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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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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
바르샤바 위치

바르샤바(폴란드어: Warszawa, 영어: Warsaw, 문화어: 와르샤와), 공식적으로는 수도 바르샤바(Miasto stołeczne Warszawa)는 폴란드수도이자 최대 도시로 폴란드 중동부의 비스와강 연안에 위치한다. 인구는 186만 명이며 대도시권을 포함하면 310만 명으로 유럽 연합 6위이다. 18개 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면적은 517km²이고 대도시권을 포함하면 6,100km²이다. 세계도시이자 문화, 정치, 경제, 교통의 중심지이며 정부 소재지이다. 냉전 시대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있었던 도시로 유명하다.[1]

개요[편집]

바르샤바는 폴란드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이며 행정구역상 마조비에츠키에주에 속해 있으며 그 주도이다. 바르샤바의 기원은 마조프셰의 작은 어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6세기 후반 지그문트 3세는 수도와 궁정을 크라쿠프에서 바르샤바로 옮겼고 바르샤바는 1795년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의 사실상 수도였다. 이후 나폴레옹은 이곳에 바르샤바 공국을 세웠다. 19세기와 산업혁명으로 인하여 인구가 폭증했고 그 결과 유럽에서 가장 크고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바르샤바는 당시 우아한 건축물과 거리로 알려져 있었으나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포위와 폭격을 당했다. 1943년 게토 봉기, 1944년 바르샤바 봉기, 그리고 나치의 체계적인 파괴로 인하여 역사적 시가지 대부분은 파괴되었고 인구 다양성은 사라졌다. 바르샤바에는 2개의 국제공항이 있다. 쇼팽 공항과 모들린 공항인데 후자는 저비용 항공사를 위하여 건설되었기 때문에 비교적 작다. 주요 대중교통으로는 지하철, 버스, 통근 열차, 트램 등이 있다. 바르샤바는 R&D, BPO, IT 아웃소싱의 주요 중심지이다. 바르샤바 증권거래소중앙유럽동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최대 거래소이다. 유럽 국경 연안 경비 기관(Frontex)와 유럽 안보 협력 기구의 주요 기관 중 하나인 민주제도인권사무소(ODIHR)의 본부가 있다. 바르샤바는 유럽에서 마천루가 가장 많은 도시 중 하나이며 바르소 타워(Varso Place)는 유럽 연합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다.[2]

바르샤바에는 바르샤바 대학교, 바르샤바 공과대학교, SGH 바르샤바 경제대학교, 쇼팽 음악대학교, 코즈민스키 대학교 등의 유명 대학이 있다. 또한 폴란드 과학 아카데미, 국립 필하모니 관현악단, 국립박물관, 자헹타 미술관, 세계 최대의 바르샤바 대극장도 위치하여 있다. 거의 모든 유럽의 건축 양식과 시대가 녹아있는 복원된 구시가는 1980년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이외의 주요 건축물로는 왕궁, 지그문트 기둥, 빌라누프궁, 와지엔키궁, 성 요한 대성당, 리네크 스타레고 미아스타, 왕의 길을 따라 위치한 많은 교회와 저택들이 있다. 바르샤바 동물원은 폴란드에서 가장 크고 방문자가 가장 많은 동물원 중 하나이다. 바르샤바에는 활기찬 예술과 클럽, 맛있는 식당, 광대한 녹지, 도시 면적의 약 1/4에 해당하는 공원이 있다. 바르샤바는 스포츠에서도 일류 축구 팀인 레기아 바르샤바, 바르샤바 마라톤, 국립 축구장 스타디온 나로도비(Stadion Narodovi)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3]

어원[편집]

