간 왕조와 비슷하게, 잉와, 한따와디, 그리고 나머지 산족 계열 왕국들은 모두 다민족 국가들이었다. 이 시기에는 전쟁도 벌어졌으나, 다양한 민족 간의 교류와 문화적 통일도 일어났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때는 미얀마 문화의 황금기라고 불릴 정도로 수많은 문화적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법전이 생겨나고 종교 체계가 잡히며 대규모 사원들이 세워지는 등 문화적으로는 가히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기도 하였다.

따웅우 왕조[편집]

미얀마는 16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재통일이 이루어졌다. 한때 잉와 왕국의 봉신국이었던 따웅우 왕국은 점차 힘을 길러 잉와 왕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다. 이후 따웅우 왕국의 젊은 왕인 따빈슈웨티 왕은 한따와디 왕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명성을 드높였고, 그의 후계자인 바인나웅 왕은 란나, 마니푸르, 몽 마오, 아유타야 왕국, 란상 왕국 등 여러 왕국들을 정벌하며 국력을 신장하고 영토를 넓히며 한시적이나마 동남아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이루며 국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제국은 오래가지 못했고, 1581년에 바인나웅 왕이 사망하며 곧바로 쇠퇴기에 들어가고 말았다. 아유타야 왕국은 곧바로 따웅우 제국을 공격하였고, 상당수의 영토를 떼어갔다. 또한 포르투갈 상인들도 본국의 지원을 받아 포르투갈령 영토들을 상당수 확보하며 따웅우 왕조는 갈수록 쇠락해 갔다.

따웅우 왕조는 1613년에 국력을 재결집하여 포르투갈을 격파하였고, 1614년에는 시암을 꺾었다. 무리한 팽창으로 인한 쓴맛을 제대로 맛본 따웅우 왕조는 이전보다는 작지만 더 안정적인 왕국을 구축하는 데에 주력하였고, 미얀마 대부분, 산족 왕국들 대부분, 란나 지역 등을 통치하였다. 따웅우 왕조의 왕들은 심지어 19세기까지 이어지는 미얀마의 법 체계와 기틀을 잡았고, 봉건 영주들의 세습권들을 대부분 박탈하고 중앙 정부에서 보내는 관리들로 그 자리를 채움으로써 중앙집권적 시스템도 한 층 강화하였다. 또한 해외 각지, 그리고 내수 경제도 활성화시키며 80여 년 동안 전성기를 이루어냈고, 풍요를 누리며 발전을 거듭했다. 그러나 1720년대 이후 외세의 침입이 거듭되며 점차 쇠락하기 시작하였고, 미얀마 하부 지역에 모여 살던 몬족들도 독립을 이루어 한따와디 왕국을 다시 세우는 데에 성공하였다. 한따와디 왕국은 1752년에 잉와 지역을 약탈하였고, 이로 인해 266년 동안 존속된 따웅우 왕조가 멸망하고야 만다.

꼰바웅 왕조[편집]

따웅우 왕조가 멸망하고 난 이후, 미얀마의 영주였던 알라웅파야가 등장하며 두각을 드러냈다. 알라웅파야는 한따와디 왕국과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고, 1759년에는 미얀마 전역을 통일하는 데에 성공, 한따와디 왕국에게 무기를 제공하였던 프랑스와 영국까지 몰아내는 데에 성공하였다. 1770년 경, 알라웅파야의 후계자들은 라오스 일대도 정복하였고, 버마-시암 전쟁에서 아유타야 왕국과 맞서 싸웠으며 중국의 청나라와도 전쟁을 벌여 승리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한편 꼰바웅 왕조가 청나라와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에, 아유타야는 그 틈을 타 1770년 경에 본 영토를 회복하였으며 1776년에는 란나도 공격하였다. 이 때문에 버마와 시암은 1855년까지 전쟁을 벌였으나, 국력이 비등하여 결국 전쟁은 교착 상태로 접어들며 버마가 테나세림을, 아유타야는 란나 지방을 가지는 것으로 평화 조약을 맺었다. 이후 동쪽에는 지나치게 강성한 청나라와 부흥에 성공한 아유타야 왕국이 자리잡게 되자, 버마는 서쪽으로 눈을 돌려 1785년에 아라칸 지방을 정복하였고 1814년에는 마니푸르를, 1817년에는 아삼 지역을 정복하였다. 이는 미얀마 역사상 따웅우 왕조 다음으로 2번째로 거대한 강역이었다.

