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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브러햄 캐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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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브러햄 캐럼(Abraham Karem)
오버에어(Overair, Inc.)

에이브러햄 캐럼(Abraham Karem)은 드론(UAV) 기술의 창시자로 "드론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미국 방산업체인 카렘 에어크래프트(Karem Aircarft)와 에어택시 선도기업인 오버에어(Overair, Inc.)의 공동 설립자이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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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편집]

에이브러햄 캐럼은 1937년 6월 27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유대계 부부의 아들로 태어나 1951년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그는 19세 때 명문 이스라엘 테크니온공과대학교(Technion Israel Institute of Technology) 항공과에 입학하였으며 그의 관심 분야는 전투용 항공기였다. 미래의 항공 엔지니어답게 어릴 적부터 모형 비행기 조립을 좋아했고 자가용 조종사 면허도 취득했다. 그는 이스라엘의 명문 공과대인 테크니온대에 입학해 항공공학을 전공한 후 이스라엘 공군에 입대했다. 그는 9년간 군 생활을 한 다음 제대 후 이스라엘 항공업체인 IAI(Israel Aerospace Industries)에 들어갔다. 대학 졸업 후 13년 동안 총 16가지의 프로젝트를 완성시켰는데 대부분은 이스라엘 공군 소유 제트 전투기의 신무기 운용 능력 향상 프로젝트였다. 미국 엔지니어들이 첫 비행까지 20년 가까이 족히 걸리던 프로젝트들을 카렘은 반년 만에 완성해냈다. IAI는 이러한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입사 4년 만에 공학 담당 부사장으로 승진시켰다. 그러나 1974년 그는 임원들의 만류에도 IAI를 떠나고 말았다. 그가 그런 결정을 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1973년 하반기 이스라엘 공군의 긴급 요청으로 레이더 기만용 무인기를 개발했다.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만든 무인기이기도 했던 이 프로젝트는 미국에서 무인기를 수입해 오기로 방침이 바뀌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카렘은 무인기라는 영역에서 엄청난 가능성을 느꼈다. 그래서 IAI를 퇴사해 무인기 설계 회사를 차린 것이다. 하지만 방위산업 관련 수주 계약 시 업체의 정치력과 파워에 밀려 그가 아무리 공들여 설계한 무인기를 내놓아도 이스라엘군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카렘은 이스라엘에서는 사업을 하기 힘들다는 결론을 내리고 미국으로 이주하기로 결정했다. 1977년 미국으로 간 카렘은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디벨롭먼트사이언스사에 들어갔다. 이 회사는 1973년 이스라엘에 기만용 무인기를 제안했으며 당시에는 DARPA(Defense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미국 국방고등연구기획국)의 자금지원을 받아 무인기를 개발하고 있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퇴사한 후 리딩시스템스(Leading Systems Inc.)를 설립했다. 로스앤젤레스 동쪽 근교 하시엔다 고원의 자택을 사무실과 공장으로 쓰며 잭 허텐스타인, 짐 머신 등 두 무인기 개념 신봉자들을 직원으로 영입했다. 1985년 리딩시스템스는 DARPA와 장기체공 무인기인 앰버의 개발 계약을 체결했다. 당시 미 해군장관 존 리먼은 해군 함포의 탄착 관측용 무인기 개발을 적극 추진하고 있었다. 해군의 자금 지원을 충분히 받아 만들어진 앰버는 라틴아메리카의 마약 밀매업자들을 지속적으로 감시하려는 미 남부사령부에서도 각광을 받았다. 그는 1988년 캘리포니아 어바인에 1만 8,580㎡ 크기의 공장을 건설하고 앰버는 엘 미라지 상공 1,650㎡ 고도를 38시간 동안 비행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미 의회가 관련 예산을 동결시켜 앰버 프로젝트는 이관 직후 폐기되고 말았다. 앰버의 장래가 불확실해지자 카렘은 자사에서 민간 자본으로 개발 중이던 수출용 무인기 내트(Gnat)750 쪽으로 사업의 무게 중심을 바꾸었으며 회사는 대출 만기로 미국 국방 산업에인 제너럴아토믹스(General Atomics)에 인수되었으며 몇 년 후 빌 클린턴 행정부가 발칸 반도에서의 민족 전쟁을 정찰할 수단을 요구하자, 당시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 제임스 울시는 카렘의 무인기를 추천했다. CIA는 비디오카메라를 탑재한 내트750 2대를 구입해 알바니아에 배치한 뒤 보스니아 상공의 정찰 임무에 투입했다. 카렘은 해당 기체를 위한 저소음 엔진을 개발하기로 합의하면서 잔디깎기 기계 소리로 흔히 묘사되는 오늘날의 저소음 엔진을 완성했으며, 이 엔진을 바탕으로 한 신형 무인기 개발 사업을 통칭 프레데터(Predator)로 명명했다. 1994년 MQ-1 프레데터가 모습을 드러냈으며 1995년부터 운용되기 시작했다. 에이브러햄 캐럼은 2004년 미국 방산업체인 카렘 에어크래프트(Karem Aircarft)을 설립하고 군용 VTOL(Vertical Take-Off and Landing, 수직이착륙기) 분야에 독보적인 기술을 확보하였다. 2019년 카렘 에어크래프트는 민간용 eVTOL 개발을 위해 오버에어(Overair)를 설립하였으며 세계적 승차공유서비스 기업 우버가 추진 중인우버 엘리베이트의 핵심 파트너사 중 하나로 되었다. 2020년 1월 한화시스템㈜가 오버에어에 2,500만 달러 투자해 에어택시 공동 개발에 나서고 2020년 3월 29일, 한화시스템㈜는 오버에어 지분 100%를 인수하기로 밝히고 대규모 인수자금 마련을 위해 2021년 상반기에 1조 2,000억 원의 유상증자를 하기로 했다.[3] [4][5]