바르샤바의 이전 표기로는 바르셰바(Warszewa), 바르쇼바(Warszowa), 보르셰바(Worszewa) 또는 베르셰바(Werszewa) 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기원은 확실하지도 않고 완전히 알아내지도 못했다. 원래 바르샤바는 비스와강의 둑에 있는 작은 어촌의 이름이었다. 어떤 학설에 따르면 바르샤바는 "바르시에 속한다"는 의미이다. 바르시는 어원적으로 브로츠와프(Wrocław)와 관련된 고대 폴란드어 남성 이름 바르치솨프(Warcisław)를 줄인 것이다. 하지만 -awa로 끝나는 대도시 이름은 드물다. 일반적으로 개인의 이름에서 파생된 폴란드 도시 이름은 -ów/owo/ew/ewo로 끝난다. 민간 어원에서는 바르스(Wars)와 사바(Sawa)에서 왔다고 본다. 전설에는 몇 가지 버전이 있는데 그 중 하나에 따르면 사바는 어부인 바르스가 사랑에 빠진 인어로 비스와강에 살았다. 공식적인 명칭은 수도 바르샤바(miasto stołeczne Warszawa)이다.

폴란드어로 바르샤바 사람은 남자일 경우 바르샤비악(warszawiak) 또는 바르샤비아닌(warszawianin), 여자일 경우 바르샤비안카(warszawianka), 여럿일 경우 바르샤비아치(warszawiacy) 또는 바르샤비아니에(warszawianie)라고 한다. 다른 언어로는 영어: Warsaw, 프랑스어: Varsovie, 독일어: Warschau, 이탈리아어: Varsavia, 라틴어: Varsovia, 리투아니아어: Varšuva, 러시아어: Варшава, 세르비아어: Варшава, 스페인어: Varsovia, 이디시어: וואַרשע이다. 이외의 언어로는 wikt:Warsaw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리 및 기후[편집]

바르샤바는 폴란드의 중동부의 중앙 마조프셰 저지대에 있으며 평균 고도는 해발 100m 정도이며 도시의 약 4분의 1이 공원이다. 시내에는 여러 개의 언덕이 있는데 대부분은 인공 언덕이다. 비스와강의 중류에 위치하며 시가지는 그 양안으로 펼쳐져 있다. 카르파티아 산맥이나 발트해에서는 대략 350km 떨어져 있다. 여름은 짧고 따뜻하며 겨울은 길고 춥다. 연평균 기온은 8.5℃이며 1월 평균 –1.8°C, 7월 평균 19.2°C이다.

역사[편집]

13세기의 바르샤바는 어촌 마을로 마조프셰(Mazowsze) 공작령에 속해 있었다. 공작 가문의 대가 끊어지면서 영토는 1526년 폴란드 왕국에 편입되었다. 당시 폴란드는 야기에우워(Jagiellonian) 왕조(1386~1596) 치하에서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일종의 국가연합을 이루고 있었다. 야기에우워 왕조의 마지막 왕인 지그문트 2세(재위 1548~1572)는 1569년 루블린 연합조약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군주제 연합국가(폴란드 · 리투아니아 왕국)로 합쳐진 양국은 외교정책은 공동으로 펴되 군대, 행정조직은 독자적으로 운용했다. 국왕은 양국 귀족대표가 선출했으며 바르샤바가 연합의회 개최지로 선택되었다.

1596년 지그문트 3세(재위 1587~1632)는 왕궁을 크라쿠프(Kraków)에서 바르샤바로 이전했다. 1611년에는 바르샤바를 왕국의 공식 수도로 지정했다. 폴란드 수도로서 바르샤바의 역사에는 번영과 수난이 교차한다. 1655년부터 5년에 걸친 스웨덴의 침략과 파괴, 약탈에 이어 18세기 후반 주변 3개국에게 3차례에 걸쳐 국토를 분할 당하다 결국 나라를 잃었다.

1772년 러시아(예카테리나 여제)와 프로이센(프리드리히 2세 대왕), 오스트리아(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모여 폴란드 왕국 영토를 나눠 가지는 분할조약에 합의했다. 분노한 국민 여론을 업고 폴란드 왕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토 포니아토프스키(재위 1764~1795)는 1791년 5월 3일 왕의 선출 제도와 귀족대표에 의한 만장일치제, 귀족대표의 거부권 등 연합왕국의 비효율적 요소를 없애고 명실공히 독립을 이루기 위한 신헌법을 제정하였다. 유럽 최초이자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의 성문헌법이었다.

