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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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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네

산동네(山村)는 산등성이나 산비탈 따위의 높은 곳에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를 말한다.[1]

개요[편집]

산동네 건 뭐건 다 아파트가 들어서 있고 높은 지역도 마을버스가 들어가고 자가용도 많이들 가지고 있어서 집이 있는 높이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다. 더욱이 산을 끼고 있는 고층 아파트도 엘리베이터가 있기에 정말로 산의 중턱 이상에 지어진 아파트가 고층 아파트면 예전에 그 산에 살던 분들이 느껴보지도 못한 높은 높이에 살게 된다. 아마도 구름 끼고 비가 오는 날에는 구름이 밑으로 갈지 모른다. 그 정도로 높이 살아도 산동네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하지만 예전에는 그런 주택 구조가 아니기에 산의 높이 만큼 살고 그 높은 산에는 좋은 집들이 아닌 그저 하꼬방 같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런 고지대 주택들에는 수돗물도 잘 안나오기에 식수 대란도 대단히 많았고 무허가 집들도 많고 그런 속에서 개량주택 정도가 있으면 그나마 잘사는 집에 속했었던 시절이다. 산 위에 살면 좋은 것은 풍경이나 밤에 보는 도시의 불빛은 정말로 아름다웠다.[2]

지형[편집]

산동네는 산을 깎아 만들어 사람이나 차가 다니기 힘든 비탈에 세워진다. 이런 데에 있는 이유는 그냥 간단하게 땅값이 싸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 1960~70년대 산업화 시절 난개발로 인해 평지에 있는 동네들은 아파트다 산업단지다 상가다 뭐다 세우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땅값이 비싸져서 돈 있는 사람들 외에는 못 살고, 돈 없는 서민들은 땅값 싼 산동네 비탈길에 집짓고 살다 보니까 이런 동네가 형성된 것이다. 주로 꼭대기로 올라갈수록 교통 접근성이 취약해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땅값이 싸진다. 산지가 아니더라도 빈민들이 외곽으로 밀려나는 것은 신흥공업국이거나 한때 신흥공업국이던 국가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는 북미 서유럽 일본도시 구조와는 완벽하게 정반대이다. 북미 서유럽 일본은 대체로 도심에 가까울수록 서민들이 살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람이 지나다니기 불편한 지형을 극복하기 위해 달동네에 복지 차원에서 야외형 에스컬레이터, 엘리베이터, 모노레일, 케이블카를 설치하기도 한다.[3]

특징[편집]

저소득층이 한국의 산동네 인구 중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는 있다지만, 치안은 무법천지나 다름없고 물도 전기도 제대로 안 나오고 길도 좁고 주변도 비위생적인 상당수 외국의 슬럼가들과는 거리가 멀다. 경사가 심해서 생활하기 불편하다는 단점에 비해 장점도 몇 개 있는데, 대부분 고지대에 위치해 있다 보니 전망이 좋고 사생활 보호가 잘 되며, 장마철에도 침수를 피해간다. 그렇다 보니 서울 종로구의 평창동과 성북구의 성북동, 용산구의 이태원동과 한남동처럼 부자와 영세민이 공존하는 달동네도 있다. 경사도가 심해서 걸어 다니기엔 힘들지만, 고급 주택이나 대사관 등이 다수 위치해 있다. 부촌과 저소득층 지역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통행로의 상태를 들 수 있다. 부촌의 경우 잘 관리된 도로처럼 되어 있는 반면, 저소득층 지역은 계단이 많고 콘크리트를 대충 바른 듯한 데다 경차조차도 도저히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상당히 좁은 곳도 있다.

