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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곡의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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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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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돔과 통곡의 벽, 예루살렘

통곡의 벽(Wailing Wall), 서벽(Western Wall), 또는 코텔(Kotel, 히브리어: הַכֹּתֶל הַמַּעֲרָבִי, HaKotel HaMa'aravi; 아스케나짐 히브리어 발음: Kosel; 아랍어:حائط البراق Ḥā'iṭ Al-Burāq)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교이슬람교의 성지이다.

오늘날 남아 있는 벽의 지상부분은 길이 약 50m, 높이 약 20m. 로마에 대한 절망적인 반란이 비극으로 끝난 뒤 유대인은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4세기에야 그들은 1년에 한번 신전이 파괴된 날로 전하는 아빕월(유대력 5월) 9일에 허물어진 신전을 찾아가 신전의 소실과 나라의 멸망을 슬퍼하고 애통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나중에 신전터에 이슬람 성소가 건설되어 통곡의 장소는 서쪽 벽으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1948년 예루살렘이 이스라엘과 요르단으로 분할되면서 이 성벽은 요르단 측에 속하였으나 67년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구시가지를 점령하여 통곡의 벽을 장악하였다. 유대교의 가장 인상깊은 상징물이다.

이 통곡의 벽에 소원을 적은 종이를 끼워 넣으면 성취가 더 잘 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2022년 이스라엘 정부는 '통곡의 벽(Wailing Wall)'에 1억1000만셰켈(약 420억원)을 투입해 대대적으로 단장한다고 한다.

개요[편집]

통곡의 벽은 이스라엘 예루살렘 구(舊)시가지 '성전 산(Temple mount)'의 서쪽에 세워진 길이 50m·높이 20m 크기의 벽이다.

통곡의 벽은 솔로몬 왕이 세운 예루살렘의 성전이 있던 곳이다. 바빌론에 의해 성전이 파괴되고 유대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가면서 유대인들의 수난사가 시작되는데, 이후 스룹 바벨이 성전을 재건하고 헤롯왕이 증축했으나, 다시 예루살렘을 점령한 로마에 의해 모두 파괴되고 서쪽 벽만 남아있게 된다. 성전이 파괴된 것을 슬퍼하며 유대인들이 벽을 잡고 울며 기도했다는 것에서 유래되어 "통곡의 벽"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실제로 영어 표현을 보면 Western Wall, 즉 서쪽 벽이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지금도 많은 유대인들은 이곳에서 밤 낮 가리지 않고 간절함을 담아 소리 내어 울면서 기도하고 있다.

통곡의 벽 너머로는 이슬람 최대 성지이자 무하메드가 승천한 곳으로 알려진<알 아크사 모스크>가 위치해 있다. 이는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종교, 나라 간의 다툼과 팽팽한 긴장감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슬람교의 중요한 성지가 이렇게 바로 버티고 있으니 유대인들은 다시 성전을 재건하고 싶어도 못한 채 이 벽 앞에서 신께 기도를 한다.

통곡의 벽은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 사이의 오랜 분쟁거리로 남아있다. 유대인들에게 이 벽은 약속의 땅인 이스라엘의 상징이고 다시 재건해야 할 소명 같은 곳이지만, 팔레스타인인 아랍인들에게는 바위 사원과 알아크사 모스크가 있는 이슬람교의 성지이기에 두 나라 간, 두 종교 간의 대립은 첨예하게 맞닿아있다.

때문에 통곡의 벽은 검문을 통과해야 입장이 가능하다. 자칫하면 종교 싸움으로 번져 국가 간의 전쟁을 야기할수도 있기 때문에 무슬림을 자극할만한 소지품, 십자가나 히브리어가 새겨진 물품을 소지해서는 안 된다.

