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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월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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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해튼의 차이나타운

민족 월경지(民族越境地)는 일정한 지역에서 오랜 세월 동안 공동생활을 하면서 언어와 문화상의 공통성에 기초하여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 집단이 특정 국가나 특정 행정구역에 속하면서 본토와는 떨어져, 주위를 다른 나라·행정구역 등에 둘러싸여 격리된 지역을 말한다. 코리아타운, 차이나타운, 리틀 이탈리아 등이 민족 월경지에 속한다. 이들 지역은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를 지니고 있으며 자체적으로 작동하는 경제 시스템도 보유하고 있다.[1] [2]

개요[편집]

아시아에서는 민족 월경지를 찾아보기 힘들지만, 유럽에서는 현대에도 자주 찾아볼수 있다. 중세 서유럽에서는 근대적인 국가 개념이 잡히기 전이라 오늘날처럼 국경을 넘나드는 일이 어렵지 않았고 거기에 봉건제 특유의 복잡한 상속 방식까지 더해져 월경지가 없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국경선이 복잡했다. 신성 로마 제국이나 프랑스 왕국을 하나의 국가로만 그리지 않고 그 내부의 봉신 국가들을 모두 표시한 지도들을 보면 국경선이 매우 난잡하다. 예를 들어 A국 영주가 먼 친척의 땅 B국 영토를 상속받아 서로 멀리 떨어진 두 땅을 동시에 통치하게 되는 것은 중세 기준으로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생긴 월경지들은 봉건제의 시대가 끝나고 근대 국가가 성립되면서 대부분 행정구역 개편으로 깔끔하게 정리되었지만 일부는 현대까지 그대로 유지되어 월경지를 형성하게 되었다. 또다른 이유는 아시아와 유럽의 문화적, 사회적 차이 때문이다. 아시아권에서 국경은 넘지 못할 금단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고, 전통적으로 특별한 사유와 허가 없이 국경을 넘는것은 죽음으로 다스려지는 중죄였다. 반면 유럽은 국경을 넘는데 큰 거부감이 없다. 오히려 특별한 이유없이 국경을 폐쇄하는건 상대국을 향한 도발이자, 비인도적인 조치로 여겨진다.[3]

세계 각 지역 월경지 역사[편집]

  • 중국 춘추 전국 시대에는 월경지가 많이 존재했다. 특히 진(晉)나라가 조(趙), 위(魏), 한(韓)으로 분할되었을 때 삼국 모두 국경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월경지가 많았다. 특히 위나라는 전성기 때 영토를 확장하면서 너무 많은 월경지가 형성되었고 주변 국가들의 압박으로 쉽게 몰락하였다.
  • 서베를린 : 역사적으로 서베를린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통일될 때까지 동독에 둘러싸여 있었다. 서베를린 바깥에도 동독 영토에 둘러싸여 서베를린으로 가려면 동독 영토를 거쳐야 하는 또다른 월경지들이 있었다.
    • 슈타인슈튀켄(Steinstücken): 서독의 월경지이면서, 또한 서베를린의 월경지였다.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개국의 독일 분할 점령 이후 1972년까지는 확실한 월경지였다. 1971년 4개국간 협정(Four Power Agreement on Berlin)에 따라, 서베를린 ‘본토’와 슈타인슈튀켄 사이를 잇는 기다란 땅을 동독에서 떼어내서 서베를린으로 편입하고 그곳에 도로인 베른하르트 바이어 가(Bernhard-Beyer-Straße)를 만들게 되었다. 서베를린은 그 대가로 사람이 없는 6개의 월경지를 동독에 양도하고 또한 400만 서독 마르크를 지급하였다. 그런데 이 도로에 속한 다리 밑으로 기존 동독 국영철도가 지나가서 문제가 됐다. 그래서 이 철도가 통과하는 구간은 다리와 다리 위 영공은 서독 서베를린에, 이 다리 아래의 땅(철도 포함)과 영공은 동독에 속하게 하여 타협하였다. 1972년 이 도로가 개통되어 서베를린에 편입됨에 따라 슈타인슈튀켄이 월경지인지 아닌지 모호해졌다.
  • 동프로이센: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하여 신생국 폴란드에 일부 영토를 할양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동프로이센은 폴란드 회랑에 의하여 독일 본토와 분리되어 있었다.
  • 동파키스탄 : 파키스탄은 인도에 의해 서부(서파키스탄, 현재의 파키스탄)와 동부(동파키스탄, 현재의 방글라데시)로 분리되어 있었다. 1971년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독립하면서 소멸되었다.
  • 현재의 전라남도 서남부 : 후삼국 시대 태봉은 900년대 초 왕건을 보내 수군으로 나주시, 진도 등을 거점으로 현재 전라남도의 남서부를 정복하였다. 육로로는 후백제가 사이에 있어 떨어져 있었다. 이는 고려 건국 이후에도 지속되었다가 928년 후백제가 되찾아 소멸하였으나, 935년초 유금필의 출병으로 고려가 되찾았다. 곧 이 월경지로 견훤이 항복해온 이후 936년 후삼국이 통일되어 소멸하였다.
  • 동프로이센 :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폴란드 회랑의 설정에 의해 독일 본토에서 떨어지게 되었다. 현재의 러시아령 칼리닌그라드주(州) 북부에 해당하는 지역.
  • 아랍 연합 공화국 : 이집트와 시리아. 1958년에서 1961년까지.
  • 자다르 : 전간기(戰間期: interwar period) 달마티아 지방(오늘날 크로아티아)에 있던 이탈리아령의 일방면해지.
  • 과다르 : 1783년 오만의 술탄이 이 곳을 차지하면서부터 오만의 영토로 남아있었지만 1958년 오만이 파키스탄에 300만 영국 파운드를 받고 매각하면서 파키스탄의 영토가 됨.
  • 월비스베이 : 나미비아(당시 남서아프리카)에 있던 남아프리카의 일방면해지. 1994년 나미비아에 반환.
  • 인도와 방글라데시의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에 많은 월경지가 존재했다. 2015년 8월 1일에 월경지가 교환되어 국경 문제가 해소되었다.

