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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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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芬皇寺) 전경
분황사 모전석탑
분황사 석정
보광전
모전석탑 인왕상 몾너석탑 몸돌의 네 면에 모두 문을 만들고, 양쪽에 불법을 수호하는 인왕상을 조각해 놓았다.
화쟁국사비부(和諍國師碑趺) 원효대사의 비문을 세우는데 썼다고 한다.
보광전 약사여래입상 보광전 안에 동 5360근으로 만든 약사여래입상이 서 있다.

분황사(芬皇寺)는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에 있는 사찰이다. 선덕여왕(善德女王) 3년(634년)에 낙성된 이래 불교가 융성했던 신라의 전성기와 함께했던, 1,400년 동안 법등(法燈)을 밝혀 온 유서 깊은 사찰이다. 송고승전(宋高僧傳)에는 왕분사(王芬寺)로 잘못 적혀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으로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佛國寺)의 말사로써, 현재의 규모는 약사도량(藥師道場)으로써 약사불(藥師佛)을 모신 보광전(普光殿)과 석탑, 그리고 요사채의 단촐한 규모일 뿐이지만, 신라 불교를 대표하는 고승인 자장(慈藏, 590년 ~ 658년)과 원효(元曉, 617년 ~ 686년) 등이 주석한 곳으로써 창건 당시의 사찰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개요[편집]

분황사는 경상북도 경주시 분황로 94-11 (구황동)에 있는 절.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으로 불국사의 말사다.

황룡사지나 감은사지처럼 석탑이 유명하지만 이와 다르게 분황사'지'가 아니다. 그 이유는 신라시대 전성기보다 좀 많이 작아지긴 했어도 엄연히 '현존하는' 사찰이기 때문이다. 한편 분황사 주변 일대는 2019년 2월 26일 경주 분황사지(慶州 芬皇寺址)라는 이름으로 사적 제548호로 지정되었다. 2021년 기준으로, 성인 기준 입장료 2천 원을 받는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아도의 비문에는 칠처가람지허(七處伽藍之墟) 중 용궁북(龍宮北)이었다고 하였다.

삼국유사 제3 흥법편 아도기라 항목에서 칠처가람을 말하며 전불시가람지허(前佛時伽藍之墟)라고 설명한다. 경주에 빈 절터 7곳(칠처가람지허)가 있는데, 과거불 시대의 절터(전불시 가람지허)라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기원전 500년대, 혹은 400년대 사람인 석가모니 이전에도 부처 6명이 더 있었다고 하여 과거불(過去佛) 또는 전불(前佛)이라고 부르고, 그 6명에 석가모니까지 더해서 과거칠불(過去七佛)이라고 칭한다. 과거 항목에서는 '칠처가람지허'라는 말에서 한때 잠깐 명맥이 끊겼던 모양이라고 했으나 이는 오류. 여기서 말하는 칠처가람지허는 전불시대의 절터라고 하므로, 석가모니와 과거불까지 7부처가 오래 전에 그 7곳에서 설법했다는 뜻이다. 당연히 석가모니 이전의 시대에는 한반도에 불교가 들어오기는커녕 신라라는 나라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으니 절의 명맥이 끊어지고 자시고도 할 것도 없다. 신라가 오래 전부터 불교와 인연이 깊었다고 주장하려는 역사왜곡인 것이다. 흥륜사 터가 원래 천경림(天敬林)이라는 숲이었는데 신라 토속신앙의 성지였으므로, 분황사 터도 원래는 천경림처럼 토속신앙의 제사터였을 가능성이 크다.

분황사의 상징은 바로 모전석탑이다. 전탑 모양을 흉내낸 석탑으로, 돌을 깎아 벽돌처럼 만들어 쌓은 탑이다. 보통 경주 관광에서는 월성, 경주국립박물관, 안압지, 황룡사, 분황사로 코스가 이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절터만 남았지만 거대한 황룡사지에 비해 인지도가 좀 낮은 대신, 석탑이 대부분인 한국에서 보기 드문 모전석탑이 있는 절로서 인지도가 있다.

역사[편집]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선덕여왕 3년(634)에 세워졌다.분황사가 세워진 해에 선덕여왕은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새로 바꿨다. 분황사는 이름 자체가 '향기로운(芬) 임금님(皇)의 절(寺)'로 선덕여왕을 염두에 둔 이름이다. 분황사는 6세기 진흥왕 때 먼저 지어졌던 황룡사의 바로 북쪽에 건설되어 담이 마주보고 있었을 것이다. 사찰은 황룡사가 더 먼저 세워졌으나 황룡사에서 가장 유명한 9층 목탑은 선덕여왕이 분황사를 세운 이후에 건설되었다.

