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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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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傳燈寺) 전경
전등사(傳燈寺)

전등사(傳燈寺)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의 정족산에 위치한 사찰이다. 정족산성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대웅전, 약사전, 범종 등 대한민국의 보물이 소장되어 있다. 경내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정족산 사고가 있다.

고구려 시기부터 사찰이 세워져 여러 차례 이름을 바꾸고 중수되었다. 전등사란 이름은 고려 후기 충렬왕 때 붙여진 것이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광해군 때 중수된 것이다.

전라도와 더불어서 전국에서 불교의 세력이 약한 지역인 인천 내에서 인천을 대표하는 사찰이기도 하다.

역사[편집]

일제강점기 전등사 전경.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일제강점기 전등사 대웅보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서기 381년 고구려 소수림왕 시절 아도화상이라는 승려가 창건하였다. 고려왕조 때 수축하였다가 17세기 초 광해군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다시 지었고 일제강점기 때 중수된 적이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현존하는 한국의 사찰 중 가장 역사가 길다. 아도화상이 처음 절을 지을 때는 진종사(眞宗寺)로 명명했다.

고려 고종 46년인 1259년에 진종사 경내에 가궐을 지은 것으로 다시 기록에 등장한다. 고려는 1232년부터 1270년 사이 강화도에 임시 도읍을 정했다.

고려시대부터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사찰로서 중하게 여겼고, 1266년 진종사는 크게 중창되었으며, 충렬왕 8년인 1282년 충렬왕의 왕비 정신부주(정화궁주)가 진종사에 시주한 것을 계기로 전등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전등은 '불법(佛法)의 등불을 전한다'는 뜻으로, 법맥을 받아 잇는 것을 뜻한다. 정화궁주는 본래 충렬왕의 왕비였으나, 고려가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면서 원나라 제국대장공주에게 밀려 둘째 비로 강등당하여 제국대장공주로부터 갖은 수모를 당하며 살았던 비운의 여인이다.

1605년과 1614년 큰 화재로 타버렸으나 재건하여 1621년에야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1678년(숙종 4)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찰로 지정되어 왕실로부터 보호를 받게 되었고, 1719년(숙종 45)부터는 주지승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임명하여 우대하였다.

1726년(영조 2) 영조가 직접 전등사에 와서 취향당의 제액을 쓰고 1749년(영조 25) 중수불사(重修佛事)에는 목재를 시주하여 이때 지금의 대조루(對潮樓)의 모습으로 지었다.

1909년 보관중이던 실록을 서울로 옮겨 사고로서의 지위를 잃었으나, 강화와 개성의 사찰을 관리하는 본산으로 승격되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피해를 보기도 하였는데, 그 당시 정족산성외부의 암자와 건물들을 프랑스군으로부터 방화되어 사라지고, 불상과 법전 등 문화재가 약탈당하기도 하였다. 특히 이곳이 관군과 프랑스군의 교전지였다. 대웅전에 들어가 보면 얼핏 낙서처럼 보이는 묵서(墨書)들이 곳곳에 적혀 있는데, 그 하나하나가 병인양요 당시 참전했던 조선군 병사들의 이름이다. 프랑스군과의 교전을 앞두고 전쟁에서 이기고 또 무사히 살아 돌아오기를 빌면서 병사들이 대웅전 불단이며 기둥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고. 물론 이후 다들 살아남았다.

건물 및 문화재[편집]

대웅보전
약사전
목조석기여래삼불좌상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묘법연화경(법화경)목판
삼랑성
대조루
양헌수 승전비
선원보각지

강화 전등사 대웅전은 보물 17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약사전(보물 179호), 범종(보물 제393호) 등 보물급 유적을 비롯해 국가사적, 인천시 지정 유형문화재 등이 있다.

대웅보전[편집]

보물 제178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은 규모는 작지만 단정한 결구에 정교한 조각 장식으로 꾸며져서 조선중기 건축물로서는 으뜸으로 손꼽힌다. 특히, 건물 내부 불단위에 꾸며진 닫집의 화려하고 정치한 아름다움은 건축공예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보마다 용틀임으로 장식되면서 용두가 네 귀퉁이에서 돌출해 나오며 천장 주변으로는 연, 모란, 당초가 화려하게 양각되고 중앙 우물 반자 안에는 보상화문이 가득 채워져 있다.