그러나 이 강역은 오래가지 못했다. 1826년, 1차 영국-버마 전쟁에서 패배한 버마는 결국 아라칸, 마니푸르, 아삼, 테나세림 지방을 영국에게 양도해야만 했고, 1852년에는 2차 영국-버마 전쟁에서 버마 남부 지역을 영국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당시 국왕이던 민돈 민 국왕은 근대화를 시도하였고, 1875년에는 영토를 떼어주면서까지 합병만은 피해나가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세우는 것을 보고 자극받은 영국이 결국 3차 전쟁을 일으키며 미얀마 전체를 점령하며 미얀마는 결국 영국의 식민지로 떨어지고야 말았다.

꼰바웅 왕조의 국왕들은 따웅우 왕조의 행정제도를 이어받아 더욱 발전시켰고, 이로 인해 미얀마 역사상 유례없을 정도의 중앙통제력 강화를 이루어냈으며 내적, 외적으로도 상당히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또한 역사상 처음으로 버마인들의 언어와 문화가 이라와디 계곡 전역에서 우세를 점하는 데에 성공하였으며, 교육도 활발히 진행되어 남성들 거의 대부분, 여성의 5% 정도가 글을 읽을 줄 알며 당대로는 엄청나게 높은 수준의 문해율을 자랑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대의 사회적 발전조차 전세계를 휩쓸던 식민지화와 제국주의의 파도를 피해나갈 수는 없었고, 결국 영국의 식민지로 떨어지고야 만 것이다.

영국령 버마[편집]

18세기에 미얀마는 인도와 인접한 미얀마 서쪽의 아삼, 마니푸르, 아라칸 지방에 자신들의 전통적인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그러나 이같은 행동은 동시기에 점차 동쪽으로 뻗어 나오며 세력을 확장해오던 영국 동인도회사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영국-미얀마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후 약 몇 십년 동안 영국과 미얀마는 충돌을 반복하게 된다. 미얀마는 이 전쟁에서 당시 최강대국이던 영국을 이길 수 없었고, 결국 미얀마 대부분은 영국의 손아귀에 떨어지고야 만다. 수도인 만달레이가 무너지자, 마침내 미얀마 전체가 영국의 지배 하에 놓였으며 1886년 1월 1일에는 공식적으로 영국에 합병되었다.

영국 식민통치기에 수많은 인도인들이 영국인들에 의하여 미얀마로 이주해왔고, 주로 군인, 공무원, 건설 인부, 상인 등 다양한 업종에 종사하면서 미얀마의 부와 권력을 독점해나가기 시작하였다. 영국은 영국령 버마의 수도를 랑군으로 정했고, 캘커타싱가포르 사이의 중요한 항구도시로 발돋움시키며 랑군을 아시아에서도 손꼽히는 대도시로 만들어 나갔다. 다만 영국인들의 통치에 대한 미얀마인들의 반감은 매우 심했고, 랑군에서는 심지어 1930년대까지도 영국에 대한 시위와 폭동이 자주 일어났다. 시위의 이유는 다양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사원에 들어갈 때에는 신발을 벗어야 하는 미얀마의 전통을 영국인들이 지키지 않으며 미얀마를 무시하는 행동을 취한 것등이 있었다. 이때 불교 승려들이 주로 반영 시위를 이끌었는데, 한 승려는 감옥 수감 중 승복을 입는 것을 금지한 영국의 조치에 반발하여 무려 166일간의 단식 시위 끝에 옥중 사망하기도 했다.