이후 경덕왕 14년(755년) 거대한 약사불상을 새로 주조하여 이 약사불상을 안치하기 위해 다시 한번 분황사를 중수하며 동금당과 서금당을 철거하여 중금당의 규모를 늘리고 중문을 새로 지었다.

황룡사와 마찬가지로 승려 원효와 자장이 이 분황사에서도 활동했다. 원효는 이 곳에서 많은 저작을 남겼고, 원효 사망 후에 아들인 설총이 유해로 상을 만들어 이 곳에 봉안했다. (원효회고상) 원효의 뼈를 부수어 만들었다는데.. 또한 황룡사처럼 신라 화가 솔거가 그린 그림이 분황사에도 있었다.

분황사의 역사에서 원효는 빼놓을 수 없는 존재로, 의상과 함께 당으로 유학길에 올랐다가 도중에 깨달음 얻고 돌아온 뒤에 머무른 곳이 분황사였고, <금광명경소>나 <화엄경소> 등 현전하는 원효의 대부분의 저작도 분황사에서 집필되었으며, 고려 시대에 원효를 위해 '화쟁국사비' 비석이 세워진 곳도 분황사였다.

세워지기는 고선사의 서당화상비가 가장 오래되었지만 고선사는 현재 덕동댐 밑으로 수몰되었다. 이 화쟁국사비는 조선 후기 이전 어느 시점에 사라져서 추사 김정희가 '화쟁국사비가 있던 곳'이라고 남겨둔 글이 있다. 덕분에 분황사에서는 해마다 원효를 기념하는 재가 열리고 있다. 원효 관련 논문 중에는 아예 원효를 분황원효(芬皇元曉)라고 부른 것도 있다.

이후 몽골의 침략 때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분황사가 다시 복구된 것 같은데, 조선 중기의 문신 홍성민(洪聖民)의 계림록에서 분황사를 소개하고 있다. 이 절에 높이 10척(약 3 m) 높이 금 불상과 높이 100인(仞)의 전탑이 있었다고 한다. 모전석탑을 말하는 것 같다. 이걸 전탑이라고 하면 틀린 거라 시험에서 함정문제로도 많이 나왔지만, 아무튼 전탑 모양을 흉내 내었기에 홍성민도 전탑으로 헷갈린 듯.

그러나 또 임진왜란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동경잡기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군이 원래 9층탑이었던 이 탑의 반을 헐었으며, 후에 분황사의 승려들이 처음부터 다시 쌓다가 또 허물어졌다고 한다. 조선 중기 인물 김수흥(金壽興, 1626∼1690)이 남긴 남정록(南征錄)에서도 분황사는 이미 폐허가 된 지 오래고 탑은 허물어지고 1개 층만 남아있으며 커다란 동불(銅佛)만 우뚝 솟아 있다고 남겼다. 탑이 무너졌다는 건 동경잡기의 언급과 같고, 임진왜란 이전에 있었다는 금불에서 일본군이 금칠을 벗겨내 구리 불상만 남은 것으로 추정. 경덕왕 14년(775) 구리 30만 근 이상이 들어간 거대한 약사여래동상을 분황사에 안치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것도 임진왜란 중 분실되었다.

이후로는 아주 작은 사찰이 되어서 근근히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현재의 규모가 작기 때문에 그리 크지 않은 절로 보이나, 2000년대 이후의 발굴 작업들을 통해 현재 있는 규모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절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깃발을 걸던 당간지주도 분황사 경내가 아니라 황룡사와 분황사 중간쯤에 있다. 오랜 기간동안 가람의 배치는 계속 변해왔으며, 리즈 시절 면적은 황룡사의 2/3정도에 육박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광복 직후 이승만 정부에 의한 불교정화운동의 일환이었던 대처승 추방 과정에서 분황사 주지가 1955년 9월 10일에 할복하는 사건이 있기도 했다. (출처: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법륜의 은사인 도문이 이 분황사의 주지였다. 예전부터 청소년, 학생, 군인에 대한 포교에 관심이 많았다고 하며, 법륜 역시 고등학생이던 1969년 당시 도문과의 선문답에서 크게 충격을 받고 출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가람배치[편집]

가람은 1탑 3금당식으로 추정되는데 모전석탑을 가운데에 두고 주위를 금당이 둘러싼 고구려식에 더 가까운 가람배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동,서쪽의 금당이 탑이 아닌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 고구려식 가람배치와의 가장 큰 차이다. 다만 755년 중수 이후에는 중금당의 규모를 넓히는 대신 동금당과 서금당을 모두 철거한 것으로 보여 사실상 1탑 1금당 형식을 취하게 된다.

