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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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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위치
정치수도 이슬라마바드
경제수도 카라치의 모습

파키스탄(우르두어: پاکستان, Pakistan)은 남아시아인도의 서쪽에 위치한 국가이다. 정식 명칭은 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우르두어: اسلامی جمہوریہ پاکِستان 이슬라미 줌후리예 파키스탄, 영어: Islamic Republic of Pakistan)이다. 수도는 '이슬람의 도시'라는 의미의 이슬라마바드. 하지만 상업, 문화의 중심지이자 최대 도시는 항구도시인 카라치다. 그 밖에 주요 도시로 라호르, 라왈핀디 등이 있다.

1947년 인도대영제국에서 분할 독립되면서 당해 8월 14일 자치령이 되었고, 1956년 이슬람 신자들을 위한 국가로 탄생했다. 1971년 동파키스탄방글라데시로 독립한 이후 당시의 서파키스탄이 남아 현재의 파키스탄이 되었다. 남아시아와 중동 그리고 중앙아시아를 잇는 요충지에 자리한 나라로, 무슬림 인구로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나라이며 핵무력을 보유한 유일한 이슬람 국가이다.

개요[편집]

파키스탄은 남아시아의 국가로 인구는 약 225,199,158 명(2021년)으로 세계에서 5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이며, 무슬림의 수는 세계에서 2번째로 많다. 면적은 약 881,913km²로 세계에서 33번째로 거대한 크기이다. 아라비아 해와 오만 만을 따라 1,046km의 해안선을 남쪽에 맞대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인도, 북서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 서쪽으로는 이란, 북동쪽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과 마주하고 있으며, 오만과는 해상 국경을 서로 접하고 있다.

파키스탄은 여러 고대 문명들의 발원지로, 8,500년이 넘은 남아시아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유적이 발견되기도 하였으며, 청동기 인더스 문명의 태동지이기도 하다. 이후 아케메네스 제국이 등장하였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잠시 헬레니즘 제국을 통하여 파키스탄 지방을 정복한 이후에는 셀레우코스 제국, 마우리아 제국, 쿠샨 제국, 굽타 제국 등이 연달아 나고 지는 것을 반복하였다. 또한 우마이야 칼리파조, 가즈나 제국, 델리 술탄국, 무굴 제국, 두라니 제국, 시크 왕국 등이 파키스탄 지역을 통치하였으며, 근대기에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지배를 받았고 1858년부터 1947년까지는 인도 제국으로 묶여 영국의 통치를 받았다.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점차 인도 제국의 국민들이 자결주의에 눈을 뜨기 시작하자, 파키스탄 지방에서도 무슬림들을 중심으로 '파키스탄 운동'이 일어나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하기 시작하였고, 1946년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1947년 마침내 영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이루어냈다. 다만 이 과정에서 힌두교가 주축이던 인도와, 이슬람교가 주축이던 파키스탄이 서로 분리독립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강제로 이주하거나 살해당하는 대규모 디아스포라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파키스탄은 민족적, 언어적으로도 굉장히 다원화된 국가이며, 지리와 야생환경도 다양한 편이다. 파키스탄은 1956년 헌법을 제정하여 이슬람 공화국임을 명시하였으며, 1971년에는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이후 방글라데시로 새롭게 탄생하였다. 이후 약 40여 년 동안 파키스탄은 문민 정부와 군부 정권이 서로 번갈아가면서 집권하며 복잡한 정치 체제를 유지하였으며,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속세주의와 이슬람 극단주의가 공존하는 굉장히 미묘한 사회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파키스탄은 2008년에 완전한 문민정부를 선거를 통해 구성하였으며, 2010년에는 주기적인 선거제도를 포함한 의회민주주의 제도를 채택하기도 했다.

파키스탄은 현재 6번째로 거대한 규모의 군대를 갖추고 있으며, 핵보유국이며 핵무기를 다량 보유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개발도상국에 속하며, 그 경제성장률은 세계적으로도 가장 빠른 편에 속한다. 파키스탄은 독립 이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경제 성장과 벌어지는 빈부 격차, 군부의 권력 확장, 정치적 불안정, 부정부패, 높은 문맹률 등과 관련한 심각한 사회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고심하고 있다. 파키스탄은 UN, 상하이 협력 기구, OIC, 커먼웰스, SAARC, 비동맹 운동의 일원이기도 하다.

국가 상징[편집]

파키스탄 국기
파키스탄 국장

국호[편집]

'파키스탄'이라는 국명은 우르드어나 페르시아어로 해석할 시에 '순수함이 넘치는 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파키스탄'이라는 단어는 크게 '파키'라는 단어와 '스탄'이라는 단어로 나눌 수 있는데, 먼저 '파키(پاک)'는 페르시아어로 '순수함', 혹은 '청정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스탄(ـستان)'은 페르시아어로 '풍요로운 곳', 혹은 '모든 것이 넘치는 곳'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파키스탄이라는 국호는 파키스탄의 독립운동가인 초우드리 라흐마트 알리가 1933년에 발간한 팸플릿인 'Now or Never'에서, 인도 제국의 펀자브, 아프가니아, 카슈미르, 신드, 발루치스탄 등 5개의 북부 지방을 일컫기 위하여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팸플릿에는 "'파키스탄'에 살고 있는 3천만 무슬림들이여"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국기[편집]

이슬람교 국가답게 흰색과 초록색 단 2가지의 색으로 되어 있으며, 초록 바탕에 하얀 초승달과 별이 그려져있다. 깃대 왼쪽으로 하얀 수직띠가 있고, 그 옆으로 이슬람을 상징하는 초록색 바탕이 그려졌으며, 초록색 바탕에 커다란 초승달과 별이 그려져 있다. 1947년에 인도와는 별도의 자치령으로 지정되어 사실상 인도와는 다른 나라로 독립할 때 화가인 아메루딘 키드와이가 디자인하여 국기로 제정하였다. 또한 국기에서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어진 모양은 동파키스탄(방글라데시)과 서파키스탄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방글라데시가 분리 독립된 이후에도 여전히 이 국기를 사용하고 있다.

하양은 평화, 초록은 번영, 초승달은 발전, 별은 지식을 뜻하며 공통적으로는 이슬람의 상징을 뜻한다. 그 외 국기 대부분을 차지하는 초록은 다수인 이슬람, 일부를 차지하는 하양은 이슬람 외의 소수자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국장[편집]

파키스탄의 국장은 1954년에 제정되었다.

국장 위쪽에는 초록색 초승달과 별이 그려져 있으며 국장 가운데에 있는 방패 안에는 파키스탄의 주요 생산물인 목화, 황마, 차, 밀이 네 개로 나뉜 작은 공간 안에 그려져 있다. 초승달과 별, 초록색은 파키스탄의 종교인 이슬람교의 상징이다.

국장 양쪽을 파키스탄의 국화인 수선화 화환이 감싸고 있으며 국장 아래쪽에 있는 두루마리에는 무하마드 알리 진나가 제정한 파키스탄의 나라 표어인 "신뢰, 단결, 훈련"("ایمان ، اتحاد ، نظم", "Iman, Ittehad, Tanzeem")이라는 문구가 우르두어로 쓰여져 있다. 수선화는 파키스탄에 남아 있는 무굴 제국의 문화 유산을 의미한다.

국가[편집]

국가는 قومی ترانہ‬‎(아랍 문자)/Qaumi Taranah(라틴 문자)이다. 이는 우르두어로 국가(노래)를 의미한다. پاک سرزمین‬‎,(파크 사르자민: 신성한 땅)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우르두어 가사만 있으며 영어 가사는 따로 없다. 발음만 다르지 중간에 한 번 나오는 کا를 제외하면 가사 전체가 페르시아어 차용어로만 이루어져 있어 페르시아어로 읽어도 완전히 같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파키스탄이 크리켓 인기가 높은 나라이다 보니 크리켓 경기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국가 중 하나이다.

지리[편집]

파키스탄의 지형 항공사진

파키스탄의 영토는 881,913km²에 달하며, 프랑스와 영국의 육지 영토를 합친 것과 맞먹는 크기이다. 세계에서는 33번째로 거대한 국토를 가지고 있다. 다만 이 영토 순위는 카슈미르 지방을 포함시키느냐 아니냐에 따라 일부 변동이 있기는 하다.

파키스탄은 인도 대륙 북부의 거대한 힌두쿠시 평원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인도 및 아라비아해와 접하고, 북동쪽에는 카라코람산맥히말라야산맥을 건너 중국과 접한다. 북서쪽에는 힌두쿠시산맥의 지류와 함께 아프가니스탄과 접경하고, 서쪽은 이란과 접경한다. 파키스탄은 넓은 평지도 있지만, 전 국토의 60% 정도가 산지 또는 고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파키스탄은 크게 북부 고지와 인더스 평원, 발루치스탄(Balochistan) 세 구역으로 나뉜다.

북부 고지는 힌두쿠시, 카라코람, 히말라야산맥과 접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다고 알려진 K2(Mount Godwin Austen, 8,611m)가 파키스탄과 중국의 국경에 있으며, 6,500m를 넘는 봉우리가 이 지역에만 50여 곳 이상이다. 북부의 산지는 인더스강의 서북쪽으로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을 따라 평행하게 이어지며, 남부의 발루치스탄주에 이르러 남쪽으로 이어져 아라비아해에 도달한다.

인더스 평원은 티베트, 인도령 펀자브주, 파키스탄에 있는 히말라야산맥과 힌두쿠시, 카라코람산맥에서 발원한 인더스강을 따라 만들어진 넓은 충적평원 지대로, 힌두쿠시 평원의 일부다. 인더스강은 파키스탄의 주요 하천들의 본류가 되는 핵심적인 하천인데, 파키스탄 국토를 서남쪽 방향으로 가로지르면서 흘러 아라비아해에 이른다. 인더스 평원은 4대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농경의 역사가 적어도 5,000년에 이를 정도로 초기부터 인류가 정착하고 농경을 시작한 지역으로도 알려져 있다.

발루치스탄 지역은 이란고원의 동쪽 끝으로, 서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 남아시아의 경계이자 점이지대라 할 수 있다. 산지가 많고 건조해서 인구밀도가 특히 낮은 지역이다. 힌두쿠시산맥의 남북방향 지맥인 슐레이만 산맥은 이 지역의 동쪽 끝에 있는 산맥이다. 이 지역의 서부에는 카란사막(Kharan desert)이 위치해 있으며, 다소 건조한 편이다. 파키스탄의 사막은 발루치스탄 외에도 인도와의 남부 국경에 타르사막, 인도와의 중부 국경에 촐리스탄사막(Cholistan desert), 인더스강 중류 펀자브 지방의 탈사막(Thal desert) 등이 있다.

파키스탄이 접하고 있는 아라비아해는 전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산소 부족 지역(oxyzen minimun zone)으로 어족자원이 부족한 편이다, 이로 인하여 식물성 플랑크톤이 왕성하게 발달하는 녹조 현상이 자주 관찰된다. 그 외에도 아라비아해에는 카라치 등의 대도시가 위치해 있어 해양오염 문제가 있다.

파키스탄의 기후
기후

파키스탄은 전반적으로 건조기후의 특성을 보인다. 대륙의 영향과 북회귀선에 인접한 속성에 의해 계절변화와 일변화 모두 극심한 편이다. 남부지역에는 인도양 계절풍의 영향을 주로 받으며, 북부 및 산악지대는 지중해 및 서부지역에서의 서부 교란(western disturbance)의 영향을 받는다. 인도양에서 발생하는 열대폭풍(사이클론, cyclone)의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이로 인하여 남부 지역은 여름철에 강수가 많은 편이고, 북부 지역은 겨울철에 강수가 많은 편이다.