1937년 4월 1일에는 버마가 영국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적인 식민지가 되었고, 바 모가 버마의 첫 총리로 지명되었다. 바 모 총리는 버마인들의 자치론자였으며, 영국 본토의 간섭을 매우 싫어하는 편이었다. 얼마 후 발발한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그는 총리직에서 사임하였으며, 소요죄로 구속되었다. 1940년에 일본 제국이 전쟁에 공식적으로 참전하자, 현 미얀마의 국부로도 불리는 아웅 산[1]이 일본에서 버마 독립군을 창설하였다. 버마는 일본과 영국의 주요 전선으로 떠올랐고, 미얀마는 폐허가 되고 말았다. 일본군이 수도인 랑군을 향해 진격을 시작했고, 영국 식민정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졌다. 일본은 직후 바 모 전 총리를 내세워 버마 행정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실제로는 괴뢰 정부를 세워 미얀마를 통치하였다. 상황이 악화되자 영국 측에서는 친디트 특수부대를 구성, 미얀마에서 게릴라전을 펼쳤으며, 지속적으로 전선 후방에서 일본에 상당한 피해를 주기도 했다. 전쟁이 끝으로 치닫던 1944년 말, 연합군이 드디어 미얀마에 상륙하였으며 1945년 7월에는 마침내 미얀마를 해방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다. 세계대전에서 일본은 버마에서 15만 명의 군인들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버마인들은 전쟁 초기에는 일본 측에서 싸웠으나, 점차 일본의 비윤리적인 실태에 실망하여 돌아섰으며, 버마인들이 아닌 소수민족들 대다수는 영국과 연합국 측에서 싸웠다. 버마 독립군 또한 1942년부터 1944년까지는 일본 측에서 싸웠으나, 1945년에는 연합국 측으로 돌아섰다. 약 17만 명에서 25만 명의 버마 민간인들이 전쟁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세계 대전이 종식되자, 전쟁 중 버마를 이끌었던 아웅 산이 소수민족 지도자들과 팡롱 조약을 체결하여 소수민족들이 떨어져나가지 않고 미얀마를 하나의 국가로 독립시키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1947년에는 아웅 산이 미얀마 행정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었으며, 과도 정부의 수반으로 등극하였다. 그러나 1947년 7월에 그의 정치적 라이벌들이 아웅 산과 내각 요인들을 암살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독립[편집]

미얀마는 1948년 1월 4일에 공식적으로 독립 공화국이 되었다. 새 공화국의 이름은 ‘버마 연방’으로 결정되었으며, 우 누를 초대 총리로 지명하였다. 버마 연방은 여러 전 영국 식민지들과는 다르게 영국 중심의 국제기구인 커먼웰스에 가입하지 않았다. 이후 양원제를 기본으로 한 의회가 구성되었고, 다당제에 기반한 선거가 1951년에서 1952년에, 1956년에, 1960년에 한 번씩 시행되었다. 1961년에는 UN의 버마 대표이자 이전 총리보좌관이었던 우딴이 유엔 사무총장에 선출되며 약 10년을 재임하였다. 그 외에도 UN에서 일한 버마인들 중에서는 국부인 아웅 산의 딸이자 1991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아웅산 수치][2] 등이 있다.

한편 버마 연방은 갈수록 상황이 불안정해졌다. 소수민족들은 점차 목소리를 키우며 연방 내에서의 자신들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자 하였고, 민간 정부는 제대로 구심점을 찾지 못한 채 탁상공론을 계속하며 사회적, 경제적으로 추락을 거듭했다. 이 시기에 조용히 힘을 키우고 있던 군부가 마침내 1962년에 쿠데타를 일으켰고, ‘연방제’라는 미명 하에 독재를 실시하며 미얀마의 민주주의를 압살하였다.

