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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바조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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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바조니아 국기
암바조니아 국장
빨간색은 암바조니아가 주장하는 영토

암바조니아(Ambazonia)는 중앙아프리카 카메룬에서 분리 독립을 선포한 비승인 국가이다. 정식 명칭은 암바조니아 연방 공화국이며 흔히 암바랜드(Amba Land)라고 불린다. 암바조니아는 카메룬 영토 중에서 영어를 구사하는 지역이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분리독립 지지 독립체이다. 암바조니아는 국제적으로 미승인 상태라서, 카메룬의 자치구로 간주되는 자치주이다. 이 영토는 과거에 남카메룬으로 구성되었으며 카메룬 행정상 북서부주남서부주에 해당한다. 남카메룬은 한때 영국 관할 하의 유엔 남카메룬 신탁통치령이었으며(1922~1961년) 연방제를 조건으로 인접국에 연합함으로써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1961년 투표를 거쳐 주민들이 나이지리아 대신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카메룬에 편입하기로 결정해 편입되었다. 그러나 카메룬 정부는 연방제를 폐지하고 영어권 주민을 차별하여 분쟁이 발생하였다.

2017년, SCACUF(Southern Cameroons Ambazonia Consortium United Front)는 일방적으로 암바조니아를 독립체로 선언하였으나 카메룬 정부는 이 선언은 법적인 무게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암바조니아는 대표 없는 국가 민족 기구에 속한다.

개요[편집]

  • 수도: 부에아
  • 면적: 42,710 km²
  • 인구: 3,521,898 명 (2015년 추정)
  • 공용어: 영어
  • 대통령: 새뮤얼 이코메 사코(Samuel Ikome Sako)
  • 정부 공식 홈페이지: https://ambagov.org/

어원 및 용어[편집]

"암바조니아"라는 용어는 영어로 암바 만으로 알려진, 우리강 하구의 지역명인 암보제스(Amboses)에서 유래되었다. 이 명칭은 1984년 폰 고르지 딩카(Fon Gorji Dinka)가 지역 내 앙글로폰 기관의 자율성 회복과 보존을 위한 캠페인의 일환으로 만들었다.

암바조니아라는 용어는 대개 분리주의 또는 독립추구파와 더 관련이 있는 반면 카메룬 정부나 유엔 등 공식 소식통들은 계속해서 '북서권'과 '남서권'(또는 때로는 '북서권'이나 '북서방'과 '남서방' 지역)을 언급하고 있다.

역사[편집]

초기 식민지화[편집]

1470년대 포르투갈을 시작으로 여러 나라의 유럽 무역상들이 암바스만에 도착하기 시작하였다. 이 지역에서 유럽 본토에 정착한 최초의 영구 정착지는 1858년 영국 침례교 선교사 알프레드 사커에 의해 해방된 노예들의 안식처로 세워졌다. 이 정착지는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을 따서 빅토리아(현재의 Limbe, 카메룬)라고 명명되었다. 1880년대까지만 해도 유럽 활동은 무역회사와 선교사들이 주도했다. 그러나 1880년대에 아프리카 쟁탈전은 유럽 강대국들이 식민지의 주장을 확보하기 위해 아프리카에 대한 외교적 또는 군사적 지배권을 획득하기 위해 서두르는 가운데 본격화되었다. 우리강 삼각주(현대 두알라)에 동남쪽에 실질적인 무역센터를 세운 독일인과 나이지리아에 서쪽에 폭넓은 이해관계를 가진 영국인은 둘 다 지역 통치자들과 협정을 맺기 위해 경쟁했다. 독일의 탐험가 구스타프 나흐티갈은 몇몇 저명한 왕들과 주요 조약에 서명했다. 1884년 독일은 지역 동맹국들의 승리를 도우며 카메룬에서의 식민지 지위를 근본적으로 굳혔고 1887년까지 영국은 이 지역에서의 주장을 포기했다.

