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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피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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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피에히(Anton Piech)
폭스바겐(Volkswagen)

안톤 피에히(Anton Piech)는 오스트리아계 독일인 변호사이자 페르디난트 포르쉐(Ferdinand Porsche)의 사위이다. 그는 1941년에서 1945년 사이에 현재 폭스바겐(Volkswagen) 회사인 폭스바겐베르크(Volkswagenwerk GmbH)를 이끌었으며 독일 볼프스부르크에 있는 공장에서 폭스바겐 차량(KdF-Wagen)을 생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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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편집]

안톤 피에히는 1894년 9월 21일 비엔나에서 변호사 안톤 바울 피에히(Anton Paul Piëch)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비엔나 대학교에서 공부했고 1922년에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고향에서 변호사로 자리를 잡았고, 그의 고객은 여러 오스트리아 나치들이 포함되었다. 1920년대 말 그는 고용 계약과 관련하여 다임러 벤츠(Daimler-Benz)와의 소송에서 페르디난트 포르쉐를 변호했다. 1928년 피에히는 페르디난트 포르쉐의 딸인 루이즈 포르쉐(Louise Porsche)와 결혼했으며, 아들 3명과 딸 하나를 키웠다. 안톤 피에히는 1931년 4월 25일 슈투트가르트에서 포르쉐 회사를 설립하면서 15%의 지분을 보유했다. 1937년 창설된 포르셰 KG(Porsche KG)에서 그의 지분은 10%였으며, 피에히는 법률과 계약 문제에서 회사를 대표했다. 1933년 5월 피에히는 당시 불법이었던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당원이 되었으며, 1937년 7월 나치 독일의 나치당에 입당했다. 그 후 그는 1944년에 친위대에 입대했다.

1941년 6월 그는 볼프스부르크의 폭스바겐 생산 공장의 공장장으로 취임했다. 피에히는 오토 다크호프(Otto Dyckhoff)의 뒤를 이어 페르디난트 포르쉐 및 보도 라프츠(Bodo Lafferentz)와 함께 폭스바겐베르크(Volkswagenwerk GmbH)의 관리자 중 한 명이 되었으며 수십 년 후 현재의 폭스바겐그룹(Volkswagen Group)이 형성되었다. 페르디난트 포르쉐의 오른팔인 피에히는 V-1 비행 폭탄과 같은 무기 제조를 위해 볼프스부르크 공장을 개조하는 일에 참여했다. 그의 지휘하에 폴란드, 소련, 이탈리아, 프랑스에서 2만 명의 강제노동자들과 독일 정치범들뿐만 아니라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알베츠도르프(Arbeitsdorf)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도 이 공장에서 일했다.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장 노동력의 약 3분의 2를 차지했으며, 일부 불완전한 목록에 따르면 볼프스부르크에서 전쟁 포로, 추방자, 강제 수용소 포로 등 500명이 사망했다. 루헨(Rühen)에는 공장 근처에 강제노동차의 아기를 위한 고아원이 세워졌으며, 적어도 350명의 아이들이 그곳에서 사망했으며, 그들이 직장에 복귀할 수 있도록 태어난 지 2주 후에 엄마와 떨어져 있었다.

피에히는 국민돌격대(Volkssturm) 4개 회사의 공장 리더였으며, 군인들은 주로 공장과 일종의 관계를 유지했다. 1945년 4월 10일 그는 그의 군대에게 엘베 강(Elbe)를 향해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폭스바겐베르크의 주소를 안전한 장소로 이전한다는 핑계로 네이덱(Nejdek)에서 그의 가족이 농장을 소유한 젤암제(Zell am See)로 1000만 독일 라이히스마르크를 옮겼다. 이 자금은 원래 공장을 네이덱에서 알게우(Allgäu)로 이전하는데 사용되어야 했지만 이것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고 어떤 자금도 포르셰 KG에 자금을 조달할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난 후, 해고 통지가 없었기 때문에 피에히는 1945년 11월까지 폭스바겐베르크의 최고 경영자로 재직했다. 그는 이 마지막 달을 Porsche KG의 청구서를 지불하는데 사용했다. 피에르-앙리 테이트겐(Pierre-Henri Teitgen)의 요청에 따라 피에히는 1945년 말 바덴바덴에서 페르디난트 포르쉐, 페리 포르쉐와 함께 체포되었고, 마르셀 폴 산업생산부 장관의 초청으로 체포되었다. 그들은 프랑스 노동자들을 볼프스부르크로 강제 이송하고,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한 동안 푸조의 간부들을 나치 강제 수용소로 추방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또한 푸조의 장비와 공구를 해체하고 VW 공장으로 옮기는 책임을 맡았으며, 피에히와 를 해체하고 VW 공장으로 옮기는 책임을 맡았다. 피에흐와 페르디난드 포르쉐는 프랑스 교도소에서 22개월을 보냈다. 하지만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법정에서 많은 증인들의 증언으로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48년 9월 17일 피에히는 바트라이헨할(Bad Reichenhall)에서 새로운 CEO 하인리히 노르트호프(Heinrich Nordhoff)가 이끄는 폭스바겐베르크와 포르쉐 KG(Kommanditgesellschaft)의 협정에 서명했다. 로운 조약의 결과로 포르쉐는 현재까지 폭스바겐의 개발 활동을 담당하게 되었다. VW가 지불한 라이선스 수수료와 대표권을 통해 Dr. Ing. F. Porsche AG의 새로운 공장을 위한 재정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1947년 4월 1일 잘츠부르크에서 설립된 포르쉐 그뮌트(Kärnten)의 케른텐(Kärnten)에서 설립된 잘츠부르크(Salzburg)의 Porsche Konstruktionen-GmbH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 위치한 국민바겐 종합 대리점의 매니저를 역임했으며, 현재는 폭스바겐 그룹의 대주주인 포르쉐 홀딩이 되었다. 1952년 8월 29일 안톤 피에히는 클라겐푸르트(Klagenfurt)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으며, 그의 아내 루이스는 오스트리아의 사업부장이 되었다.[1]

각주[편집]

  1. "Anton Piëch", Wikipedia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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