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그룹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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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인 1896년 8월, 창업주 매헌 박승직이 한성부(현 서울) 종로에 세운 '박승직 상점'이 모태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이다. 다만 현 모기업 ㈜두산은 존속법인이 다를뿐더러 업종 변경과 단절 기간이 있다는 이유로 정통성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동화약품을 최장수 기업으로 꼽기도 한다. 동화약품은 설립 당시부터 현재까지 줄곧 한 상호와 한 업종과 한 제품으로 한 자리를 지켜 왔다. 설립 당시에는 포목점으로 시작했다. 당시 창업주였던 매헌 박승직 선생은 넓은 안목으로 조선 내에서 생산되는 포목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 생산되던 고가의 수입산 포목까지 취급하여 박승직 상점은 늘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전해졌다. 박승직은 박승직 상점의 주요 단골들에게 사은품으로 화장품을 제공했는데 이게 반응이 좋아지자 1916년 화장품 공장을 만들고 '박가분'이란 화장품으로 유행시켰다. 이 성공으로 종로의 거상이 된 박승직 사장은 일제로부터 우리 상권을 지키기 위해 광장시장의 대표로 취임했으며 1925년 박승직 상점을 주식회사로 개편했다. 1933년 박승직 사장은 쇼와기린맥주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해 일부 주식을 소유했다. 다만 사업 과정에서 1909년 이토 히로부미 국민대추도회 발기인을 지낸 것을 비롯해 1940년 박승직 사장이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고 '미키상사'로 바꾼 후, 국방헌금을 내는 등 일제의 시정에 협력한 어두운 면이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박승직 상점은 문을 닫았으나, 박승직의 아들 연강 박두병이 1946년 두산 상회를 다시 세웠다. 귀속재산 쇼와기린맥주 관리인으로 선임되어 주류 생산에 뛰어들었고, 1952년에 후신인 동양 맥주를 정식으로 불하받아 그 약자인 OB라는 이름의 브랜드를 출범시켰다. 그래서 1978년 이전까지 그룹명도 두산그룹이 아닌 'OB 그룹'이었다. 1969년 박두병 동양 맥주 사장이 회장으로 일선에서 물러난 후 삼성에서 돌아온 정수창이 사장이 되면서 전문경영인 운영체제가 확립되었고, 1973년 박두병 사후 1975년 동양 맥주 기획실을 '종합기획실'로 개편한 후 1977년부터 정수창 사장이 그룹 회장이 되어 국내 최초로 전문경영인 출신 총수 시대를 열었다. 1981년 박용곤이 회장이 되어 3세 경영체제를 확립하고 1983년 을지로 신사옥으로 이전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기술소재사업, 정보유통사업, 생활문화사업 등, 주로 경공업 위주의 포트폴리오로 짜여 있었다. 이 당시 계열사가 병뚜껑을 만드는 삼화왕관, 코카콜라를 유통하던 두산음료, OB 맥주, 두산백화, 두산경월 같은 소비재 기업이었고, 두산 상사는 폴로 랄프 로렌 및 월풀의 수입사로도 유명했다. 한때는 유가공사업(두산 유업)이나 즉석 김치 사업(두산종합식품)까지 각각 손댄 적도 있었다. 1982년에 프로야구단 OB 베어스를 창단하였고, 1985년 동아출판사 및 동아인쇄공업을 인수해 출판/인쇄업에도 손을 뻗었다. 91년 이전까지 두산의 주력 사업분야는 현재의 중공업 분야가 아닌 소비재 중심, 특히 주류산업이었다. 그룹의 모태나 다름없었던 OB 맥주의 경우 창립 당시부터 꾸준히 업계 1위를 고수했으며 1982년에는 상표 이름을 딴 야구단까지 창단하면서 인기를 독차지했다. 그러나 1991년 경상북도 구미시에서 두산전자(현 두산 전자BG)가 낙동강 페놀 유출사건을 발생 시켜 낙동강 라인인 대구 및 경북, 부산 및 경남 지역으로부터 불매 운동 대상이 되어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당시 두산그룹은 OB 맥주, [[코카콜라]], [[버거킹]], [[KFC]](이하 두산음료), 네슬레, 코닥, 3M 등 소비재 사업을 주로 하던 기업이었기에 타격이 만만치 않았으며 무엇보다 100여 년을 이어온 OB 맥주가 직격탄을 맞게 된다. 당시 회장이던 박용곤이 물러나고 기업 이미지 쇄신을 위해 두산 종합기술원을 세우고 1993년 새 경영이념을 제정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지만, 1995년 적자 규모 9천억 원, 부채비율 625%로 창사 이래 최대 위기가 찾아왔다. 1996년 동생 박용오가 회장으로 취임했고 두산 가 3세들은 그룹의 미래를 건 가족회의를 열게 된다. 