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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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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영(鄭世永, Chung Se-yung)
현대자동차 초대 사장/회장, 현대그룹 2대 회장
현대자동차㈜(Hyundai Motor Company)

정세영(鄭世永, Chung Se-yung)은 현재자동차의 초대 사장이고 1987년부터 현대자동차와 현대그룹의 회장으로 1994년까지 임직했다.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한라그룹 창업주 정인영, 성우그룹 창업주 정순영의 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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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편집]

정세영은 1928년 강원도 통천에서 6남 2녀 중의 4남으로 태어났으며 큰 형은 현대그룹 창업주인 정주영이고 둘째 형은 한라그룹의 창업주인 정인영이었으며 셋째 형은 성우그룹의 창업주인 정순영이었다. 누나 정희영은 한국프랜지공업의 회장이었던 김영주한테로 시집갔으며 아래에 동생 정신영, 동생 KCC그룹 회장이 었던 정상영이 있었다.

1953년에 고려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1954년에 미국의 콜롬비아 대학교에 진학했다가 1955년에 미국 오하이오주 마이애미대학교에 전액 장학생으로 이적하였으며 1957년에 미국 오하이오주 마이애미대학교 정치외교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신문기자로 활동하였고 미군정기에는 미군통역관으로 지냈으며 미국유학을 마친 1957년에 현대건설에 입사한 뒤 1965년에 현대건설 태국 초대 지점장으로 부임되었으며 그 시기에 파타니-나라티왓 공사 수주를 하였다. 1967년 시멘트공장 기계를 사기 위해 미국에 체류하던 중에 형인 정주영의 지시로 포드자동차와 합작을 성사시키면서 자동차 인생을 시작하였다. 같은 해에 현대자동차를 설립하고 사장을 맡았으며 이듬해에 첫 자동차 코티나를 출시하였다. 한국 도로여건에 맞지 않는 코티나는 악평에 시달렸으며 1974년에 한국 최초의 국산모델 현대 포니를 출시시켰다. 이로써 현대자동차는 세계에서 16 번째,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2 번째로 고유 자동차 모델을 개발, 출시하는 사례로 기록되었다. 1976년부터 포니 본격생산에 진입하고 에콰도르에 첫 해외 수출을 추진하였으며 1986년에 미국에 포니 엑셀을 처음으로 수출하였다.

1987년에 정주영회장이 정계에 진출하면서 후임으로 현대자동차와 현대그룹의 회장을 맡았으며 1999년에 조카 정몽구한테 사장자리를 넘겨주고 현대자동차와 결별했으며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으로 취임하였다.

2005년 5월 21일에 향년 76세로 별세하였다.[1][2][3]

주요 활동[편집]

□ 현대자동차 경영

1967년에 한국에 진출하고자 하는 미국 포드사의 영국법인과 기술제휴에 성사하고 현대자동차를 설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포드의 영국법인에서 생산했던 포드코티나(Ford Cortina)를 도입하여 이듬해에 CKD방식으로 조립한 첫 모델 현대 코티나(Hyundai Cortina)를 런칭하였다.

포드측에서 기술이전을 회피하는 연유로 코티나는 단지 조립 생산품에 불과하였으며 차량 개발이 고른 아스팔트 노면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다보니 한국 도로 사정에 적합하지 않아 고장이 다발하는 문제가 있을 때 정세영은 우리 기술로 고유브랜드 자동차를 생산해야만 국제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고 우리나라의 기계공업발전에 기여하는 일이라고 판단하고 순 국산차의 개발을 제안하고 인가를 받은 뒤에 기술개발을 추진하였으며 일본미쓰비시 자동차공업의 협력을 받아 1974년에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개최하는 '제55회 국제자동차 박람회'에 한국 최초의 자주개발 모델 포니(Pony)를 데뷔하였다. 1976년에 포니수출을 개시하였으며 1986년에는 전략 차종 엑셀을 개발해 미국 수출을 본격화하였다. 미국 수출 4개월만에 52,400대를 판매하고 그 해에 203,000대를 판매하여 미국 10대 상품에 선정되었으며 정세영은 그 해에 "산업계의 숨은 영웅" 6명중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1987년에 현대자동차와 현대회장으로 취임한 뒤 1991년에 자주적으로 엔진과 변속기를 개발하였으며 1997년 후로는 터키공장과 인도공장을 준공해 세게화에 박차를 가했다. 1989년에 캐나다 부르몽에 연산 10만대 규모의 소나타 생산공장을 설립하였으며 1993년에 가동을 중단하고 1996년에 5,000억 원의 손실을 보면서 완전 정리를 하였다.

1999년에 정주영 명예회장의 지시에 따라 경영권을 정몽구한테 넘겨주고 현대자동차와 결별했다. 회고록에서 정세영은 "정주영 명예회장이 '몽구가 장자인데 몽구에게 자동차를 넘겨주는 게 잘못됐어?'라고 반문하는 바람에 자동차 인생을 끝낼 수 밖에 없었다"라고 아쉬움을 표현하였으며 "큰 형님의 속뜻을 진작 헤아리지 못해 송구스러웠다"고도 했다.

정세영 회장은 1967년부터 현대자동차를 맡아 세계 11위 자동차 업체로 키우는데 큰 공로가 있었다.[4][2]

□ 현대 경영권 포기

1999년에 정세영 명예회장과 정몽규 부자는 1998년에 4%에 불과했던 현대자동차의 지분을 8.3% 까지 늘여 경영권 다툼에 대비하였다. 정몽구 현직 회장이 현대자동차 이사회 인원을 대폭 늘리면서 자기 측근인 이계안 기획조정실 사장과 노관호 인천제철 사장을 이사진에 배치하려 할 때 정세영 명예회장은 조카의 제안을 거부하고 측근 인사인 이방주와 이유일 사장을 이사회에 끌어들였으며 이로서 현대그룹 내부 분쟁이 불거졌다. 그 때 정주영 명예회장이 현대자동차 주인이 장남 몽구씨임을 분명히 밝히면서 동생의 퇴진을 요구하여 현대자동차에서 물러나게 되었으며 30여년간 현대자동차를 이끌어 온 대가로 3월 4일에 자산규모 3조 5천억 원이 되는 건설업체 현대산업개발을 받았다.

1999년 3월 5일에 정세영 명예회장은 현대그룹 15층 회의실에서 가진 기자 회견에서 자동차 사업에서 은퇴한다고 선포하고 "정주영 명예회장 장자인 정몽구 그룹 회장이 현대자동차를 이어받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한다"고 발표문을 읽었다.

현대자동차 경영권을 포기하면서 정세영, 정몽규 부자는 보유중인 현대자동차 지분 8.3%와 정몽구 회장을 비롯해 현대그룹 계열사가 가지고 있는 현대산업개발 지분 37.67%를 교환하였으며 현대산업개발을 맡아 독립하였다.[5][6]

각주[편집]

  1. 정세영〉, 《위키백과》
  2. 2.0 2.1 이홍동 기자, 〈‘포니 신화’ 잠들다 정세영 전 현대차 회장 별세〉, 《한겨레》, 2005-05-22
  3. 정세영〉, 《나무위키》
  4. (위대한결단) 정세영〉, 《중소기업뉴스》, 2010-11-29
  5. 이현철 기자, 〈"사람 죽인 적 없다"〉, 《시사저널》, 1999-03-18
  6. 성태원, 〈정주영과 정세영의 독대서 '현대차의 경영 향배' 갈려 〉, 《이코노텔링》, 2019-12-26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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