가운데 중금당터는 절에 들어가서 탑 뒤로 현재 대웅전으로 쓰이는 보광전(普光殿) 앞마당에 돌을 낮게 둘러쌓고 지면에 살짝 솟아난 듯한 평평한 부지로, 언뜻 봐서는 티가 안 난다. 분황사에서는 2005년부터 장기적으로 이 금당을 복원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듯, 금당 복원을 위한 기와 불사(佛事)를 벌이고 있기는 하다. 불사란 기왓장에 시주한 사람의 이름하고 그 사람의 소원 적고 얼마씩 내는 식의 행사.

그러나 언제 복원될지도 모르고 고증상 문제도 많다. 복원이 된다 해도 옛날 문화재를 그대로 복원한다는 의미보다는 현역 사찰인 분황사에서 실제로 사용될 종교적 기념물을 재건하는 쪽에 더 가까울 것이다. 참고로 중금당터는 지금의 보광전 부지까지 모두 포함하고 있는 규모다. 중금당터 한 모퉁이에 보광전이 올려져 있는 모양새. 다시 말해 중금당을 완전복원하기 위해서는 보광전을 이건해야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섵불리 시도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사찰 자체는 불국사에 비해 훨씬 작은 규모지만 시내와 가깝고 수려한 풍경을 갖춘 덕에 경주 관광지로 꼽힌다. 봄에는 청보리밭, 여름~초가을에는 코스모스, 가을에는 단풍으로 장식되어 계절별로 사진 찍기 좋은 곳이다.

모전석탑[편집]

신라시대 모전석탑 중 대중들에게 가장 유명한 탑으로, 현재 대한민국 국보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분황사 석탑(芬皇寺石塔)이 정식 명칭이다.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높이 9.3m의 모전석탑이다. 분황사 창건 때 같이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3층으로 되어 있으나 원래의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탑의 비율이나 다른 전탑들의 형태를 봐서는 훨씬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 탑을 구층탑이라고 기록한 사료가 많아 대략 9층 정도로 추측하고 있다.

이 탑은 돌을 전탑을 흉내내서 돌을 네모나게 깎아 벽돌 모양을 내서 만든 석탑이다. 즉, 생긴 것과는 다르게 벽돌로 쌓은 전탑이 아니다. 임진왜란 때의 기록으로 봐서는 1층만 남기고 무너졌다가 다시 쌓았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니 신라시대에 쌓은 형태는 지금과는 좀 다를 가능성도 있다.

구한말을 거치면서 나무들이 자라는 등 탑의 상태가 더욱 더 안 좋아지기 시작했으며, 결국 1915년 조선총독부에서 이 탑을 대대적으로 수리하였다. 그 과정에서 2층과 3층 사이에 들어 있던 사리함을 발견했는데, 함 안에는 각종 옥류, 가위, 은바늘 및 숭녕통보(崇寧通寶), 상평오수 등 고려시대의 중국주화가 발견되었다. 이 때 무너진 탑을 수습하면서 3층에 지붕 형상을 만들어 마무리를 지었다.

분황사 석정[편집]

경내에 있는 우물로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 또는 호국용변어정(護國龍變漁井)이라고도 불린다. 화강암을 통째로 움푹하게 파낸 다음 그 위에 다시 돌을 쌓아 만든 것으로, 통일신라시대부터 만들어져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외부는 높이 70cm로 윗부분은 8각형이며, 내부는 원형으로 되어있다. 이것은 불교의 팔정도와 원융(圓融)의 진리를, 우물 안의 4각형은 불교의 근본교리인 사성제를 뜻하는 것이다.