그룹의 뿌리나 다름없는 소비재 산업에 대한 운명을 결정하는 회의였다. 당시 큰형이던 박용곤, 둘째 박용오는 소비재 산업을 버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집안의 뿌리나 다름없는 OB를 버리는 것은 가문의 정체성을 집어던지는 것이라며 완강히 반대했고 셋째 박용성, 막내 박용만 등은 다 죽게 생겼는데 가업이 무슨 소용이냐며 되받아쳤다. 이러한 사건들로 형제간의 갈등이 폭발하며 그룹 전체로 번져나갔다. 3남 박용성, 5남 박용만이 차남 박용오를 회장 자리에서 퇴출시켰고 박용오는 박용성과 박용만을 비자금 조성과 탈세로 고발하는 등 난타전을 벌였다. 형제들 간의 싸움은 결국 이 권고를 기점으로 마무리되었고 큰형인 박용곤이 맥주를 비롯한 소비재 산업에서의 철수를 결정하면서 두산은 OB맥주를 비롯해 코카콜라, 버거킹, 3M 등의 계열사를 매각 혹은 사업 철수를 통해 구조조정을 하여 소비재 산업에서 떠났고, 1998년에 기존 OB맥주 법인이 모기업이던 두산 상사, 두산정보통신, 두산동아, 두산경월 등을 합병해 '[[㈜두산]]'으로 탈바꿈한 후, 을지로 사옥을 [[하나은행]]에 팔고 동대문 두산타워로 본사를 이전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룹의 미래는 불투명했고 형제들 간의 갈등도 아물지 않아서 둘째 박용오가 형제들과 의절하는 등 진통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인수합병과 비주력 사업 부문 매각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듯이 중공업, 플랜트 기업으로 변했다. 두산은 2008년에 롯데 등을 제치고 [[중앙대학교]] 재단을 인수하였다. 두산은 중앙대 인수 후 박용성 회장이 직접 이사장을 맡아서 구조조정에 나섰다. '학문 단위 재조정'의 명분으로 기업식 구조조정을 단행해서 사실상 학과 계열을 대폭 폐지, 축소하고 경영/경제 계열을 대규모로 확대하는 개편을 단행했다. 이러한 개편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게 된 단위의 극심한 반발이 있었으며 총학 및 교수들과도 갈등을 빚었다. 다만 그동안 지나치게 세분화돼서 난립했던 일부 학과 단위를 재조정한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폐과된 학생들의 수업 축소 문제와 학문적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채 인기 학과 위주로의 통폐합이라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재단 인수 후에 신교사 건축과 도서관 리모델링 등 학교 인프라에 대한 투자는 확실히 대폭 늘어났다. 그러나 서울캠퍼스에 한해서만 투자가 이루어져 안성캠퍼스는 방치에 가까운 수준이라는 비판이 있다. 여담이지만, 두산그룹이 재단에 들어오면서 중앙대학교는 대학교 1학년 학생들에게 기초회계를 교양과목으로 이수하게 했는데, 처음에는 대학을 직업훈련소로 만드냐는 비판이 많았지만, 회계는 모든 기업의 기본이기 때문에 지금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2011년 포츈지 선정(매출기준) 세계 500대 기업에 489위로 이름을 올렸다. 두산그룹의 위기는 소비재 중심의 기업에서 중공업 중심 기업으로 체질 개선하면서 한때 성공적인 혁신이라 추켜세운 성과를 거두었지만, 이면에는 M&A 와 경영진의 경영실패에서 본격적인 위기가 도래하기 시작한다. 두산그룹의 위기설은 위에 상술한 [[밥캣]] 인수부터 시작한다. 2008년 밥캣 인수를 위해 과다한 차입금을 지불하면서 운없이 서브프라임 사태로 건설 경기가 지장이 가버렸다. 그로 인해 기업가치가 폭락하면서 부채 문제가 도래했고, 이를 영구채로 전환시켜 한숨 돌린다. 2012년 11월 초 계열사 두산인프라코어가 발행한 영구채(신종자본증권)가 금융위원회에서 '부채로 판단해야 한다'라는 판단이 나와서 논란이 되는 중이며 금융감독원, 한국산업은행 측에서는 [[두산인프라코어]]의 영구채를 자본으로 인정했고 IFRS 자본분류 기준으로도 자본으로 판단했으나 금융위원회는 인정하지 않고 있는 중이다. 11월 8일 한국회계기준원 연석회의에서 부채, 자본을 결단날 듯했으나 이날 회의에서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고, 결국 12월 13일 자본으로 결정 나며 두산은 한시름 놓게 되었다. 여기까지 보면 밥캣 인수는 당시는 힘들었지만 지금은 성공적인 M&A로 평가받는다. 밥캣 때문에 휘청거리는 2012~2013년에 소위 3D1S라는 증권가에 돌았던 위기에 처한 기업 명단 약자가 있었다. 저 기업들은 동부, 동양, 대성 그리고 STX로 모두 알다시피 현재 동양과 STX는 완전히 멸망했고, 동부는 그룹해체를 모면하고 금융계열만을 건진 중견기업 수준, 대성은 사세가 약화되었다. 