더욱 희귀한 것은 물고기를 천장에 양각해 놓아 마치 용궁인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닫집 왼쪽 천장에는 양쪽에 용두장식을 하고 몸체에 용틀임을 한 작은 용가(龍架)의 배 부분에 아홉 개의 방울을 달아 놓고 끈을 달아 불단까지 늘여놓아 이를 잡아 흔들면 아홉 개의 방울이 동시에 울어 구룡토음의 장관을 이루게 했던 적도 있었다.

내부에 있는 유물로는 석가여래 삼존과 1880년에 그린 후불탱화, 1544년 정수사에서 개판한<법화경>목판 104매가 보관되어 있다.

현재의 건물은 1621년(광해군 13)에 지은 정면 3칸, 측면 3칸 형식의 목조 건물이다. 정면 3칸은 기둥과 기둥 사이를 같은 길이로 나누어 빗살문을 단 형식이다. 좌우 옆면은 벽이나 앞 1칸에만 외짝으로 문이 있다. 기둥은 대체로 굵은 편이며 모퉁이 기둥은 높이를 약간 높여서 처마 끝이 들리도록 했다.

대웅보전의 외관상 특징은 우선 비슷한 시기의 다른 건물에 비해 약간의 변화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다. 곡선이 심한 지붕과 화려한 장식(나부상, 동물 조각, 연꽃 조각 등)이 그런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전설[편집]

대웅전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목각상을 벌거벗은 여인인 나부상(裸婦像)이라고 하는데 거기에는 대웅전 중수를 맡은 도편수가 달아난 여인에 대한 배반감으로 조각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그러나, 그 목각상이 원숭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것은 한글대장경 《육도집경》에 나오는 석가모니의 전생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전생에 석가모니는 원숭이 500마리를 거느린 원숭이 왕이었는데 무리를 안전하게 지키고자 자신을 희생한 일이 있었다. 그 이야기에서 착안하여 원숭이들의 석가모니에 대한 끝없는 존경심을 표현하기 위해 네 마리 원숭이들이 처마를 받들어 지붕을 들고 있게 배치했다는 것이다.

약사전[편집]

보물 제179호로 지정된 약사전은 대웅보전 서쪽에 위치하는 건물로 대웅보전과 거의 같은 양식의 건물이다. 조선 중기 다포계열의 정면 3칸, 측면 3칸 단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장대석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기둥을 설치하였으며, 정면 각 기둥 위에는 공포를 배열하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공간포(기둥과 기둥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공포)를 설치하였다.

내부 천장은 중앙 부분에 우물천장을 두고 주위에는 빗천장을 만들었으며, 거기에 돌아가면서 화려한 연화당초문을 그려 놓았다. 대웅보전과 함께 지붕을 수리했다는 기록 말고는 다른 기록이 없어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건물의 겉모습이나 내부 장식도 대웅보전과 비슷하다. 고려 말기나 조선 초기에 석조로 조성한 약사여래상을 모시고 있다. 이 약사여래불은 최근 금박으로 개금되어 있다. 건립 시기는 대략 1621년으로 추정된다.

범종[편집]

보물 제393호로 지정된 전등사 범종은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종과는 그 형태가 판이하다. 이 종은 1097년 중국 하남성 숭명사에서 조성된 것으로 음통이 없으며 겉에 상ㆍ중ㆍ하로 구획이 지어져 띠가 둘려 있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또 표면에 8개의 네모진 구획이 마련되어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많이 마멸되어 판독하기가 어렵다.

이 종은 기하학적 무늬로 장중하고 소박한 중국 종의 솜씨를 보이며 종소리가 맑고 아름다운 게 특징이다. 이 종은 일제 말기 군수 물자 수집에 광분한 일제가 공출이란 명목으로 빼앗아 가는 바람에 한때 전등사를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광복 이후 부평 군기창에서 발견되어 다시 전등사로 옮겨왔다. 하마터면 귀중한 범종이 일본의 만행으로 없어질 뻔 했으나 부처님의 가피로 본래의 장소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목조석기여래삼불좌상[편집]

