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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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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헨지(Stonehenge)
스톤헨지(Stonehenge)
스톤헨지(Stonehenge)
스톤헨지(Stonehenge)
힐스톤
스톤헨지 형성

스톤헨지(Stonehenge)는 영국 남부 윌트셔 주 솔즈베리(Salisbury) 평원과 에이브버리에 있는 선사 시대의 거석기념물(巨石記念物)에 있는 환상 열석 유적이다. 거석주(巨石柱)라고도 한다. 높이 8미터, 무게 50톤에 달하는 거석 여든여개가 세워져 있다. 수수께끼의 선사시대 유적으로 누가, 어떻게, 왜 만들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풀려지지 않고 있다.

2022년 3월에는 스톤헨지가 태양력 계산을 위한 도구라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개요[편집]

스톤헨지는 원형으로 늘어선 돌기둥(환상열석/環狀列石)으로, 보통은 영국 솔즈베리 평원에 있는 것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쓰인다. 원형의 흙 구조물 한가운데 거대한 바위들을 여러 형태로 세워 배열한 선돌(입석) 유적지이다. 스톤헨지의 목적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솔즈버리 평원의 기묘한 고독함 속에 서 있는 스톤헨지는 수세기에 걸쳐 세워지고 개조되어 왔으며, 놀라운 기술과 조직력의 결정체이다.

이 거대한 입석(立石) 구조물은 폭 6미터, 깊이 1.4미터 도랑에 둘러싸인 원형 광장을 지칭하는데, 스톤헨지의 안쪽 지름은 98미터이다. 그리고 그 구성은 둥근 고리 모양으로 줄지어 서 있는 거대한 열석과 동북 방향으로 U자 형태로 벌어진 거대한 돌의 조합으로 구성된다.

스톤헨지(Stonehenge)라는 영어 명칭은 중세 시대에 붙었다. 솔즈베리 스톤헨지 외에도 이와 비슷한 돌기둥 무리가 영국과 아일랜드 각지에 분포한다. 고인돌과 비슷하다.

스톤헨지는 종교적인 장소이자, 이것을 지었던 족장, 귀족, 사제들의 권력과 부유함의 표상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 중 대부분이 근처에 있는 많은 고분에 매장되었다. 스톤헨지는 태양의 위치와 맞춰져 있었으며, 아마 태양과 달을 관찰하는 데에 쓰이고 농사용 달력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혹은 살아 있는 이들의 세계와 분리된, 선조들의 세계에 바쳐진 건축물일 수도 있으며 치유센터였을 수도 있다. 이 유적을 사용했던 이들이 켈트 족의 사제인 드루이드였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으나, 오늘날의 드루이드들은 매년 하지를 맞이하기 위해 이곳에 모인다.

1986년 유네스코는 스톤헨지를 에이브버리와 윌트셔에 있는 스톤 서클들과 더불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으며, 선사 시대에 대해 증언해 주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유적이라 칭했다.

유적 구조[편집]

스톤헨지에 사용된 석재는 셰일과 블루스톤(청회색 사암, 휘록암과 유문암), 사르센석(잉글랜드 중남부에 산재하는 사암)으로, 각각 바깥쪽 원과 안쪽 원을 구성하고 있다.

셰일 서클은 셰일을 30개 세운 다음 그 위에 돌을 가로로 눕혀 원을 그리도록 배치했으며, 안쪽의 블루스톤 서클은 크기가 작고 모양도 나 쓰러져 중앙에 제단처럼 자리하게 된 블루스톤이 있다. 셰일 서클 바깥에는 Y홀, Z홀이라고 불리는 작은 구덩이들이 원을 그리듯 파여 있다. 또 그 바깥쪽에는 오브리 홀이라는 56개의 구덩이들이 파여 있으며 그 뒤로는 두개의 입석이 정반대 방향으로 놓여 있다.

셰일 서클 바깥에서 떨어진 곳에 힐스톤이라는 돌이 혼자 서있고 이 돌과 셰일 서클 사이에 도살석이라는 돌이 있다. 이 돌들은 모두 태양의 빛에 관련하여 일직선으로 놓아져 있는데, 이 때문에 해시계였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묘지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형성[편집]

스톤헨지 터는 심지어 스톤헨지를 건설하기 이전부터 중요한 곳이었던 듯하다. 기원전 8천 년 무렵에 나무 기둥들을 세운 흔적이 발견된다. 이후 스톤헨지는 3단계로 건설되었다. 사슨석(Sarsen stone)과 청석으로 이루어진 스톤헨지는 바깥쪽 원을 셰일 서클, 안쪽 원을 블루스톤 서클이라고 부른다. 사슨석으로 만든 원은 기원전 1500년경에 세워졌고, 블루스톤(청석)으로 만든 원은 기원전 2000년경에 세웠다고 한다.