배경[편집]

본래 이 자리에는 솔로 왕이 세운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다. 기원전 957년에 솔로몬 왕이 세운 성전을 제1성전이라 부른다. 하지만 기원전 586년 신 바빌로니아가 침공하며 제1성전을 파괴하고 유대인 상당수를 바빌론으로 끌고갔다. 이것이 바빌론 유수이다. 이때 유대교에서는 최고의 성물이고 유대교 제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언약궤가 사라졌다. 살아남은 제사장들이 다른 곳으로 안전하게 옮겼다는 말도 있고 성전산 지하에 숨겼다는 말도 있지만, 아마도 바빌로니아의 군병들이 제1 성전의 보물과 귀금속을 약탈할 적에 같이 파괴했을 공산이 크다. 나무로 만든 궤짝에 금박을 입히고 금장식물을 달았다고 하므로, 보물을 찾는 병사들이 보면 절대로 그냥 내둘리 없다.

기원전 539년 아케메네스 왕조의 황제 키루스 2세는 바빌로니아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관용정책의 일환으로 바빌론에 끌려온 유태인들을 이듬해(기원전 538)에 고향 땅으로 돌려보냈다. 이때 키루스 2세가 임명한 유대 지역의 총독은 즈루빠벨이었다. 다리우스 1세가 지원하고 즈루빠벨이 주도하여 유대인들은 기원전 521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기원전 516년에 새로운 예루살렘 성전을 완공하였다. 이 성전을 '제2성전' 혹은 '즈루빠벨 성전'이라고 한다. 느헤미야가 성전을 재건했다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으나, 느헤미야는 성전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였다. 그러나 언약궤를 찾을 길이 없어서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없었던 듯하다.

유대 지역을 지배한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가 제2성전에 다른 신상을 세우고 일부를 망가트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외세 왕조의 전횡에 분개하여 유다 마카베오의 주도로 혁명이 일어나 제2성전에서 이교의 신상을 제거하고 망가진 부분을 수리하였다. 이를 기념하는 절기가 '하누카'이다. 이후 로마의 지원으로 헤로데 대왕이 즉위하였다. 이두매아, 즉 에돔 출신으로 정통성이 부족했던 헤로데는 정통성을 세우려는 목적으로 제2성전을 증축했다. 이를 일명 헤로데 성전이라고 한다. 헤로데 성전은 제2성전을 증축했을 뿐이므로 제3성전이 아니다.

로마 제국이 이스라엘을 통치하면서 지나치게 세금을 매기고, 유대교에 간섭하고, 칼리굴라가 폭정을 휘두른 영향으로 서기 66년부터 73년까지 1차 유대전쟁이 벌어졌다. 73년 (훗날 로마의 황제가 된) 티투스 장군은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유대인들의 정신적 구심점인 헤로데 성전을 깨끗하게 헐어버렸다. 로마 군대는 예루살렘 성전의 모든 건물을 헐어버렸지만, 성전의 축대이기도 했던 '이방인의 뜰' 부분의 서쪽 담장만큼은 헐어버리지 못하였다. 축대까지 무너트리기는 너무 힘들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연유로 옛 헤로데 성전 건물의 서쪽 축대 일부만은 무너지지 않고 남았으니, 이것이 바로 통곡의 벽이다. 또한 유대인들을 이스라엘 땅에서 축출하고 외국으로 흩어지게 하였으니, 이것이 디아스포라이다.

이름의 유래[편집]

통곡의 벽 이름은, 유다인들이 로마에 거슬러 일으킨 2차 반란에서 유래했다. 서기 66년 발발한 열혈당원들의 1차 반란 뒤, 132년에는 바르 코흐바 혁명이 이어졌다. 두 번에 걸친 반란에 분노한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유다인들을 예루살렘에서 내쫓았고, 나중에야 그들은 아브월 9일(성전파괴일)에만 예루살렘 출입 허가를 받는다. 그날 유다인들이 이 벽을 붙들고 통곡하다가, 울면서 떠났기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전승에 따르면, 성전이 무너지던 날 벽이 이슬에 젖어 우는 것처럼 보였으므로 통곡의 벽이라고도 전한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방문해 간절한 기도문을 벽에 꽂는다. 요한 바오로 2세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문도 눈길을 끌었다. 다만, 오십 년 전만 해도 통곡의 벽은 유다인들에게 그야말로 화중지병, 곧 그림의 떡과 같았다. 통곡의 벽을 포함한 동예루살렘이 요르단 영토라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1967년 일어난 6일 전쟁 뒤에야,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통합에 성공한다.