밥캣이 이렇게 골칫덩어리였으나 위기를 지난 이후 매출액이 2019년 기준 4조 5천억에 영업이익이 연간 5천억에 가까운 명실공히 두산 최고의 캐시카우다. 2010년대 후반에 두산그룹은 그룹의 핵심인 [[두산중공업]]이 영업이익을 내지만 천문학적인 부채를 갚느라 순적자를 내면 이를 두산인프라코어와 두산밥캣이 메우는 손익주 였다. 그리고 두산밥캣은 2020년대 두산중공업의 사업이 안정화 될 때까지 그룹의 유일한 캐시카우로서 활약했다. 다행히 이 시점에 전세계적으로 소형 건설장비, 농기계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 밥캣의 실적 전망도 밝아 졌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밥캣 인수와 동시기인 [[두산건설]]의 PF 부실이 두산그룹을 위기 속으로 몰아넣었다. 2013년 11월 26일 두산건설이 오전에는 자본 감소를, 오후에는 유상증자를 단행했다. 사실 두산건설은 몇 년 전부터 적자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특히나 일산에 짓고 있던 위브 더 제니스 아파트 단지가 미분양 물량이 쏟아지면서 두산건설은 큰 타격을 입었다. 그래도 일산 위브 더 제니스는 2016년 기준 미분양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2018년에도 대형평수는 여전히 미분양 상태로 남아있었다. 용인시에 지어놓은 용인 행정타운 두산 위브 아파트는 2012년에 준공 이후 2016년까지 미분양률이 80%, 1,293가구 단지에 1,034가구가 여전히 미분양 상태이다. 중공업과 두산인프라코어에서 돈을 투자했지만, 문제는 실패했다는 것이며 현재진행형이며 2018년에도 용인타운 분양가격을 6천만 원 내려주면서 미분양을 해소하려 애썼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특이한 점은 일산 제니스 미분양은 사건은 유명하고 잘 알려진 것이지만 그것만으로 두산건설만 아니라 두산그룹을 재정위기가 될 정도는 아니였다. 하지만 2006년 PF에 보증 1,550억 원을 건 울산 대현 주택사업은 10년 만인 2015년 분양했지만 1,437억 원의 적자를 보았다. 또한 용인 삼가, 천안 청당, 화성 반월 등의 PF 보증도 2019년 2월 기준 대여금을 포함해 7,705억 원 규모이며 아직도 미분양 상황이다. 여기에 맥쿼리는 흑자를 안정적으로 버는 지하철 사업을 하고 있으며 두산건설은 신분당선을 가지고 있음에도 누적 적자가 4천억에 육박해서 매각까지 고려하지만 신통치 않았다. 온갖 미분양과 사업적자가 발생하니 당연히 적자는 천문학적으로 증대되어 2011년부터 두산건설은 적자를 3,000억, 2012년은 무려 적자를 6,500억이나 기록하며 현재까지 단 한 번도 흑자를 낸 적이 없었다. 2018년에도 적자 4,200억을 내며 2019년에 상장폐지를 밟는다. 계열사가 1년만 수천억대의 적자가 나도 웬만한 재벌은 분위기 매우 안 좋아지며 이 회사의 전문경영인들은 다수의 명예퇴직을 당한다. 무려 10년 동안 두산건설이 연간 수천억에 총 수조가 넘는 적자를 내는 기업을 두산이 살리려고 하기 때문에 그룹이 제대로 활성화될 수 없었다. 당연히 경영적 판단으로는 하루라도 빨리 두산건설을 정리 매각해야 했다. 각종 언론과 시장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두산건설은 어떻게든 빨리 정리했어야 하는데 계열사의 재무 악화와 알짜 자산 매각에 부실 전이까지 감수하며 무리하게 살리려다 이런 결과가 난 것으로 보고 있다. 두산건설을 쉽게 처리하지 못했던 건 건설사 특성상 비자금 조성의 필수요소라는 음모론적인 시각 외에도 형제가 돌아가며 경영권을 맡는 두산그룹의 사촌경영 구조가 원인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물론 두산도 자금 마련을 위해 사업 매각을 통해 자금확보를 하였다. 일례로 두산중공업은 배열회수 보일러(HRSG) 사업부를 두산건설에 넘겨주며 두산건설의 위기를 해소하려 했다. 그러나 HRSG를 두산건설은 결국 2017년에 3천억에 GE에 매각해버리고, 보유한 두산DST 지분 51%를 3,500억에, 논현동 사옥조차 빚갚는다고 매각해버렸다. 또한 두산그룹이 중앙대에 온갖 공사를 해서 죄다 두산건설에 몰아주었다. 이럼에도 두산건설의 부실은 상술했듯이 꾸준해서 2018년에도 적자 4,200억을 기록했고, 급기야 두산중공업과 같이 유상증자로 9,500억을 그해에 조달했지만, 결과는 알다시피 두산건설의 상장폐지 - 두산중공업 자회사 편입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2013년부터 두산중공업이 두산건설에 쏟아부은 지원금은 1조 9252억이다. 유동성 위기로 매각한 온갖 자산들을 가지고 있었다면 두산그룹은 이렇게 궁지에 몰리지 않았을 것이다. 