독일은 군사 원정에 의해 뒷받침된 지역 지도자들과의 합의를 통해 연안에 대한 통제를 계속 강화했다. 독일은 수년간의 전투 끝에 1891년 부에아를 정복하여 1892년 두알라에서 식민지 수도를 이전하였다. 1914년까지, 독일인들은 직접 또는 지역 지도자들을 통해 현재 암바조니아에 의해 주장되고 있는 영토의 배후지까지 통제권을 확립했고, Nkambe와 같은 공동체를 정복하고 1912년에 Bamenda에 수비대를 세웠다. 독일 행정부는 현금작물 재배지 구축, 운송 및 통신 인프라 개선으로 제품과 천연자원을 항구로 신속히 들여와 유럽으로 수송하는 데 주력했다. 카메룬 노선의 험준한 지형과 암바조니아에 의해 주장된 지역 내륙의 많은 부분에 항해할 수 있는 강이 부족하여 해안 지역 밖의 식민지 활동이 제한되었다.

영국 식민지 시대 (1914–1961)[편집]

제1차 세계 대전베르사유 조약 이후, 카메룬은 프랑스 위임통치령과 영국 위임통치령으로 나뉘었습니다. 프랑스 위임통치령은 Cameroun으로 알려져 있었고, 이전 독일 영토의 대부분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영국 위임통치령은 식민지 나이지리아의 국경을 따라 길게 뻗은 땅으로, 역사적인 암바스만 보호령을 포함한 북부 카메룬과 남부 카메룬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영국령 카메룬으로 조직되었습니다.

영국은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전통에 따라 주민를 관리할 수 있도록 허용하면서 간접 통치를 통해 영토를 관리했다. 1953년, 런던에서 열린 회의에서 남부 카메룬 대표단은 별도의 지역으로의 권리를 요구했다. 영국은 동의했고, 남부 카메룬은 수도가 여전히 부에아에 있는 자치 지역이 되었다. 1954년 선거가 치러졌고 1954년 10월 1일 E. M. L. 엔들리가 총리로 취임하면서 의회가 소집되었습니다.

독립과 국민투표 (1961년)[편집]

유엔은 1961년 2월 11일 이 지역에서 국민들에게 두 가지 대안을 제시하는 국민투표를 조직했습니다. 나이지리아와의 연합 또는 카메룬과의 연합. 세 번째 옵션인 독립은 유엔 신탁통치이사회의 영국 대표인 앤드류 코헨 경에 의해 반대되었고, 결과적으로 목록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국민투표에서 북부 카메룬 유권자의 60%가 나이지리아와의 연합에 찬성했고, 남부 카메룬 유권자의 70%가 카메룬과의 연합을 선택했다.

1961년 10월 1일 남부 카메룬은 카메룬과 "서 카메룬"이라는 이름으로 연합했으며, 10월 1일을 독립일로 정하였다. 하지만, 남카메룬의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80%의 다수인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정부에 의해 공정한 대우를 받는다고 믿지 않았다. 당시 대통령 아마두 아히조는 남부 카메룬이 천연 자원을 가지고 연합에서 이탈할 것을 우려했다. 1972년 5월 20일 프랑스령 카메룬의 일방적 국민투표에 따라 카메룬에서는 연방 국가단일 국가로 대체하는 새로운 헌법이 채택되었고 또한 대통령에게 더 많은 권한을 부여했다. 카메룬 남부는 자치권을 잃고 카메룬 공화국의 북서 지역과 남서 지역이 되었다. 독립 찬성 단체들은 서 카메룬 출신 의원 대다수가 헌법 개정을 정당화하는 데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이 헌법을 위반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남부 카메룬이 사실상 카메룬에 합병되었다고 주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 카메룬의 정치 지도부는 헌법을 다시 바꾸고,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폴 비야를 총리로 임명하고 아마두 아히조의 후임자로 임명했다.

1985년 3월 20일자 각서에서, 앵글로폰 변호사이자 카메룬 변호사 협회 회장인 퐁굼 고지 딩카는 폴 비야가 이끄는 카메룬 정부가 위헌이라고 쓰고 전 남카메룬이 암바조니아 공화국으로 독립해야 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딩카는 이듬해 1월 재판 없이 투옥되었습니다. 3년 후, 그는 나이지리아로 탈출했다.

