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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 가브리엘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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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 가브리엘손(Assar Gabrielsson)
볼보(Volvo)

아사 가브리엘손(Assar Gabrielsson)은 스웨덴의 경제학자이며 자동차 제조사 볼보(Volvo)의 공동창시자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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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아사 가브리엘손은 1891년 8월 13일 스웨덴 코르스베르가(Korsberga)에서 태어났으며 1911년 스톡홀름 경제대학에서 경제학 학사 학위을 수여받았다. 아사 가브리엘손은 스웨덴 의회의 하부 회의소에서 공무원 및 스테네 그래프로 일했으며 1916년 스웨덴 예테보리에 위치한 베어링 제조 업체인 SKF에서 영업관리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1921부터 파리에 있는 SKF 자회사의 전무 이사로 임명되었으며 1922년 6월 SKF 그룹 영업 관리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1924년부터 자동차 부문 책임자로 임명되어 사업을 추진하였으며 구스타프 라스손과 합작하여 구스타프가 신차의 엔지니어링 작업과 신공장 구축에 필요한 투자계획을 책임졌다. 시험 제작 차량이 공개되어 1927년 SKF 자회사인 볼보(AB Volvo)가 설립되면서 볼보의 사장 겸 전무 이사로 임명되었다. 볼보는 1927년 4월부터 승용차를 제작하기 시작하였으며 1928년부터는 1.5톤 상용차를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라인업을 늘려갔다. 1930년 볼보는 엔진을 공급하던 회사를 통째로 사들이는 한편 한창 무르익은 택시 시장을 휘어잡기 위해 7인승 택시 전용 TR671과 672를 선보이고 같은 해 8월에는 PV651을 고급스럽게 다듬은 승용 PV652를 발표했다. 볼보는 1935년 모기업 SKF를 떠나 독립한 뒤 버스, 변속기, 중장비, 선박 및 항공기 엔진 등의 제조업체를 인수하면서 유럽에서 규모를 키웠다. 볼보는 1935년에는 유선형의 카리오카(PV36)를 데뷔시켜 2차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 생산했다. 볼보는 자동차 제작 기술에도 큰 힘을 쏟았는데 그 결과 6기통 사이드 밸브 엔진과 독립식 서스펜션, 오버드라이브 방식의 변속기 등을 개발했다. 볼보는 앞선 기술을 갖춘 튼튼한 차를 계속 선보였지만 2차대전 무렵까지 모방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볼보가 입지를 다지기 시작한 것은 PV444를 내놓고부터 시작되며 2차대전 말기에 선보인 1.4X 44마력 엔진의 PV444는 앞창에 처음으로 강화유리를 써 안전성을 높였는데 65년까지 21년 동안 44만 대가 팔리며 볼보라는 메이커를 세상에 알렸다. 아사 가브리엘손은 1956년 볼보 그룹 이사회 회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62년 5월 28일 사망할 때까지 이사회 회장을 역임하였다.[2][3]

주요 활동[편집]

볼보 설립[편집]

1920년대 중반 SKF는 사업 다각화 차원에서 판매 책임자로 있던 아사 가브리엘손을 자동차 부문 책임자로 임명해 사업을 추진하도록 하였으며 가브리엘손은 1924년 6월 오랜 친구인 구스타프 라르손(Gustav Larson)을 만나 자동차 개발에 관해 의논을 시작하였다. 두 사람은 1910년대 중반에 스웨덴의 베어링 제조업체인 SKF에서 함께 일한 사이였으며 가브리엘손은 계속 SKF에서 일했지만 라르손은 이직해 엔진 부품 제조업체인 AB 갈코에서 일하고 있었다. 당시 스웨덴에서는 1년에 1만 5,000대 정도의 자동차가 팔리고 있었으며 모두 다른 나라에서 만들어 수입한 것이었고 그 가운데 약 90%는 미국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미국에서 만들어진 차들은 스웨덴 실정에는 좀처럼 맞지 않았다. 겨울이 길고 추운 스웨덴의 환경이 가혹하기도 했지만 관리나 수리에 필요한 부품을 제때 알맞게 구하기가 어렵기도 하여 가브리엘손은 그런 스웨덴의 자동차 환경을 바탕으로 자동차를 직접 생산하면 성공을 거둘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1925년 12월 16일에 두 사람 사이에서 정식 계약을 체결하였다. 계약에는 구스타프가 신차의 엔지니어링 작업과 신공장 구축에 필요한 투자계획을 책임지며 프로젝트가 정상적으로 운영될 때에 보상을 받는 걸로 되었다. 정상적으로 운영된다는 의미는 1928년 1월 1일 전에 적어도 100대 이상의 생산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었으며 아사가 프로젝트의 소유권을 갖고 보장이 없는 조건에서 높은 리스크를 감당하며 구스타프는 최악의 상황에서 보상이 없이 일을 한다는 내역이었다. 가브리엘손은 라르손이 설계한 차의 시제품이 완성되면 자신이 일하고 있던 SKF에 보여주고 본격적인 투자를 받을 생각이었다. SKF에서도 회사 일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가브리엘손이 자동차 생산 계획을 추진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라르손 역시 회사의 허락을 받아 맡은 일은 그대로 하면서 작업을 했기 때문에 원래 다니던 직장에서 월급을 그대로 받을 수 있었다. 자동차 개발이 도중에 중단되더라도 라르손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일종의 보험처럼 두 사람이 합의한 결과였다. 라르손은 자신이 일하던 AB 갈코 공장의 설비를 활용해 1926년 6월부터 10대의 차를 시험 제작을 시작하였으며 1926년 7월 25일에 완성된 차를 야콥(Jakob)이라 불렀다. 이는 천주교 성인 중 한 명인 야콥 즉 야고보가 선종한 날을 기리는 영명축일이 7월 25일인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나중에 볼보의 첫 차인 ÖV 4의 별명으로도 널리 알려지게 된다. 이렇게 완성된 10대의 시제차로 가브리엘손은 SKF의 투자를 받아 본격적인 자동차 생산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SKF는 1915년에 설립되었지만 거의 방치 상태였던 자회사인 볼보 AB의 이름을 되살려 자동차 생산을 위한 회사인 AB 볼보(AB Volvo)를 설립하고 1927년 1월 1일 가브리엘손은 사장으로 라르손은 부사장으로 임명하였다. 예테보리의 룬드비(Lundby) 에 마련된 공장은 분주하게 움직여 마침내 1927년 4월 14일에 처음 완성된 ÖV 4가 조립 라인을 떠나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볼보의 첫 양산차인 ÖV 4가 가브리엘손과 라르손에 의해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2년 10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다.[4]

