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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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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청

경주시(慶州市)는 대한민국 경상북도 동남부에 있는 시이다. 북동쪽으로 포항시, 서쪽으로 영천시·청도군, 남쪽으로 울산광역시 울주군, 동쪽으로 동해에 면한다.[1]

개요[편집]

경주시는 동경 128°58′∼ 129°31′, 북위 35°39′∼ 36°04′에 위치한다. 면적은 1,324.41㎢이고, 인구는 2023년 7월을 기준하여 248,510명이다. 행정구역으로는 4개 , 8개 , 11개 행정동(44개 법정동), 305개 행정리(142개 법정리)가 있다. 시청은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에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약 천년 동안 신라의 수도였다.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57년 6월 8일에 첫 성읍 국가인 사로국이 경주 계림 일대에 세워졌는데, 비슷한 시기에 고조선의 왕검성이 함락되었으니 경주시는 도시 전체가 고풍스럽고 역사적인 무대라 할 수 있다.

경주시는 남북국시대에 이미 수십만 명의 인구가 산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 시대에도 삼경(三京)의 하나로서 명성을 유지했으며, 고려 후기에 무신정권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나고 나서는 3경에서 제외되고 이어서 몽골의 침략으로 황폐화 되었다. 그러나 다시 동경으로 복권이 되어 고려 시대 내내 중요한 도시로서 기능했다.

조선 시대에도 그 위상은 여전해서 경상도의 '경'자가 경주에서 따왔고, 부(府)로 지정된 동시에 경주부의 수장인 부윤(府尹)은 종2 품으로 관찰사와 동급이었던 것에서 보듯이 현대의 광역시급 지위는 되었을 정도로 경상도에서 가장 큰 도시였고, 동시에 이언적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양동마을 및 옥산서원을 위시하여 안동시와 함께 영남 남인의 구심점이자 대표적인 양반 도시였다. 즉 신라 멸망 이후로도 주요 도시라는 명성은 잃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어져왔다. 이러한 경주의 위상과 규모는 경제 개발기 이전까지 경상도 내에서 수위를 차지했다.

문화유적이 많다는 특성 때문에 시가지 개발과 (바다와 접하지만) 대규모 항만 조성이 어려워 발전이 미흡해지면서 오늘날에는 바로 이웃 도시인 포항시와 (옛 수도 시절 경주의 무역항 역할을 했던) 울산광역시가 대신 성장했고, 또한 인접해 있지는 않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부산광역시와 대구광역시가 있기에 지금은 중소 도시가 되었다. 도 내에서는 포항, 구미, 경산 다음가는 제4의 도시다.

대한민국의 시 중 면적이 3번째, 기초자치단체 중에서는 5번째로 넓다. 수도권에서 서울특별시, 고양시, 부천시, 광명시를 통합한 면적과 비슷한 수준이다. 참고로 시 중 면적 1위가 안동시(기초자치단체 기준 3위), 2위가 대구광역시, 4위가 상주시(기초자치단체 기준 6위)인데 1, 3, 4위가 전부 경상북도 소속이며, 대구광역시경상북도에서 광역시로 분리된 도시다. 사실 경상북도가 산하 시군 중 무려 7개가 면적이 1,000㎢를 넘을 정도로 큼직큼직한 면적을 가진 지자체가 매우 많은 편이기는 하다.

동해와 접한 도시이지만, 일반 대중들은 경주가 해안 도시란 걸 잘 모른다. 그 이유로는 바다와 접해 있는 인근의 해안 도시들(울산광역시, 포항시, 부산광역시)과 달리 경주는 시가지가 바다와 한참 떨어진 내륙에 있는 데다 문화유적이 워낙 많아서 관광도시란 인상이 강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알고 보면 해수욕장도 제법 많은데, 사실 문무대왕릉(대왕암)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하면 답이 나오며 문무대왕릉과 접해있는 곳이 바로 봉길 해수욕장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월성 원자력 발전소도 있다.[2][3]

자연환경[편집]

태백산맥의 남단으로 경상계(慶尙系)의 화강암이 관입한 지질을 이룬다. 지형은 주사 산맥(朱砂山脈) · 금오산맥(金鰲山脈) · 동대산맥(東大山脈) 등 세 줄기 태백산맥의 지맥이 서부 · 중부 · 동부를 각각 남북으로 주행하여 산지 지형을 이루고 있다.

주요 으로는 도덕산(道德山, 703m) · 구미산(龜尾山, 594m) · 금오산(金鰲山, 466m) · 황룡산(黃龍山, 664m) · 토함산(吐含山, 745m)과 주사산(朱砂山, 622m) · 소두방산(315m) · 천룡산(天龍山, 495m) 등이 있다.

고개로는 추령(楸嶺, 309m)과 치술령(765m) 등이 있다. 형산강구조곡(兄山江構造谷), 영천∼경주간 구조곡이 교차하는 지점에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침식 분지가 형성되어 그 곳에 경주 시가지가 발달하였다.

명활산(明活山, 245m) · 금오산(金鰲山) · 옥녀봉(玉女峰, 215m) · 선도산(仙挑山, 381m) · 소금강산(小金剛山, 143m) 등 구릉성 산지로 둘러싸인 분지는 자연 요새를 이루고 있다. 또한, 경주∼양산간 구조곡도 경주 도심지에서 교차하여 거의 시 전역이 형산강의 상류 · 중류부에 해당된다.