군부 독재[편집]

1962년 3월 2일에 네윈 장군이 이끄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미얀마의 권력을 빼앗았으며, 그 때 이후로 2011년까지 미얀마는 군부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된다. 1962년부터 1974년까지 미얀마는 군부 주도의 혁명위원회의 지배를 받았으며, 이 시기에 미디어, 국영기업, 공장 등 대부분의 경제 주체들이 국유화되거나 ‘버마식 사회주의’라는 이름 하에 정부의 통제 하에 놓였다. 군부는 소련식 경제 계획을 모델로 중앙통제식 경제 모델을 내세웠으며, 민간의 투자나 해외 무역 등을 엄격히 통제하였다.

1974년에는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헌법이 채택되었다. 1988년까지는 아예 군부 이외의 정당이 금지된 일당제 국가였으며, 군부 출신 인사들이 유일한 합법정당이었던 버마사회주의계획당(Burma Socialist Programme Party) 내에서 돌아가면서 권력을 차지하였다. 군부의 통치 하에 버마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 중 하나로 전락하였으며, 일반인들의 삶의 질 또한 하락을 거듭하였다. 네윈의 통치기에 전국에서 산발적인 시위들이 일어났으나, 군부는 이 시위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며 반대 의견들을 억눌렀다. 1962년 7월 7일에는 정부가 랑군 대학에서 대학생들이 벌이던 시위를 강제 진압하며 무려 15명의 학생들을 죽이는 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1974년에는 우딴의 장례식 기간 도중 국민들 사이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보이자 이때에도 폭력을 사용하여 진압하였다. 이 외에도 1975년, 1976년, 1977년에도 각각 시위가 일어났으나, 군부는 압도적인 무력을 사용하여 이를 억눌렀다.

1988년에 경제가 혼란에 빠져들고 군부의 억압이 갈수록 심해지자 참다못한 버마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반군부 시위를 일으켰는데, 이를 8888 항쟁이라고 한다. 이 항쟁에서 군대는 수 천명의 시민들을 학살하였고, 이로 인해 국제사회의 엄청난 지탄을 받기도 했다. 군부의 이미지가 갈수록 악화되자, 소 마웅 장군이 군부 내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국가평화발전평의회(SLORC)를 구성, 이미지 변화를 꾀했다. 군부는 1989년 5월에 국회 선거를 계획하였고, 국명도 1989년 6월 18일에 ‘버마사회주의연방공화국’에서 ‘미얀마 연방’으로 바꾸었다.

1990년 5월에는 미얀마에서 거의 3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자유로운 다당제 선거가 열렸고,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국민민주연맹(NLD)이 전체 492석 가운데 392석을 얻는 압도적인 대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군부는 당연히 이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였고, 국가평화발전평의회는 2011년까지 미얀마를 통치하였다. 1997년 6월 23일에 미얀마는 ASEAN에 가입하였으며, 2006년 3월 27일에는 군부가 수도를 랑군에서 옮겨 ‘왕들의 도시’라는 뜻의 네피도로 천도하였다.

2007년 8월에는 연료 가격 상승으로 인하여 사회 분위기가 뒤숭숭해지며 승려들이 주도한 샤프란 혁명이 일어나기도 했다. 군부는 이 또한 강제로 진압하였다. 2007년 9월 26일에는 쉐다곤 파고다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농성하고 있던 승려들을 군대를 동원하여 죽였으며, 이에 반대하던 시민들도 체포하여 고문하거나 학살하였다. 이같은 조치에 대해서 심지어 군부 내에서도 반대의 목소리가 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군부의 이같은 억압은 국제사회에 엄청난 분노를 일으켰고, 이후 미얀마 정부에 대한 국제적인 경제 제재가 시행되기 시작하였다.