ÖV4[편집]

볼보 첫 번째 자동차 ÖV 4

ÖV 4볼보에서 처음으로 개발한 자동차이다. ÖV 4라는 모델 이름은 4기통 엔진 오픈카라는 뜻의 스웨덴어(Öppen Vagn 4 cylindrar) 머리글자다. 야콥(Jakob)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본격 생산에 앞서 만들어진 열 대의 시제차 중 하나가 1927년 7월 25일에 만들어져 붙은 이름이다. 시제차 열 대는 1926년 라르손이 기술책임자로 일하고 있던 AB 갈코의 스톡홀름 공장에서 만들어졌다. 엔진은 영국에서 엔진 기술을 익힌 라르손이, 프레임과 변속기를 포함한 구동계 등 주요 섀시 구성요소는 미국 자동차 업계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얀 스미스(Jan G. Smith)가 설계했다. 디자인은 헬머 마스올레(Helmer MasOlle)가 맡았다. 개발이 이루어지는 동안 SKF의 자회사였던 AB 볼보가 독립해 1927년 1월 1일에 자동차 회사로 새롭게 시작했다. 새 회사의 사장은 가브리엘손이 맡았다. ÖV 4의 첫 양산 모델은 예테보리에 있는 룬드비(Lundby) 공장에서 1927년 4월 13일에 출고되었다. 처음 공장에서 생산된 ÖV 4를 기술자 에릭 카를베르그(Eric Carlberg)가 몰고 출발하려고 했을 때 기어를 1단에 넣었는데도 차는 뒤로 움직였다. 뒤 차축 디퍼렌셜 기어를 잘못 조립한 탓이었다. 문제를 바로잡는 데 시간이 걸렸고 결국 공식 출시는 계획보다 하루 미뤄진 1927년 4월 14일에 이루어졌다. 엔진은 볼보 펜타(Volvo Penta)의 전신인 선박 및 산업용 엔진 업체 펜타베르켄(Pentaverken)에서, 변속기는 나중에 볼보 파워트레인에 합병된 기계 가공업체 KMV에서, 일부 섀시 부품은 훗날 세계적 총기 제조업체로 성장하는 보포스(Bofors)에서 만들었다. 기계 부품에 쓰인 베어링은 물론 모두 SKF에서 공급했다. ÖV 4는 사이드 밸브 구조가 쓰인 직렬 4기통 1,944cc 엔진을 얹었다. 압축비 4.9:1인 이 엔진은 2,000rpm에서 최고출력 28마력의 힘을 냈다. 변속기는 동기 기구(싱크로나이저)가 없는 3단 수동이었다. 주차 브레이크는 변속기 출력축에 달린 드럼에 직접 작동하는 단순한 방식이었다. 최고 속도는 시속 90km였지만 시속 60km 정속 주행이 권장되었다. 초기 생산 모델에는 뒷바퀴에만 브레이크가 달렸지만 1928년에 선택사항으로 앞바퀴 브레이크가 추가되었다. 차체에는 네 개의 문이 달렸고 물푸레나무와 너도밤나무로 만든 프레임에 강판을 씌워 만들었다. 내장재는 가죽이었고 차체 색은 짙은 파란색 한 가지였다. 볼보는 처음부터 스웨덴 철강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ÖV 4를 알렸다. 그러나 이름처럼 오픈카였던 ÖV 4는 스웨덴의 날씨에는 어울리지 않아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1929년까지 생산된 ÖV 4는 275대로 그중 205대는 오픈 투어러로 만들어졌다. 오히려 ÖV 4의 섀시를 이용한 트럭과 상자형 차체를 갖추고 나중에 나온 PV 4 세단이 더 잘 팔렸다. ÖV 4는 볼보뿐 아니라 스웨덴 기술로 만든 첫 번째 자동차이다.[5]

각주[편집]

  1. "Assar Gabrielsson", "wikipedia"
  2. 박현욱, 〈‘안전과 품질’로 세계 상용차 기술력 선도〉, 《상용차신문》, 2018-08-07
  3. 품질과 안전으로 승부한다-볼보(volvo)〉, 《카라이프》, 2005-10-31
  4. 볼보자동차코리아, 〈볼보 타임머신, 1924년 - 첫 볼보의 탄생을 일구어낸 두 사람의 만남〉, 《네이버 포스트》, 2019-07-08
  5. 류청희, 〈브랜드 역사의 시작 #15. 4기통 오픈카로 출발한 볼보 ÖV 4〉, 《오토헤럴드》, 2019-01-22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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