또 두산인프라코어의 공작기계 사업부도 1조 1천억에 매각한 후 두산 밥캣 상장으로 3천억을 끌어모았는데 여기서 실패한 결과물이 되었으며 두산공작기계는 두산이 MBK에 판지 3년 만에 2019년 M&A 매물로서 무려 2조 8천억부터 값이 시작하며 두산의 마음을 다시 한번 울렸으며 밥캣 상장도 밥캣의 규모에 비해 실적은 좋지 않았다. 그리고 맥킨지 컨설팅의 [[LG그룹]]과 더불어 컨설팅 실패의 양대 산맥으로 꼽히고 있다. 두산공작기계는 두산이 MBK에 판지 3년 만에 2019년 M&A 매물로서 무려 2조 8천억부터 값이 시작하며 두산의 마음을 다시 한번 울렸으며 밥캣 상장도 밥캣의 규모에 비해 실적은 좋지 않았다. 그리고 맥킨지 컨설팅의 LG그룹과 더불어 컨설팅 실패의 양대 산맥으로 꼽히고 있다. 2017년부터 3년동안 두산중공업의 주요 사업인 원전과 화력발전의 수주 감소로 급격히 줄어들었으며 규모는 10조원에 달하는 수주가 취소되면서 영업이익이 2012년과 비교해서 17% 수준에 불과한 상황이다. 2018년 들어서는 두산중공업, 두산밥캣, 두산인프라코어의 흑자전환으로 그룹 분위기가 한숨 나아졌다. 특히 두산인프라코어는 자회사인 밥캣과 중국시장에서의 성공으로 영업이익이 1조에 육박하는 성과를 내었다. 다만 이 회사 이미지가 방산문제 때문에 워낙 좋지않고, 주가도 관리를 안하다보니 실적이 상당히 좋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좋지 못한 취급을 받고있다. 하지만 위의 영업이익 성과는 흑자일지언정 영구채의 이자와 당기순손실이 누적되어서 당기순이익은 계속 적자였다. 또한 두산중공업이 2018년 3분기까지는 순이익을 올리다 갑자기 4분기에 순손실 5천억이라는 대형사고를 치고 급하게 유상증자를 하자 주가는 땅을 뚫고 내려갔다. 두산건설에 큰돈을 쏟았지만, 전세계적으로 친환경 에너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가속화된 탈석탄 추세에 의해 소모된 자본과 시너지가 나서 완전히 늪에 빠져버린것이다. 2010년대 초반 두산인프라코어의 위기보다 지금 두산중공업의 위기가 더 심각한 상황이다. 결국 2020년 2월 직원 2,600여명을 명예퇴직 시킨다고 발표했으며 3월 11일에 무려 회사 휴업까지 검토한다는 뉴스까지 나온 상황이다. 4월 1일에는 아예 구조조정의 칼을 빼들었다. 산업은행과 채권단에서는 우선 1조원을 지원해주기로 하여 잘 이루어지면 급한 불은 끌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채권단에서는 당연히 경영 책임을 물어 지배구조 개편을 요구하고 있으며 특히 두산중공업과 두산인프라코어,밥캣의 계열분리를 요구하고 있었다. 두산중공업의 부실 전이를 막기위한 방법이다. 두산중공업이 두산의 중간지주회사라서 채권단 요구대로 연결고리가 끊어지면 두산그룹은 금호와 별 다를 것이 없는 패망기업으로 거듭나게 된다. 전세계적으로 친환경 트렌드 때문에 석탄발전이 사양되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두산중공업은 석탄 발전에 목을 매 미래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다. 다른 에너지발전에 다방면 투자를 해야 했으나 원자력에 많은 것을 투자 하였고, 이는 두산중공업의 패착이 되었다. 내수시장 아파트 건설에만 투자한 경영전략의 실패로 그룹의 돈을 막대하게 소비하게 된 두산건설 때문에 두산그룹은 많이 약해진 상태였고, 한국과 유럽의 탈원전 추세는 두산중공업에겐 너무나 아픈 타격이었다. 두산중공업은 석탄과 [[원자력]] 말고는 주력 매출이 없는 상황이었고, 결국 실적부진으로 두산중공업의 영업손실액이 불어나자 두산건설과 함께 그룹 전체의 위기로까지 번진게 현재의 두산 위기이다. 2020년 6월 16일 두산그룹의 핵심인 두산인프라코어가 매물로 나왔으며 2020년 12월 3일 두산의 재무구조가 나아지고 있는 상태이며 두산인프라코어의 매각이 진행된다면 [[두산퓨얼셀]]이 대신할 예정이다. 두산중공업은 1.2조의 유상증자에 성공하여 현재 그 금액은 빚을 갚는데 사용한다고 한다. 2010년대부터 이어지는 두산그룹의 위기는 큰 틀에서 볼 때 과거 1990년대의 대우그룹의 위기와 매우 흡사한 구조를 갖고 있다. 대출을 통한 사세의 확장, 공기업이나 워크아웃 중인 기업을 저가에 인수 등으로 전성기를 누렸으나 세계적인 경제 위기가 닥치면서 이러한 차입경영에 치명타가 오며 위기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히 혹독한 구조조정과 신재생 먹거리 사업 덕분인지, 2021년 1분기 영업이익이 전년도 대비 무려 403% 증가했다고 하며, 계열사인 두산중공업 역시 최고 558%가 급증하면서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고 밝혔다.<ref>〈[https://namu.wiki/w/%EB%91%90%EC%82%B0%EA%B7%B8%EB%A3%B9 두산그룹]〉, 《나무위키》</ref>
 