이와중에 미얀마에서는 자연재해까지 일어났는데, 태풍이 2008년 5월에 이라와디 강 삼각주에 몰아닥치며 미얀마의 곡창지대에 엄청난 피해를 입힌 것이다. 미얀마 역사상 최악의 자연재해로 기록된 이 사건으로 인하여 약 20만 명에 달하는 국민들이 죽거나 실종되었으며, 약 100만 명이 집을 잃고 떠돌이 신세로 전락하였다. 한편 미얀마 정부는 국내의 열악한 사정이 해외로 유출될까 두려워 UN과 국제사회의 원조를 받기를 거부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국민들의 피해는 갈수록 가중되었다. 이외에도 수많은 국제 인권단체들이 나서 인도주의적 협력을 제안하였으나, 미얀마 정부는 약, 식량, 침구 등 모든 종류의 지원을 거부하였고,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는 갈수록 심화되었다.

2009년 8월에는 미얀마 북부 지방에서 소수민족과의 갈등이 터졌고, 군부는 이에 군대를 파견하여 한족, 와족, 카친족 등 여러 소수민족들과 전투를 벌였다. 8월에 이로 인하여 약 1만 명에 달하는 미얀마인들이 전투를 피하여 인접한 중국의 윈난성으로 도망친 것으로 추산된다.

민정 이양[편집]

국제사회의 압박이 갈수록 심해지고 경제제재가 악화되자, 미얀마 군부는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부분적인 민주화를 계획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미얀마의 국명이 또다시 ‘미얀마 연방’에서 ‘미얀마 연방 공화국’으로 바뀌었으며, 2010년에는 새롭게 제정된 헌법 하에 총선이 실시되었다. 2010년의 총선은 대체적으로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으나, 서구 국가들과 UN 측에서는 이 과정에서 군부 측에서 불법 행위를 저지르는 등 선거 과정에서 문제가 많았다고 비난하였다.

2010년 총선에서 군부의 지원을 받는 통합단결발전당(USDP)가 승리를 거두었고, 전체 득표수의 80%를 받았다고 공표하였다. 그러나 수많은 국제기구들과 인권단체 측에서는 군부가 부정한 방법으로 선거에 개입하였으며, 재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군부 측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군부는 2011년 3월 30일에 공식적으로 해산하여 통합단결발전당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 2010년 총선 이후, 정부 측에서는 여러 개혁조치들을 실시하여 민주주의로의 과정을 조금씩이나마 밟아나가기 시작하였다. 미얀마는 혼합경제, 선거 등의 조치를 도입하였으며, 민주주의 운동가인 아웅산 수치도 오랜 가택연금에서 풀어주었고 국가인권위원회도 신설하였다. 또한 새로운 노동법을 신설하여 노동조합과 파업의 권리를 인정하였고, 언론 검열을 완화하였으며 환율도 정부가 아닌 민간 측에서 일부 담당할 수 있도록 바꾸었다.

이처럼 미얀마가 조금씩 민주화에 진전을 보이자, 국제적인 위상도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ASEAN 회원국들은 미얀마가 2014년에 의장국을 맡는 데에 동의하였으며,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이 2011년 12월에 미얀마를 방문하기도 했다. 이는 거의 약 50여년 만의 일이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한편 빌 클린턴 대통령은 당시 대통령과 군부 지도자, 그리고 아웅산 수치 등 모두를 접견하기도 했다. 한편 미얀마 정부는 국민민주연맹의 정치 참여를 막았던 법을 폐지하여 2012년의 재보궐선거에서 국민민주연맹의 후보를 허가하기도 했다. 또한 역사상 최초로 해외 인사들이 선거 과정을 지켜볼 수 있도록 허락하기도 하였다.

2015년 11월 8일에 또다시 총선이 열렸으며, 이는 1990년 이래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치러지는 선거이기도 하였다. 이 선거에서 NLD는 상원과 하원 모두 압도적인 대승을 거두었으며, 이로인해 국민민주동맹의 지도자가 대통령에 당선될 것이라는 것도 거의 확실해졌다. 다만 국민민주동맹의 상징과도 같은 아웅산 수치는 군부 세력에 의해 법적으로 대통령직에 오를 수 없다고 못박혀 버렸다. 2016년 2월 1일에는 새로운 의원들로 구성된 의회가 출범하였고, 2016년 3월 15일에는 틴쪼 대통령이 1962년 이래 처음으로 비-군부 출신으로 대통령직에 올랐다. 2016년 4월에는 아웅산 수치가 특별 신설직인 ‘국가고문’직에 취임하였다. 참고로 국가고문직은 미얀마 내에서 총리직과 동등한 위치이다.