신헌법에 반발한 폴란드, 리투아니아 귀족들은 동맹을 맺고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왕의 조카인 유제프 포니아토프스키, 미국 독립전쟁에서 맹활약했던 타데우슈 코시치우슈코(1746~1817) 등이 국왕 편에서 분전했으나 패배하고 말았다. 러시아와 프로이센이 폴란드 응징에 나섰다. 1793년 러시아가 영토의 동쪽을, 프로이센은 서쪽 비엘코폴스카 지역을 빼앗아가는 2차 분할이 이루어졌다. 두 번째 분할에 국민은 물론 귀족들도 충격에 빠졌다.

1794년 코시치우슈코 장군이 지도자가 되어 농노제 폐지를 약속하고 농민들을 모아 군대를 조직, 한때 러시아군을 물리쳤다. 수도 바르샤바에서는 얀 킬린스키가 군대를 일으켜 러시아군을 몰아냈다. 반격에 나선 러시아 · 프로이센군이 전세를 뒤집어 바르샤바를 2개월간 포위 공격했다. 전투 끝에 코시치우슈코 장군이 러시아군에 대패하고 그 자신도 부상해 포로가 되었다.

바르샤바는 함락당했고, 러시아군은 무차별 학살, 처형과 시베리아 유형 등으로 보복했다. 포니아토프스키 왕은 권좌에서 쫓겨나 시베리아로 이송됐다. 그는 결국 폴란드, 리투아니아 왕국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1795년 폴란드의 나머지 영토 중 바르샤바는 프로이센이, 크라쿠프는 오스트리아가, 빌르노(Wilno) 지역은 러시아가 점유하는 3차 분할이 시행되면서 2세기 전만 해도 유럽 초강대국이었던 폴란드는 지도에서 사라졌다.

1807년 보나파르트 나폴레옹(1769~1821) 프랑스 황제가 프로이센을 굴복시키고 바르샤바에 입성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와 틸지트 조약을 맺고 프로이센이 차지했던 지역에 바르샤바 대공국을 세웠다. 나폴레옹은 대공국의 군대 지휘권을 자신의 휘하에서 활약하던 폴란드인 유제프 포니아토프스키 장군에게 부여했다. 바르샤바 대공국은 1813년까지 7년간 존속했다. 폴란드인들은 독립에 대한 열망을 ‘구원자 영웅 나폴레옹’에 투영한 것이었으나, 나폴레옹의 입장에서 대공국은 폴란드인들을 자기 군대에 끌어들이기 위한 방편이었다.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때도 폴란드군은 대거 동원되었다. 67만 병력 중 10만 명이 폴란드 군이었다. 러시아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바르샤바 공국은 병력이 70%나 줄었다. 포니아토프스키 장군은 1813년 10월 나폴레옹군과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스웨덴 연합군이 맞붙어 나폴레옹이 패한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전사했다. 러시아는 바르샤바 대공국을 점령했다.

나폴레옹 몰락 후 열린 빈 회의(1814~1815)에서 바르샤바 대공국 영토 대부분은 러시아가 사실상 지배하고 러시아 황제가 왕을 겸하는 폴란드 왕국 치하로 넘어갔다. 바르샤바는 국권 상실 이후 여러 차례 저항했다. 1830년 11월 폴란드인 장교와 사관생도들이 봉기하자 시민들도 대거 합세했다. 반란군은 바르샤바를 장악했고 1831년 1월에는 의회 결정으로 러시아 황제를 폴란드 왕에서 내쫓았다. 그러자 러시아가 대군을 보내 공격해왔다. 1831년 9월 반란군은 러시아에 항복했다. 러시아는 1830년 봉기 이후 폴란드인의 자치권과 군대를 없애고 러시아 관리와 군대를 폴란드에 파견했다.

1863년 1월 봉기 때는 바르샤바에 폴란드 임시정부까지 세웠지만 역시 러시아 군대에 의해 무너졌다. 1863년 봉기 후에는 러시아어를 공용어를 삼고 학교에서 러시아어만 쓰게 강요했다. 1897년 러시아제국 인구조사에 따르면 바르샤바는 인구 626,000명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에 이어 러시아제국 세 번째 도시였다.