구한말인 1896년 8월, 창업주 매헌 박승직이 한성부(현 서울) 종로에 세운 '박승직 상점'이 모태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이다. 다만 현 모기업 ㈜두산은 존속법인이 다를뿐더러 업종 변경과 단절 기간이 있다는 이유로 정통성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동화약품을 최장수 기업으로 꼽기도 한다. 동화약품은 설립 당시부터 현재까지 줄곧 한 상호와 한 업종과 한 제품으로 한 자리를 지켜 왔다. 설립 당시에는 포목점으로 시작했다. 당시 창업주였던 매헌 박승직 선생은 넓은 안목으로 조선 내에서 생산되는 포목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 생산되던 고가의 수입산 포목까지 취급하여 박승직 상점은 늘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전해졌다. 박승직은 박승직 상점의 주요 단골들에게 사은품으로 화장품을 제공했는데 이게 반응이 좋아지자 1916년 화장품 공장을 만들고 '박가분'이란 화장품으로 유행시켰다. 이 성공으로 종로의 거상이 된 박승직 사장은 일제로부터 우리 상권을 지키기 위해 광장시장의 대표로 취임했으며 1925년 박승직 상점을 주식회사로 개편했다. 1933년 박승직 사장은 쇼와기린맥주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해 일부 주식을 소유했다. 다만 사업 과정에서 1909년 이토 히로부미 국민대추도회 발기인을 지낸 것을 비롯해 1940년 박승직 사장이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고 '미키상사'로 바꾼 후, 국방헌금을 내는 등 일제의 시정에 협력한 어두운 면이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박승직 상점은 문을 닫았으나, 박승직의 아들 연강 박두병이 1946년 두산 상회를 다시 세웠다. 귀속재산 쇼와기린맥주 관리인으로 선임되어 주류 생산에 뛰어들었고, 1952년에 후신인 동양 맥주를 정식으로 불하받아 그 약자인 OB라는 이름의 브랜드를 출범시켰다. 그래서 1978년 이전까지 그룹명도 두산그룹이 아닌 'OB 그룹'이었다. 1969년 박두병 동양 맥주 사장이 회장으로 일선에서 물러난 후 삼성에서 돌아온 정수창이 사장이 되면서 전문경영인 운영체제가 확립되었고, 1973년 박두병 사후 1975년 동양 맥주 기획실을 '종합기획실'로 개편한 후 1977년부터 정수창 사장이 그룹 회장이 되어 국내 최초로 전문경영인 출신 총수 시대를 열었다. 1981년 박용곤이 회장이 되어 3세 경영체제를 확립하고 1983년 을지로 신사옥으로 이전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기술소재사업, 정보유통사업, 생활문화사업 등, 주로 경공업 위주의 포트폴리오로 짜여 있었다. 이 당시 계열사가 병뚜껑을 만드는 삼화왕관, 코카콜라를 유통하던 두산음료, OB 맥주, 두산백화, 두산경월 같은 소비재 기업이었고, 두산 상사는 폴로 랄프 로렌 및 월풀의 수입사로도 유명했다. 한때는 유가공사업(두산 유업)이나 즉석 김치 사업(두산종합식품)까지 각각 손댄 적도 있었다. 1982년에 프로야구단 OB 베어스를 창단하였고, 1985년 동아출판사 및 동아인쇄공업을 인수해 출판/인쇄업에도 손을 뻗었다. 91년 이전까지 두산의 주력 사업분야는 현재의 중공업 분야가 아닌 소비재 중심, 특히 주류산업이었다. 그룹의 모태나 다름없었던 OB 맥주의 경우 창립 당시부터 꾸준히 업계 1위를 고수했으며 1982년에는 상표 이름을 딴 야구단까지 창단하면서 인기를 독차지했다. 그러나 1991년 경상북도 구미시에서 두산전자(현 두산 전자BG)가 낙동강 페놀 유출사건을 발생 시켜 낙동강 라인인 대구 및 경북, 부산 및 경남 지역으로부터 불매 운동 대상이 되어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당시 두산그룹은 OB 맥주, [[코카콜라]], [[버거킹]], [[KFC]](이하 두산음료), 네슬레, 코닥, 3M 등 소비재 사업을 주로 하던 기업이었기에 타격이 만만치 않았으며 무엇보다 100여 년을 이어온 OB 맥주가 직격탄을 맞게 된다. 당시 회장이던 박용곤이 물러나고 기업 이미지 쇄신을 위해 두산 종합기술원을 세우고 1993년 새 경영이념을 제정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지만, 1995년 적자 규모 9천억 원, 부채비율 625%로 창사 이래 최대 위기가 찾아왔다. 1996년 동생 박용오가 회장으로 취임했고 두산 가 3세들은 그룹의 미래를 건 가족회의를 열게 된다. 그룹의 뿌리나 다름없는 소비재 산업에 대한 운명을 결정하는 회의였다. 당시 큰형이던 박용곤, 둘째 박용오는 소비재 산업을 버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집안의 뿌리나 다름없는 OB를 버리는 것은 가문의 정체성을 집어던지는 것이라며 완강히 반대했고 셋째 박용성, 막내 박용만 등은 다 죽게 생겼는데 가업이 무슨 소용이냐며 되받아쳤다. 이러한 사건들로 형제간의 갈등이 폭발하며 그룹 전체로 번져나갔다. 