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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지역 ==
 
== 주요 지역 ==
* '''[[허베이성]]''' - 약칭으로 기(冀)라고도 쓴다. [[성도]](省都)는 [[스자좡]](石家莊)이며, 중국의 화베이(華北) 지역에 속한다. [[베이징]](北京) 직할시와 톈진(天津) 직할시를 둘러싸고 있으며, [[보하이만]](渤海湾)에 인접해 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연(燕) 나라와 조(趙) 나라 지역이었으며 한(漢) 나라와 진(晋) 나라 때에는 기주(冀州)·유주(幽州)라고 불렀다. 당(唐) 나라 초기에는 하북도(河北道), 원나라 때는 중서성(中書省), 명나라 때는 경사(京師) 지역에 속하였다. 청(淸) 나라 때부터 독립된 성을 이루었고, 1928년 현재의 명칭으로 불렀다. 면적은 약 19만㎢이며, 스자좡과 한단(邯鄲), 싱타이(邢臺), 바오딩(保定), 장자커우(張家口), 청더(承德), 랑팡(廊坊), 탕산(唐山), 친황다오(秦皇島), 창저우(滄州), 헝수이(衡水) 등 11개 대도시와 22개 현급 시(市), 108개 현, 6개 자치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보하이(渤海) 연해 지역을 포함한 100여 개의 시와 현을 개방하여 120여개 국가와 무역을 교류한다. 거주 인구는 한족(漢族)과 만주족(滿洲族), 회족(回族), 몽골족과 조선족 등 54개 민족이 혼재하는데, 소수민족이 4~31%를 차지한다. 중국문명의 발원지 가운데 하나로, 9개 주(州)로 나뉘던 시기에는 기주(冀州)에 속하였다. 취양[曲陽]에서는 10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인류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셴현[獻縣]은 6000년 전에는 바다였으며, 그 서부 지역에 고대인들이 거주하였다. 전국시대의 명의 편작(扁鵲)과 정치가 인상여(藺相如)를 비롯하여 남북조 시대의 과학자 조충지(趙沖之), 북위 시대의 지리학자 역도원(酈道元), 원나라의 수리학자 곽수경(郭守敬) 등 역사적 인물을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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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베이성]] - 약칭으로 기(冀)라고도 쓴다. [[성도]](省都)는 [[스자좡]](石家莊)이며, 중국의 화베이(華北) 지역에 속한다. [[베이징]](北京) 직할시와 톈진(天津) 직할시를 둘러싸고 있으며, [[보하이만]](渤海湾)에 인접해 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연(燕) 나라와 조(趙) 나라 지역이었으며 한(漢) 나라와 진(晋) 나라 때에는 기주(冀州)·유주(幽州)라고 불렀다. 당(唐) 나라 초기에는 하북도(河北道), 원나라 때는 중서성(中書省), 명나라 때는 경사(京師) 지역에 속하였다. 청(淸) 나라 때부터 독립된 성을 이루었고, 1928년 현재의 명칭으로 불렀다. 면적은 약 19만㎢이며, 스자좡과 한단(邯鄲), 싱타이(邢臺), 바오딩(保定), 장자커우(張家口), 청더(承德), 랑팡(廊坊), 탕산(唐山), 친황다오(秦皇島), 창저우(滄州), 헝수이(衡水) 등 11개 대도시와 22개 현급 시(市), 108개 현, 6개 자치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보하이(渤海) 연해 지역을 포함한 100여 개의 시와 현을 개방하여 120여개 국가와 무역을 교류한다. 거주 인구는 한족(漢族)과 만주족(滿洲族), 회족(回族), 몽골족과 조선족 등 54개 민족이 혼재하는데, 소수민족이 4~31%를 차지한다. 중국문명의 발원지 가운데 하나로, 9개 주(州)로 나뉘던 시기에는 기주(冀州)에 속하였다. 취양[曲陽]에서는 10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인류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셴현[獻縣]은 6000년 전에는 바다였으며, 그 서부 지역에 고대인들이 거주하였다. 전국시대의 명의 편작(扁鵲)과 정치가 인상여(藺相如)를 비롯하여 남북조 시대의 과학자 조충지(趙沖之), 북위 시대의 지리학자 역도원(酈道元), 원나라의 수리학자 곽수경(郭守敬) 등 역사적 인물을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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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이자 제1의 도시로서 정치·행정·문화·교육의 중심지이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문화유산을 갖춘 고도(古都)이자, 현대화된 국제도시다. 역사적으로 연, 요, 금, 원, 명, 청의 수도였고,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현재까지 중국의 수도이다. 유목민족과 정주민족간 문화적 교류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중국 북방문화의 중심지이자, 전세계에서 500대 글로벌 기업의 본사가 가장 많이 유치된 현대적인 국제도시다. 중국의 수도로 정식 명칭은 베이징직할시(北京直轄市)이며, 약칭하여 '징(京)'이라고도 부른다. 중국 북방의 허베이성의 중앙부에 위치한다. 화베이평원의 북부 지역으로, 동쪽으로는 톈진과 맞닿아있고, 동남쪽으로 보하이해와 약 150km 거리에 있다. 행정구역은 총 16개 구(區)로 이루어져 있으며, 면적은 16,410㎢로 우리나라의 수도권 면적보다 크며, 군사분계선 이남의 강원도 면적과 비슷하다. 2020년 상주인구(常住人口)는 2189.3만 명인 초대도시(初大城市)로, 중국 도시 중에서 충칭과 상하이에 이어 3위다. 또한, 상하이, 광저우, 선전과 함께 중국에서 가장 발전한 네 개의 '1선도시(一線城市)' 중 가장 처음으로 손꼽히는 도시다.