1914년 발발한 1차 세계대전은 1918년 독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패배로 끝났다. 전후 열린 파리 강화회의와 베르사유 조약 덕분에 폴란드는 1795년 망국 후 123년 만에 독립을 이루었다. 러시아 차르 체제를 무너뜨린 볼셰비키 혁명정권이 1918년 독일과 맺은 브레스트 · 리토프스크(Brest · Litowsk) 조약도 폴란드 독립에 기여했다. 바르샤바는 다시 폴란드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다.

독립 폴란드는 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7년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옛 폴란드 왕국 영토였던 서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를 되찾기 위해 소비에트 러시아와 전쟁(1919~1921)을 벌였다. 폴란드 · 소비에트 전쟁에서 러시아 적군(赤軍)은 1920년 8월 수도 바르샤바 근처까지 진격해 왔다. 양측 각각 10만 이상의 병력이 동원된 ‘바르샤바 전투’에서 폴란드군은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러시아군 1만 5,000명 이상이 전사하고 약 6만 5,000명이 포로로 잡힌 데 비해 폴란드군 전사자는 4,500여 명이었다. 폴란드에서는 바르샤바 전투를 ‘비스와의 기적’이라 부른다. 1921년 3월 리가(Riga) 조약 체결로 전쟁은 종료됐다.

폴란드는 승전 덕분에 원하던 서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지역을 얻었다. 폴란드 국경은 동부로 200km 이상 확장됐다. 그러나 소련은 훗날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나치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서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에 기존 폴란드 영토 일부까지 더해 되찾아갔다.

폴란드 · 소비에트 전쟁의 결과는 공산주의 혁명의 유럽 서진(西進)을 막았다는 의미도 있다. 러시아 혁명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은 폴란드를 독일-프랑스로 뻗어 나가는 혁명 수출의 중간 다리로 간주했다.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9월 27일 바르샤바가 항복함으로써 폴란드는 독일 지배하에 들어갔다. 폴란드 정부는 파리를 거쳐 런던에 망명정부를 세우고 저항운동을 벌였다.

나치 치하 바르샤바에서는 폴란드인과 함께 수많은 유대인이 희생됐다. 나치 독일은 1940년 45만 명 이상의 유대인을 폴란드 곳곳에 설치한 게토(유대인 집단거주지)에 가두었다. 1942년부터는 게토의 유대인들을 강제수용소로 끌고 가 학살했다. 1943년 4월 18일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투쟁은 한 달 가까이 계속됐으나 결국 독일군의 막강한 화력과 초토화 작전으로 괴멸됐다. 봉기 목격자들과 일부 역사가는 바르샤바 게토 봉기가 ‘자유를 위한 싸움이 아니라 품위 있게 죽기 위한 싸움’이었다고 말한다.

1944년 8월 1일에는 바르샤바 봉기가 일어났다. 당시 소련 육군은 독일군을 물리치며 바르샤바 동쪽까지 접근했다.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와 바르샤바 저항 시민들은 독일군을 속히 쫓아내 소련군보다 먼저 바르샤바를 해방시킴으로써 향후 명분을 확보하려고 계획했다. 소련도 바르샤바 시민의 투쟁을 촉구했다. 소련 지도자 스탈린은 2차 세계대전 내내 폴란드 망명정부의 대표성을 부인하는 동시에 폴란드 내에 친소파 세력을 키우려고 노력했다.

바르샤바 봉기는 63일간 지속됐다. 군인, 시민 등 바르샤바 저항군은 약 5만 명이었으나 무장한 사람은 5,000명에 불과했다. 저항군은 초기에는 시내 대부분을 장악했으나 곧 독일군의 반격을 받았다. 독일군은 중무장한 16,000명과 인근 지원부대 3만 명에 전차, 폭격기까지 동원했다. 1944년 10월 2일 저항군은 독일군에 항복했다.

바르샤바 시민 약 18만 명과 폴란드군 1만 6,000명 이상이 사망했고, 약 70만 명의 시민이 독일군에 체포돼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독일군의 철저하고 계획적인 보복으로 왕궁, 구시가지, 대학, 성당이 차례로 파괴됐다. 바르샤바의 집 10채 중 9채가 불타고 부서졌다. 도시를 관통하는 비스와 강의 다리도 모두 사라졌다.