조선 광해군 15년(1623)에 수연(守衍)이 수화승(首畵僧, 우두머리 조각승)으로 참여하여 1623년에 조성한 불상으로 원만한 상호와 양감.균형감.조각 솜씨가 뛰어난 목조불상이다. 삼존불은 삼세불(三世佛)이라고도 하며,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身)의 세 분의 부처님을 말하는데 현세불인 석가여래. 약사여래. 아미타여래를 모시기도 하고 과거.현재.미래불을 함께 모셔 삼존불이라고도 한다. 주불인 석가모니불의 높이는 125cm이고 무릎폭은 88cm로 원만한 얼굴에 유난히 큰 귀를 하고, 당당한 어깨와 가슴,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한 채 결과부좌하고 있다. 신체는 우견편단의 법의를 걸치고, 가슴께에는 군의를 묶은 자락 위에 3개의 꽃잎 모양을 보이고 있다.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편집]

지장보살상과 그 좌우에 무독귀왕, 도명존자, 시왕(十王)과 귀왕, 판관, 사자상, 동자상, 인왕상 등 명부전의 권속 총 31구의 상은 조선 인조 14년(1636)에 조성되었다. 전등사 본말사지에 보면 조선 영조 43년(1767)에 한영대사에 의해 시왕(十王)을 채색했으며 헌종 5년(1839)에 시왕전을 중수한 사실과, 고종 21년(1884)에 지장상에 개금하였다고 한다. 목조지장삼존상과 시왕상 및 그 권속들은 모습이 독특하고 아름다우며 보존이 잘 되어있다.

묘법연화경(법화경)목판[편집]

전등사 묘법연화경 목판은 1443년(세종 25년) 성달생이 정서하여 새긴 고산 화암사판을 저본으로 1543년(중종 38년) 마니산 정수사에서 복각한 것이다. 묘법연화경은 줄여서 법화경이라고 한다. 묘법연화경은 범어로 삿다르마 푼다리카 수투라라고 하며 ‘백련 꽃과 같이 올바른 가르침’이라는 의미다. 법화경의 내용은 제법(諸法)의 실상을 바로 깨치면 일체중생(一切衆生)이 모두 성불할 수 있다는 내용의 대승경전이다. 전등사 법화경 목판은 104판에 411장이 판각되어 있는데, 목판 한 면에 2장을 새겨 양쪽 총 4장이 판각되어 있다. 현재 전등사에서 보관중인 법화경 목판은 보존 상태가 아주 양호하지만 일부는 손상이 있어 보관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원래 105판이 보존되어 있었으나 한국전쟁 당시 1판이 외부로 유출되어 104판이 보관되고 있다.

삼람성[편집]

전등사 일대를 에워싸고 있는 삼랑성은 국가사적 제1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성은 고대 토성의 흔적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단군의 세 아들인 부여·부우·부소가 쌓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후 토성 자리에 표면이 거친 할석(割石)으로 성을 쌓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삼랑성은 성 안팎을 할석으로 겹축했으며 할석 사이마다 할석 부스러기로 쐐기를 많이 사용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해발 222m인 정족산의 정상에서 동향한 계곡을 포용하고, 동남향한 계곡에 수구와 남문이 있다. 북문은 북벽의 서쪽에 치우쳐 산봉우리 사이의 안부에 있고, 서문도 서남쪽 안부에 있으며, 동문은 남문의 북쪽으로 해발 107m의 봉우리 북쪽 안부에 있다. 성벽이 꺾어 도는 곳마다 10여 개의 곡성을 이루며,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 치성(雉城)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대조루[편집]

전등사의 남동쪽으로는 멀찌감치 강화해협이 내려다보인다. 강화해협은 일명 '염하'라고도 부르는데 이 염하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전등사 대조루이다. 전등사의 남문이나 동문으로 올라와 두 길이 합치는 지점에 이르면 2층 건물이 보이고 1층 이마에는 '전등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이 건물이 바로 전등사의 불이문 구실을 하는 대조루이다. 지금의 대조루는 1932년에 중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건물 자체가 주변 경관과 잘 어울리며 전등사의 여러 건물 중에서도 아주 소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대조루에서 대웅전을 바라볼 때의 시선은 25도쯤 위쪽으로 향하게 된다. 대웅전의 석가모니불을 가장 존경하는 시선으로 보게 하는 각도로, 이런 부분까지 섬세하게 고려해 지어진 건물이 대조루이다. 대조루에는 1726년 영조 임금이 직접 전등사를 방문해서 썼다는 ‘취향당’이라는 편액을 비롯해 추사가 쓴 '다로경권' 등 많은 편액이 보관되어 있다. 본래 대조루는 기도를 하거나 법회를 열던 공간이었으나 지금은 불교 서적과 기념품 등을 파는 곳으로 사용되고 있다. 인천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어 있는 건물이다.