페샤와르는 파키스탄의 북부 산악지대와 인더스평원의 경계에 있는 대도시로, 인도양 계절풍과 서부 교란을 모두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 지역이다. 가장 더운 달은 7월로 평균기온 32.2℃이며 여름 최고 기온은 45℃를 넘고, 가장 추운 달의 평균기온은 11.2℃를 보인다. 온화한 여름을 보이는 페샤와르의 연 강수량은 403mm로 스텝기후에 해당한다. 이 지역의 특징은 우기가 두 차례 온다는 것이다. 첫 번째 우기는 11월~4월에 찾아오며, 이는 서부 교란(western disturbance)에 의해서다. 두 번째 우기는 6~7월에 있는데, 이는 계절풍의 직간접적 영향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하이데라바드(Hyderabad)는 인더스강 중하류에 위치한 도시로, 파키스탄에서의 인도양 계절풍 효과를 확인할 수 있는 예시라 할 수 있다. 이 지역은 열대기후지역과 스텝 반건조기후의 중간정도 되는 기후로서의 특이성이 있다. 하이데라바드의 연평균기온은 26.8℃이고 가장 더운 달인 6월 평균기온은 29.7℃, 가장 추운 달인 12월 평균기온은 21.9℃로 크게 다르지 않아 열대기후의 특성을 보인다. 강수는 연 854.6mm로 이 지역의 인도양 계절풍 시점에 맞추어 6월부터 9월까지 집중되는 편이다.

북부 산악지대에는 온대기후·냉대기후·고산기후가 나타나며, 사막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건조기후가 나타난다. 다만 위의 두 사례처럼 각 기후들이 혼재되어 있거나 특이한 사례가 다수 존재하는 것을 파키스탄의 기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강우량은 연마다 편차가 심한 편이고, 이 때문에 가뭄과 홍수가 연달아 발생하는 것이 흔하다. 특히 최근 2022년에는 사상 최악의 가뭄을 겪었고, 가뭄이 끝나자 평소보다 2배에서 8배 이상의 폭우가 내렸으며 이로 인하여 국토의 75%가 침수되었고 천백명의 사망자와 수십만명의 수재민이 발생하였다.

역사[편집]

모헨조다로 유적

고대-중세[편집]

파키스탄에서 인류의 거주가 확인된 가장 오래된 유물은 펀자브 지방의 쏘언계곡(Soan valley)에서 발견된 전기 구석기 시기의 유적이다. 하라파유적모헨조다로 고고유적이 발굴되면서 세계적으로 알려진 인더스 문명은 여러 시대에 걸친 문명들이 남긴 유적들이 섞여 남아 있는 흔적들이다. 가장 오래된 층위는 메르가르(Mehrgarh)에서 확인되는 신석기시대 유물로 대표되는 메르가르 문명이고, 뒤따르는 것이 인더스 강변 지역 전체는 물론이고 파키스탄 전역에 걸쳐서 확인되는 청동기 시대의 인더스 문명이다. 인더스 문명의 시기는 대략 기원전 2,800~1,800년으로 추정된다.

인더스 문명이 하천 흐름의 변화를 포함한 자연환경의 변화를 맞아 도시 문명의 생활 형태를 포기한 이후, 인도-아리아인이 이주해 오고 사회·종교적 지배세력으로 자리 잡아가는 베다(Veda) 시기를 맞게 된다. 이 시기는 대략 기원전 1,500~500년으로 추정되며, 이때 인더스 강변의 사람들을 부르던 "힌두(Hindu)"라는 이름이 오늘날 "힌두교"의 연원이 된다. 인더스강의 7개 지류들을 중심으로 확립된 베다 전통은 인도아대륙의 종교와 문화 전통의 뿌리를 형성하게 된다. 현재 펀자브에 자리 잡은 탁실라(Taxila, 당시 Takṣaśilā) 등이 당시 중요한 중심지였고, 이 도시는 후대의 간다라 문화에서도 큰 의미를 지니는 장소가 된다.

이후로는 수많은 주변 정치 세력들이 파키스탄 지역을 장악하는데,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기원전 519년경)에 이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기원전 326년경)이 이루어진다. 나중에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대왕이 영토를 파키스탄 지역까지 확장하여 그 세력이 기원전 185년까지 지속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이후, 인도-그리스 왕국들이 박트리아의 데메트리우스(기원전 180~165)에 의해 탄생하고, 이 지역에 그리스와 불교문화의 융합을 낳은 간다라 문화가 만들어지게 된다. 이미 베다 시기 후기부터 탁실라에 자리잡은 대학과 유사한 대형 교육기관이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었을 만큼, 이 지역은 문화적으로 번창하는 지역이었다. 나중에 신드지방에서 성장한 라이 왕조(Rai dynasty, 489~632)가 주변지역까지 지배하기도 했고, 최후의 불교 왕국이라고 할 수 있는 팔라 왕조가 인도 북부 전역을 장악했을 때에는 파키스탄 지역을 장악하기도 했다.

이슬람 시기[편집]

라호르의 바드샤히 모스크

711년 경에는 아랍에서 건너온 무슬림 정복자인 무하마드 빈 카심이 신드 지방을 정복하였다. 이슬람을 신봉하는 파키스탄 정부는 이때부터 파키스탄의 기초가 제대로 놓이기 시작했다고 주장하고 있다만, '파키스탄'이라는 단일 국가의 개념 자체는 19세기에 들어와서야 만들어진 것이기에 파키스탄 정부의 공식 주장에는 약간 하자가 있다. 어쨌든 중세 초기인 642년 경부터 1219년 경까지 파키스탄 지방에는 점차 이슬람교가 뿌리깊게 퍼져나가기 시작하였으며, 수니파 선교사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며 지역의 불교도들과 힌두교도들을 무슬림으로 개종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후 파키스탄 지방에서 등장한 제국과 왕국들은 모두 이슬람교를 믿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국가들이 기원전 975년부터 1187년까지 존속한 가즈나 제국, 샨사브 왕국, 1206년부터 1526년까지 존속한 델리 술탄조 등이 있다. 또한 델리 술탄조의 마지막 왕조였던 로디 왕조를 몰아내고 인도를 정복한 무굴 제국 또한 무슬림 제국이었다.

1526년에 건국된 무굴 제국은 이후 인도를 대부분 정복하면서 페르시아 문화를 널리 퍼뜨려나갔고, 이로 인하여 파키스탄 지방에도 인도-페르시아 문화가 성립되기 시작하였다. 무굴 제국 시대에 파키스탄 지역의 대도시에는 라호르와 타타 등이 있었으며, 이 때문에 이 도시들에는 웅장한 무굴 제국 시절의 건물들이 매우 많은 편이다. 파키스탄 지역은 16세기 초부터 계속 무슬림 황제들이 다스리는 무굴 제국의 지배 하에 놓여있었으나, 18세기 초부터는 점차 서구 열강들이 인도로 침입해들어오며 무굴 제국이 망해가기 시작하자 점차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지게 된다.

전세계적으로 식민주의의 광풍이 불던 18세기 경, 영국 동인도회사는 파키스탄의 해안선 지역에 여러 무역기지들을 설치하였으며, 영국은 상선들을 보호하고 경제적 자유를 지켜낸다는 구실로 이 기지들에 군대를 파견하면서 점차 파키스탄 지역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동인도회사는 1765년에는 다른 서구 경쟁자들을 몰아내고 인도 아대륙 전부를 차지하는 데에 성공하였으며, 나중에는 벵골 지역도 점령하고 군대를 통한 통제력을 대폭 강화하면서 1820년 경에는 인도와 파키스탄 등지에 이르는 광대한 유역의 영토를 차지하였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이때부터를 파키스탄의 식민기의 시작으로 본다. 이 시기의 파키스탄은 영국의 사실상 지배를 받았으며, 동인도회사는 단순히 경제적, 정치적 동화뿐만 아니라 교육, 사회, 문화적으로도 현지인 탄압과 동시에 대대적인 동화 작업을 벌이면서 파키스탄 사회에 격랑을 불어넣었다.] 가장 대표적으로 1835년의 영국교육법, 인도시민법 등이 있다. 한편 영국이 자체적인 서구식 학교들을 세우며 서구화 정책을 펼치기 시작하자, 본래 인도에서 교육을 담당하던, 서당과 비슷한 교육기관이었던 ‘마드라사’는 영국의 지원을 받지 못했고, 이때 많은 수의 마드라사들이 강제로 문을 닫았다.

식민시기[편집]

18세기 들어 무굴 제국이 고질적인 부정부패와 서구 열강들의 침입으로 망조가 들어가자, 파키스탄 펀자브 지방의 시크 제국이 일시적으로 그 틈을 타서 상당히 거대한 영토를 정복, 다스리는 데에 성공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인도 전역의 확고한 지배권을 노리던 영국 동인도회사가 쳐들어오자 멸망하고 말았다. 1857년에는 벵골 지방에서 빅토리아 여왕과 대영제국을 상대로 한 무력 봉기였던 세포이 항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한편 영국은 효율적인 통치를 위하여 현지인들 사이의 갈등을 증폭시켜 함부로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는 전술을 사용하였는데, 인도의 가장 대표적인 두 이질집단이었던 힌두교도들과 무슬림들에게 이 전술을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하였다. 영국은 이 두 집단 사이의 종교적 갈등을 대거 불러일으켰고, 언어적, 민족적, 종교적으로 판이했던 인도는 갈수록 분열을 거듭하고야 만다. 한편 힌두교도 지식인들은 힌두 전통으로 회귀하자는 내용의 ‘힌두 르네상스’를 불러일으켰고, 이를 통하여 영국령 인도에서 더 큰 사회적 권력을 얻고자 하였다. 한편 무슬림 지식인들은 이에 맞서고 수적 열세를 이겨내기 위하여 아예 2개의 국가로 나누어 갈라서자는 주장까지 펼쳤고 1906년에는 전인도 무슬림연맹을 창설하여 무슬림 세력을 결집하였다. 당시 힌두교도들의 주축 세력이었던 인도국민회의가 반영 투쟁을 벌이며 인도 독립을 외쳤던 것과는 달리, 무슬림 세력들은 상대적으로 친영적인 목소리를 띠었으며 영국적 민주주의, 의회제도 등을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힌두교도들을 믿는 인도인들을 중심으로 수백만명이 결집한 대대적인 시민불복종 운동이 일어나 영국에 대항하기도 했다.

한편 무슬림 세력들은 1930년대에 이르러서야 이슬람교를 대표할 세력이 인도 정계에 두드러지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점차 결집하기 시작하였다. 1930년 12월 29일에는 당시 전인도 무슬림연맹의 위원장이었던 알라마 이크발이 ‘무슬림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인도 제국의 북서부 지역, 즉 펀자브, 북서부 국경지대, 신드 주, 발루치스탄 등을 따로 독립시키겠다’라고 선포하였다. 한편 인도 정계가 힌두교도들에 의하여 장악당하고, 무슬림 세력의 목소리가 갈수록 묻혀가자, 1937년과 1939년 사이에 당시 무슬림 지도자였던 무함마드 알리 진나가 다시 2국가 독립론을 활발히 띄우기 시작하였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인도 내 무슬림 세력은 영국을 지지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2국가 독립론을 영국에게 적극적으로 표명하였고 점차 힌두교를 믿는 인도 제국의 나머지 지방들과는 멀어져만 갔다.