대표적인 민족 월경지 지역[편집]

코리아타운[편집]

동아시아의 코리아타운[편집]

일본[편집]

도쿄 신오쿠보와 오사카 이쿠노 코리아타운이 있다.

중국[편집]

중화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이 국교를 수립한 이래, 중국으로 가는 한국인 유학생들 수가 늘고 한국 기업들의 진출도 늘어나면서 코리아타운이 생겼다. 베이징 우다오커우와 차오양구 왕징, 선양 시타(서탑), 칭다오 청양구, 상하이 민항취 홍췐루, 홍콩 침사추이 킴벌리 거리 등에 코리아타운이 있다.

동남아시아의 코리아타운[편집]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타이 방콕에 코리아타운이 있으며, 싱가포르, 필리핀 마닐라, 베트남 하노이와 호치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및 땅어랑시 까라와치, 브까시군 찌까랑에 한인이 많이 모여 살고 있다.

북미의 코리아타운[편집]

미국[편집]

미국은 한국계 교민이 두 번째로 많이 사는 곳으로, 하와이와 캘리포니아를 시작으로 많이 정착했다. 미국에서 제일 큰 코리아 타운이자 세계에서 제일 큰 코리아 타운은 로스앤젤레스의 코리아타운이다. 1992년에 일어난 로스앤젤레스 폭동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흑인 빈민 출신 소녀가 한국 출신 이주민의 상점에서 도둑질한 것으로 오인받아 실랑이가 발생, 상점 주인 두순자는 권총으로 흑인 여성을 살해하면서 흑인 사회의 분노를 촉발시켰던 것이다. 이후 1개월 뒤 미국 연방정부의 사태 중재로 일단락된 바 있다. 뉴욕에는 맨해튼에 코리아타운이 있는데, 미국에 있는 코리아타운 중에서 로스앤젤레스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이다. 또한 퀸스 구역에는 한국인 공동체가 있다. 로스앤젤레스와 뉴욕 말고도 매사추세츠 보스턴, 펜실베이니아 필라델피아, 뉴저지 버겐 카운티, 버지니아 애난데일, 조지아 애틀랜타, 일리노이 시카고, 텍사스 댈러스, 콜로라도 덴버,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도 코리아타운이 있다.

캐나다[편집]

한국인이 많이 살고 있는 두 도시 토론토, 밴쿠버에 코리아타운이 있다.

멕시코[편집]

수도 멕시코시티 소나로사(Zona Rosa)에 페케뇨 세울(Pequeño Seúl, 리틀서울)이라고 불리는 코리아타운이 있다.

중남미의 코리아타운[편집]

브라질 상파울루,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칠레 산티아고에 코리아타운이 있다.