3남 박용성, 5남 박용만이 차남 박용오를 회장 자리에서 퇴출시켰고 박용오는 박용성과 박용만을 비자금 조성과 탈세로 고발하는 등 난타전을 벌였다. 형제들 간의 싸움은 결국 이 권고를 기점으로 마무리되었고 큰형인 박용곤이 맥주를 비롯한 소비재 산업에서의 철수를 결정하면서 두산은 OB맥주를 비롯해 코카콜라, 버거킹, 3M 등의 계열사를 매각 혹은 사업 철수를 통해 구조조정을 하여 소비재 산업에서 떠났고, 1998년에 기존 OB맥주 법인이 모기업이던 두산 상사, 두산정보통신, 두산동아, 두산경월 등을 합병해 '[[㈜두산]]'으로 탈바꿈한 후, 을지로 사옥을 [[하나은행]]에 팔고 동대문 두산타워로 본사를 이전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룹의 미래는 불투명했고 형제들 간의 갈등도 아물지 않아서 둘째 박용오가 형제들과 의절하는 등 진통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인수합병과 비주력 사업 부문 매각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듯이 중공업, 플랜트 기업으로 변했다. 두산은 2008년에 롯데 등을 제치고 [[중앙대학교]] 재단을 인수하였다. 두산은 중앙대 인수 후 박용성 회장이 직접 이사장을 맡아서 구조조정에 나섰다. '학문 단위 재조정'의 명분으로 기업식 구조조정을 단행해서 사실상 학과 계열을 대폭 폐지, 축소하고 경영/경제 계열을 대규모로 확대하는 개편을 단행했다. 이러한 개편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게 된 단위의 극심한 반발이 있었으며 총학 및 교수들과도 갈등을 빚었다. 다만 그동안 지나치게 세분화돼서 난립했던 일부 학과 단위를 재조정한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폐과된 학생들의 수업 축소 문제와 학문적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채 인기 학과 위주로의 통폐합이라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재단 인수 후에 신교사 건축과 도서관 리모델링 등 학교 인프라에 대한 투자는 확실히 대폭 늘어났다. 그러나 서울캠퍼스에 한해서만 투자가 이루어져 안성캠퍼스는 방치에 가까운 수준이라는 비판이 있다. 여담이지만, 두산그룹이 재단에 들어오면서 중앙대학교는 대학교 1학년 학생들에게 기초회계를 교양과목으로 이수하게 했는데, 처음에는 대학을 직업훈련소로 만드냐는 비판이 많았지만, 회계는 모든 기업의 기본이기 때문에 지금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2011년 포츈지 선정(매출기준) 세계 500대 기업에 489위로 이름을 올렸다. 두산그룹의 위기는 소비재 중심의 기업에서 중공업 중심 기업으로 체질 개선하면서 한때 성공적인 혁신이라 추켜세운 성과를 거두었지만, 이면에는 M&A 와 경영진의 경영실패에서 본격적인 위기가 도래하기 시작한다. 두산그룹의 위기설은 위에 상술한 [[밥캣]] 인수부터 시작한다. 2008년 밥캣 인수를 위해 과다한 차입금을 지불하면서 운없이 서브프라임 사태로 건설 경기가 지장이 가버렸다. 그로 인해 기업가치가 폭락하면서 부채 문제가 도래했고, 이를 영구채로 전환시켜 한숨 돌린다. 2012년 11월 초 계열사 두산인프라코어가 발행한 영구채(신종자본증권)가 금융위원회에서 '부채로 판단해야 한다'라는 판단이 나와서 논란이 되는 중이며 금융감독원, 한국산업은행 측에서는 [[두산인프라코어]]의 영구채를 자본으로 인정했고 IFRS 자본분류 기준으로도 자본으로 판단했으나 금융위원회는 인정하지 않고 있는 중이다. 11월 8일 한국회계기준원 연석회의에서 부채, 자본을 결단날 듯했으나 이날 회의에서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고, 결국 12월 13일 자본으로 결정 나며 두산은 한시름 놓게 되었다. 여기까지 보면 밥캣 인수는 당시는 힘들었지만 지금은 성공적인 M&A로 평가받는다. 밥캣 때문에 휘청거리는 2012~2013년에 소위 3D1S라는 증권가에 돌았던 위기에 처한 기업 명단 약자가 있었다. 저 기업들은 동부, 동양, 대성 그리고 STX로 모두 알다시피 현재 동양과 STX는 완전히 멸망했고, 동부는 그룹해체를 모면하고 금융계열만을 건진 중견기업 수준, 대성은 사세가 약화되었다. 밥캣이 이렇게 골칫덩어리였으나 위기를 지난 이후 매출액이 2019년 기준 4조 5천억에 영업이익이 연간 5천억에 가까운 명실공히 두산 최고의 캐시카우다. 2010년대 후반에 두산그룹은 그룹의 핵심인 [[두산중공업]]이 영업이익을 내지만 천문학적인 부채를 갚느라 순적자를 내면 이를 두산인프라코어와 두산밥캣이 메우는 손익주 였다. 그리고 두산밥캣은 2020년대 두산중공업의 사업이 안정화 될 때까지 그룹의 유일한 캐시카우로서 활약했다. 