보광전[편집]

금당 3개가 모두 소실되고 없는 현재 분황사의 대웅전 구실을 하고 있는 전각. 외관으로만 따져도 상당히 낡았다. 1998년 해체 수리 당시 분황사의 창건과 소실 경위 등이 담긴 상량문이 나왔는데, 보광전이 1680년 5월에 다시 지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보광전 안에 모셔져 있는 3.45 m짜리 금동약사여래입상은 구리 5,360근이 들었는데 18세기 후반의 작품이라고. 불상을 받치는 대좌는 석제인데 원래 부지에 있던 것을 재활용한 듯하다. 한쪽에 원효대사의 초상화도 같이 모셔두었다. 안에 불상이나 대좌, 갖가지 불화에 작은 보살과 위패가 벽에 가득하고 천장에는 연등까지 달려서 안에 들어가면 좁게 느껴진다.

문화재[편집]

  • 국보 제30호 :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慶州 芬皇寺 模塼石塔)(1962.12.20 지정)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 : 분황사화쟁국사비부(芬皇寺和諍國師碑趺)(1979.01.25 지정)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호 : 분황사석정(芬皇寺石井)(1985.08.05 지정)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9호 : 분황사약사여래입상(芬皇寺藥師如來立像)(1996.05.14 지정)

기타[편집]

향가

도천수대비가는 신라 경덕왕시절 눈이 먼 아이가 분황사에 걸려 있던 천수대비의 그림 앞에서 기도하며 불렀던 노래다. 결국 눈을 떴다는 전설이 있다.

사자상 보수

분황사 석탑 주위에는 4마리의 사자상이 있다. 그 중 하나는 발이 없었지만 2006년에 사자상의 다리를 복원했다.

수정화주

임진왜란 이후 절의 승려들이 탑을 다시 쌓기 위하여 헐었더니 바둑알만한 작은 구슬이 나왔는데, 그 구슬은 수정처럼 빛나고 투명하였으며 태양을 쪼여 솜을 가까이 대면 불길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것을 백률사에 보관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다.

이 전설이 진짜였는지는 알기 힘들다. 와전된 것일 수도 있다. 1915년에 분황사 탑을 수리하면서 발견된 사리함 안에 진짜 수정화주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대략 7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돋보기 혹은 불씨를 얻는데 쓰였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 안경의 역사와 관련된 유물 중 하나.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홍수

홍수피해를 유난히 많이 받은 절이기도 하다. 사진에서 보듯 물길이 여기서 커브를 트는데, 상류에서 물이 넘치면 이것이 곧장 절로 직행한다. 애초에 법력으로 홍수를 막기 위해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윤경렬 선생이 쓴 신라 이야기 1권에 따르면, 물줄기가 흐르는 방향을 두고 분황사 부처와 헌덕왕릉이 서로 자기 쪽으로 안오게 하려고 기싸움을 벌였다고 한다. 그 싸움의 흔적으로 헌덕왕릉에는 현재 석물이 별로 남지 않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헌덕왕릉은 실제로 북천 강변에 바짝 닿아 있다. 하지만 결국 보문호와 덕동댐 건설 이후에야 홍수는 잦아들었다.

반달리즘

근처에 우물이 있는데 경내에 있는 돌우물이 아니라, 분황사 북쪽 담에서 약 33 m 떨어진 또 다른 신라 우물이다. 이 우물 안에서 목이 잘린 불상 수십 좌가 발견 되었다. 불상은 비록 넘어지면 목이 쉽게 부러지는 구조이지만, 목 잘린 불상이 우물에 가득 쳐박혔으니, 과거 조선 시대에 반불교적 사상(숭유억불)을 가진 선비들이 작정하고 벌인 반달리즘일 가능성이 높다. 지금은 이 목 잘린 불상들을 건져서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전시관에 줄 세워 놓았다. 남산(경주)에도 의도적으로 파불(破佛)됐던 불상과 조각의 안면과 목을 다시 붙여놓은 것을 무수히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관람안내[편집]

  • 관람시간 : 하절기(4월~10월) 오전 9시~오후 6시/동절기(11월~3월) 오전 9시~오후 5시
  • 관람요금 : 성인 2,000원 청소년/군인 1,500원 어린이 1,000원

교통 안내[편집]

  • 10번 버스 : 분황사 버스 정류장에 내린다. 18번, 100번, 150번 버스를 타도 된다.
  • 700번 버스 : 분황사 버스 정류장에 내린다. 신경주역, 고속버스(시외버스) 터미널, 경주역에서 탄다. 급행 버스이므로 빠르지만, 배차 간격이 35분 이상으로 길다.
  • 경주박물관, 안압지에서 걸어 간다. 황룡사 터를 지나서 간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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