오세아니아의 코리아타운[편집]

오스트레일리아(호주)의 시드니 코리아타운은 시드니 남부 캠시, 서부 스트라스필드, 북부 이스트우드, 에핑, 채스우드에 있다. 이 중 캠시에 처음 코리아타운이 생겼으며, 스트라스필드가 규모가 가장 크다. 또한 도심 피트 스트리트와 리버풀 스트리트 교차점에도 코리아타운이 있으며, 이 구역에는 각종 한국 음식점과 미용실, 편의점, 카페, 관광상품점, 한국식 중국 음식점 등 다양한 한인 상점들이 밀집해 있다. 뉴질랜드의 최대도시 오클랜드의 근교인 노스쇼어시티에 한인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다.

유럽의 코리아타운[편집]

영국 런던의 뉴몰든 지역에 코리아타운이 있다.

차이나타운[편집]

일본의 차이나타운[편집]

아시아 최대 크기이며 중화가(中華街)라고도 불리는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을 필두로 고베 차이나타운, 나가사키 차이나타운과 같은 기존 빅3 외에 최근엔 도쿄에 이케부쿠로 차이나타운이 형성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차이나타운[편집]

대한민국의 인천 중구 북성동 인천역 앞에는 짜장면의 탄생지인 차이나타운이 있다. 개화기에 한국에 온 화교(중국사람)들이 치외법권 적용을 받던 공동체인 즉, 중국 조계지였던(참고로 일본사람들이 치외법권 적용을 받던 공동체였던 일본 조게지는 인천광역시 중구청 및 주변이다. 일본 하역회사(지금의 팟알카페), 영사관(지금의 인천 중구의회), 상인들이 의상실, 잡화점 등 가게로 사용하는 일본 전통가옥이 있다.) 차이나타운에는 화교들이 공부하는 중산학교 담장에 삼국지 벽화가 있다. 담장에는 삼국지의 줄거리와 벽화가 그려져 있다. 화교들의 종교공동체인 천주교 인천교구 해안성당, 도교 법당인 의선당(義善黨, 도교의 여덞 신선들이 바다를 건너는 벽화가 있다.), 월병, 공갈빵을 파는 가게, 천주교 제물포 순교성지(1845년 김대건 부제가 페레올 주교를 조선 천주교회의 큰어른으로서 모셔오기 위해 교우들과 중국 상하이에 출발했다는 곳이며,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있다.)등이 있다. 부산에도 중구 영주동 부산역 맞은편에 차이나타운이 있으며, 화교 학교 등이 시설이 건립되어 있다. 1998년 안상영 시장 시절 상하이시(上海)와 자매 결연을 맺은 후 상해가(上海街, 혹은 상해 거리)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최근에는 러시아인 유흥가와 접하여 차이나타운으로서의 분위기를 잃어가고 있으나 규모는 커지고 있다. 또한 매년 가을 '부산 차이나타운특구 문화축제'를 개최한다. 그 밖에 서울 마포구 연남동과 서대문구 연희동, 영등포구 대림동, 구로구 구로동 등의 상점 골목이 있다

미국과 캐나다의 차이나타운[편집]

미국과 캐나다에는 서부 지역에 골드러시와 철도 공사가 시작되면서 많은 중국인들이 노동자로 들어오기 시작하며, 그들의 인구가 늘어났다. 화교들의 이민이 늘면서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뉴욕, 밴쿠버, 토론토, 몬트리올 등의 대도시들에 차이나타운이 생겼다. 또한 1997년 중화인민공화국에 이양될 예정이었던 홍콩에서 중국 공산당의 통치에 위협을 느껴, 대다수가 밴쿠버에 정착하였다. 그리하여 "홍쿠버"(홍콩 + 밴쿠버)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가장 큰 곳은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인데 약 4만 명이 거주하며, 상점·학교 등 외에 절·극장까지 갖추고 있다.

영국의 차이나타운[편집]

영국이 홍콩을 지배한 후에 그쪽에서부터 많이 영국으로 이주하였다. 런던, 버밍엄, 맨체스터, 리버풀, 뉴캐슬 등의 대도시에 차이나타운이 생겼으며, 특이 맨체스터의 차이나타운이 영국에서 가장 큰 규모로 알려져 있다.

그 밖의 차이나타운[편집]

유럽에서는 파리의 차이나타운이 유명하고, 동남아시아에서는 쿠알라룸푸르, 자카르타의 차이나타운이 잘 알려져있다. 오스트레일리아에도 시드니, 멜번 등의 대도시에 차이나타운이 들어섰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민족〉, 《네이버 지식백과》
  2. 월경지〉, 《위키백과》
  3. 월경지〉,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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