개발도상국들과 달리 한국은 선진국이고 국가의 행정체계가 제대로 잡혀 있기 때문에 치안은 국내 기준에서는 몰라도 세계 수준으로 본다면 매우 좋은 축에 들며, 지자체가 인프라 관리를 하고 있으며, 거주 인구에 대한 행정관리 역시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거주자들 또한 인생을 사실상 포기한 외국 슬럼 인구와 달리 주류 사회로의 편입을 위한 열망과 의지를 가지고 있고 교육 서비스 또한 상위 소득층에 비해 질의 차이가 있을 뿐 양호하게 이루어지며, 국가에서 보장하는 의료 서비스도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 이런 환경으로 변한 시기 역시 그리 오래전이 아니어서, 198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산동네라 하면 인프라가 잘 깔려 있지 않는 등 치안을 제외하면 외국의 슬럼가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뭐 이 당시의 경제 상황을 고려하면 이상할 것도 없지만 말이다. 맨몸으로 시골에서 도시로 상경한 사람이나 철거민들, 일용직 노동자들 같은 당대의 돈 없는 서민들이 산동네에 많이 살았다. 이런 모습은 한국 문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그 결과 수많은 한국의 현대 문학 작품에서 주로 비참한 서민들이 사는 곳으로 묘사되곤 했다. 슬프고 씁쓸한 사실이지만, 실제로도 그런 동네였기도 하였다. 서울의 경우 강북구의 미아동, 성동구의 금호동, 옥수동 쪽이 달동네의 메카라 불릴 정도로 달동네가 많았지만, 현재는 다 재개발이 되어서 이제 산동네는 옛말이다. 실제로 70년대에 그 많던 달동네들은 80년대와 90년대의 집중적인 재개발 붐으로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다. 그러나 재개발이 해당 지역의 모든 구역에서 다 같이 한꺼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에 재개발된 신축 아파트와 여전히 남아 있는 달동네가 공존하는 경우를 지금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덕분에 또한 부산에서는 6.25 전쟁 때 피난민들이 형성한 마을로 시작된 상당수의 산동네가 아직도 분포한다. [3]

대표적인 산동네[편집]

서울특별시[편집]

강북권[편집]

산이 많고 구도심인 강북지역 특성상 강북에 많이 몰려 있다. 서대문구 동쪽 - 종로구 북서쪽 - 성북구 서쪽으로 이어지는 북한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지역은 온갖 거주 형태가 모여있는 가히 서울 달동네의 메카라 할 만하다. 역사가 꽤 오래된 마을에 한국전쟁으로 인한 실향민 및 이촌향도 현상으로 많은 사람이 몰려와 판잣집을 짓고 정착하면서 달동네가 된 곳도 여러 곳 있다는 점이 강북권 달동네의 특징이다. 또한 강남권에 비해 형성 시기가 이른 편이고 형성이 마무리된 편이 빠른데다 정부에서 집중적인 판자촌 확장 단속 및 관리를 시행했고, 강남권 달동네보다 이른 시기에 재개발되었기 때문에 재슬럼화가 발생해 다시 달동네가 된 지역도 여러 곳 존재한다는 점도 특징이다. 종로구는 관할구역 안에 산지가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다 청와대 때문에 개발제한구역인 곳도 있고, 문화재도 많이 산재해 있어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개발이 가로막혀 낙후된 상태로 머무르다 보니 달동네로 전락한 동네가 많다. 노원구 달동네는 1960년대 말부터 서울 도심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도심에 존재하던 판자촌을 대대적으로 철거하고 경기도 양주군 국유지로 강제이주시켰던 곳들이 서울로 편입된 케이스다. 그래서 상당히 악명 높은 편이다.

  • 강북구 - 삼양동
  • 노원구 - 상계동(양지마을, 합동마을, 희망촌), 중계 본동(백사마을)
  • 도봉구 - 도봉동(무수골, 안골마을)
  • 동대문구 - 이문동, 회기동, 휘경동
  • 마포구 - 신수동, 아현동
  • 서대문구 - 천연동, 홍은동(호박골 마을), 홍제동(개미마을),현저동
  • 성동구 - 금호동 재개발 취소 지역, 마장동 (꽃 담벽화 마을), 사근동
  • 성북구 - 정릉동(정릉골), 성북동(북정마을), 삼선동(낙산 일대, 장수마을), 장위동
  • 용산구 - 이촌동, 삼각지역, 용산역 인근 등을 제외한 구 대부분
  • 은평구 - 갈현1동 일부, 녹번동, 대조동 일부, 불광동, 수색동
  • 종로구 - 숭인동, 이화동, 충신동, 창신동, 혜화동
  • 중구 - 다산동(구 신당 2동), 필동
  • 중랑구 - 면목동(4, 7동)