파키스탄 운동[편집]

1946년에는 영국이 인도를 독립시키기 위하여 인도와 파키스탄 지방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여 독립, 자치적인 의회를 구성하도록 만들었다. 이 선거에서 무슬림 연맹은 무슬림들에게 할당된 의석수 가운데 90%를 휩쓸었으며, 이로 인하여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을 외치던 무슬림 연맹의 목소리가 나날로 커져갔다. 무슬림 연맹이 인도 내 무슬림들의 단일 대변자임을 부정하던 인도 국민회의조차도 어쩔 수 없이 무슬림 연맹을 동등한 협상자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영국도 인도의 모든 무슬림들을 대표한다는 것을 천명한 무함마드 알리 진나와 그의 2국가 독립론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를 2개로 나뉘어 독립시키고 싶지 않던 영국은 '내각 작전(Cabinet Misson Plan)'을 통하여 인도와 파키스탄을 묶기 위한 최후의 노력을 하기도 했다.

영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각 작전이 수포로 돌아가자, 영국은 1946년과 1947년 사이에 영국의 식민통치를 완전히 끝내며 더 이상 인도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이를 자와할랄 네루 등 인도 국민회의와 무함마드 알리 진나 등 무슬림 연맹이 받아들이면서 1947년 6월까지 마운트배튼 인도 부왕에게서 권력을 이양한다는 내용이 결정되었고, 1947년에 영국이 인도 식민지를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할독립시킨다는 것을 승인하면서 마침내 1947년 8월 14일에 파키스탄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당시 파키스탄의 영토는 무슬림이 다수를 차지한 인도 제국의 동부 지방과 북서부 지방이었는데, 크게 발루치스탄, 동부 벵골, 북서부 국경지방, 서부 펀자브, 신드 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편 인도와 파키스탄에 걸쳐 있던 펀자브 지방에서는, 분할 독립이 선포되자마자 힌두교도들과 무슬림 사이에서 격렬한 충돌이 일어났다. 대략 20만 명에서 200만 명 사이에 달하는 사람들이 종교갈등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과정에서 5만 명에 달하는 무슬림 여성들이 힌두교도와 시크교도들에게 납치되거나 강간당했으며, 3만 3천 명의 힌두교도 여인들 또한 무슬림들에 의하여 같은 일을 당했다. 이후 대대적인 이주가 일어났고, 650만 명에 달하는 무슬림들이 인도에서 파키스탄으로 이주하였으며 470만 명에 달하는 힌두교도들과 시크교도들이 파키스탄에서 인도로 피난을 갔다. 이는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집단 이주 사건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잠무-카슈미르 지방에 대한 영유권 문제가 발생하였고, 이 영유권 문제와 해묵은 종교갈등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히면서 결국 1947년에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현대[편집]

파키스탄의 국부인 무함마드 알리 진나.

1947년에 독립을 이룬 직후, 무슬림 연맹의 지도자였던 무함마드 알리 진나는 파키스탄의 첫 총독으로 부임하였으며, 파키스탄 의회의 대변인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은 1948년 9월 11일에 결핵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러던 중, 파키스탄 지도부는 무슬림 연맹의 사무총장이었던 리아콰트 알리 칸을 파키스탄의 첫 총리로 임명하기로 경정하였다.

한편 영국은 인도의 분할 독립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기에, 여러 영국 지도자들은 파키스탄의 건국을 좋게 보지 않았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마지막 인도 부왕이었던 마운트배튼 경이었는데, 그는 무슬림들이 주도한 파키스탄의 건국과 그 전망을 굉장히 부정적으로 보았다. 마운트배튼 경은 후에 만일 당시 파키스탄의 지도자였던 진나가 결핵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 틈을 타 파키스탄에 공격을 가할 생각이었냐고 묻자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라고 답변하기도 했다.

1949년 경 파키스탄의 존경받던 이슬람 법학자인 샤비르 아흐마드 우스마니, 그리고 이슬람 정당인 자마트-에-이슬라미의 학자였던 마우라나 마우두디가 주도하여 이슬람교와 샤리아에 기반한 파키스탄의 헌법을 만들었으며, 이 과정에서 마우두디는 제헌의회가 헌법에 '유일신의 최고권위'를 명시하고, 샤리아가 일반법보다도 더 상위에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통과시켰다. 자마트-에-이슬라미를 필두로 한 이슬람주의자들과 극단주의자들의 노력으로 인하여, 1949년 3월에는 마침내 이슬람교가 국가의 근본이라는 내용의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이 법안에는 '우주 만물이 최고 유일신에게 속하며, 그 분이 파키스탄에게 위임하신 권한은 오직 그 분에 의해서만 제한될 수 있으리라'라는 내용이 들어가기도 했다. 이 같은 내용은 1956년, 1962년, 1973년의 개헌된 헌법에도 똑같이 들어갔다.

파키스탄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스칸데르 미르자 대통령은 불안한 국내 정세를 근거로 계엄령을 선포하며 막 자라나던 파키스탄의 민주주의를 짓밟았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군부의 아유브 칸 장군이 그를 내쫒고 권좌에 올랐다. 1962년에 대통령제를 채택한 이후, 파키스탄은 1965년에 인도와 2차로 전쟁을 벌이기 전까지 상당한 경제 성장을 이룩했으나, 전쟁 직후에 급격한 경제 불황을 겪었으며 이에 실망한 국민들로 인하여 1967년에는 대규모 시위도 일어났다. 아유브 칸을 이어 파키스탄의 지도자가 된 군부 출신의 야히야 칸 대통령 시절에는 동파키스탄을 덮친 위력적인 사이클론 때문에 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하기도 했다.

1970년에는 독립 이래 첫 민주적인 선거가 열렸으며, 군부 독재에서 민주정으로 변화가 진행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동파키스탄 지역에서 지역정당인 아와미 연맹이 당시 여당이던 파키스탄 인민당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자, 아히야 칸 대통령과 군부는 권력을 승계해 주기를 거부하였고, 서치라이트 작전을 펼치며 대대적인 무력 탄압을 시도하였다. 이로 인하여 동파키스탄 지역에서는 대대적인 소요가 일어났고, 결국 대대적인 내전이 터지고 말았다. 이 내전을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이라고 칭하는데, 이 전쟁에서 벵골 군대가 파키스탄 군대에게 승리를 거두면서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라는 국명으로 파키스탄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 전쟁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수는 대략 30만 명에서 50만 명 정도로 추정되며, 방글라데시 정부 측에서는 300만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으나 이는 일부 과장된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파키스탄과 앙숙이던 인도가 동파키스탄의 독립을 돕고자 물자 등을 지원하자 파키스탄이 육해공군을 동원하여 인도를 선제공격하였고, 이 전쟁에서 파키스탄이 인도에게 패전하면서 결국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떨어져나가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파키스탄이 인도에게 항복하고 난 직후, 아히야 칸 대통령은 그 책임을 물어 자리에서 쫒겨났고 그 대신 줄피카르 알리 부토 대통령이 취임하여 헌법을 개정하는 등 민주화에 앞장서기 시작하였다. 이 때 부토 대통령의 정당이었던 파키스탄 인민당이 정권을 잡았다. 민주정은 대략 1972년에서 1977년까지 지속되었고, 이 시기에 계몽주의, 좌파 세력의 대두, 국민주의가 두드러지고 전국적으로 재건 운동이 일어나는 등 일부 진일보한 현상들이 많이 일어났다. 1972년에는 외국의 침입을 막는다는 구실로 대대적인 핵개발에 나섰으며, 그 해에 첫 핵시설이 완공되었다. 최대 주적인 인도가 1974년에 첫 핵시험을 실시하는 것으로 이에 맞서자, 파키스탄도 핵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1979년에는 파키스탄도 드디어 핵보유국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민주정은 1977년에 파키스탄 인민당의 좌파 정권에 반발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끝난다. 무하마드 지아 울 하크 장군이 1978년에 새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며, 군부 정권은 1977년부터 1988년까지 기업화와 경제화 정책을 펼치며 파키스탄을 남아시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권으로 올려놓는 데에 성공하였다. 한편 파키스탄은 아프가니스탄 지역에서 미국이 무자헤딘에게 지원을 해주는 것을 도와 소련 지배하의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을 몰아내는 데에 일조하였으며, 아프가니스탄과의 국경지대였던 파키스탄 북서부 지역은 반공산세력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파키스탄의 이슬람 세력들은 아프간 공산정부가 이슬람을 탄압하는 것을 비난하며 파키스탄 정부에게 '지하드'에 나서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지아 대통령은 1988년에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고, 그 뒤를 부토 전 대통령의 딸이었던 베나지르 부토가 승계하면서 군부의 지배를 끝내고 다시 민간 정부를 복원하면서 파키스탄의 첫 여성 총리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파키스탄 인민당은 보수적인 파키스탄 무슬림 연맹에게 권력을 넘겨주었고, 이후 수십년 동안 두 정당이 권력을 다투는 와중에 파키스탄의 경제 사정은 날로 악화되었다. 경제 지표는 날로 추락했고, 스태그플레이션이 일어났으며 부정부패가 판을 쳤고 인도와의 갈등은 터지기 직전이었으며 좌우 이념 갈등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1997년의 총선에서는 파키스탄 무슬림 연맹이 압도적 의석을 쓸어가며 대승을 거두었고, 인도가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 총리의 주도 하에 2차 핵실험을 하자 파키스탄도 이에 맞서 핵실험을 진행하였다.

인도와의 갈등이 날로 심각해져가던 와중에, 카길 지역에서 군사적 대치 상태가 고조되었으며 1999년에는 카길 전쟁이 터졌고, 국가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군부의 페르베즈 무샤라프 장군이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다. 무샤라프 대통령은 1999년부터 2001년까지는 최고행정위원장으로, 2001년부터 2008년까지는 대통령으로 재임하며 독재 정치를 폈고, 이 시기에 대대적인 계몽 정책을 펼쳤으며 사회자유주의, 경제 자유화 정책을 펴나갔다.

2007년에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가 암살된 이후, 파키스탄 인민당이 부토 전 총리의 암살을 계기로 동정표를 굉장히 많이 얻어내는 데에 성공하면서 2008년에 다수 의석을 확보하였고, 유사프 라자 길라니가 새 총리로 취임하였다. 의회에서 밀린 무샤라프 대통령은 탄핵의 위협을 느끼고 결국 2008년 8월 18일에 사임하였고, 그 뒤를 부토 전 총리의 남편인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 대통령이 이으며 파키스탄 인민당이 다시금 여당이 되었다. 그러나 자르다리 대통령의 지나친 부패 행각, 그리고 사법권 침해 등 행정권 남용으로 인하여 의회에서 대통령의 권한을 제한한다는 내용의 법안을 통과시킬 정도로 정계가 혼란스러워졌고, 2013년에는 자르다리 대통령이 결국 차기 대선 및 총선 불출마를 발표하였다.

2013년에는 파키스탄 무슬림 연맹이 다시 정권을 되찾았고, 이로 인하여 건국 66년만의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2017년 8월에는 새 총리로 무슬림 연맹 소속인 샤히드 하칸 압바시 총리가 선출되었다.

한편 2018년 7월 25일에 진행된 총선에서, 현 파키스탄 총리인 임란 칸이 이끄는 파키스탄 정의운동이 예상을 뛰어넘는 압승을 거두면서 새로운 여당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파키스탄 인민당, 파키스탄 무슬림 연맹, 군부가 돌아가면서 정권을 차지하던 순환고리를 깨고 마침내 임란 칸이 새로운 총리로 취임하였다.