2021년 군부 쿠데타[편집]

2020년에 미얀마에서 치러진 총선에서는 집권 여당인 NLD가 군부 정당인 통합단결발전당(USDP)를 포함하여 여러 군소정당들과 경쟁하였는데, 결과적으로는 또다시 상원과 하원에서 압도적인 대승을 거두며 476석 가운데에서 396석을 차지하였다. 통합단결발전당과 군부 측에서는 심지어 2015년 총선보다도 악화된 결과가 나오자 엄청난 충격을 받았으며, 전체 476석 중 33석이라는 참담한 실적을 거두고 말았다. 이로 인해 군부는 선거 결과 수용을 거부하였으며, 통합단결발전당은 군부의 감시 하에 새로운 선거를 치를 것을 정부에게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이외에도 선거에 참여한 90여 개 정당들 가운데에서 15개의 정당이 재검표나 재선거를 주장하였으나, 국외 선거 감시자들의 말에 따르면 이번 선거에서 특별히 문제 삼을 만한 점은 없었다고 한다.

군부는 끝까지 선거 부정을 주장하였고, 300여 개가 넘는 선거구에서 8백만 개에 달하는 부정이 발견되었다면서 선거위원회에게 이를 시정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선거위원회 측에서는 이번 선거에서 별다른 부정이 벌어지지 않았으며 이에 따라 재선거나 재검표도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게다가 국민민주동맹의 승리가 워낙 압도적이었기에, 재선거를 치른다고 하여도 국민들의 뜻을 뒤집지는 못할 것이라고 밝혔다. 2021년 1월, 새 의원들이 임기를 시작하기 직전에 정부 측에서는 아웅산 수치 여사가 새 내각에서도 국가고문직을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2021년 2월 1일 아침에 미얀마 육군 장군인 민 아웅 흘라잉이 쿠데타를 일으켜 국가고문인 아웅산 수치를 구금하고 여러 정부 내각요인들을 강제로 체포하였다. 이후 권력을 장악한 흘라잉 장군은 1년 간의 국가비상상태를 선포하였고, 국경 폐쇄, 여행 금지, 전자통신 금지 등 여러 폐쇄적 조치를 내리며 국가권력을 틀어쥐기 시작하였다.

군부는 자신들의 행동이 그저 부정한 선거를 되잡고 새 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입헌적인 절차라고 항변하고 있으며, 군부가 장악한 미디어 측에서는 1년 안에 새로운 선거가 군부의 통제 하에 치러질 것이라고 한다. 다만 군부 측에서 공식적으로 재선거를 공언한 적은 없다. 국가고문인 아웅산 수치와 윈민 대통령은 가택연금 상황에 놓였으며, 군부는 그들에게 온갖 죄목을 동원하여 기소하였다. 군부는 국민민주연맹 출신 정치인들을 수도에서 추방하였으며, 2021년 3월 15일에는 계엄령을 확장 시행하여 양곤에까지 선포하였다. 한편 이에 저항하는 국민들의 시위가 강해지자, 군부는 무력을 사용하여 이를 진압하였고 하루에만 무려 38명에 달하는 국민들을 살해하였다.