남부 카메룬 국가평의회[편집]

1993년, 영어권 단체 대표들은 부에아에서 첫 번째 모든 영어권 회의(AAC1)를 소집했습니다. 이 회의는 1961년 연방을 복원하기 위한 헌법 개정을 요구하는 "부에아 선언"을 발표했다. 이어서 1994년 바멘다에서 열린 제2회 All Anglophone Conference (AAC2)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연방 국가가 합리적인 시간 내에 복구되지 않으면 남부 카메룬이 독립을 선언한다는 "바멘다 선언"을 발표했다. AAC는 남부 카메룬 국민 회의(SCPC)로 이름이 바뀌었고, 이후 남부 카메룬 국민 회의(SCNC)를 집행 기관으로 하여 남부 카메룬 국민 회의(SCAPO)로 이름이 바뀌었니다. 젊은 활동가들 1995년 5월 28일 부에아에서 남부 카메룬 청년 연맹을 결성했다. SCNC는 존 폰차가 이끄는 대표단을 유엔에 파견했고 1995년 6월 1일에 접수되었으며 프랑스령 카메룬의 남부 카메룬 합병에 반대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SCNC 활동은 경찰에 의해 일상적으로 중단되었다. 1997년 3월 23일, 바멘다에 있는 헌병대 수용소를 급습하여 약 10명이 사망했다. 경찰은 주로 SCNC 지지자들인 200명에서 300명 사이의 사람들을 체포했지만, 또한 영어권 지역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는 야당인 사회민주전선의 당원들도 체포했다. 이어진 재판에서 국제사면위원회와 SCNC는 고문과 무력을 통하여 승인을 받아 냈다는 실질적인 증거를 발견했다. 압수수색과 재판으로 SCNC 활동이 중단되었으며 이에 대응하여 1998년 4월 사회민주전선의 고위 당원인 에소카 은도키 무케테를 SCNC의 새 의장으로 선출했다. SCNC는 2001년 카메룬 당국에 의해 공식적으로 불법으로 선언되었다.

시위 및 내전(2016-현재)[편집]

2016년 11월, 많은 대규모 시위와 파업이 조직되었는데, 처음에는 영어권 변호사, 학생, 교사들이 법과 교육에서 영어와 영어권 기관의 증가하는 소외에 초점을 맞췄다. 여러 시위가 보안군에 의해 폭력적으로 분산되면서 시위대와 경찰 간의 충돌로 이어져 여러 명이 사망했습니다. 이 폭력사태로 추가 시위와 총파업이 일어나게 하는 동시에 2017년 초까지 정부의 단속이 시작되었다. 여기에는 시민사회단체 금지, 1~4월 전화와 인터넷 접속 차단, 시위대 검거 등이 포함된다.

정부가 영어권 불만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위원회를 설립하고 법원과 학교의 언어 평등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지만, 지속적인 불신과 시위에 대한 가혹한 대응으로 그 효과가 대대적으로 삭감되었다.

2017년 말까지 대화 노력이 사라지고 양측의 폭력이 계속되면서 주요 암바조니아 민족주의 운동은 상부조직인 Southern Cameroons Ambazonia Consortium United Front (SCACUF)을 조직했다. SCACUF는 남부 카메룬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기념일인 10월 1일에 이 지역의 독립을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SCACUF는 지도자인 Sisiku Ayuk Tabe Julius를 임시 대통령으로 하여 임시 정부로의 전환을 모색했다. 독립 선언에 따른 시위로 최소 17명이 사망했고, 암바조니아 방위군이 주장한 공격으로 카메룬군 14명이 사망했다. 카메룬 정부는 이 선언이 법적 효력이 없다고 밝혔고, 2017년 11월 30일 카메룬 대통령은 경찰과 군인에 대한 분리주의자 공격에 대해 더 강경한 노선을 표시하고 대규모 군사 배치를 함과 동시에 야간 통행을 금지 하고 마을 전체를 강제 대피 시켰다. 이것은 대화를 계속할 것에 대한 희망을 일시적으로 끝내 버렸으며 남부 카메룬에서 본격적인 게릴라 전쟁을 시작했다. Red Dragons, Tigers, ARA, Seven Kata, ABL과 같은 여러 다른 무장 파벌들이 등장했다. 이 무장 파벌은 암바조니아 정치 지도자들과의 협력과 충성도은 각자 다르다. 독립을 지지하는 민병들은 정치 지도자들로 부터 독립되었으며 정치 지도자 대부분이 해외에 망명중이다.