정치[편집]

이슬라마바드 국회의사당
총리실

파키스탄은 민주적인 의회 연방공화국이며, 국교는 이슬람교이다. 첫 헌법은 1956년에 채택되었으나, 2년 후인 1958년에 아유브 칸에 의하여 효력이 일시 정지되었고 1962년에는 개헌이 이루어졌다. 완전한 헌법체계의 틀을 갖춘 헌법은 1973년에 도입되었으나, 지아울하크 대통령이 1977년에 또다시 효력을 중지시켰고 1985년에야 다시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이 헌법이 바로 현행 헌법이다. 파키스탄의 군부는 민간 정부와 연이어 정권을 번갈아 차지하면서 파키스탄 정치사에 많은 굴곡을 남겼는데, 1958년부터 1971년까지, 1977년부터 1988년까지, 1999년부터 2008년까지는 모두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던 기간이었으며 이 시기에는 군부 지도자들이 사실상의 대통령으로 군림했다. 다만 현재에는 군부가 물러나고 문민정부가 들어서 있으며, 이덕분에 다당제가 보장되는 의회제도를 채택하고 있으며 권력 분립이 이루어지고 있다. 첫 평화롭고 성공적인 정권 교체는 2013년 5월에 들어서야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파키스탄의 정치는 주로 사회주의, 보수주의, 제3의 길 등이 주류이다. 2013년에 총선이 열렸고, 현재 파키스탄에는 3개의 주류 정당이 있다. 첫 번째가 중도보수 성향의 파키스탄 무슬림 연맹이고, 두 번째가 중도좌파 성향의 파키스탄 인민당, 마지막이 제3의 길 성향의 파키스탄 정의운동이다.

  • 국가원수 : 파키스탄의 국가원수는 대통령으로, 헌법 41조 3항에 의하여 상원의원들로 구성된 선거인단에서 선출된다. 대통령은 국가의 상징적인 최고지도자이며, 파키스탄 군대의 민간 군통수권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치적인 실권은 거의 파키스탄 총리에게 있으며, 군통수권 또한 총리에게 있다. 총리가 자신이 임명할 후보들의 자질을 평가한 다음, 그 명단을 대통령에게 재가해달라고 올리면 대통령은 그저 이를 허가해주기만 할뿐, 실질적인 권한은 그다지 많은 편이 아니다. 또한 대통령의 권한이 이전보다도 굉장히 약화되어 있기에, 대통령이 권한을 행사하려 할 때에도 무조건적으로 의회와 내각, 그리고 총리의 허가를 받고 행동해야 하기에 타 대통령제 국가들에 비하여 대통령의 권한이 매우 작은 편이다.
  • 입법부 : 파키스탄은 양원제를 채택한 국가로, 상원은 104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원은 342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원의원들은 국민들에 의하여 직접선거로 뽑히며, 이 국민을 대표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기에 상원보다 실질적인 권한은 더 큰 편이다. 헌법에 의하면 여성과 종교적 소수자들을 배려하기 위하여 하원에는 최소 70석 정도가 소수 정당들에게 배분되어 있다고 한다. 한편 상원의원들은 지방의원들에 의하여 선출되며, 모든 주들이 동등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다. 다만 실질적인 권한은 하원에 비하여 작다.
  • 행정부 : 행정부의 최고 수반은 총리로, 보통의 경우 하원에서 최대 의석을 차지한 정당의 지도자가 총리로 선출된다. 파키스탄의 총리는 정부 수반이며, 대통령보다도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어 사실상 국가의 행정권을 총지휘하는 입장이다. 총리는 내각을 임명할 권한이 있으며, 정책들을 심의하고 결정할 권한도 있다. 또한 외국과의 조약 체결, 장,차관보 임명, 비서관 임명 등도 모두 총리의 허가를 받고 이루어진다.
  • 지방정부 : 파키스탄은 4개의 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방정부의 시스템은 거의 비슷한 편으로 국민에 의하여 직접선거로 구성된 지방의회들이 각각 있고 지방의회에서 최대 의석을 차지한 정당의 지도자가 그 주의 행정장관이 된다. 행정장관은 지방정부를 진두지휘하는 역할을 맡으며, 지역의 내각을 꾸려 그 주의 국정을 책임질 권한이 있다. 파키스탄에서는 워낙 지역색이 다른 탓에 각 주의 행정장관들이 모두 다른 당에 속해있는 것이 흔한 편이다. 한편 중앙정부와 총리는 각 주에 비서실장을 임명할 수 있는데, 이 비서실장은 해당 지역의 공무원들을 감독하는 역할을 한다. 지방 의회는 법률을 제정하고 지방의 재정장관이 제출한 예산안을 심의할 수 있다. 한편 대통령은 주지사들을 임명하는데, 이 주지사는 각 주의 상징적인 수반일 뿐 특별한 권한은 없다.
  • 사법부 : 파키스탄의 사법부는 2개의 수직적인 틀로 나누어진다. 상위 법원이 있으며, 하위 법원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다. 파키스탄의 최고 사법수장은 대법관이며, 모든 종류의 사법권을 관할할 수 있다. 또한 최고 법정은 파키스탄 대법원이고,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이기에 샤리아 연방법원과 5개의 고등법원들도 따로 존재한다. 파키스탄 헌법에는 사법부가 행정부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기는 하지만, 파키스탄의 고질적인 부정부패 탓에 사법과 행정체계가 완벽히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외에 각 지방마다도 지방법원들이 따로 있다.

외교[편집]

독립 이래 파키스탄은 해외 국가들과 활발히 관계를 맺어왔다. 특히 인근의 중국과 관계가 굉장히 친밀한 편이며, 각국 모두 특별관계를 맺으며 서로에 대한 중요도와 관심도가 매우 높은 축에 속한다. 또한 NATO가 아닌 국가들 가운데 미국의 동맹국이기도 하며, 테러와의 전쟁에도 미국의 편에서 참전한 바 있다. 파키스탄의 주요 외교 정강들은 주로 영토 분쟁, 이슬람 세계 통합, 국가 정체성 확립 등에 집중되어 있으며, 특히 타 이슬람 국가들과 관계를 다지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파키스탄과 인도는 건국 이래부터 현재까지 관계가 굉장히 안 좋은 국가들에 속하며, 현재에도 카슈미르 분쟁 등 영토 문제가 갈등의 씨앗으로 남아있고 이 지역에서는 무려 4번이나 인도와 파키스탄 간에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파키스탄은 바로 남쪽에 붙어있는 인도를 견제하기 위하여 이란터키 등 인근 이슬람 국가들과 관계를 가까이 유지하고 있으며, 이덕분에 파키스탄 외교에서 가장 핵심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국가들 중에 이란과 터키가 최우선 순위에 들어가기도 할 정도이다. 그 외에도 사우디아라비아와도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다.

파키스탄은 핵확산방지조약에 서명하지 않았으며, 핵보유국이기에 IAEA에서도 상당히 영향력있는 국가이기도 하다. 최근들어 파키스탄은 무기용 핵분열 물질 생산금지 조약에서 탈퇴하였는데, '해당 조약이 파키스탄을 특정하고 있다'라고 하는 이유 때문이었다고 전한다. 20세기 들어 파키스탄은 인도가 핵무기를 개발하기 시작하자, 라이벌 의식과 균형 의식 때문에 핵무기를 개발하기 시작하였으며 현재에는 세계적으로도 최대 규모의 핵무기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해외에서는 세계 안보를 이유로 점차 파키스탄에게 핵무기를 감축하라고 요구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감축의 움직임은 없다.

파키스탄의 지정학적 위치는 세계 석유 공급의 핵심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앙아시아를 통한 원유 수송로의 중간에 자리하고 있다. 2004년에 파키스탄 상원의원은 '파키스탄은 각 국가들의 주권, 쌍방주의, 상호주의, 상호불간섭주의 등을 외교의 기본 정책으로 삼고 있다'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파키스탄은 UN의 회원국이며, UN에 영구 대사를 두고 있다. 또한 무슬림 세계에 신경을 굉장히 많이 쏟고 있는 만큼 '계몽 현대주의'를 이슬람 세계에 퍼뜨리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기도 하다. 파키스탄은 커먼웰스, 남아시아 지역협력연합, G20 개발도상국, ECO 등의 회원국이다.

파키스탄은 종교를 탄압하는 공산주의를 극단적으로 배척했고, 이덕분에 1950년대에는 소련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1980년대에 일어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는 파키스탄은 적극적으로 미국의 편에 서서 소련과 맞서 싸우기도 했다. 그러나 소련이 망하고 새롭게 들어선 러시아와는 1990년대 들어 극적으로 관계가 개선되었으며, 여러 부문에 걸쳐 협력이 크게 늘어났다. 다만 냉전 시기 전통적 우방이었던 미국과의 관계는 오히려 악화되었는데, 파키스탄이 핵을 개발하는 것에 미국이 제재를 대량 부과하기 때문이었다. 다만 9.11 테러 이후 미국이 시작한 테러와의 전쟁에서는 금융과 무기 지원을 받는 대가로 미국의 편에 서서 중동과 남아시아 지방의 핵심적 동맹국으로 서기도 했다. 다만 초기에는 테러와의 전쟁에 참전한 것으로 양국 관계가 호전되는 듯 싶었으나, 나중에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서로 간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꼬이면서 다시금 악화하기 시작하였다.

파키스탄은 이스라엘과는 외교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으나, 가끔씩 몇몇 이스라엘인들이 관광비자로 파키스탄을 찾기도 한다. 다만 터키를 중재자로 삼아 양국간 일부 협상이 열리기는 했다. 파키스탄은 아르메니아와 외교관계를 맺지 않은 유일한 국가이나, 파키스탄 국내에 아르메니아 공동체가 존재한다. 한편 방글라데시와는 초기에 전쟁까지 벌였을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현재에는 관계가 급격히 호전되어 나쁘지 않은 편이다.

대한관계

대한민국과 파키스탄은 1968년 영사 관계를 맺고 1983년 대사급 관계로 격상되었다. 북한과 먼저 외교관계를 체결하여 미사일과 핵 개발 분야에서 북한과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대한민국과의 우호관계는 좋은 편이다. 2016년과 2017년 대북제재에 동참하면서 북한 유일의 민간항공인 고려항공 취항금지를 취하기도 했다. 2003년 대통령 페르베즈 무샤라프(Pervez Musharraf, 1943.8.11~)가 서울을 3일간 공식 방문하기도 했으며, 2019년 파키스탄 상무장관이 방한해서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제안하기도 했다. 양국 간 무역 액은 11억 달러이고, 파키스탄 카라치 소재 KOTRA 카라치 무역관이 운영되고 있다. 이슬라마바드에 파키스탄 대한민국대사관이 있고 카라치에 분관이 위치하며 서울에 파키스탄 대사관이 있다.

파키스탄 후세인 샤히드 수라와르디 총리와 중국 저우언라이 총리의 회담.
대중관계

파키스탄은 중화인민공화국이 1950년에 건국된 이후 가장 먼저 국가로 인정하고 외교 관계를 튼 국가들 중 하나이며, 1962년에는 중국이 인도와 전쟁을 치르면서 인도의 최대 적수였던 파키스탄과의 관계가 더더욱 돈독해졌다.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파키스탄은 중국이 점차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닉슨이 중국에 국빈방문하는 것 또한 파키스탄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파키스탄에서 군부가 들어서든, 민간 정부가 들어서든 간에 중국과의 관계는 여전히 변함없이 끈끈한 편이었으며, 중국 또한 파키스탄에 대하여 굉장히 호의적인 태도로 대하며 관계를 좋은 쪽으로 이끌어갔다.[63] 파키스탄에는 중국인을 위한 차이나 타운이 여러곳 존재하기도 하며, 중국은 파키스탄의 최대 무역 상대국이다. 양국은 경제상호협력을 통하여 대대적인 투자를 했으며 이를 통하여 항구를 지어주는 등 파키스탄의 인프라를 크게 향상하는 데에 기여하기도 했다. 또한 2015년에는 51개조항에 달하는 협약들을 체결하면서 더더욱 그 관계가 돈독해졌고, 2000년대에는 FTA에도 서로 서명하였다. 파키스탄은 현재 중국과 무슬림 세계를 이어주는 도개교 역할을 하고 있다. 2016년에는 중국이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 정부를 도와 반테러리즘 군사 작전을 펴겠다고 천명하기도 하였으며, 2018년 12월에는 서구가 중국 공산정권이 위구르 자치구에서 자행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인종학살, 강제노동 따위의 내용을 파키스탄 정부가 직접 반박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발루치스탄 지역에는 중국인을 대상으로 테러나 납치등을 벌이는 등 반중감정을 보이고 있다.