강남권[편집]

강남 지역에서는 관악구에 많은 편이다. 관악구는 달동네가 워낙 대규모로 존재하다보니 일반적인 자료에서 보통 마을 단위로 다루는 다른 구와 달리 동 단위로 다룬다. 서초구, 강남구, 송파구는 1980년대부터 생긴 판자촌, 비닐하우스촌이 여기저기 산재해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구로구, 금천구, 영등포구는 달동네보다는 쪽방촌으로 유명한 편이다.

  • 강남구 - 개포동 (재건마을, 구룡마을, 달터마을)
  • 관악구 - 신림동 (난곡동, 난향동, 삼성동, 서림동), 봉천동 (청림동, 은천동 등)
  • 구로구 - 가리봉동, 고척2동,궁동
  • 서초구 - 방배동 (성뒤마을, 윗성뒤마을, 국회단지, 두레마을)
  • 송파구 - 장지동 화훼마을
  • 영등포구 - 대림동, 도림동, 신길동
  • 양천구 - 목2~4동

부산광역시[편집]

역사[편집]

부산은 일제 강점기 일본의 대륙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서 급속히 개발된 근대적 정체성의 도시였다. 지형적으로 평지가 협소하여 거주 가능한 면적이 적을 수밖에 없었던 부산은 그마저도 산과 바다 사이에서 좁고 긴 모양의 선형이라 확장하기 어려운 도시 공간 구조를 가지고 있다. 1909년부터 시행된 일본의 각종 매축 공사와 토지 구획 정리 사업, 수도·항만·철도 등의 사회 기반 시설 등이 세워지면서부터 부산은 오늘날과 유사한 형태로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인구도 본격적으로 증가하였다. 부산의 산동네는 일제 강점이라는 역사적 경험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형성되기 시작한 독특한 도시 공간이다. 1920년대 초 부산은 공업과 대일 무역의 성장, 대규모 매축 공사 등으로 일자리를 얻기 위해 유입되는 조선인 노동자 수가 급증하게 된다. 그런데 조선인 노동자들의 수가 과도하게 증가하자 이들의 임금이 떨어지고 고용 구조도 불안해지게 된다. 결국 조선인 노동자들은 도시 빈민층으로 전락하고 만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조선인들은 대개가 일용직 노동자들이었기 때문에, 일거리를 얻기 위해 도심부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일본인 거주 지역의 외곽에 있는 산비탈이나 고개에 집중적으로 모여 살게 되었다. 이처럼 산동네의 형성은 일제 강점기에 부산으로 몰려든 부두·방직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의 현장을 담고 있는 산물이었다.