2018년 1월 5일, 나이지리아 아부자에서 Sisiku Ayuk Tabe Julius 대통령 등 망명 중인 암바조니아 임시정부 구성원들이 체포되어 카메룬 정부군의 구류로 이송되어 형사 소송를 당했다. 2018년 2월 4일, 미국에 기반를 둔 설교자 Samuel Ikome Sako 박사가 Sisiku Ayuk Tabe Julius의 뒤를 이어 암바조니아 연방 공화국의 임시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발표가 있었다. 그러나 카메룬 법원으로부터 테러 혐의로 종신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2019년 5월 2일 아유크 타베는 교도소에서 사코의 관리인 내각 해산과 자신의 내각 복원을 선언했다. 이에 사코가 저항하면서 2019년 암바조니아 지도부의 위기로 이어졌다.

폭력 사태가 격화되면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적인 노력이 강화되었다. 2019년 5월 13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앵글로폰 위기를 논의하기 위한 비공식 회의를 가졌다. 스위스 정부가 중재한 평화 회담은 여러 차례 결렬되었는데, 주로 계파 분열과 분리주의 지도자들의 민병대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 부족으로 인해 심지어 예비 조치조차 어렵게 되었다.

이 전쟁은 분리주의 민병대가 정부군과 협력한 민간인이나 민병대의 선언된 학교, 그리고 선거 보이콧 또는 모든 여행과 활동을 금지하는 등 "폐쇄"원칙을 지키지 않는 민간인에게 게릴라 공격을 하였다는 것이 특징이다. 교사들과 학생들이 납치되어 살해되었고 많은 학교와 학교 자료들이 불에 탔으며 많은 어린이들은 위기가 시작된 이후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 사람들은 일부 민병대가 지속적인 활동에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민간인들을 납치하여 몸값을 지불하도록 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정부군은 분리주의자들의 은신처로 의심되는 마을 전체를 불태우고, 정당한 절차 없이 민간인들을 처형했으며, 억류자들을 고문했다. 양측에 의한 무차별적인 살인, 고문, 강간 및 기타 성차별적인 폭력에 대한 보고가 널리 보고되었다. 미국과 독일 정부는 인권 침해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보고된 학대에 대해 카메룬과의 군사 협력을 축소하거나 취소했다. 프랑스와 영국은 물론 유럽의회도 우려를 표명하고 위기 해결을 위한 당사자 간 협상을 추진했다.

군대[편집]

무장 분리주의자들은 다양한 규모의 수십 개의 게릴라 집단으로 나뉘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임시정부 산하의 암바조니아 자주국방위원회(ASC)에 가입했다. ASC에 가입하지 않은 그룹으로는 암바조니아 방위군(ADF)과 남카메룬 방위군(SOCADEF)이 있는데, 이들은 둘 다 어느 정도 ASC와 협력한다.

지리[편집]

나이지리아로 가는 국경 쪽으로 서쪽으로 가면 맘프 유역은 저지대로서 우림이 울창하게 덮여 있다. 코럽 국립공원이나 다카만다 국립공원 같은 보호구역이 있다. 카메룬을 향해 동쪽으로 더 가면 마넨구바나 쿠페와 같은 일련의 화산이 발견될 수 있다. 그들은 카메룬의 국경을 따라 남쪽에서 북쪽으로 뻗어 있으며, 그곳에서 바멘다 고원지대로 간다. 암바조니아 남쪽 끝 근처에 있는 파코 산(카메룬 산)은 해발이 4,040m (13,250ft)로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높고 아프리카에서 28번째로 높은 산이다.

기후[편집]

암바조니아의 많은 지역이 서부 고원에 있기 때문에 카메룬나이지리아의 주변 지역보다 다소 서늘한 기후를 가지고 있다. 베누에 수로의 일부인 해안가의 저지대와 만수의 강 계곡은 더 따뜻하다. 암바조니아의 대부분은 열대 몬순 기후를 가지고 있으며 해안 평야에는 세계에서 가장 비가 많이 내리는 곳(데분차 마을 등)이 포함되어 있다. 북서부 지방(바멘다 시 포함)의 북동부 지역은 열대 사바나 기후로 습기와 건기가 뚜렷하다. 오쿠 마시프나 카메룬 산과 같이 높은 고도에서 기온이 충분히 떨어져 따뜻한 여름 지중해성 기후로 분류되는 주머니가 있다. 카메룬 산의 꼭대기는 툰드라 변종의 극지방 기후를 가지고 있는데, 서아프리카에서 독특하며 적도 부근에 매우 드물다.

지도[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중앙아프리카 같이 보기[편집]

중앙아프리카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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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프리카 문화
중앙아프리카 주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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