국방[편집]

파키스탄은 인구 중 신도 수의 비율로 볼 때, 인도네시아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이슬람 국가이다. 그리고 핵무기 보유를 선언한 유일한 이슬람국가로서, 국제사회에서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파키스탄은 매우 독립적인 외교 정책을 펴는데, 특히 핵무기 개발, 원자로 건설, 군수 물자 거래, 기타 국가 안위에 필수적인 이슈들에서 그렇다. 파키스탄은 세계의 주요 원유의 공급경로에 위치하고 있고, 원유가 풍부한 중앙아시아에 가까워, 전략적으로 지정학적인 위치에 놓여 있다. 파키스탄은 이슬람 회의 기구의 중요회원국이며, 미국은 파키스탄을 주요 주요 비NATO 동맹국(major non-NATO ally)으로 분류하고 있다. 또한 매우 잘 훈련된 군대를 보유하고 있어 세계 8위의 국방력을 지닌다.

파키스탄의 군 병력은 2021년 기준, 651,800명의 현역병과 291,000명의 준군사조직원으로 구성되고 병력 면에서 세계 6위 규모이며, 모병제를 따른다. 군 명령체계의 정점에 합동참모본부(Joint Chiefs of Staff Committee)가 있다. 그 의장(Chairman)이 군대 내 최고위 장교인데 민선 정부의 최고 군사 자문이 되지만, 삼군에 직접 명령권을 갖지는 않는다.

군인들 위주로 이루어진 정보부(Inter-Services Intelligence, ISI)가 파키스탄의 국가안보에 개입되는 주요 정보조직이다. 아프가니스탄 등의 주변국 상황 관리와 파키스탄의 국내정치에 핵심적으로 개입되어 있는 조직이며, 반(反)소련 무자헤딘 지원활동을 통해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을 훈련시키고 지원한 것도 ISI가 주도한 비밀 사업이었다. ISI가 중국 신장웨이우얼자치구의 무슬림이나 필리핀의 무슬림 저항단체 그리고 중앙아시아의 무슬림 단체를 지원한 사례도 있다. 스톡홀름국제평화문제연구소(SIPRI)에 따르면 2012~2016년 기준, 파키스탄은 세계 9대 무기 수입국이다. 파키스탄의 주요 무기 수입원은 미국·튀르키예·중국이다.

파키스탄군이 아랍국가들의 군대육성과 전투에 직접 개입된 다수의 사례가 있다.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 간의 전쟁에 파키스탄 해군과 공군 군인들이 자원 형식으로 참전한 사례가 있고, 1979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서 반군진압 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1991년 걸프전쟁 때에는 미국의 동맹국으로 5,000명을 파병했다.

행정구역[편집]

파키스탄은 기본적으로 연방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전국을 4개의 주로 나누어 구분하고 있다. 4개의 주에는 크게 펀자브 주, 카이베르파크툰크와 주, 신드 주, 마지막으로 발루치스탄 주 등이 있다. 또한 길기트발티스탄과 아자드 카슈미르가 속한 2개의 자치구역이 있으며, 수도인 이슬라마바드를 둘러싼 수도권 지역을 연방구역으로 따로 분리하여 행정구역을 만들었다. 현재 파키스탄 정부는 인도와의 분쟁 지대인 카슈미르 지역의 서부 지역을 사실상 통치하고 있으며, 이들을 특별 관리하기 위하여 아자드 카슈미르와 길리트발티스탄으로 나누어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2009년에는 파키스탄 헌법을 해석하면서 길기트발티스탄에게 반쯤은 주의 지위를 갖도록 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자치 정부를 구성하고 지역의회를 창설하도록 허가하며 실효적인 지배를 강화하려 들기도 했다.

카슈미르 분쟁
카슈미르 지역(녹색으로 표시된 지역은 파키스탄이 통제하는 지역)
카슈미르 지방

카슈미르 지방은 남아시아의 북서부 끝단에 위치한 지역으로,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격렬한 다툼이 벌어지고 있는 단초를 제공한 분쟁 지역이기도 하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이 카슈미르 지역의 영유권 문제로 인하여 1947년, 1965년, 1971년에 한 번씩 최소 3번에 걸친 대규모 전쟁을 치렀으며, 1971년에 벌어진 대전쟁에서는 파키스탄이 사실상 항복하고 동파키스탄 지역이 방글라데시로 떨어져 나가는 것을 승인하기도 했다. 현재 이 곳에는 대규모의 군대가 파병되어 있으며, 카슈미르 지역의 45.1% 정도를 인도가 통치하고 있으며 나머지 38.2% 정도는 파키스탄의 영유권 하에 있다. 인도는 현재 잠무, 카슈미르 계곡, 라다크, 시아첸 등을 포함한 잠무 카슈미르 지방 전체를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으나, 파키스탄은 이 주장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현재 파키스탄은 자국이 영유하고 있는 카슈미르 지역에 아자드 카슈미르, 그리고 길기트발티스탄이라는 2개의 자치구역을 세워 따로 관리하고 있다.

카슈미르 분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인도 제국이 영국에게 독립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잠무 카슈미르 지방은 마하라자 하리 싱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었는데, 힌두교를 믿었던 하리 싱은 카슈미르 지방이 파키스탄, 혹은 인도 둘 중 한 국가로 편입되어야 한다는 소식을 듣고 힌두교 세력인 인도에 가기를 원했으나, 카슈미르 인구의 대부분이 무슬림이었기에 이에 대한 급격한 반발이 일어나게 된다. 이후 하리 싱은 인도에 도움을 요청하고, 인도에 대한 잠정 편입을 승인한 뒤에 도주하였고, 인도 군대가 카슈미르로 진입하는 것에 반발한 파키스탄이 자국 군대를 파병하면서 대대적인 갈등이 발발하게 된다. 이에 따라 현재까지도 인도는 잠무 카슈미르 지방의 마지막 토후였던 하리 싱이 인도와 체결한 협약에서 캬슈미르 지방 전체를 인도에게 넘겨주기를 약속했다는 것을 근거로 들고 있으나, 파키스탄 측에서는 카슈미르 지방은 무슬림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될 때의 원칙에 따라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인도는 1948년 1월 1일에 이 안건을 UN에 상정하였고, UN 총회에서는 파키스탄에게 병력을 일단 물리고 주민투표를 통하여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파키스탄은 이를 물리지 않았고, 대신 1949년에 이르러 일단 교전을 중지하고 잠정적 국경선을 그어 카슈미르 지역을 2개의 국가에 나뉘어 편입하는 것으로 잠정적 결론이 났다. 인도는 무슬림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 카슈미르 지방이 파키스탄에 통째로 넘어가는 것에 두려워하였고, UN이 제안한 국민투표를 거부하였다.

이슬람[편집]

라호르의 바드샤히 모스크에서 열린 금요일 대예배

파키스탄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슬람교' 자체를 국가의 주 설립 목적으로 삼고 건국된 국가이다. 파키스탄은 인도의 무슬림들이 모여 만든 나라라고 할 수 있기에, 이슬람교가 국가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타 국가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지대하며 이슬람 율법과 샤리아가 헌법이나 민법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 건국의 아버지이자 파키스탄의 국부인 무함마드 알리 진나 또한 이슬람 율법학자들과 굉장히 친밀한 관계였으며, 파키스탄의 건국 세력 역시 압도적 다수가 절대적인 무슬림들이었다.

1949년 3월에 발표된 헌법 내용에는 유일신이 만물의 주권자이며, 파키스탄은 무조건적으로 이슬람 국가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파키스탄은 단순히 자국을 확고히 이슬람화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인근의 국가들까지 이슬람화시키고, 최종적으로는 전세계의 이슬람화와 세계적인 이슬람 조직체를 창설하는 것을 핵심 목표로 삼았다. 이 목표는 1970년대에 이슬람 협력기구(OIC)가 출범하면서 일부 이루어졌다.

한편 파키스탄 정부는 건국 직후부터 사회 전반에 강력한 이슬람 율법을 강요했는데, 서파키스탄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반발이 적었던 반면, 벵골 지방을 중심으로 한 동파키스탄 지역에는 속세주의를 추구하고 민족을 종교보다 우선시했던 벵골의 전통적 엘리트층들이 다수 모여 살고 있었기에 지나친 생활의 종교화에 대하여 강하게 반발하였다. 이슬람 정당이었던 자마트-에-이슬라미는 파키스탄이 완전한 이슬람 국가라고 선포한 마당에, 벵골의 지역적인 민족주의는 용납될 수 없다고 보았으며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려 하였다. 1971년에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자마트-에-이슬라미는 파키스탄 군대 편에 서서 벵골의 민족주의자들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파키스탄의 첫 총선 직후, 제헌 의회에 의하여 1973년에 첫 헌법이 제정되었다. 이 헌법에는 파키스탄이 이슬람 공화국이라는 내용과, 그리고 이슬람교가 파키스탄의 국교라는 내용이 동시에 들어가 있었다. 또한 모든 민법과 형법이 이슬람 율법에 맞추어져야만 하며 이슬람 경전인 쿠란과 수나를 능가하는 그 어떠한 법적 권위도 없다고 못박아놓았다. 이 헌법에는 샤리아 법원과 이슬람이념위원회 등 이슬람 경전이나 율법 등을 해석하는 자체적인 종교기관의 창설도 의무토록 해놓았다.

한편 좌파 성향을 띠고 상대적으로 속세주의를 추구했던 줄피카르 알리 부토 총리는 당시 보수적인 이슬람 세력의 엄청난 반대에 부딪혔는데, 가장 대표적으로 '니잠-에-무스타파' 등 샤리아법에 의하여 통치되는 완전한 이슬람 국가를 세우려는 극단주의 단체들이 강력하게 반발한 것이다. 이 때문에 부토 총리도 어쩔 수 없이 일부 요구는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한편 부토 총리를 죽이고 권좌에 오른 지아 대통령은 아무래도 종교적인 세력의 지지를 등에 업고 권력을 탈취했기에, 이슬람교에 친화적일 수 밖에 없었고 그들의 요구를 맞추어주기 위하여 이슬람 율법을 강화하고 샤리아법을 전면 시행하였다. 지아 대통령은 독립적인 샤리아 법원을 창설하였고, 이슬람 율법에 통달한 배심원들을 양성하였다. 또한 '울라마'라고 부르는 이슬람 법학자들과 이슬람 정당들의 영향력을 강화하였으며, 특히 이슬람 부흥주의의 한 교파인 데오반드파와의 협력을 굳게 하였다. 이 때문에 데오반드파, 즉 후의 살라피즘의 세력이 굉장히 강해졌고, 지아 대통령이 수니파를 가까이 하고 시아파를 배척하자 점차 이슬람 국가들 사이에서의 갈등도 심해졌다.

퓨리서치센터에 의하면 파키스탄의 국민의 대다수가 샤리아법을 파키스탄의 공식 법으로 제정하는 것에 찬성한다고 전했다. 또한 파키스탄이 이집트, 인도네시아, 요르단 등 타 이슬람 국가들에 비해서도 종교색이 강하여 심지어 국적보다도 종교를 우선시한다고 전했다.