양헌수 승전비[편집]

전등사 경내에는 인천기념물 제36호로 지정된 양헌수승전비가 있다. 이 승전비는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양헌수(1816~1888) 장군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1873년(고종 10)에 건립된 것이다. 이 때는 아직 양헌수 장군이 살아있을 때였지만 대원군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은 뒤 외침을 물리친 것을 널리 알리기 위해 기념비를 세운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양헌수 장군은 1838년(헌종 4)에 무과에 급제한 이래, 병인양요 때 공을 세워 한성부좌윤으로 특진되었으며 중군을 거쳐 어영대장·금위대장·형조판서·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충장공이며 저서로는 <하거집(荷居集)>이 있다.

선원보각지[편집]

인천향토유적 제12호로 지정된 선원보각지는 전등사 서문 등산로를 따라 150m 가량 올라가면 나온다. 일제 때 건물이 불에 타 없어졌으나 1999년 강화군에서 옛모습대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체험 및 기타 시설[편집]

명부전
삼성각
무설전
적묵당
극락암
전등사 남문
전등사 동문
죽림다원
부도전

명부전[편집]

약사전 옆의 서남쪽에 세워진 명부전도 정확한 창건 연대는 밝혀지지 않는다.

명부전에는 지장보살상을 비롯해, 시왕·귀왕 등 모두 29존상이 모셔져 있다. 대개 명부전은 지장전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죽은 이를 재판하는 시왕이 있는 곳은 명부전, 지장보살을 모셨을 경우에는 지장전이라고 부른다. 이 전각은 죽은 사람들이 49일이 지나 재판을 받을 때까지 그들의 넋을 위해 치성을 드리는 곳이다.

지장보살은 모든 중생이 극락을 가기 전까지는 결코 성불하지 않겠노라는 원을 세운 보살이다. 그래서 지장보살은 녹색의 머리를 깎고 주장자를 짚은 채 지옥 문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처럼 명부전에는 부처님 원력으로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제사의 공덕으로 극락을 가라는 정성어린 마음이 담겨 있다.

삼성각[편집]

삼성각은 산신, 독성(나반존자), 칠성 등 삼성(三聖)을 모신 건물이다.

본래 삼성은 중국의 도가 사상과 관련이 있는 성인들이지만 이 땅에 불교가 전래하면서 불교 사상과 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무설전 및 서운갤러리[편집]

기존 가람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면서, 지하에 새로운 공간을 조성하게 된 배경이다. 외부는 크게 표 나는 부분이 없지만, 내부는 현대식 공간으로 조성한 이색적 법당이자 복합 문화공간이다. 젊은 세대의 감각에도 부담감을 주지 않도록 디자인 특성을 배려했다.

새로운 불사를 위해 전등사는 현역 미술가 중심의 전문 창작단을 조직했고, 이들에게 새로운 불교미술의 실행을 당부했다. 미술대학 교수이자 미술계에서 주목받은 작가로서 새로운 불교미술의 창출에 의지를 모은 것은 국내 초유의 일로 기록된다. 창작단에 참여한 전문가들은 전통과 현대, 종교와 미술, 독창성과 시대정신, 민족성과 국제성 등의 주요 사항을 숙지하고 평소 작품에 반영한 경우에 해당한다.

불상 작품은 전통성을 바탕으로 하여 현대적 감각 특히 인체 비례를 반영시켰다. 주불 석가모니불 좌상은 토함산 석굴암 본존상을 연상시킬 만큼 당당한 대장부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주불의 늠름한 기상은 예배 대상으로서의 존엄미와 더불어 깨달음에 이르는 인도자로서의 원만함과 장엄함을 보여준다. 반면에 협시보살은 현대인의 인체 비례 감각을 감안하여 제작된 바, 지장보살 좌상은 이웃집 아저씨처럼, 관음보살 좌상은 이웃집 보살님처럼 친근미와 더불어 품격 있는 원만상이다. 이들 다섯 분의 불보살상은 비슷한 것 같지만 相好와 옷매무새 등을 자세히 보면 각기 다르다. 주불을 비롯해 협시보살상과 1천불 원불은 모두 청동주물 작업에 백색 도료를 입힌 작품들이다.