바깥쪽 셰일 서클은 사슨석을 30개 세운 다음 그 위에 돌을 가로로 눕혀서 원을 그리도록 배치하였는데, 현재는 30개 중 17개만 남았다. 세일 서클 바깥쪽에는 Y홀, Z홀이라 불리는 작은 구덩이들이 동심원을 그리듯 배열되었는데, 이중 Z홀이 안쪽, Y홀이 바깥쪽에 있다.

Y홀과 둑 사이에는 '오브리 구덩이(Aubrey holes)'라고 불리는 구덩이가 56개 있었지만 지금은 그중 절반 정도는 메워졌다. 오브리 구덩이에서 사람을 화장하고 남은 뼈가 발굴되었는데, 방사성 연대측정 결과 중앙의 돌기둥이 세워지기 500여 년 전으로 나타났다. 스톤헨지 일대는 신석기시대의 대규모 화장 유골 매장지였던 것이다. 다만 이곳에서는 시신을 화장한 장소가 발견되지 않았다. 다른 곳에서 화장한 후 여기로 시신을 옮긴 것이다. 유골의 성분 검사 결과 스톤헨지에 묻혔던 사람들 중 상당수는 스톤헨지 근방 출신이 아니라 영국 전지역에 걸쳐 있었는데, 영국 웨일즈 서쪽 지방 사람들이 많았다.

오브리 구덩이 위쪽에는 작은 선돌 두 개가 작은 입석이 정반대 방향으로 놓였다. 두 선돌 가까이에는 원형 무덤이 있는데, 입석과 무덤을 더해 '포 스테이션(네 개의 측점석測点石)'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안쪽의 청석들은 돌을 세우거나 눕히지 않고, 바깥쪽의 셰일과 비교해 크기가 작고 형태도 불규칙한 돌들을 사용해서 만들었다. 블루스톤 서클 안에는 말발굽 형태(입석 두 개 위에 돌을 가로로 눕혀놓은 형태)로 배치된 셰일 삼석탑(三石塔)이 다섯 기 있다. 그 안쪽 중앙에는 편평한 제단석이 놓여 있다. 스톤헨지라는 명칭은 바로 이 삼석탑에서 유래하였는데, 고대 영어에서 '위에 올려놓은 돌'을 의미하는 말이다.

셰일 서클 바깥쪽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힐스톤(발뒤꿈치 돌)이라 불리는 돌이 홀로 서 있다. 하짓날 태양이 힐스톤을 통과하여 스톤헨지의 중심 중앙제단을 비춘다고 한다. 그리고 이 돌과 사슨석 구조물 사이에는 슬로터스톤(도살석屠殺石)이라 불리는 돌이 있다. 슬로터스톤은 현재 옆으로 누워 있지만 옛날에는 똑바로 서 있었다고 추정한다.

처음에는 단순히 구멍들을 파고 그 구멍에 작은 돌들을 넣어 테두리가 형성된 형태였으나, 기원전 2800년 무렵 스톤헨지를 둘러싼 도랑과 둑, 그리고 정북을 가리키는 힐스톤을 더했고, 그로부터 800년 후 원을 그리는 청석(靑石) 표석들을 세워 스톤헨지의 모습을 갖추었다.

여기서 청석(靑石)이라고 번역한 단어가 영어로는 Bluestone이기 때문에 '청석'이 파란색을 띠는 특정한 암석 종류라고 오해하기 쉽다. 하지만 여기서 Bluestone은 '(스톤헨지 인근에서) 나오지 않는 외래外來 돌'이란 뜻이다. 실제 스톤헨지에서 '청석 표석'의 구체적인 암석 종류는 스무 가지가 넘는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웨일즈의 프러셀리(Prescelly)산에서 나온 것들이다. 아마도 비커(Beaker)인들이 육로를 타고 인력으로 끌고 온 듯하다. 몇몇 청석들은 프러셀리산이 아닌 웨일즈의 다른 곳에서 가져온 듯하다. 학자들은 암석들을 비교하여 옛 사람들이 프러셀리산의 정확히 어느 장소에서 돌을 채취하였는지 특정하기까지 하였다.