주요 성과[편집]

앰버 비행 사진

앰버[편집]

에이브러햄 캐럼은 1985년 미국 국방고등연구기획국(DARPA)과 장기체공 무인기인 앰버(Amber)의 개발 계약을 체결했다. 앰버 역시 무선으로 조종하며 일반적인 방식으로 이착륙이 가능하지만 마치 미사일처럼 날개를 접고 캐니스터에 수납돼 있다가 로켓의 보조를 받아 발사되기도 했다. 앰버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점은 수직에 가깝게 착륙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착륙 공간이 작은 수상함이나 잠수함, 심지어 트럭에도 착륙할 수 있었다. 앰버가 가진 여러 장점을 살펴보면 카렘의 장인 정신과 설계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엔진은 1950년대 포뮬러원(F1) 레이싱 스타였던 한스 허먼이 개발한 4행정 엔진이었고 탑재한 컴퓨터의 연산 성능은 F-16 전투기의 무려 4배에 달했다. 전자기술은 무섭도록 빠르게 발전하므로 최대한 좋은 것을 써야 구식화를 늦출 수 있다는 논리였다. 앰버는 착륙 없이 24시간 이상 비행할 수 있었다. 고도 9,000m까지 상승도 가능했고 악천후에서도 안정적으로 비행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앰버는 총 650시간을 비행하는 동안 단 한 차례 추락했다. 이는 당시의 다른 무인기들과 비교해 볼 때 실로 대단한 성능이었다. 이는 내구성과 비행 안전성을 무엇보다도 중시하는 카렘의 설계 철학이 중추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앰버에 추락 시 쓸 낙하산을 이용한 회수 시스템도 달지 않을 정도였다. 추락할 때 안전하게 회수할 생각을 하느니 아예 처음부터 추락하지 않도록 안정성에 중점을 두고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앰버는 개발 과정도 매우 신속하고 효율적이었다. 앰버의 개발은 카렘의 자택에서 소수 직원들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앰버 시제기의 단가는 35만 달러였는데 이는 아킬라 무인기의 1시간 운용비보다도 쌌다.

각주[편집]

  1. 아브라함 카렘〉, 《위키백과》
  2. "Abraham Karem", wikipedia
  3. keit_newtech, 〈에이브러햄 카렘 현대 무인기의 대부〉, 《네이버 블로그》, 2018-03-06
  4. 미국의 무인 공격기 1〉, 《고든의 블로그 구글 분점》, 2012-11-25
  5. 가상현실∙드론∙인공지능… ‘21세기 IT 걸작’을 만든 사람들〉, 《Samsung Newsroom Korea》, 2016-03-30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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