건축[편집]

통곡의 벽의 돌들은 이스라엘 땅의 암반 지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암반을 정으로 쪼아 네모 반듯하게 큰 돌들을 떠내고, 그것들을 도르래 역할을 하는 수레에 굵은 밧줄로 묶은 다음 여러 마리의 소가 끌어서 옮겨 하나하나 쌓은 것이다. 그 돌들이 쌓여지기까지 40년간 대를 이어가며 수많은 사람들의 땀이 흘려졌다.

현재 우리가 사진으로 볼 수 있는 통곡의 벽은 성전 벽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사람들이 서서 기도하는 성전 벽 바닥 밑에는 헤롯 시대에 있었던 성전 벽의 원래 높이가 그대로 숨겨져 있다. 벽의 바닥 밑으로 쌓여져 있는 돌들은 17칸이고, 지상으로는 7칸까지의 돌이 헤롯 성전의 돌들로, 예수님이 살아 계시던 당시에 존재했던 돌들이다. 그 위로 큰돌 네 칸은 맘루크 시대에, 그 위로 있는 작은 벽돌들은 오스만트루크 시대에 다시 놓여진 것들이다. 통곡의 벽은 아래로 갈수록 큰 돌로 쌓았다. 이 돌의 무게는 큰 게 7.3t, 작은 게 1.8t 정도 된다고 한다. 이들 돌 사이에는 아비오나라는 식물이 살고 있다. 아비오나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식물로 여겨지는데, 돌틈에서도 여전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통곡의 벽' 지하로 내려가면 어마어마한 크기의 매끈한 돌들이 성전 벽을 이루고 있었다. 지하 성전 벽을 발굴하면서 만들어 놓은 좁은 틈 사이로 유대인 여자들이 기도문을 들고 왔다갔다한다. 한 여인이 마치 성경에 나오는 한나처럼 벽 틈 사이에 머리를 묻고 작은 소리로 울며 기도하는 모습도 보이고, 그 옆의 좁은 공간으로 청소부들이 다니기도 한다.

특징[편집]

늘 붐비는 곳이지만, 특히 월·목요일은 성인식으로 떠들썩하다. 십대 초반에 이미 어른의 자격을 받고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는 꼬맹이들이 기특해 보인다. 가족·친지들은 신나는 북소리에 춤을 추고, 이웃에게 사탕도 던지며 흥을 돋운다. 여자아이는 만12세, 남자아이는 13세에 율법을 지킬 의무가 있는 성년으로 인정받는다. 통곡의 벽에서 성인식을 하는 까닭은, 그 위로 연결된 모리야 산에 서기 70년까지 성전이 봉헌돼 있었기 때문이다. 곧, 옛 성전 가까운 곳에서 일생일대의 사건을 기념하고자 한다(독립 기념일, 군인 선서식 등도 통곡의 벽에서 치른다).

통곡의 벽은 역사도 흥미롭지만, 전통 유다인들의 종교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장소다. 유다교는 남녀가 유별하므로, 회당이 남자 층, 여자 층으로 구분되어 있듯이 통곡의 벽에서도 따로 기도해야 한다. 가부장적 전통에 따라, 남자 구역이 몇 배 넓다. 토라 두루마리를 보관하는 지성소나 독실한 유다인들이 사용하는 도서관도 남자 구역 안에 파인 동굴에 있다(게다가 동굴 내부에는 밖에서 볼 수 없는 서쪽 벽 일부가 계속 이어진다). 성당에서는 남자들이 모자를 벗지만, 유다교는 반대다. 이방인도 통곡의 벽에서는 ‘키파’라는 정수리 모자를 써야 한다. 여인들은 민소매 등의 짧은 옷을 입을 수 없다.