마지막으로 기원전 1500년 무렵에 사슨석(Sarsen石)으로 삼석탑(三石塔)을 세웠는데, 웨식스(Wessex) 문명의 소산이라고 추정한다.

스톤헨지 리버사이드 프로젝트(Stonehenge Riverside Project)를 주도한 마이크 파커 피어슨(Mike Parker Pearson)[6] 교수는 프러슬리산에서 운반해온 청석 돌기둥을 처음에는 바로 오브리 구덩이 위에 세웠다고 주장했다. 즉, 청석 표석의 본래 용도는 묘비(墓碑)였는데, 후일 돌기둥들을 안쪽으로 옮겼기 때문에 오브리 구덩이만 움푹 패인 흔적을 남긴 채로 남았다는 말이다.

파커 피어슨 교수는 스톤헨지 인근에서 발견된 우드헨지(Woodhenge)와 더링턴 월스(Durrington Walls) 유적지가 스톤헨지와 관련이 깊고, 우드헨지와 더링턴 월스는 산 사람, 스톤헨지는 죽은 사람을 위한 종교적 공간으로 기능했다고 주장한다. 스톤헨지 리버사이드 프로젝트로 확인한 고고학적 연구 성과 덕에 크게 주목받는 학설.

2020년 7월에 스톤헨지의 사슨석이 북쪽으로 불과 25 km 떨어진 곳에서 옮겨진 것으로 확인됐다.

관광[편집]

영국에서는 스톤헨지 투어 상품을 꽤 많이 파는데, 스톤헨지의 이름을 들어본 관광객이라면 기꺼이 따라가서 바람이 세게 부는 평원에 덩그러니 놓인 높이 8미터의 돌덩어리들을 감상한다.

영국인들은 비교적 도시와 가까운 곳에 있을뿐더러 온천도 있는 바스와 함께 관광하는 편을 추천한다.

솔즈베리에서 출발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일단 런던 워털루 역에서 솔즈버리로 가는 열차가 30분에 한 대꼴로 적지 않게 있을뿐더러 솔즈베리 자체도 솔즈베리 대성당 등 문화재가 적지 않고, 시내도 런던 같은 대도시와는 다른 중세풍의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느끼기에 나쁘지 않다. 더구나 역에서 스톤헨지까지의 거리가 바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깝다. 다만 역에서 바로 가는 대중교통편이 없어서 투어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데, 입장료 포함임을 감안해도 워낙 비싼 편이다. 대신 스톤헨지와 솔즈베리 대성당, 올드 새럼을 모두 입장할 수 있고, 오디오 코멘터리도 꽤 알찬 편이다.

더불어 최근부터는 문화재 보호 및 고고학적 발굴 및 연구활동 때문에 스톤헨지 주변에 울타리를 쳐서 일반인 출입을 금한다. 그래도 돌 밑으로 걸어다닐 수 없을 뿐 상당히 가까이까지 다가갈 수 있다. 스톤헨지 주변은 땅도 매우 푸르고, 공기도 매우 맑아 먹구름만 끼지 않는다면 풍광이 아주 훌륭하다.

스톤헨지가 영국 정부 소유가 된 지는 10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스톤헨지가 있던 영국 솔즈베리 평원은 에임즈버리 수도원이 소유했는데, 헨리 8세가 가톨릭 수도원들을 해산시키면서 이 땅도 왕실에 압수되었다. 헨리 8세는 셋째 아내 제인 시모어의 형제 허트포트 백작 에드워드 시모어에게 하사했다. 이후 여러 가문들을 거치다가 안트로부스 가문에게 넘어갔지만, 이 가문의 후계가 제1차 세계 대전 때 전사하여 맥이 끊기고 가문의 소유물들이 경매에 넘어오게 되면서 스톤헨지도 경매에 부쳐졌다. 어느 미국인, 또는 다른 외국인이 낙찰받을 뻔했지만 변호사 세실 처브가 막판에 6600파운드를 불러 낙찰받았다.

세실 처브는 이후 1918년에 스톤헨지의 소유권을 영국 정부에 귀속하겠다고 선언하였고, 영국 정부는 이를 치하하는 뜻에서 준남작 작위를 하사하였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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