경제[편집]

이슬라마바드 주식거래소 바깥에 세워진 황소의 동상

파키스탄의 경제는 세계에서 PPP 순위로만 따지면 22번째로 거대한 규모이며, 명목 GDP 규모로만 따질 시에는 42번째로 거대한 경제 규모를 가지고 있다. 경제학자들은 파키스탄 지역이 기원후 1000년 경부터 약 몇 백년 동안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들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하나, 18세기부터는 중국 지역과 서유럽 지역에 추월당하고 말았다. 파키스탄은 현재 활발하게 경제가 발전하고 있는 개발도상국 축에 속하며, 유망한 개발도상국들의 모임이자 21세기의 신흥경제권을 의미하는 넥스트 일레븐의 일원이기도 하다. 파키스탄은 지난 몇 십년 동안 심각한 정치적 불안과 사회적 소요 등으로 경제가 인근의 인도에 비하여 크게 발전하지 못했으나, 최근 들어서는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파키스탄은 반쯤 공업화된 국가로, 인더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공장들이 대거 들어서 있으며 이 지역이 경제 규모도 가장 크다. 특히 카라치 지방과 펀자브 지방의 도심 지대가 가장 부유한 편에 속하며, 발루치스탄 지역이 가장 가난한 편에 들어간다. 파키스탄은 세계에서 67번째 규모의 수출국이며, 106번째로 복잡한 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다. 2015년 기준으로, 파키스탄은 2,081억 달러를 수출하였으며 4,476억 달러 어치의 물품을 수입하였고, 이로 인하여 무려 2,396억 달러에 달하는 수출입 적자를 보았다.

2019년 기준으로 파키스탄의 예상 명목 GDP는 2조 8,420억 달러이다. PPP 규모로는 1조 254억 달러 정도이다. 1인당 명목 GDP에는 미국 달러로 약 1,388달러 정도이고 PPP로 환산할 시 6,016달러 정도에 들어간다. 세계은행에 의하면 파키스탄은 굉장히 발전 가능성이 높은 국가 축에 끼며, 특히 유난히 젊은 층들의 비율이 높은 덕에 향후 경제에 선순환이 예상된다고 전했다. 다만 현재 파키스탄의 경제 상황은 예측만큼 좋지는 않은 편이라서, 전체 인구의 대략 21.04%가 최저빈곤선 아래에 떨어져 있어 하루를 1.25달러 미만의 돈으로 겨우 버텨나가고 있다고 한다. 15세 이상 경제활동인구의 실업률은 약 5.5%이다. 파키스탄의 중산층 규모는 대략 4천만 명 정도이지만, 2050년 경에는 1억 명까지도 증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2015년 세계은행의 보고서에서, 파키스탄의 경제규모는 PPP로는 세계 24번째에 달하며 명목상으로는 약 41번째로 크다고 한다. 또한 남아시아에서는 인도에 다음가는 2위의 경제국이기도 하다.

파키스탄의 경제 성장률은 굉장히 들쭉날쭉하게 변동이 심해져 왔는데, 특히 몇 십년간 민주정과 군부 독재가 번갈아 집권하면서 정치적 상황이 혼란스러웠을 때에는 성장률이 꽤나 낮은 편이었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부터 중반대부터는 급격한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였고, 정부가 예산을 활발히 집행함과 동시에 빈곤율이 10% 미만으로 떨어지고 GDP도 3% 이상 증가하면서 다시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2007년부터는 다시 경제가 위축되기 시작하였고, 전세계가 경제불황에 빠져있던 2008년에는 인플레이션이 무려 25%에 달했다. 파키스탄은 이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IMF에게 구제금융을 요청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1년 후, 아시아 개발은행은 파키스탄의 경제위기가 점차 해소되고 있다고 전했고, 2010년과 2011년에는 인플레이션이 14.1%로 크게 감소했다. 2014년에 골드만삭스는 파키스탄이 향후 35년 동안 최소 15배 이상 성장할 수 있을 것이고, 이 예측대로만 한다면 2050년 경에 세계에서 18번째로 거대한 경제규모를 가질 수 있다는 장밋빛 전망을 제시하기도 했다. 현재 파키스탄은 세계 최대의 자연광물 생산국들 중 하나이기도 하며, 세계에서 10번째로 거대한 노동시장을 가지고 있다. 또한 전세계에 퍼져있는 7백만 명에 달하는 파키스탄 이주민들이 보내오는 막대한 양의 외화도 파키스탄의 경제 발전에 한몫을 하고 있으며, 주요 거래국은 아랍에미리트, 미국, 사우디아라비아, 걸프 만에 인접한 국가들,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일본, 영국, 노르웨이, 스위스 등이 있다.

산업구조

파키스탄 경제는 농업 위주 경제에서 서비스산업 비중이 확장되는 형태로 변화되었다.

농업의 국내총생산(GDP) 기여분은 2015년 기준 20.9%에 그치고 있지만 인구의 약 43.5%가 농업 분야에 종사하고 있다. 밀 생산량만 보더러도 2005년 기준 남아메리카 전체의 생산량과 맞먹는 양을 생산했으며, 현재 수출액 기준 기여도가 가장 높은 것이 농업 분야이다. 면화 생산량에서는 세계 5위 규모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녹색혁명 정책이 밀과 벼의 생산량 증가에 기여했다. 관정을 개발해 생산성이 50% 향상되었고 다수확품종의 재배가 기여한 바가 크다.

제조업 분야는 GDP의 19.74%를 차지하고 일자리의 24%를 차지한다. 대기업 비중이 높아 66%를 차지하고 있는데, 특히 시멘트 산업이 아프가니스탄의 수요와 국내 부동산 붐으로 빠르게 성장했으며, 2013년 771만 톤(t)의 시멘트가 수출되었다. 제조업 분야에서 비중이 높은 것은 섬유산업 분야이다. GDP의 9.5%를 차지하며 1500만 명의 고용을 창출하고 있다. 섬유산업에서 둘째 수출 대상국이 중국인데, 중국은 주로 방적사나 면직물 같은 원재료에 가까운 형태를 파키스탄에서 수입하고 있다.

서비스업은 GDP의 58.8%를 차지하고 있으며 현재는 경제발전의 핵심요소가 되었고, 발전 속도도 높다. 개발도상국들이 그러하듯 소비 중심 사회이고 한계소비성향이 높다. 특히 IT 분야가 성장률이 높은 분야들 중 하나인데, 2020년 5월 기준 파키스탄에는 8200만 명의 인터넷 이용자가 있고, 그 규모는 세계 9위 수준이다. 이 분야 고용 창출 규모는 12,000명 정도인데 수출과 해외 대기업의 하청을 맡는 구조로 자리 잡아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8.2%(2005~2006)에서 12.6(2012~2013)으로 확대되고 있다. 제조업 기반이 취약한 채로 서비스업이 비대해지면서 사회 기초 인프라 구축과 일자리 창출이 어려워지는 구조적인 문제를 국면하고 있다.

파키스탄의 다양한 자연환경은 관광산업 발전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2018년 660만 명의 해외 관광객이 방문한 것으로 파악되는데, 1970년대 히피 문화 전성기의 상황보다는 규모가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관광객들이 주로 찾는 지역은 카이베르 고개, 페샤와르, 카라치, 라호르, 스왓(Swat), 라왈핀디 등이다. 북부의 히말라야 산악지대부터 남부의 맹그로브 숲과 불교 유적지, 인더스 문명 유적지 등에 관광객이 몰린다.

에너지와 교통[편집]

타르벨라 댐
카라치 칸톤먼트 기차역
카라치 고가도로

2021년 5월 상업 원자력발전소 6기에서 이루어지는 전력 공급은 전체 전력 소모의 5.8%를 담당하고 있다. 발전의 64.2%는 석유와 가스를 사용하고, 29.9%는 수력발전에서 생산하고, 석탄발전은 0.1% 규모이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회원국이지만 비확산조약 가맹국은 아니고 인도, 이스라엘, 북한과 함께 핵 무장 국가이다.

파키스탄과 중국 양국은 2013년부터 중국 서부 신장웨이우얼자치구에서 과다르항까지 약 2,800km에 이르는 구간에 도로·철도·송유관 및 광통신망 등을 건설하는 중국-파키스탄경제회랑(China–Pakistan Economic Corridor, CPEC) 건설을 시작했다. 중국 입장에서 이 사업은 해상 석유 수송로인 남중국해가 미국에 봉쇄당할 경우에 대비해 안정적인 에너지 수송로를 구축하기 위해 중요하다. 이 프로젝트에 따라 파키스탄 정부는 과다르항을 중국이 지정한 다국적 기업 '중국해외항만지주회사(COPHC)'에 2015년 말부터 2059년까지 임대해 주었다. 과다르항 개발이익의 대부분이 다시 중국 측 COPHC로 흘러들어간다는 현지민들의 불만이 강하게 제기되면서 연달아 중국인들에 대한 자살폭탄 테러가 일어나는 등 현지민들의 반발도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교통은 국내총생산(GDP)의 최대 10.5%까지 담당하고 있는데, 국가 교통망의 핵심인 고속도로망은 국립고속도로국(National Highway Authority)에서 운영한다. 고속도로 명칭은 대문자 "M(Motorway)"을 앞에 붙여서 번호를 매겨서 표시하는데, 예를 들어 "M-1"과 같은 형태이다. 고속도로가 여객 수송의 92%와 화물수송의 96%를 담당한다. 파키스탄은 '국가무역회랑사업(National Trade Corridor Project)'을 추진하여 아라비아해의 3대 항구, 즉 카라치와 카심(Qasim) 항구와 과다르를 내륙 지방과 연결하려고 하고 있고, 이것은 장기적으로 북쪽 중국, 중앙아시아, 아프가니스탄과도 연결될 계획이다.

독립이후 1970년대까지는 철도망이 주된 교통체계였다. 현재는 국내 여객운송의 8%, 그리고 화물운송의 4%만이 철도를 이용한다. 시내교통을 담당하는 지하철은 라호르의 오렌지라인이 2020년 개통되어 지하철로는 처음 운행을 개시했다. 25.4km의 고가구간과 1.72km의 지하구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외의 여러 도시에서 시내 교통을 담당하는 메트로버스(Metro Bus)와 버스연계망(Bus Rapid Transit, BRT)이 운영되고 있다.

2013년 파키스탄에 약 151개의 공항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카라치의 진나국제공항(Jinnah International Airport)이 가장 중요한 국제공항이다. 1993년 항공업이 자유화되기는 했지만 국가소유의 파키스탄국제항공(PIA)이 대표적인 항공사이고 국내여객의 73%를 수송하고 국내 항공운송 전체를 담당한다. 사기업 항공사인 에어블루(airBlue), 에어인더스(Air Indus) 등은 가격경쟁력을 내세워 경쟁을 하고 있다.

주식 시장[편집]

파키스탄 증권거래소(Pakistan Stock Exchange)는 아시아에서도 가장 오래된 증권 거래소 중 하나이다. 1947년에 설립되었으며 2015년 7월 기준 총 시가총액은 약 750억 달러 (약 84조원)이다. 기준 주가지수는 KSE100 지수. 그 만큼 유동성도 높은 편이며 최근 파키스탄 경제 성장에 힘입어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는 중이다. 의외로 KSE100 지수는 대침체 이후 가장 많이 상승한 지수 중 하나 이다.