소련군은 1945년 1월 17일 독일군이 막 퇴각한 바르샤바에 입성했다. 폴란드에는 소련 주도로 1944년 6월 폴란드 민족해방위원회가 설립돼 있었다. ‘루블린 위원회’로 불린 이 조직을 소련은 1945년 1월 5일 폴란드 임시정부로 승인했다. 공산주의 세력을 기반으로 1947년 폴란드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고, 이후 44년 간 폴란드는 소련의 위성국가로 존속했다. 바르샤바는 폴란드인민공화국의 수도였다.

1939년 1,300,900명이었던 바르샤바 인구는 1945년 422,000명으로 무려 67.6%가 줄었다. 전쟁으로 시가지의 85%가 파괴된 바르샤바의 복구 활동은 전후 곧바로 시작되었다. 1945년 바르샤바 재건 계획이 마련돼 1953년까지 복구 작업이 계속됐다. 파괴된 건물들의 설계도면은 물론, 과거 폴란드 왕국의 궁정화가로 활동한 이탈리아 출신 화가 베르나르도 벨로토(1721~1780), 마르첼로 바치아렐리(1731~1818)가 남긴 18세기 풍경화들도 시가지 복원에 활용되었다. 덕분에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복구 작업이 이루어졌다.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는 1980년 복구된 바르샤바 지역에 대해 ‘13~20세기에 걸친 역사를 거의 완벽히 복원해 낸 걸출한 사례’라며 세계 문화 및 자연유산으로 등재했다. 2011년에는 도시 복구에 쓰인 자료인 ‘바르샤바 재건사무소 기록물’도 UNESCO 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덕분에 바르샤뱌는 불사조 도시(Phoenix city)라는 새로운 별칭을 얻었다.[4]

교통[편집]

바르샤바는 항공, 철도, 운하 등으로 세계와 연결되는 교통 요충지로 쇼팽공항(Chopin Airport)과 바르샤바모들린공항(Warsaw Modlin Airport) 등 2개의 국제공항이 있다. 쇼팽공항은 시내에서 불과 10km 정도로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바르샤바의 관문 역할을 한다. 쇼팽공항은 매일 100여 개의 국내외 노선이 운항되고 있으며, 2017년에는 15,500,000만 명의 승객이 이용하였다. 쇼팽공항은 폴란드는 물론이고 중동 유럽에서 가장 큰 공항으로 서유럽과 동유럽 그리고 유럽과 러시아를 잇는 핵심공항이다. 한편 바르샤바모들린공항은 시내에서 35km 떨어진 위치에 있으며 원래 군용공항이었으나 2012년 새롭게 민항공항으로 개장한 것으로 폴란드 국내선 노선이 주로 운항한다.

바르샤바의 대중교통은 2개의 지하철 노선과 170여 개의 버스 노선을 연계하여 남북과 동서를 잇고, 79개에 달하는 트램 노선이 시내 전역에 촘촘하게 구축되어 있다. 바르샤바 트램 노선의 총연장은 132㎞로 유럽에서 가장 길다. 이외에 4개 노선의 시내 급행철도(Urban Rapid Rail)가 운행된다. 바르샤바의 지하철은 1호선이 1995년, 그리고 2호선은 2010년과 2015년에 부분적으로 개통되어 총 연장 32㎞에 이른다. 시는 증가하는 만성적인 교통체증을 해소하기 위해 새로운 지하철 노선 건설을 계획하고 있다.

시를 둘러싼 도로망이 취약하고 대부분의 도로가 시내 중심으로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출퇴근 시간에는 교통 체증이 극심하다. 또한 공산주의 시절에 차량 증가를 예상치 못하고 도로를 건설하여 늘어나는 교통량을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따라 바르샤바 시 당국은 2000년대 이후 유럽연합으로부터의 재정 지원과 외국인 투자를 통해 시내 전역에 고가도로와 다리를 건설하였고, 시를 둘러싼 3개의 외곽도로 건설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바르샤바 시내를 관통하는 비스와강에는 8개의 다리가 있는데, 이중 3개는 2000년대 이후에 건설된 것이다. 한편 폴란드 정부에서는 유럽연합의 재정지원을 통해 2012년 둑일 베를린에서 서부의 포즈난(Poznań)-우쯔(Łódź)-바르샤바를 잇는 A2 고속도로를 완공하여 서유럽과의 육로 운송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5]