통곡의 벽에서 사람 구경을 하다 보면, 앞뒤로 몸을 흔들며 기도하는 유다인들도 포착된다. 졸면 안 되니까 흔드느냐는 질문도 나오고, '흔들어 바치면 두 배'이기 때문이라고 재미있게 추측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온몸으로 하느님을 찬양하기 위해서다. 실제로 몸을 흔들며 모세오경을 읽는 모습은 꽤 신실해 보인다. 차 안에서 책을 읽어도 어지러운데, 온몸으로 토라를 봉독하는 모습은 나름의 신앙을 오라처럼 발산한다. 기도 뒤에는 지성소에 계실 하느님께 등을 보이지 않도록 뒷걸음을 친다. 조심스럽게 물러나오는 유다인들을 볼 때마다, 2000년 전 통곡의 벽 위에서 위엄을 떨쳤을 웅장한 성전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하다.

관광 가이드[편집]

현재 통곡의 벽은 유대인의 성지이자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되었다. 통곡의 벽으로 들어가려면 잠시 이스라엘 군의 검문을 받아야 한다. 이곳을 통과하면 넓은 광장이 나오고 그 동쪽으로 높이 19m의 성벽이 나타난다. 이것이 모세의 성전시대 이래 남아있는 유일한 구조물이다. 이 벽은 지하에 묻힌 기초로부터 따지면 32m나 된다. 그러나 이 지하 기단부가 현재는 땅 속에 묻혀있다. 성전의 남쪽에서 보면 성벽의 높이를 확인할 수 있다.

지상에 있는 부분은 상부이고 하부는 지하에 묻혔으니 가이드를 대동해서 지하도로 내려가보는 것도 좋다. 전쟁을 여러 차례 겪는 과정에서 예루살렘은 과거의 잔해 위에 재건되기를 반복하였다. 때문에 현재 지하에는 과거 지상이었던 부분의 유적 등이 많이 남아있다.

유대인의 성지인 만큼 복장 규정을 지켜야 들어갈 수 있다. 반바지, 민소매 차림은 들어갈 수 없다. 남자는 모자를 써야 하는데, 빌려주는 곳이 있다. 입구에서 종이로 된 키파를 담은 상자가 있는데, 이를 쓰고 들어간 다음 나올 때 다시 상자에 두고 나오면 된다. 사진 촬영은 어느 정도 허용되지만, 안되는 날도 있으니 사전에 알아보아야 한다. 오늘날엔 남녀가 따로 입장하도록 분리대가 설치되었다. 극단적인 시온주의자로 의심받을 정도로 유대인임을 자랑스러워하는 나탈리 포트만조차도 통곡의 벽에서 영화를 찍다가 남녀가 같이 있던 장면 때문에 이스라엘 랍비들이 대노하여 각본을 수정하던 적도 있다.

하레디와 같은 유대인들은 이 통곡의 벽을 기반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복원해야 한다며 벽돌과 같은 건축 자재들을 가져다 놓는 시위를 하기도 한다. 물론 이를 제지하는 이스라엘 경찰들과 충돌이 빈번하다.

유대교의 믿음에 따르면 신이 성전산 바위의 돔 터를 법궤를 안치하고 자신에게 바칠 제사를 올리는 유일한 장소로 결정하였기에, 오직 그곳에서만 율법에 맞는 방식으로 제사를 올릴 수 있다. 따라서 다른 성전 건축 후보지란 존재할 수가 없다. 문제는 성전을 복원하려면 바위의 돔(본 문서 사진에 등장하는 황금색 돔)을 부수거나 이전해야 한다는 것. 그런데 이슬람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가 있던 그 자리에서 마지막 사도 무함마드가 승천했다고 믿어 바위의 돔을 건설했으므로, 바위의 돔을 이전하는 정도로 타협할 수가 없다. 이슬람에서도 바위의 돔 건물이 아니라 '터'가 중요하다. 그런데 바위의 돔을 없애고 그 자리에 유대교의 제3 성전을 건축한다? 이는 이슬람 세계 전체와 전쟁을 하겠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이스라엘 정부도 절대로 손을 못 대는 것.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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