쿠데타 2번째 날, 수 천명의 항의 시위대들이 미얀마의 중심도시인 양곤의 거리로 뛰쳐나와 군부의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전국적으로도 수많은 시위들이 벌어졌다. 군부는 이들을 체포하거나 죽이는 것으로 대응하였으나, 이같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공무원, 교사, 학생, 일반인들 등 수많은 사람들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UN 측에서는 곧바로 불법 쿠데타를 규탄하였으며, 조 바이든 대통령을 포함한 각국 지도자들도 이를 비판하였다. 국제사회는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을 포함하여 군부가 불법적으로 구금한 정부 인사들을 석방할 것을 촉구하였으며, 시민들을 상대로 화기를 사용하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2010년대 중반 이후 조금씩 완화되기 시작한 미얀마에 대한 경제 제재도 일부 다시 시행하기 시작하였으며, 국제적인 교류도 다수 차단되었다.[25] 한편 미얀마 군부 측에서는 은행을 강제로 닫았으며,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을 포함한 미디어도 차단하여 해외와의 접속을 차단하였다.

지리[편집]

미얀마의 총 면적은 678,500km2로, 인도차이나 반도의 국가 중에서 가장 크고, 세계에서는 40번째로 크다. 북서쪽은 방글라데시의 치타공구와 인도의 미조람주, 마니푸르주, 나갈랜드주, 아루나찰프라데시주, 북쪽은 중화인민공화국의 티베트 자치구, 북동쪽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윈난성과 접하고 국경의 총 길이는 2,185km이다. 미얀마는 남쪽과 남서쪽으로 벵골만 및 안다만해에 이르는 1,930km의 해안선을 가지고 있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서단에 위치하고 있고, 지형적으로는 서부의 아라칸 산맥, 북부의 고산지대, 중부의 저지, 동부의 샨 및 테나세림 산지가 펼쳐져 있다. 중부는 다시 건조지인 상(上)미얀마분지와 저습지인 하(下)미얀마로 나뉜다.

국토가 남북으로 길기 때문에 차이가 많다. 대부분의 지역이 열대 몬순 기후로서 동쪽의 태국과 비슷하나 만달레이 이북은 온대 동계 건조 기후이다. 그리고 북쪽의 산악 지대는 겨울에 서리도 내린다. 몬순의 영향으로 5월부터 우기이다. 강우량은 하미얀마에서 2,500mm, 산간부에서는 5,000mm에 달한다. 11월에서 4월에 이르는 동안 몬순이 북동쪽에서 불게 되면 비가 거의 오지 않는 건조기가 된다.

네피도 이남 지역은 1월 평균 20도이상 온대와 열대의 경계지역인 중북부의 만달레이에서 미치나에 이르는 지역은 1월평균 15~22도 온대기후에 속하는 최북단의 푸타오지구는 1월평균 13도이다

인구[편집]

2017년까지 미얀마 인구는 54,995,829명이다. 미얀마는 다민족 국가로, 정부 측에서는 135개의 민족들을 인정하고 있다. 인구의 68%를 차지하며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버마족이 가장 대표적인 민족이며,[48] 그 다음이 10%에 달하는 샨족, 7%를 차지하고 있는 카인족, 4%를 차지하고 있는 라카인족, 화교들이 3%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미얀마 전체 인구의 2%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몬족은 인근 캄보디아 계열의 민족으로, 언어학적으로는 크메르계와 관련이 있다. 한편 인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약 2% 정도 있다. 나머지에는 카친족, 친족, 로힝야족, 영국-인도 혼혈인, 구르카족, 네팔인 등이 있으며 나머지는 대부분 소수민족들이다. 특히 식민지 시기에는 영국계 백인들과 버마인들이 결혼하여 낳은 ‘앵글로-버마’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독립 이후 대부분 국내의 혼란을 피해 영국이나 호주로 이민을 가버리며 현재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현재 미얀마에는 많아봤자 약 52,000여 명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2009년 기준으로는 11만 명에 달하는 버마인 난민들이 태국에 있는 난민 캠프에 살고 있다고 전한다.

  • 버마족 68%
  • 샨족 9%
  • 카렌족 7%
  • 중국계 3%
  • 인도계 2%
  • 몬족 2%
  • 기타 5%

각주[편집]

  1. 아웅 산〉, 《위키백과》
  2. 아웅산수찌〉, 《위키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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