산동네와 관련한 당시의 신문 기사를 보면, 조선인은 평지에 집을 얻지 못하여 부산진 본전 사면팔방으로 산상에다 집을 지었는데[『동아 일보』, 1925. 6. 20], 계획을 세우지 않고 산비탈에 마음대로 불규칙하게 지은 토막과 빠락[바라크] 사이로 꼬불꼬불하고 험악한 길이 거미줄 모양으로 엉키어 여름철이나 비가 계속 오면 교통은 차단되고 도로는 진흙으로 흙바닥을 이루어 다니는 사람들이 미끄러지기 일쑤였다[『동아 일보』, 1934. 3. 31]고 전하고 있다. 당시 조선인 밀집 지역의 거주 환경이 얼마나 열악했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945년 광복이 되면서 부산은 각지에서 귀환한 동포들로 북새통이 된다. 일제에 의해 건설된 인구 30만의 계획도시에 약 100만의 인구가 밀집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귀환 동포들 중 국내에 오갈 곳 없던 이들의 태반이 부산에 눌러 앉게 되고, 6·25 전쟁을 피해 유일한 비전투 지역이었던 부산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면서, 부산은 그야말로 사람들로 넘쳐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많은 인구가 한정된 가용지에 몰려들어 주택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당시 부산에는 3만여 명을 수용한 적기 수용소, 영도구 봉래동의 대한도기회사 터, 대연 고개, 남부민동 등 전쟁 피난민들을 위한 수용소가 40여 개가 있었지만 수용 인원은 고작 7만여 명에 불과하였다. 이에 반해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40만 명가량 달했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경제력이 약하고 친척이 없이 피난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주로 용두산 공원이나 천마산, 수정산 자락에 삶의 둥지를 틀었었다. 산동네는 6·25 전쟁의 경험이 그대로 엉켜 있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혼란스런 상황 속에서 새로운 건물을 짓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부산을 찾아온 이주민들은 미군들의 폐품으로 나온 깡통을 펴서 엮어 만든 양철 판이나 군수 물자를 포장했던 박스를 사용한다든지 판자·콜타르를 바른 미군용 야전 식량 박스(일명 볼박스) 등으로 얼키설키 엮은 무허가 판잣집인 이른바 하꼬방을 지어 살기 시작했다. 자갈치 시장의 경우 영도 대교 입구에서부터 보수천 남항 유입 지역에 이르는 전 지역에 판잣집이 촘촘히 들어섰고, 국제 시장과 자갈치 시장은 판자 상가가 밀집한 형태로 바뀌게 되었다. 용두산, 복병산, 천마산, 보수산, 구봉산, 수정산, 구덕산 등의 비탈들도 판잣집으로 뒤덮였다. 부경역사연구소에 따르면 휴전 직후 이런 판잣집들이 용두산 산비탈을 중심으로 중구 관내에만 1만 5000여 채, 시내 전체로는 4만여 채가 있었다고 추산된다.

늦게 온 사람들일수록, 가진 것이 적은 사람들일수록 점점 더 산꼭대기로 올라가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우암동의 경우 몰려드는 피난민들은 병든 소 화장터 주변과 개울 주변에 움막을 짓고 살았으며, 점차 공동묘지 있는 곳까지 확장하였다. 나무, 판자, 가마니, 골판지, 루핑 등으로 바람만 들어오지 않게 하고 살다가 초막을 짓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공동 화장실과 급수차에 의지하며 40계단과 UN 고개를 넘나들었고, 다림질, 날품팔이, 노점상 등으로 가계를 꾸렸다. 깡통으로 판잣집 지붕을 만드는 ‘깡깡이’나 철길에서 석탄 부스러기를 줍는 ‘코크스 수집업’, 구제품과 자물쇠를 파는 ‘샌드위치맨’도 당시 생겨난 직업들이었다. 피난민들이 몰려들면서 부산의 외형도 폭발적으로 증폭되었다. 피난민들이 부산의 주 서민층을 담당하게 되었고, 휴전 이후 산동네는 자연스레 돌아갈 곳 없는 서민들의 정착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항만 하역 부두 노동자, 신발 공장 노동자로 대표되는 탈 농촌 도시 근로자들이 산업화 과정 속에 몰려들어 살게 된 곳도 산동네였다. 이 새로운 이주민들이 산동네에 정착하게 되면서 주민들의 내부 구성에도 상당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전쟁이라는 집단적 기억을 함께 한 운명 공동체적 이웃 대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서 도시로 유입된 이웃들이 동네에 넘쳐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관계도 실리적이고 익명적인 관계로 변해갔다.