다행히 이 시점에 전세계적으로 소형 건설장비, 농기계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 밥캣의 실적 전망도 밝아 졌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밥캣 인수와 동시기인 [[두산건설]]의 PF 부실이 두산그룹을 위기 속으로 몰아넣었다. 2013년 11월 26일 두산건설이 오전에는 자본 감소를, 오후에는 유상증자를 단행했다. 사실 두산건설은 몇 년 전부터 적자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특히나 일산에 짓고 있던 위브 더 제니스 아파트 단지가 미분양 물량이 쏟아지면서 두산건설은 큰 타격을 입었다. 그래도 일산 위브 더 제니스는 2016년 기준 미분양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2018년에도 대형평수는 여전히 미분양 상태로 남아있었다. 용인시에 지어놓은 용인 행정타운 두산 위브 아파트는 2012년에 준공 이후 2016년까지 미분양률이 80%, 1,293가구 단지에 1,034가구가 여전히 미분양 상태이다. 중공업과 두산인프라코어에서 돈을 투자했지만, 문제는 실패했다는 것이며 현재진행형이며 2018년에도 용인타운 분양가격을 6천만 원 내려주면서 미분양을 해소하려 애썼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특이한 점은 일산 제니스 미분양은 사건은 유명하고 잘 알려진 것이지만 그것만으로 두산건설만 아니라 두산그룹을 재정위기가 될 정도는 아니였다. 하지만 2006년 PF에 보증 1,550억 원을 건 울산 대현 주택사업은 10년 만인 2015년 분양했지만 1,437억 원의 적자를 보았다. 또한 용인 삼가, 천안 청당, 화성 반월 등의 PF 보증도 2019년 2월 기준 대여금을 포함해 7,705억 원 규모이며 아직도 미분양 상황이다. 여기에 맥쿼리는 흑자를 안정적으로 버는 지하철 사업을 하고 있으며 두산건설은 신분당선을 가지고 있음에도 누적 적자가 4천억에 육박해서 매각까지 고려하지만 신통치 않았다. 온갖 미분양과 사업적자가 발생하니 당연히 적자는 천문학적으로 증대되어 2011년부터 두산건설은 적자를 3,000억, 2012년은 무려 적자를 6,500억이나 기록하며 현재까지 단 한 번도 흑자를 낸 적이 없었다. 2018년에도 적자 4,200억을 내며 2019년에 상장폐지를 밟는다. 계열사가 1년만 수천억대의 적자가 나도 웬만한 재벌은 분위기 매우 안 좋아지며 이 회사의 전문경영인들은 다수의 명예퇴직을 당한다. 무려 10년 동안 두산건설이 연간 수천억에 총 수조가 넘는 적자를 내는 기업을 두산이 살리려고 하기 때문에 그룹이 제대로 활성화될 수 없었다. 당연히 경영적 판단으로는 하루라도 빨리 두산건설을 정리 매각해야 했다. 각종 언론과 시장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두산건설은 어떻게든 빨리 정리했어야 하는데 계열사의 재무 악화와 알짜 자산 매각에 부실 전이까지 감수하며 무리하게 살리려다 이런 결과가 난 것으로 보고 있다. 두산건설을 쉽게 처리하지 못했던 건 건설사 특성상 비자금 조성의 필수요소라는 음모론적인 시각 외에도 형제가 돌아가며 경영권을 맡는 두산그룹의 사촌경영 구조가 원인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물론 두산도 자금 마련을 위해 사업 매각을 통해 자금확보를 하였다. 일례로 두산중공업은 배열회수 보일러(HRSG) 사업부를 두산건설에 넘겨주며 두산건설의 위기를 해소하려 했다. 그러나 HRSG를 두산건설은 결국 2017년에 3천억에 GE에 매각해버리고, 보유한 두산DST 지분 51%를 3,500억에, 논현동 사옥조차 빚갚는다고 매각해버렸다. 또한 두산그룹이 중앙대에 온갖 공사를 해서 죄다 두산건설에 몰아주었다. 이럼에도 두산건설의 부실은 상술했듯이 꾸준해서 2018년에도 적자 4,200억을 기록했고, 급기야 두산중공업과 같이 유상증자로 9,500억을 그해에 조달했지만, 결과는 알다시피 두산건설의 상장폐지 - 두산중공업 자회사 편입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2013년부터 두산중공업이 두산건설에 쏟아부은 지원금은 1조 9252억이다. 유동성 위기로 매각한 온갖 자산들을 가지고 있었다면 두산그룹은 이렇게 궁지에 몰리지 않았을 것이다. 또 두산인프라코어의 공작기계 사업부도 1조 1천억에 매각한 후 두산 밥캣 상장으로 3천억을 끌어모았는데 여기서 실패한 결과물이 되었으며 두산공작기계는 두산이 MBK에 판지 3년 만에 2019년 M&A 매물로서 무려 2조 8천억부터 값이 시작하며 두산의 마음을 다시 한번 울렸으며 밥캣 상장도 밥캣의 규모에 비해 실적은 좋지 않았다. 그리고 맥킨지 컨설팅의 [[LG그룹]]과 더불어 컨설팅 실패의 양대 산맥으로 꼽히고 있다. 두산공작기계는 두산이 MBK에 판지 3년 만에 2019년 M&A 매물로서 무려 2조 8천억부터 값이 시작하며 두산의 마음을 다시 한번 울렸으며 밥캣 상장도 밥캣의 규모에 비해 실적은 좋지 않았다. 