관광[편집]

제2차 세계대전 이전 바르샤바는 경제적으로 번영하고 유럽의 건축양식을 모두 확인할 수 있는 건축물이 많아 유럽인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였다. 그러나 제2차 대전으로 시내 대부분이 파괴되어 현재는 복원된 궁전과 공원 그리고 현대적인 빌딩숲을 이룬 시가지가 조화를 이룬 곳이 되었다. 2004년 폴란드가 유럽연합에 가입하면서 서유럽과 도로망이 구축되고 유럽연합과 유럽자유무역연합(EFTA) 국가 간 자유이동을 위한 솅겐협정이 체결되면서 바르샤바는 프라하, 크라코우와 함께 중동 유럽에서 관광객이 많이 찾는 도시가 되었다. 바르샤바는 늦은 봄부터 초가을인 5월부터 9월까지의 기온이 가장 쾌적하여 이 시기에 관광객이 집중적으로 몰린다.

바르샤바의 대표적 명소는 구시가지로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신고전주의 등 다양한 유럽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건물이 한곳에 위치하며 1980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전후 구시가지는 여러 사료를 참조하여 시가지의 원형과 대부분의 건물이 거의 완벽하게 복원되어 유서깊은 바르샤바의 역사를 보여준다. 구시가지에서 가장 인기있는 건축물은 1390년에 고딕양식의 붉은 벽돌로 지어진 성 요한대성당(St John's Cathedral)이다. 성 요한대성당은 1944년 바르샤바 시민과 독일군과의 전투로 크게 파괴되었으나 전후 복구되었고 구시가지 전체와 함께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1952년에 지어진 상인가문인 발츠코 가옥(the house of the Baryczko)은 전형적인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이다. 이외에도 구시가지에는 1644년에 세워진 국왕 지그문드의 석조기둥(iconic King Sigismund's Column), 1683년에 건설된 구시가지의 크라신스키 궁전(Krasiński Palace) 등 역사적인 건물이 즐비하다. 바르샤바 궁전(The Royal Castle in Warsaw)은 1596년부터 건축이 시작되어 1619년에 완공되었고 이후 부분적인 증축으로 르네상스 양식 등 다양한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바르샤바 궁전은 1944년 파괴되었다가 1970년대부터 15년에 걸쳐 복원된 건물로 매년 500,000여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바르샤바의 명소이다.

구시가지 남쪽에 위치한 왕가의 거리(Royal Route)는 여러 유서깊은 교회와 대통령궁(Presidential Palace)과 함께 아름다운 바르샤바대학교(University of Warsaw) 캠퍼스가 위치하여 구시가지와 함께 관광객이 많이 들르는 곳이다. 이외에도 시내 곳곳에 유서깊은 건축물이 많이 있다. 17세기에 건설되어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폴란드의 문화를 상징하는 빌라누프 궁전(Wilanów Palace)은 바로크 양식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시내의 로얄배스공원(Warth Baths Park)에 있는 아일궁전(Palace on the Isle)과 바르샤바 대극장(Great Theater)은 모두 18세기말에 건축된 신고전주의 건축물이다. 또한 바르샤바공과대학교 건물은 19세기 건축양식을 잘 보여준다. 이외에도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묘지 중 한 곳인 포바스키 묘지(Powązki Cemetery)는 19∼21세기 폴란드 조각가들의 다양한 작품이 묘지 내에 산재하는 독특한 곳이다.[6]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바르샤바〉, 《위키백과》
  2. 바르샤바(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3. 바르샤바〉, 《나무위키》
  4. 바르샤바〉, 《요다위키》
  5. 바르샤바의 교통〉, 《네이버 지식백과》
  6. 바르샤바(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동유럽 같이 보기[편집]

동유럽 국가
동유럽 도시
동유럽 지리
동유럽 문화
동유럽 주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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