인문사회[편집]

인구[편집]

파키스탄의 인구는 2021년 추산 225,199,937명으로 세계 5위 규모 인구 대국으로, 세계 인구의 2.8%에 달하는 규모의 인구를 자랑한다. 2017년 파키스탄 인구조사에서는 본디 파키스탄의 인구를 약 2억 780만 명 정도로 추정하였으나, 이는 길기트-발티스탄과 아자드 카슈미르의 인구를 제외한 것으로 실제로 이를 포함하면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2017년 파키스탄의 인구는 1988년의 인구보다 57%나 증가한 정도이며, 2016년 기준으로 인구성장률은 1.45% 정도로 SAARC 국가들 중 가운데 가장 높은 수치이나 현재 들어서는 성장률이 점차 낮아지고 있다. 2030년 경에는 대략 인구가 2억 6,300만 명 정도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1947년 파키스탄이 영국으로부터 분할 독립할 적에, 파키스탄의 인구는 약 3,250만 명 정도였으나, 1990년과 2009년 사이쯤에 57.2% 가까이 증가하였다. 2030년에 이르면 파키스탄이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무슬림 국가로 발돋움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기도 하다. 파키스탄은 중간나이가 23.4세로 굉장히 낮은 편으로 세계적으로도 젊은 편으로 속한다. 2010년 기준에는 1억 4천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30세 이하이다. 2016년 기준으로 파키스탄의 출산율은 2.68명이며, 인도보다도 높다.[85] 대부분의 인구는 인더스 강을 따라 남부 지역에 모여 살고 있으며, 특히 카라치 유역에 몰려 살고 있다. 또한 이를 제외한 동부, 서부, 북부 지방에는 라호르, 라왈핀디, 사르고다, 이슬라마바드, 구자라트, 페샤와르 등 대도시에 집중적으로 모여 살고 있다. 1990년과 2008년 사이에 전체 인구의 36%가 도시에 모여 살았으며, 이로 인하여 남아시아 전체에서 가장 도시화된 국가로 떠오르기도 했다.

전체 GDP의 2.8% 정도가 복지에 소요되었으며, 2010년 기준으로 예상 수명은 여성이 67세이고 남성이 65세 정도이다.

파키스탄 남부 거주민의 대부분은 인더스강 주변에 거주한다. 그 중에서도 카라치가 1,491만명의 인구 규모를 지닌 최대의 도시이다. 중북부의 도시들은 파이살라바드(Faisalabad, 3위 320만명), 라호르(Lahore, 2위 1,112만명), 라왈핀디(Rawalpindi, 4위 209만명), 사르고다(Sargodha, 11위, 66만명), 이슬라마바드 (Islamabad, 9위, 100만명), 물탄(Multan, 5위 187만명), 구지란왈라(Gujranwala, 6위 203만명), 시알코트(Sialkot, 12위 66만명), 페샤와르(Peshawar, 7위 197만명)로 이어지는 반원을 이루는 분포를 보인다.

민족[편집]

파키스탄은 인더스 문명 이래로 중앙아시아, 서아시아에서 많은 이주민들이 진출했던 역사를 지닌 나라이다. 문화와 역사 그리고 종족면에서의 다양성이 강한 나라이다. 펀자브인이 44.7%로 최대의 종족집단을 이루며, 파슈툰족 15.4%, 신드족 14.1%, 사리아키족(Saraiki) 8.4%, 무하지르족(Muhajir)이 7.6%를 차지한다.

이 중 사리아키족은 펀자브인과 신드족의 중간에 놓인 집단의 특징을 보인다. 그래서 1951년과 1961년 총조사에서는 펀자브인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무하지르는 인도의 분할 독립시기에 인도에서 파키스탄으로 이주한 피난민들을 일컫는다. 가장 많은 수는 동펀자브 지역에서 서펀자브 지역으로 이주한 이주민들이지만, 이들은 언어와 문화, 종족 면에서 서펀자브인들과 구분되지 않기에 별도로 구분해서 무하지르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래서 무하지르로 구분되는 집단은 주로 신드주의 대도시에 거주하는 실향민 집단이며, 이들은 상대적으로 교육수준이 높고 별도의 정치정당으로 조직되기도 하면서 파키스탄 사회변동의 한 주체로 역할을 했다.

파키스탄 내 대부분 종족은 인도-이란어 집단에 속한다. 파슈툰어과 발로치(Balochi)만이 이란어 계통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이다. 15~19세기에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온 흑인들은 "쉬디(Sheedi)"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무슬림이고 발로치, 신디어, 우르두어를 언어로 사용한다. 1971년 방글라데시의 독립전쟁 이후로 비하르주 주민들과 벵갈인들이 수천명 카라치로 이주해 왔고 최근에는 미얀마의 로힝야족 난민들이 이주해 들어오기도 했다. 그리고 약 140만명 정도의 아프가니스탄인들이 임시거주민으로 파키스탄에 머물고 있는데, 이들은 거의 아프가니스탄 남동부 출신의 파슈툰족어서 이미 파키스탄 내의 파슈툰족과 연대가 강하고 30년간 파키스탄에서 교육받고 자란 경우들도 많다.

언어[편집]

공용어는 1947년부터 우르두어이며 영어도 공용어이다. 아울러 우르두어는 국어로도 지정되어 있다.

우르두어는 힌디어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으며 상호 의사 소통도 가능하다. 그러나 파키스탄인 대부분은 우르두어를 할 줄은 알아도, 우르두어가 모어는 아니다. 오히려 파키스탄에서 모어로 가장 많이 쓰는 언어는 펀자브어로 2017년 기준 파키스탄 인구의 39% 가까이가 펀자브어를 모어로 쓰며 우르두어가 모어인 파키스탄인 수는 겨우 1,600만명 정도로, 전체의 7% 정도다.관련 통계 이는 파키스탄 내에서도 화자 수가 5위에 그칠 만큼 적은 것이고, 오히려 인도에서 우르두어를 모어로 쓰는 사람이 5,100만 명으로 훨씬 많다. 그럼에도 파키스탄이 굳이 우르두어를 공용어로 지정한 것은 무굴 제국에서 이어지는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그리고 한 집단의 모어를 공용어로 지정해 생기는 차별을 막기 위해서이다. 아무튼 국어이자 공용어인 만큼 기초교육에서 우르두어를 가르치기 때문에 75%의 파키스탄인들이 우르두어를 이해할 줄 알고, 서로 모어가 다른 파키스탄인들은 의사소통할 때 우르두어나 영어를 쓴다.

영국의 지배와 영향으로 영어는 파키스탄에서 우르두어와 함께 공용어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영어의 경우에는 인도와 마찬가지로 상류층에서는 자주 쓰이는 경향이 있고 억양도 인도와 유사하다. 영어도 우르두어와 함께 정규과정에서 많이 가르치고 있고 인도에서 영어와 힌디어를 같이 쓰듯 영어와 우르두어를 같이 쓰는 경우도 많다.

신디어, 카슈미르어, 펀자브어, 발티어, 발루치어, 브라후이어, 하자라어 등의 다른 언어들도 쓰이고 있다. 아프간과 접한 지역에서는 파슈토어가 쓰이고 있다.

파키스탄은 중국과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서 중국어가 중시되고 있고 많이 가르치고 있다. 종교적인 면에서는 아랍어를 가르치는 경우가 흔하며 거기에다 역사적으로는 이란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서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는 편이다.

종교[편집]

1986년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살 빈 압둘 아지즈 국왕 을 대신해 터키 건축가 베다트 달로카이가 지은 파이잘 모스크

파키스탄의 국교는 이슬람교다. 그렇지만 헌법에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인구의 96.47%가 무슬림이고 힌두교도가 2.14%, 기독교인 1.27%가 있으며 소수종교로 시크교, 불교, 자이나교, 조로아스터교가 있다. 이슬람 신도 중에서는 수니파가 다수인데 그들 중 75~95%가 수피즘을 따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슬람교

시아파는 5~25%로 추정된다. 아흐마디(Ahmadi)는 0.22~2%를 차지하는 소수파인데, 1974년부터 스스로 무슬림이라고 밝히는 것이 금지된 이후로 핍박받고 있으며 공식적으로 무슬림에서 제외된다. 2012년 기준으로 12%의 파키스탄 무슬림들은 자신을 초종파적이라고 간주한다. 그리고 라리안(Lalian Tehsil)에 집중되어 있는 《코란》 주의자들도 있는데, 이들은 종교기관의 권위와 하디스(hadith)를 믿지 않는다. 파키스탄의 이슬람 전통에서는 수피즘이 긴 역사를 통해 큰 역할을 해 오고 있는데 지금도 성인들의 무덤을 중심으로 한 모임과 축제들에서 음악과 춤을 통해 종교 체험을 경험하는 관습이 이어지고 있다. 지금도 중요한 수피 성인으로, 라호르의 알리 후즈위리(Ali Hujwiri 약 1009~1072/77)와 세흐완(Sehwan Sharif)의 샤흐바즈 칼란더(Shahbaz Qalander, 1177~1274)를 꼽을 수 있다. 수피즘의 대중적인 형태는 성인과의 합치를 추구하는 종교 행사들을 들 수 있고, 다른 방식은 도시지역의 고등교육을 받은 상류층 사이의 관행인데, 중세 유명 수피 사상가들의 저술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지적인 전통이다. 지금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이러한 수피즘 전통을 비이슬람적이라고 비판하고 적대시하며 종종 수피 종교행사장에 테러를 가하는 일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기타 종교

힌두교는 신드지방에 가장 강하게 남아 있고, 힌두교도들은 현재 신드의 우베르꼿(Umerkot), 타르빠르까르(Tharparkar), 미르뿌르카스(Mirpurkhas), 쌍가르(Sanghar)의 네 곳에 집중해서 거주하는데 이곳에 사는 이들이 전체 파키스탄 힌두교도들의 절반을 넘는다. 다수의 힌두교도들이 이등시민 취급을 받거나 박해 당한다고 호소하고 있으며 많은 수가 해외로 이주하기도 했다. 파키스탄 독립 당시에는 인도 내의 무슬림을 보호하기 위해 파키스탄의 힌두교도들도 박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hostage theory)도 있었지만, 머지않아 그 힘을 잃었다. 그리고 인도에서 힌두와 무슬림 간의 무력충돌 사태가 발생할 때에는 파키스탄 내의 힌두교도들이 공격받는 일이 종종 있었다. 기독교도들의 밀도가 가장 높은 곳은 펀자브의 라호르와 이슬라마바드인데 각각 5%와 4%의 기독교도 비중이 있다. 1850년 영국이 카라치를 주요 항구로 개발하면서 인도의 라자스탄주, 구자라트주, 고아주 등지에서 상당한 사람들이 이주해 왔는데 카라치의 고아 카톨릭이 카라치 기독교인의 주류를 구성하고 있다. 총조사에서 자신의 종교를 밝히지 않는 비중도 0.5%에 이르며, 식자층에서는 과도한 종교편향에 반대하는 의견을 가지는 사람들도 드물지 않다. 무신론자 비중은 아주 작은데 2005년에는 1%정도로, 그리고 2012년에는 2.0%로 파악되어 비중은 확대되는 것으로 보인다.

종교 현안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을 밝히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슬람교가 국교이고 파키스탄이 분할독립된 근거가 되었지만, 이슬람이 구체적인 국가 운영의 방향성을 정한다거나 그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피상적 오해다. 파키스탄 성립 이전, 일반대중을 정치적으로 동원하기 위해 대의명분으로 사용된 종교가 독립 이후 신정국가를 지향하는 것으로 귀결되지 않은 것이 현실이며, 정치 엘리트들은 이와는 먼 세속주의적 지향을 천명했다. 무슬림의 정체성이 파키스탄의 국가적 정체성을 구체적으로 확보하기는 어렵고, 지향성을 제공할 수는 있지만 입헌민주공화국 체제 안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할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입장들이 존재한다. 따라서 파키스탄의 이슬람 정체성은 아직도 역동적인 논쟁의 대상이고 대다수 파키스탄인들은 이슬람 자체 내부에 존재하는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지지하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교육[편집]

페샤와르 대학교

파키스탄 헌법은 초등과 중등교육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독립 당시 라호르의 펀자브대학교가 국내 유일한 대학이었는데, 그후 각 주마다 공립대학을 설립하였고, 현재는 공립대학과 사립대학의 병행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현재 매년 445,000명의 대학 졸업자들과 1만여 명의 컴퓨터공학 졸업자들이 배출되고 있다. 전반적인 교육의 질이 저하되어 있다는 우려가 강하게 제기되어 있는 것도 현실이다. 이 외에 마드라사(madrassah)라고 하는 숙식을 무료로 제공하는 신학을 가르치는 이슬람교육기관들이 존재하는데, 학생들은 대부분 빈곤층 출신인 경우가 많다. 이 학생들을 부르는 파슈토어 단어가 "탈레반"이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의 배후지는 파키스탄의 파슈툰 지역이고, 이슬람 극단주의와 세속적 근대국가 사이의 딜레마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현대 파키스탄의 정치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초등(primary)과정이 1~5학년, 중등과정 6~8학년, 수험과정(matriculation) 9~10학년을 마치면 중등졸업장(secondary certificate)을 받을 자격조건을 갖추게 되고 중간과정(intermediate) 11~12학년을 마치면 고급중등졸업장(higher secondary certificate)을 얻을 자격을 받는다. 영국 교육체계의 규정에 따른 시험을 치르는 학생들도 많은데, 파키스탄에는 약 439개의 국제학교가 있다. 2007년의 정책으로 영어 사용 교육이 모든 학교에서 의무화되었다.