그리고 맥킨지 컨설팅의 LG그룹과 더불어 컨설팅 실패의 양대 산맥으로 꼽히고 있다. 2017년부터 3년동안 두산중공업의 주요 사업인 원전과 화력발전의 수주 감소로 급격히 줄어들었으며 규모는 10조원에 달하는 수주가 취소되면서 영업이익이 2012년과 비교해서 17% 수준에 불과한 상황이다. 2018년 들어서는 두산중공업, 두산밥캣, 두산인프라코어의 흑자전환으로 그룹 분위기가 한숨 나아졌다. 특히 두산인프라코어는 자회사인 밥캣과 중국시장에서의 성공으로 영업이익이 1조에 육박하는 성과를 내었다. 다만 이 회사 이미지가 방산문제 때문에 워낙 좋지않고, 주가도 관리를 안하다보니 실적이 상당히 좋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좋지 못한 취급을 받고있다. 하지만 위의 영업이익 성과는 흑자일지언정 영구채의 이자와 당기순손실이 누적되어서 당기순이익은 계속 적자였다. 또한 두산중공업이 2018년 3분기까지는 순이익을 올리다 갑자기 4분기에 순손실 5천억이라는 대형사고를 치고 급하게 유상증자를 하자 주가는 땅을 뚫고 내려갔다. 두산건설에 큰돈을 쏟았지만, 전세계적으로 친환경 에너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가속화된 탈석탄 추세에 의해 소모된 자본과 시너지가 나서 완전히 늪에 빠져버린것이다. 2010년대 초반 두산인프라코어의 위기보다 지금 두산중공업의 위기가 더 심각한 상황이다. 결국 2020년 2월 직원 2,600여명을 명예퇴직 시킨다고 발표했으며 3월 11일에 무려 회사 휴업까지 검토한다는 뉴스까지 나온 상황이다. 4월 1일에는 아예 구조조정의 칼을 빼들었다. 산업은행과 채권단에서는 우선 1조원을 지원해주기로 하여 잘 이루어지면 급한 불은 끌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채권단에서는 당연히 경영 책임을 물어 지배구조 개편을 요구하고 있으며 특히 두산중공업과 두산인프라코어,밥캣의 계열분리를 요구하고 있었다. 두산중공업의 부실 전이를 막기위한 방법이다. 두산중공업이 두산의 중간지주회사라서 채권단 요구대로 연결고리가 끊어지면 두산그룹은 금호와 별 다를 것이 없는 패망기업으로 거듭나게 된다. 전세계적으로 친환경 트렌드 때문에 석탄발전이 사양되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두산중공업은 석탄 발전에 목을 매 미래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다. 다른 에너지발전에 다방면 투자를 해야 했으나 원자력에 많은 것을 투자 하였고, 이는 두산중공업의 패착이 되었다. 내수시장 아파트 건설에만 투자한 경영전략의 실패로 그룹의 돈을 막대하게 소비하게 된 두산건설 때문에 두산그룹은 많이 약해진 상태였고, 한국과 유럽의 탈원전 추세는 두산중공업에겐 너무나 아픈 타격이었다. 두산중공업은 석탄과 [[원자력]] 말고는 주력 매출이 없는 상황이었고, 결국 실적부진으로 두산중공업의 영업손실액이 불어나자 두산건설과 함께 그룹 전체의 위기로까지 번진게 현재의 두산 위기이다. 2020년 6월 16일 두산그룹의 핵심인 두산인프라코어가 매물로 나왔으며 2020년 12월 3일 두산의 재무구조가 나아지고 있는 상태이며 두산인프라코어의 매각이 진행된다면 [[두산퓨얼셀]]이 대신할 예정이다. 두산중공업은 1.2조의 유상증자에 성공하여 현재 그 금액은 빚을 갚는데 사용한다고 한다. 2010년대부터 이어지는 두산그룹의 위기는 큰 틀에서 볼 때 과거 1990년대의 대우그룹의 위기와 매우 흡사한 구조를 갖고 있다. 대출을 통한 사세의 확장, 공기업이나 워크아웃 중인 기업을 저가에 인수 등으로 전성기를 누렸으나 세계적인 경제 위기가 닥치면서 이러한 차입경영에 치명타가 오며 위기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히 혹독한 구조조정과 신재생 먹거리 사업 덕분인지, 2021년 1분기 영업이익이 전년도 대비 무려 403% 증가했다고 하며, 계열사인 두산중공업 역시 최고 558%가 급증하면서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고 밝혔다.<ref>〈[https://namu.wiki/w/%EB%91%90%EC%82%B0%EA%B7%B8%EB%A3%B9 두산그룹]〉, 《나무위키》</ref>
  
==자회사==
+
==회사소개==
 
===계열사===
 
===계열사===
 
*[[두산중공업]] : 두산중공업은 산업의 기초 소재인 주단조 제품에서부터 화력, 원자력, 풍력 등의 발전설비와 해수담수화 및 수처리 설비에 이르기까지 발전, Water(물) 사업 분야의 통합솔루션을 제공하는 글로벌 플랜트 전문 기업이다.
 
*[[두산중공업]] : 두산중공업은 산업의 기초 소재인 주단조 제품에서부터 화력, 원자력, 풍력 등의 발전설비와 해수담수화 및 수처리 설비에 이르기까지 발전, Water(물) 사업 분야의 통합솔루션을 제공하는 글로벌 플랜트 전문 기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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