* '''[[베이징]]''' -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이자 제1의 도시로서 정치·행정·문화·교육의 중심지이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문화유산을 갖춘 고도(古都)이자, 현대화된 국제도시다. 역사적으로 연, 요, 금, 원, 명, 청의 수도였고,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현재까지 중국의 수도이다. 유목민족과 정주민족간 문화적 교류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중국 북방문화의 중심지이자, 전세계에서 500대 글로벌 기업의 본사가 가장 많이 유치된 현대적인 국제도시다. 중국의 수도로 정식 명칭은 베이징직할시(北京直轄市)이며, 약칭하여 '징(京)'이라고도 부른다. 중국 북방의 허베이성의 중앙부에 위치한다. 화베이평원의 북부 지역으로, 동쪽으로는 톈진과 맞닿아있고, 동남쪽으로 보하이해와 약 150km 거리에 있다. 행정구역은 총 16개 구(區)로 이루어져 있으며, 면적은 16,410㎢로 우리나라의 수도권 면적보다 크며, 군사분계선 이남의 강원도 면적과 비슷하다. 2020년 상주인구(常住人口)는 2189.3만 명인 초대도시(初大城市)로, 중국 도시 중에서 충칭과 상하이에 이어 3위다. 또한, 상하이, 광저우, 선전과 함께 중국에서 가장 발전한 네 개의 '1선도시(一線城市)' 중 가장 처음으로 손꼽히는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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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톈진시] - 약칭하여 진((津)이라고도 부른다. 화베이(華北) 지구의 [[보하이만]](渤海灣)에 인접하며, 해안선 길이는 130여㎞에 이른다. 금(金)나라와 원(元)나라 때는 '즈구(直沽)'라고 불렸으며, 수상 운송의 요지이다. 1928년에 시로 건설되었다. 면적은 1만 1632㎢로 허핑(和平), 허둥(河東), 허시(河西), 허베이(河北), 훙차오(紅橋), 난카이(南開), 한구(漢沽), 탕구(塘沽), 다강(大港), 둥리(東麗), 진난(津南), 시칭(西淸), 베이천(北辰), 우칭(武淸), 바오디(寶坻) 등 15개 구와 지현(蓟縣), 닝허현(寧河縣), 징하이현(靜海縣) 등 3개의 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앙직할시로서 연해 지역에 중점적으로 개발된 항구도시이다. 원나라 때부터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였다. 건국 이후 대규모 개조와 건설을 통하여 도시화가 이루어졌으며, 길이 73㎞에 이르는 전국 최대의 녹화지대가 도시를 감싸안고 있다. 3환(環) 도로와 14개의 환도로가 교차하는 분사 모양의 주요 도로가 건설되었으며, 지하철과 주택단지, 교육문화시설, 상업시설 등의 공공시설들이 있다. 교외에 진(鎭:우리나라의 면에 해당하는 행정구역) 단위의 위성 농촌도 개발되었다. 건국 이후 상공업 발전과 더불어 인구가 늘어나자 1955년 5만 9000명을 칭하이[靑海]로 이주시켰다. 1958~1960년 변경 건설사업에 7만 명의 주민을 동원하였다. 회족(回族), 몽골족, 조선족 등 42개 소수민족이 거주하는데, 시 전체 인구의 3%에 못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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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시성]] - '진(晋)'이라고도 부르며, 성도(省都)는 [[타이위안]](太原)이다. 화베이(华北) 지구의 [[타이항 산맥]](太行山脈) 서쪽에 있는 성으로, 춘추시대에는 오패(五覇)의 하나였던 진(晋) 나라가 있던 곳이며, 전국시대에는 칠웅(七雄)의 하나인 조(赵) 나라와 위(魏) 나라 등의 영토였다. 진(秦) 나라 때 타이위안군(太原郡)·허둥군(河东郡)·상당군(上党郡)이 설치되었고, 한(汉) 나라 때는 빙저우[并州]라고 불렸다. 원(元) 나라 때는 중서성 산시도(山西道)에 속하였고, 명(明) 나라와 청(清) 나라 때 성이 설치되었다. 타이위안(太原)·다퉁(大同)·숴저우(朔州)·진중(晋中)·양취안(阳泉)·창즈(长治)·신저우(忻州)·린펀(临汾)·윈청(运城)·진청(晋城)·뤼량(吕梁) 등 11개의 지급시(地級市;성과 현 사이의 행정구역), 11개의 현급시(县級市), 85개의 현(县)을 관할하고 있다. 일본·미국·프랑스·독일·영국을 비롯한 120여개 나라 및 지역과 경제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
* '''[[톈진시]]''' - 약칭하여 진((津)이라고도 부른다. 화베이(華北) 지구의 [[보하이만]](渤海灣)에 인접하며, 해안선 길이는 130여㎞에 이른다. 금(金)나라와 원(元)나라 때는 '즈구(直沽)'라고 불렸으며, 수상 운송의 요지이다. 1928년에 시로 건설되었다. 면적은 1만 1632㎢로 허핑(和平), 허둥(河東), 허시(河西), 허베이(河北), 훙차오(紅橋), 난카이(南開), 한구(漢沽), 탕구(塘沽), 다강(大港), 둥리(東麗), 진난(津南), 시칭(西淸), 베이천(北辰), 우칭(武淸), 바오디(寶坻) 등 15개 구와 지현(蓟縣), 닝허현(寧河縣), 징하이현(靜海縣) 등 3개의 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앙직할시로서 연해 지역에 중점적으로 개발된 항구도시이다. 원나라 때부터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였다. 건국 이후 대규모 개조와 건설을 통하여 도시화가 이루어졌으며, 길이 73㎞에 이르는 전국 최대의 녹화지대가 도시를 감싸안고 있다. 3환(環) 도로와 14개의 환도로가 교차하는 분사 모양의 주요 도로가 건설되었으며, 지하철과 주택단지, 교육문화시설, 상업시설 등의 공공시설들이 있다. 교외에 진(鎭:우리나라의 면에 해당하는 행정구역) 단위의 위성 농촌도 개발되었다. 건국 이후 상공업 발전과 더불어 인구가 늘어나자 1955년 5만 9000명을 칭하이[靑海]로 이주시켰다. 1958~1960년 변경 건설사업에 7만 명의 주민을 동원하였다. 회족(回族), 몽골족, 조선족 등 42개 소수민족이 거주하는데, 시 전체 인구의 3%에 못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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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멍구자치구]] - 약칭하여 네이멍구(内蒙古)라고도 부르며, 구도(區都)는 후허하오터(呼和浩特)이다. 북쪽 국경지대에 몽골(蒙古)·러시아와 인접하여 있다. 국경선이 4,220㎞에 이르는데, 이 가운데 몽골과 접경선이 3,192㎞, 러시아와 접경선은 약 1,000㎞이다. 전국시대에는 조(赵) 나라와 연(燕) 나라 등에 속하였고, 한(汉) 나라 때는 흉노(匈奴)의 땅이었으며, 송(宋) 나라 때는 서하(西夏)·요(辽)·금(金)이 있었다. 청(清) 나라에 들어와 네이멍구 지역으로 지정되었고, 1928년 차하얼성(察哈尔省)과 쑤이위안성(绥远省) 등의 성(省)을 두었다. 1947년 5월 1일 중국 최초의 성(省) 급 민족 자치구로서 네이멍구자치구가 설치되었다. 면적은 110여 만㎡ 로  중국 국토의 11.9%를 차지한다. 행정구역은 시린궈러멍(锡林郭勒盟)·싱안멍(兴安盟)·아라산멍(阿拉善盟) 등 3개의 멍(盟)과 후허하오터를 비롯하여 바오터우(包头)·우하이(乌海)·츠펑(赤峰)·퉁랴오(通辽)·후룬베이얼(呼伦贝尔)·오르도스(鄂尔多斯)·우란차부(乌兰察布)·바옌나오얼(巴彦淖尔) 등 9개 지급시(地級市), 11개 현급시(县級市), 17개 현(县), 49개 기(旗), 3개 자치기(自治旗)로 이루어져 있다. 시현(市县)의 3분의 1 정도가 대외적으로 개방되고 있으며, 얼롄하오터(二连浩特)와 만저우리(满洲里) 등지에 대외통상 국경출입구가 있다. 개혁개방 정책을 전개한 뒤로 전세계 60여개 국가 및 지역과 무역거래를 하고 자매결연을 맺었다.
 