1955~1964년에 부산시는 도시 환경 개선과 미관을 이유로 판자촌에 대한 강제 철거와 철거민들에 대한 도심 외곽 강제 이주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계획적인 이주지는 개발되지 못한 채 강제 철거만 시행되었기 때문에 산동네 특유의 자생적 형태가 유지될 수밖에 없었다. 1973년 「주택 개량에 의한 임시 조치법」이 제정되면서 불량 주택 개량 사업이 시행되었다. 도시 계획 차원에서의 정책 이주 사업은 1975년까지 계속되었는데 규모나 시설 면에서는 아직 영세하였다. 1980년 도심 재개발 추진 계획을 추진하면서 현지 개량과 철거 이주를 원칙으로 연립 주택지와 시영, 주공 임대 아파트가 지어지게 되었다. 서구 아미동, 범천동, 개금동에 각각 임대 및 분양을 목적으로 시영 주택이 건설되었으며, 200만 호 주택 건설 사업의 일환으로 개금동에 영구 임대 주택, 근로자 주택, 소형 분양 주택이 각각 건립되었다.[4]

분포[편집]

현재 부산광역시 전체 산동네 6곳, 78개 동에 걸쳐 130여 만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대표적인 산동네들은 수정산, 봉래산, 황령산 등의 일원에 위치하고 있는데, 대체로 부산의 원도심(原都心)이라 불리는 지역들을 둘러싸고 있는 형세이다. 수정산 일원의 산동네는 망양로, 엄광로 등을 연결하는 17개 도로[총 연장 35.3㎞의 산복 도로]를 따라 위치해 있는데 동구, 부산진구, 사상구, 사하구, 서구, 중구 등 총 6개구 54개 행정동을 연결하고 있다. 수정산 일원의 산동네 마을은 부산의 대표적인 원도심 지역과 연결되어 있으며 부산 원도심의 역사와 함께 해온 곳이다. 산복 도로의 산동네들과 천마산 아래의 동네들은 바다가 출렁이는 모습과 그 위로 부서지는 배와 파도를 볼 수 있고, 때로는 산을 타고 올라오는 비릿한 바다 냄새를 맡을 수도 있다. 망양로는 부산항을 내려다볼 수 있으며 부산의 대표적인 드라이브 코스로 꼽히기도 한다. 등산로와 시락국밥으로 유명한 구덕산 기슭의 꽃마을, 통일교 성지와 오리고기 등으로 이름난 수정산 자락의 안창 마을, 태극도 마을이라고도 불리는 감천 문화 마을 역시 수정산 일원에 위치해 있는 마을이다. 새띠 고개, 대티 고개, 까치 고개, 구덕 고개, 영선 고개, 성북 고개 등이 위치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봉래산 일원의 산동네는 영도의 봉래길, 절영로, 하나길을 연결하는 3개 도로[총 연장 8.4㎞]를 이루고 있으며, 영도구 전체 11개 동을 포함하고 있다. 이곳은 부산항의 전경과 밤바다를 감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바다 건너 망양로의 전경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아리랑 고개와 영선 고개가 위치해 있다. 황령산 일원의 산동네는 진남로 6.3㎞ 구간으로 남구, 부산진구, 연제구 등 총 3개구 18개 행정동을 연결하고 있다. 연산동의 물만골 마을, 문현동의 돌산 마을 등이 황령산 산복 도로를 둘러싸고 위치해 있다. 산동네는 부산의 역사적 경험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 공간으로, 서민들의 삶의 애환이 담겨 있는 집단 기억의 원형이다. 산동네에는 부산의 여러 역사적 경험들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도 다양한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때문에 부산이라는 도시의 독특한 역사성을 산동네에서 본다. 산동네를 보면 사람이 있고, 삶이 있고, 산동네 사람들이 자아내는 독특한 생활 양식과 문화가 있다. 부산의 산허리를 굽이굽이 둘러싸고 앉아 있는 산동네를 오늘날 우리가 또다시 주목하고 그 이야기들을 듣고자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4]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산동네〉, 《네이버 지식백과》
  2. 보물섬, 〈산동네〉, 《네이버 블로그》, 2018-05-22
  3. 3.0 3.1 달동네〉, 《나무위키》
  4. 4.0 4.1 산동네의 숨겨진 보물 - 골목골목 깃든 삶과 이야기〉, 《부산역사문화대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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