2012년에는 말랄라 유사프자이(Malala Yousafzai, 1997~)가 여성교육운동을 벌이다 탈레반의 총격을 받았는데, 회복 이후에도 여성교육운동을 지속하면서 2014년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하였고, 역대 최연소 노벨상 수상자가 되었다. 2013년부터는 신드의 모든 교육기관이 중국어 과정을 제공해야 하는 의무가 생겼는데, 중국의 부상과 파키스탄의 밀접한 협력관계가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문해율은 2018년 기준 62.3%이고 남성 문해율은 72.5%인데 여성 문해율은 51.8%로 낮다. 문해율도 지역과 성별에 따라 편차가 큰데, 부족 거주지역의 여성 문해율은 9.5%이고 파키스탄령 잠무-카슈미르의 경우에는 74%로 편차가 크다. 현재 파키스탄 정부는 국내총생산(GDP)의 2.3%를 교육에 지출하고 있는데, 이는 남아시아 지역에서도 가장 낮은 수준이다.

문화[편집]

트럭 아트는 파키스탄 문화의 독특한 특징이다.
샬와르 카미즈 여자 전통의상

파키스탄 사회는 굉장히 계층적인 사회로, 지역색이 대단히 강한 편이며 이슬람 율법이 생활 곳곳에 스며들어 있어 이슬람 색채에 강하게 물들어 있는 종교적인 사회이기도 하다. 기본적인 가족 형태는 대가족 형태이나, 최근 들어서는 경제 성장과 중산층의 대두로 인하여 핵가족의 형태가 점차 조금씩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파키스탄의 전통의복은 남성과 여성 모두 '샬마르 카미즈'라고 부르며, 남성들 사이에서는 청바지, 셔츠 등 서구식 의복들도 점차 유행하고 있다. 최근들어 파키스탄의 중산층 인구는 3,500만 명 수준까지 증가하였으며, 상류층과 중상류층도 크게 증가하여 거의 1,700만 명에 이르러 이 흐름에 맞추어 사회의 주도권도 시골의 지주들로부터 도시의 신흥 엘리트층들에게 이동하고 있는 중이다. 파키스탄의 축일에는 라마단, 크리스마스, 부활절, 디왈리, 홀리, 이드 알피트르, 이드 울 아즈하 등이 있다.

의복[편집]

파키스탄의 전통복은 '샬와르 카미즈'라고 부르며, 펀자브, 신드, 발루치스탄, 카이버파크툰크와 등 4개의 주에서 남성과 여성의 구분없이 모두가 즐겨 입는다. 다만 지방별로 조금씩 복식에 차이는 있는 편이다. 샬와르 카미즈는 실크, 솜 등으로 만들며, 색깔과 디자인, 그리고 의복의 재질 등은 개인의 취향에 따라서 굉장히 종류가 다양하다. 최근들어서는 조금씩 현대화와 서구화가 진행되면서 특히 남성들을 중심으로 회사나 사회적 모임, 혹은 학교에서 서구식 양복을 입고 다니는 것이 흔해지고 있다.

파키스탄에서는 패션 산업도 점차 활기를 띠고 있는데, 현재는 주로 전통복과 서구 양복을 혼용하여 입고 있는 편이며, 아직까지는 특히 시골 지방을 중심으로 서구 복식을 입기보다는 전통복을 오히려 더 즐겨 입고 있는 편이다. 라호르에는 '파키스탄 패션 디자인 협회'도 개설되어 있으며, 이 협회에서 PFDC 패션위크를 개최하며 카라치에 본사가 위치한 패션 파키스탄 협회는 패션 파키스탄 위크를 개최하기도 한다. 파키스탄의 첫 패션위크는 2009년 11월에 처음으로 열렸다.

파키스탄의 국민시인 무함마드 이크발(Muhammad Iqbal)

문학[편집]

파키스탄을 대표하는 문인으로는 우르두어와 페르시아어로 책을 집필했던 무함마드 이크발(Muhammad Iqbal, 1877~1938)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이슬람 문명과 정신을 되살리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한 지성인이었다. 그 외 다수의 수피 시인 작품들이 파키스탄에서는 대중적으로 사랑받고 있다. 철학 분야에서는 영국과 미국의 영향이 강하게 미치고 있는데, 1971년 전쟁 이후로는 상당수 사상가들이 마르크스주의을 수용하는 흐름을 보이기도 했다.

미디어[편집]

21세기 이전까지, 파키스탄의 중심 미디어는 국영기업인 파키스탄 텔레비전(PTV)와 파키스탄 라디오(PBC), 그리고 몇몇 개인 소유의 영리 신문 등이 독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서는 인터넷의 보급이 활발해지면서 점차 24시간 운영하는 뉴스 미디어들의 활동이 활발해졌으며, 거대한 규모의 텔레비전 채널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다만 이에 불구하고 아직까지 언론의 자유가 높은 편은 아니라서, 국경없는기자회는 2016년에 파키스탄의 언론자유지수를 전체에서 147위 정도로 낮게 잡기도 하였다. 다만 이와 동시에 ‘정치인들의 스캔들이나 가십들을 보도하는 데에는 아시아에서 가장 자유로운 편’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BBC는 파키스탄의 미디어들을 보고 '남아시아에서 가장 말이 많다'라고 평했으며, 이같은 활발한 스캔들 폭로 덕에 정치인들의 부패를 폭로하는 데에 한 몫을 하기도 했다.

파키스탄 영화계는 세계적 영화 중심지인 할리우드의 이름을 따와서 별칭으로 '롤리우드', '카리우드' 등으로도 불리며, 주로 카라치, 라호르, 페샤와르 지역을 중심으로 영화가 활발하게 제작되고 있다. 인도의 볼리우드 계열의 영화들은 1965년부터 2008년까지 파키스탄 내 상영이 중단되었으나, 점차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2008년에 마침내 제재가 풀렸다. 또한 우르두어로 제작되는 드라마가 여러 편 제작되고 있으며, 1990년대 이래 여러 차례 장편 드라마를 내놓기도 하면서 수많은 유명 배우들을 배출한 적도 있다. 파키스탄에서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팝 음악과 디스코가 전성기를 누렸으며, 1980년대와 90년대에는 영국의 영향을 받아 락 음악이 세를 불렸고, 2000년대 들어서는 잠시 동안 헤비메탈 음악이 대중의 인기를 끈 적이 있다.

건축[편집]

Minar-e-Pakistan은 파키스탄의 독립 운동을 기념하는 국가 기념물

건축 면에서는 인더스 문명 유적의 건축부터 간다라미술, 그리스와 불교문화가 결합된 유적들이 남아 있다. 펀자브주 물탄에 소재한 샤 룩크네알람(Shah Rukn-e-Alam, 1251~1335)이라고 불리는 수피 성자의 무덤은 대표적인 인도-이슬람 스타일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무굴제국 시대에 축조된 대표적인 건축으로는 라호르에 소재한 라호르성과 바드샤히 모스크를 들 수 있다. 영국통치기의 유적들도 다수 남아 있으며, 독립 이후를 대표하는 건축물로는 샤파이잘 모스크, 미나르 에 파키스탄(Minar-e-Pakistan), 마자르(Mazar-e-Quaid) 등을 들 수 있다. 미나르 에 파키스탄은 1940년의 파키스탄 결의안을 기념하여 라호르에 1960~1968에 건설되었다.

영화[편집]

파키스탄에서도 인도 발리우드(Bollywood) 영화의 영향력은 상당하지만 인도와의 전쟁으로 1965~2008년 금지된 적이 있다. 파키스탄 내의 영화산업은 라호르를 중심으로 한 펀자브 영화가 주류이고 카라치에 자리잡은 몇몇 영화사들의 영화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우르두어 드라마들이 대중적인 인기가 있고, 이것들은 여러 민영 채널들에서 반복해서 방영된다.

스포츠[편집]

파키스탄의 인기 스포츠는 대부분 영국통치기의 교육과 연관된다. 필드하키가 국가를 대표하는 종목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인데, 국가별 경기에서 파키스탄 최고의 스포츠라고 할 수 있다. 이미 하키월드컵에서 네 차례 세계챔피언이 되었고, 올림픽에서도 세 개의 금메달을 딴 종목이다. 반면 크리켓은 파키스탄에서 대중적 인기가 최고인 종목이다. ICC 크리켓 월드컵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데, 2017년 숙적인 인도를 결승에서 이기고 우승을 차지한 일을 많은 파키스탄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다. 파키스탄 총리 임란 칸(Imran Khan, 1952.10.5~)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것도 그가 파키스탄 크리켓 국가대표 주장을 1982년부터 10년 동안 맡아 왔다는 사실과 그가 1992년 크리켓 월드컵 우승을 이끈 다재다능한 크리켓 선수였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파키스탄 수퍼리그(Pakistan Super League)는 전세계 최대 크리켓 리그들 중 하나이고 그 브랜드 가치가 2억 달러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일반적인 대중성 면에서 크리켓을 잇는 종목은 축구이다. 파키스탄프리미어리그(Pakistan Premier League)가 있고, 파키스탄은 국제축구연맹(FIFA) 공인구 생산량이 가장 많은 국가로 알려져 있다.

파키스탄 요리

식생활[편집]

파키스탄의 음식은 중앙아시아와 인도 그리고 중동지방의 전통과 영국 전통이 혼융된 형태에 무굴제국 귀족들의 음식문화가 섞여 있다고 할 수 있다. 강한 향신료를 많이 사용한다. 일상적으로는 카레요리와 밀로 만든 납작한 빵인 로티와 쌀을 자주 먹는다. 펀자브 지방에서는 라씨를 즐겨 마시고, 홍차를 우유에 우려내서 설탕을 넣은 차를 모든 사람들이 즐겨 마신다. 옥수수 가루와 우유, 설탕, 견과류를 뭉쳐 만든 쏘한 할와(Sohan halwa)는 원래 펀자브 남부 지역의 달콤한 디저트인데, 현재는 전국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디저트로 즐겨 먹는다.

허가된 할랄음식 무엇이고 금지된 하람(Haram) 음식이 무엇인지에 대한 규정이 이슬람 율법에 따라 정해지고, 하람 음식은 금기시된다. 알코올을 포함한 중독성이 있는 음식 그리고 돼지고기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공식적으로 알코올이 금지되다 보니 하층민들이 밀주를 만들어 섭취하다 집단 사망에 이르는 사고들이 종종 일어난다.

파키스탄 지도[편집]

파키스탄 민족 지도[편집]

파키스탄 주변 지도[편집]

인도양 국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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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남아시아 같이 보기[편집]

남아시아 국가
남아시아 도시
남아시아 지리
남아시아 문화
남아시아 주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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