 
* '''[[산시성]]''' - '진(晋)'이라고도 부르며, 성도(省都)는 [[타이위안]](太原)이다. 화베이(华北) 지구의 [[타이항 산맥]](太行山脈) 서쪽에 있는 성으로, 춘추시대에는 오패(五覇)의 하나였던 진(晋) 나라가 있던 곳이며, 전국시대에는 칠웅(七雄)의 하나인 조(赵) 나라와 위(魏) 나라 등의 영토였다. 진(秦) 나라 때 타이위안군(太原郡)·허둥군(河东郡)·상당군(上党郡)이 설치되었고, 한(汉) 나라 때는 빙저우[并州]라고 불렸다. 원(元) 나라 때는 중서성 산시도(山西道)에 속하였고, 명(明) 나라와 청(清) 나라 때 성이 설치되었다. 타이위안(太原)·다퉁(大同)·숴저우(朔州)·진중(晋中)·양취안(阳泉)·창즈(长治)·신저우(忻州)·린펀(临汾)·윈청(运城)·진청(晋城)·뤼량(吕梁) 등 11개의 지급시(地級市;성과 현 사이의 행정구역), 11개의 현급시(县級市), 85개의 현(县)을 관할하고 있다. 일본·미국·프랑스·독일·영국을 비롯한 120여개 나라 및 지역과 경제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
 