주불이 봉안된 공간은 궁륭형(돔)으로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곳 후벽에 벽화작업을 시도한 바, 화가 오원배 교수는 서구식 프레스코 기법을 활용하여 제작했다. 정통 프레스코 벽화제작 기법은 이번 무설전 후불벽화 제작에 응용되어 새로운 불교회화의 장을 마련했다고 평가된다. 프레스코 기법의 벽화와 천정화 작품은 국내 유일의 사례에 해당한다. 신중탱은 紅幀의 일종으로 붉은 색 바탕에 銀線으로 작업한 것이다. 여기의 인체 비례는 서구식에 익숙한 젊은이들도 호감 갖도록 배려했다.

무설전 내부 공간 디자인은 여타의 법당과 커다란 차별상을 보일만큼 하나부터 열까지 새롭게 시도한 창작품이다. 천정 공간의 연등 디자인으로부터 기둥 처리 그리고 벽면 공간처리 등 모든 것이 조화와 개성을 기본으로 하여 이룩한 성과물이다. 공간 디자이너 이정교 교수는 이미 국내 유수의 건축물에서 실력을 발휘하여 높은 평가를 받은 바 있다. 그의 이번 무설전 디자인은 사찰 불사의 첫 사례라는 점에서 남다른 주목을 받을 것이다.

서운 갤러리는 무설전의 입구 부분의 공간을 특화하여 운영하는 특수공간이다. 이 갤러는 바로 불교와 미술의 만남 즉 종교와 예술의 공존/조화를 기도하는 공간이지 않을 수 없다. 이 갤러리는 현대 미술작가의 창작품을 전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 운영된다. 이를 위해 전등사는 이미 오래전부터 현역 미술작가의 창작품을 구입하여 상당량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이번 서운갤러리 개관기념 전등사 소장품 전시는 이를 공개하는 전시이며, 사찰 운영의 이색적 현대미술 전시공간임을 천명하는 현장임을 확인시킨다.

적묵당[편집]

적묵당은 스님들이 참선하던 선원이었다. 지금은 스님들의 숙소와 종무소로 사용되고 있다.

강설당[편집]

강설당은 스님들이 경전을 공부하던 건물이다. 한때 강설당은 전등사 승가대학 건물로 쓰였으나 지금은 복원되어 템플스테이 사무실 및 서점으로 사용되고 있다.

정족사고[편집]

사고란 고려 및 조선시대에 나라의 역사 기록과 중요한 서적문서를 보관한 전각을 일컫는 말이다.

옛 선조들은 특히 사고 안에 따로 역대 왕조실록을 보관한 곳을 사각(史閣)이라 해서 그 보존에 힘을 썼다. 실록이 처음으로 사찰에 보관되었던 것은 고려 때인 1227년(고종 14)의 일이다. 이때 고려 왕실에서는 합천 해인사에 사고를 마련하여 실록을 보관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궁궐의 춘추관과 충청도 충주, 경상도 성주, 전라도 전주에 사고를 설치했다. 이것으로 춘추관 외에 이들 충주·성주·전주의 사고를 3대 사고라 해서 여기에 역대 실록을 분산 보관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춘추관과 충주 및 성주의 사고가 소실된 반면 전주의 사고만 유일하게 보존되어 그곳의 실록 등을 한때 내장산으로 옮겼다.

1606년(선조 39), 명종까지의 실록이 여러 벌 복원되자 묘향산에 사고를 설치하여 전주 사고본을 옮겼다. 또한 오대산, 태백산, 적상산에도 사고를 마련하여 새로 간행한 실록을 보관하였다. 1628년(인조 6), 조정에서는 강화 마니산에 새로 사고를 설치하여 묘향산 사고에 보관했던 전주본을 옮겼다가, 1660년(현종 1) 강화 정족산에 사고를 마련하여 마니산 사고에 있던 전주본을 이곳에 비장하였다.

이처럼 실록 등 국가의 귀중한 사서는 소실 등의 피해를 막기 위해 중앙과 지방에 분산하여 보관했다. 그러다 구한말인 1908년, 정족·태백·오대·적상산 등 4대 사고의 장서들은 규장각의 관할 하에 두었다. 이렇게 보면 세계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도 수난을 많이 겪은 셈이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과 교훈을 생명처럼 여겼던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정성은 오늘날까지 한민족의 문화적 역량을 한껏 보여주고 있다.