 
 
* '''[[네이멍구자치구]]''' - 약칭하여 네이멍구(内蒙古)라고도 부르며, 구도(區都)는 후허하오터(呼和浩特)이다. 북쪽 국경지대에 몽골(蒙古)·러시아와 인접하여 있다. 국경선이 4,220㎞에 이르는데, 이 가운데 몽골과 접경선이 3,192㎞, 러시아와 접경선은 약 1,000㎞이다. 전국시대에는 조(赵) 나라와 연(燕) 나라 등에 속하였고, 한(汉) 나라 때는 흉노(匈奴)의 땅이었으며, 송(宋) 나라 때는 서하(西夏)·요(辽)·금(金)이 있었다. 청(清) 나라에 들어와 네이멍구 지역으로 지정되었고, 1928년 차하얼성(察哈尔省)과 쑤이위안성(绥远省) 등의 성(省)을 두었다. 1947년 5월 1일 중국 최초의 성(省) 급 민족 자치구로서 네이멍구자치구가 설치되었다. 면적은 110여 만㎡ 로  중국 국토의 11.9%를 차지한다. 행정구역은 시린궈러멍(锡林郭勒盟)·싱안멍(兴安盟)·아라산멍(阿拉善盟) 등 3개의 멍(盟)과 후허하오터를 비롯하여 바오터우(包头)·우하이(乌海)·츠펑(赤峰)·퉁랴오(通辽)·후룬베이얼(呼伦贝尔)·오르도스(鄂尔多斯)·우란차부(乌兰察布)·바옌나오얼(巴彦淖尔) 등 9개 지급시(地級市), 11개 현급시(县級市), 17개 현(县), 49개 기(旗), 3개 자치기(自治旗)로 이루어져 있다. 시현(市县)의 3분의 1 정도가 대외적으로 개방되고 있으며, 얼롄하오터(二连浩特)와 만저우리(满洲里) 등지에 대외통상 국경출입구가 있다. 개혁개방 정책을 전개한 뒤로 전세계 60여개 국가 및 지역과 무역거래를 하고 자매결연을 맺었다.
 
 
 
 
[[파일:화베이 평원.png|썸네일|300픽셀|'''화베이 평원''']]
 
[[파일:화베이 평원.png|썸네일|300픽셀|'''화베이 평원''']]
 
 
== 역사 ==
 
== 역사 ==
 
화북이라 칭하는 지역은 사람마다 다르고 시대마다 다르지만 어떤 기준으로 나누던 화북의 국력이 다른 지역보다 우세하였다. 애초에 중국 문명의 발상지인 황하 유역이 화북이며, 화남은 수풀이 우거진 밀림과 축축한 늪지대가 대부분인 미지의 땅이었다. 주나라 이래부터 한나라까지 이곳의 이민족들을 몰아내고 어느 정도 개발을 해놓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장강 주변과 몇몇 거점도시에나 확실하게 통치력이 미쳤고 나머지 화남 지역 대부분은 과장 좀 보태서 만리장성 이북의 몽골 초원이나 다름없는 미지의 땅이었다. 이는 삼국시대 당시의 오나라도 마찬가지였으며, 촉과 오가 힘을 합쳐도 위나라 군대에 못 미치는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5호 16국 시대부터 북방 유목민에게 화북을 빼앗긴 한족들이 대거 화남으로 이주, 한족 왕조를 이어 남북조시대를 열면서 본격적으로 개발이 시작되었고, 통일 이후 수나라의 대운하 건설, 남송시대를 거치며 장강 하류의 생산력이 급상승하여 전란으로 피폐해진 화북을 앞질렀다. 비록 화남의 생산력이 대폭 상승했더라도 인구는 화북에 비해 수배 이상 부족했기 때문에 그 차이를 메꾸기는 쉽지 않았다. 게다가 그 상승된 생산력은 화남의 인구를 늘리는데 투입된 것이 아니라 화북의 인구를 먹여살리기 위해 운송됐다. 대운하를 만든 이유도 화남의 생산물을 화북으로 옮기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두 지역 간에 군사적 대결이 발생할 경우 명나라 건국과 국민혁명의 2번을 제외하고는 늘 화북의 승리로 끝났다. 또한 정난의 변 이후에는 영락제가 근거지인 베이징으로 천도하여 수도로 삼았으며,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중화인민공화국도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천도하여 현재도 화북은 중국의 중추지로 남아있다.
 
화북이라 칭하는 지역은 사람마다 다르고 시대마다 다르지만 어떤 기준으로 나누던 화북의 국력이 다른 지역보다 우세하였다. 애초에 중국 문명의 발상지인 황하 유역이 화북이며, 화남은 수풀이 우거진 밀림과 축축한 늪지대가 대부분인 미지의 땅이었다. 주나라 이래부터 한나라까지 이곳의 이민족들을 몰아내고 어느 정도 개발을 해놓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장강 주변과 몇몇 거점도시에나 확실하게 통치력이 미쳤고 나머지 화남 지역 대부분은 과장 좀 보태서 만리장성 이북의 몽골 초원이나 다름없는 미지의 땅이었다. 이는 삼국시대 당시의 오나라도 마찬가지였으며, 촉과 오가 힘을 합쳐도 위나라 군대에 못 미치는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5호 16국 시대부터 북방 유목민에게 화북을 빼앗긴 한족들이 대거 화남으로 이주, 한족 왕조를 이어 남북조시대를 열면서 본격적으로 개발이 시작되었고, 통일 이후 수나라의 대운하 건설, 남송시대를 거치며 장강 하류의 생산력이 급상승하여 전란으로 피폐해진 화북을 앞질렀다. 비록 화남의 생산력이 대폭 상승했더라도 인구는 화북에 비해 수배 이상 부족했기 때문에 그 차이를 메꾸기는 쉽지 않았다. 게다가 그 상승된 생산력은 화남의 인구를 늘리는데 투입된 것이 아니라 화북의 인구를 먹여살리기 위해 운송됐다. 대운하를 만든 이유도 화남의 생산물을 화북으로 옮기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두 지역 간에 군사적 대결이 발생할 경우 명나라 건국과 국민혁명의 2번을 제외하고는 늘 화북의 승리로 끝났다. 또한 정난의 변 이후에는 영락제가 근거지인 베이징으로 천도하여 수도로 삼았으며,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중화인민공화국도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천도하여 현재도 화북은 중국의 중추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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