본래의 정족산 사고는 1931년 무렵 주춧돌과 계단석만 남긴 채 없어졌다. 다만 사고에 걸려 있던 '장사각'과 '선원보각'이라는 현판만 전등사에 보존되어 있어 당시의 실상을 알려주고 있다. 폐허가 되었던 장사각 건물은 1999년 복원되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조선왕조실록은 한 왕조의 역사적 기록으로는 가장 긴 시간에 걸쳐서 작성되었고, 가장 풍부하면서도 엄밀한 기록을 담고 있다. 또한 국왕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조선인들의 일상적인 생활상을 자세히 보여 주며, 세계에서 유일하게 활자로 인쇄되었고, 보관과 관리에도 만전을 기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에 따라 조선왕조실록은 1973년 12월 31일에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10월 1일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관음전[편집]

관음전은 자비로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하는 관세음보살을 주불(主佛)로 모시는 전각으로, 신도들의 수행정진과 기도에 도움이 되는 공간이다.

극락암[편집]

명부전과 종각 사이의 계단을 오르면 아담한 전각이 세워져 있다. 비교적 근래에 세워진 극락암 건물은 전등사 조실이었던 서운 큰스님과 상묵 큰스님이 열반할 때까지 머무신 곳이다.

종루[편집]

전등사에는 보물 제393호로 지정된 전등사 범종과 근래에 만들어진 범종 등 두 개의 종이 있다. 이 두 범종을 보관하기 위해 종각과 종루로 이름을 달리하여 두 개의 범종각을 세웠다.

현재 대조루 옆의 종루에는 보물로 지정된 범종이 있었으나 2004년에 명부전 앞의 종각으로 옮기고 지금은 일반 범종이 보관돼 있으며 조석 예불 때 사용된다.

남문[편집]

전등사의 출입구는 두 군데에 있다. 전등사 사거리 쪽에서 주차장으로 진입하자마자 나오는 출입구가 동문이고 동문에서 약 500미터쯤 남쪽으로 진행하면 남문 주차장이 있다. 본래 삼랑성(정족산성)에는 동서남북 네 개의 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동문과 남문만 이용된다. 이 가운데 문루(門樓)가 있는 곳은 남문이 유일하며 남문의 문루를 ‘종해루’라 부른다. 이 종해루를 지나 50미터쯤 올라 좌측을 보면 전등사 역대 조사들의 부도가 세워진 부도전이 보인다.

동문[편집]

삼랑성(정족산성)에는 본래 동서남북 네 군데에 출입문이 있었다. 그 중 지금까지 이용되는 것은 동문과 남문이며 전등사 사거리에서 전등사로 진입할 때 가장 먼저 보이는 문이다. 전등사에는 여느 사찰과는 달리 일주문이나 불이문이 없다. 그 대신 호국의 상징이었던 삼랑성 동문과 남문이 일주문 구실을 하고 있다. 동문 안쪽에는 양헌수 장군의 승전비가 세워져 있다.

죽림다원[편집]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며 녹음 짙은 전등사 경내에 있는 전통차 전문점이다. 아담한 연못과 어울러진 외부, 품위 있고 아늑한 분위기의 찻집 내부는 색다른 느낌주어 가족,연인,단체가 함께 담소를 나누기 좋은 장소이다. 솔바람이란 이름의 솔잎차와 모과차 등 다양한 전통차와 간단한 다과를 함께 즐길 수 있다.

부도전[편집]

전등사에 주석하셨던 역대 조사들의 부도를 모셔둔 곳으로 남문을 50미터 쯤 지난 왼쪽 산기슭으로 부도전이 세워져 있다.

고려가궐지[편집]

고려가 몽골의 침략을 받아 강화로 도읍을 옮겼을 때인 1259년에 세워진 궁궐터이다. 당시 고려 조정에서는 부처님의 가피로 왕실의 안녕을 꾀하고 나아가 국난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임금의 임시 거주처를 마련하게 했다. 그래서 전등사 경내에 고려의 가궐을 세우고 한때는 임금이 머물며 대불정오성도량을 열었다.

하지만 39년의 항쟁 끝에 고려 조정은 다시 개경으로 환도를 했고 강화도에 남았던 고려의 문화유산은 몽골군에게 마구 불태워지거나 훼손되고 말았다. 전등사 적묵당 옆 산기슭에 있던 가궐도 이때 폐허를 면치 못했다. 풍문으로만 남았던 고려 가궐지가 발굴되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지난 2000년의 일이었다. 동양고고학연구소 소장이며 선문대학교 교수인 이형구 박사팀이 고려 가궐지를 발굴하여 건물지를 실측하고 수많은 문화재를 수습하여 학계에 보고한 결과 전등사 경내의 고려 가궐지가 공식 확인된 것이다. 울창한 숲 속에 터 잡은 널찍한 공터가 고려 시대의 풍상을 느끼게 한다.

템플스테이[편집]

전등사에서는 내·외국인을 위한 다양한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템플스테이 안내 바로가기 클릭

관람료 및 주차 안내[편집]

구분 개인 단체(30명 이상)
어른 4,000 3,500
청소년 3,000 2,500
어린이 1,500 1,000
주차비(동문,남문)
  • 주차비는 관람료 면제사항과는 별도입니다.
대형 4,000
소형 2,000
운영시간 하절기 : 오전 8시 ~ 오후 6시 30분 / 동절기 : 오전 8시 30분 ~ 6시
결제방법 현금, 카드결제 가능
애완견동반 가능(단,목줄 착용 및 동반서약서 작성시)
입장료 면제 대상
  • 신 도 : 대한불교조계종 신도증소지자(유효기간 내)
  • 어린이 : 7세 미만 미취학 아동
  • 장애인 : 장애인(복지카드 소지) 및 장애정도가 심한 장애인 보좌 1인 포함
  • 국가유공자 : 국가 유공자(유공자증 소지) 및 배우자, 장애정도가 심한 국가유공자 보좌하는 동행자 1인
  • 보훈/유공자 : 보훈대상자, 5.18 민주유공자, 특수임무유공자, 의사상자, 민주화운동관련자(인증서 소지)
  • 노인 : 만 70세 이상 어르신
  • 교원 : 학생인솔을 위한 교원(신분증 소지)
  • 저소득층 : 기초생활수급자(관련 증명서 소지)
  • 군인 : 정복 착용 군인(사병에 한함)
  • 임산부 : 임산부 및 보호자 1인(임산부 수첩 소지)
  • 단체인솔 : 단체인솔 해설사 및 안내사 (자격증 패용)
  • 강화군민 : 강화군 지역주민(신분증 소지)

교통[편집]

자가용 이용시[편집]

방화대교 지나 강화방향 1,2차선 직진 ⇒ 강화 이정표 보고 계속 직진 ⇒ 운양삼거리에서 통진/양촌/대곶 방향 ⇒ 이후 양촌/대곶/초지대교 이정표 참고 ⇒ 초지대교 건넌 후 직진(전등사 남문)

가양대교 건너서 올림픽대로 이용 ⇒ 1) 올림픽대로 참고

대중교통 이용시[편집]

  • 신촌 ~ 전등사

신촌역 4번 출구 직진 후 중앙차로 버스 정류장 M6117 버스 또는 영등포에서 출발하는 60-3,8000번 버스 승차 후 → 김포복합환승센터에서 하차 → 60-2, 60-5, 70, 700-1번으로 환승 → 전등사 동문 또는 온수리 하차

  • 홍대입구역 ~ 전등사

홍대입구역 2번 출구에서 강화운수 2000번 승차 -> 전등사 동문 하차

  • 검단,검암역 ~ 전등사

검단사거리역에서 700-1번 또는 검암역에서 700-2번(1번 출구 정면 길건너 정류장), 70번(2번 출구 길건너 고가 위 정류장) 승차 -> 전등사 동문 또는 남문 하차

  • 김포공항 ~ 전등사

김포공항 내 국내선 1층 10번 승차장에서 60-5번 승차 -> 전등사 동문 하차 (하루 8회 운행)

※ 참조 : 동문.남문 버스정류장 하차 시 사찰까지 도보로 10분여 소요 / 온수리 하차 시 도보로 15분여 소요

버스노선 안내[편집]

(2018년 11월 26일 업데이트)

인천지역 버스
  • 70번, 60-5번 버스는 '전등사 동문' 혹은 '전등사 남문' 에서 타고 내릴 수 있다.
  • 700-1번, 60-2번 버스는 '온수리' 에서 탈 수 있다.
  • 템플스테이 참가자분들은 전등사 남문 혹은 동문에서 승하차하면 된다.
  • 2018년 9월부터 시간표가 변경되어 운행하오니 참고하기 바람. (700-2번 버스 노선 폐쇄)
서울지역버스(2000번)
  • 주요 경유지 : 화도터미널-온수리(승하차)-대명초교-오라니마을-청송1단지-지경-고촌-마곡역-홍대입구역-신촌역

동영상[편집]

지도[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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