산내면에서 발원하는 동창천이 청도군 청도읍 내호리에서 청도천과 합류, 밀양강으로 흘러들며, 외동읍 괘릉리에서 발원하는 동천이 울산에서 태화강으로 흘러든다.

울산광역시 울주군에서 발원하는 미역내가 북류하면서 크고 작은 하천과 합해져 기린내[麟川]가 되고, 반월성을 싸고 도는 남천(南川)은, 시가지 중심부를 관통하는 북천(北川)과 현곡천(見谷川) · 대천(大川) 등과 합류해 형산강을 이루어 북류 하다 안강평야에서 칠평천(七坪川) · 기계천(杞溪川)과 합류하여 동해로 흐른다.

기후는 기온교차가 비교적 심한 내륙성기후를 나타내고 있다. 연평균기온 14.0℃, 1월 평균기온 -0.9℃, 8월 평균기온 24.6℃이며, 연 강수량은 1,037.0㎜이다.[4]

역사[편집]

BC 57년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이곳을 중심으로 서라벌(徐羅伐)을 세웠다. 이 나라가 307년(기림왕 10)부터 신라로 개칭·발전하였는데, 이후 992년간 신라의 왕경(王京)이 자리하였으며 지방의 소경(小京)과 대비하여 대경(大京)이라고 불렀다. 6세기에 도시로서 도로망과 주거형태를 체계적으로 갖추기 시작하였고 계획적인 도로망이 격자로 만들어졌으며 8세기에 대도시로서 면모를 갖추었다. 도시의 규모는 남북과 동서로 각 약 6km내외의 규모로 짐작된다.

고려가 신라를 합병한 935년(태조 18) 처음으로 경주라 불렀으며, 940년(태조 23) 영남지방의 행정 관청인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가 설치되었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바꾸고, 유수사(留守使)를 두었으며 1012년(현종 3)에 다시 경주가 되었다. 한동안 경주부에 설치된 경상좌도(慶尙左道)의 감영(監營)이 1601년(선조 34)에 대구로 이동된 후 경주의 지위는 약화되었다.

1895년(고종 32) 23부제(府制) 실시로 경주군으로 개편되고, 1931년 4월 경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37년 7월 양북면(陽北面)에서 감포리(甘浦里) 외 8개리가 감포읍으로 분리 승격되었다. 1949년 5월에는 강서면(江西面)이 안강읍으로 승격되었다. 1955년 9월 경주읍이 경주시로 승격되어 군과 분리되었고, 군의 명칭이 월성(月城)으로 바뀌었다.

1973년 7월 서면(西面)의 건천리(乾川里) 외 10개리가 건천읍으로 승격 분리되었고, 1980년 12월 외동면(外東面)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9년 1월 월성군의 명칭이 경주군으로 환원되었다. 1995년 1월 경주시와 경주군이 합쳐 통합시가 되었다.

2016년 경주시는 감포읍·안강읍·건천읍·외동읍 및 양북면·양남면·내남면·산내면·서면·현곡면·강동면·천북면과 중부동, 황오동, 성건동, 황성동, 용강동, 동천동, 황남동, 보덕동, 월성동, 불국동, 선도동 등 4읍 8면 11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2021년 4월 경주시의 결정에 따라 양북면(陽北面)의 행정 명칭이 문무대왕면(文武大王面)으로 변경되었다.

산업[편집]

경주시는 관광업이 매우 중요하다. 이건 두말할 필요가 없어서, 시내권과 남산, 불국사 등 신라유적지 관광 및 보문단지를 중심으로 한 컨벤션산업이 발달해 있다. 다만 그 덕에 시내에는 산업단지가 매우 적은데, 그나마 일진글로벌이 용강 산업단지를 본진으로 삼고 있는 정도. 되려 외곽의 읍면지역이 포항, 울산과의 접근성 덕에 공장들이 꽤 많다. 포항과 인접한 강동면, 천북면이나 울산과 인접한 외동읍이 대표적. 특히 외동읍은 김해시를 방불케 하는 난개발이 이루어져 들판 곳곳에 공장들이 흩뿌려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다 노무현 정부의 공기업 지방 이전 정책, 방사능 폐기물 처리장 부지 선정 등과 맞물리면서 한국수력원자력 본사가 경주에 자리를 잡았다. 물론 그 위치는 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뜬금없는 속이지만 어쨌든 경주시의 재정에 기여를 하고 있으며 한국 원자력 환경 공단 등과 같은 유관 기업들이 함께 따라왔다.

교통[편집]

도로 교통에 비해 철도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편이었지만, 경부고속철도 신경주역 개통과 함께 서울까지의 소요시간이 2시간 초반대로 단축되었다. 경주 시내에서 경주역까지 차로 20~30분 정도가 걸린다.

버스는 2012년도에 교통카드를 사용할 경우 30분 내에 환승을 하면 1회에 한해 환승 무료제도를 시행했다. 단, 울산, 포항, 영천까지 가는 버스는 환승이 되지 않는다. 울산에서 경주, 포항과 광역 환승 체계를 도입하려는 계획은 있지만 아직 실현되지 않고 있다.

2018년에 원화로에 위치한 경주역과 현곡면 금장리에 위치한 서경주역 2곳을 없애고 현곡역을 새로 이전한다는 계획이 발표되었다. 그래서 현곡면에 아파트 대단지가 들어서 현곡 푸르지오 2차까지 완공되었다. 2024년에는 자이르네가 완공될 예정이다.

그러나 경주시의 인구는 정체 및 감소 추세인 데다 비교적 도심과 멀리 떨어진 탓에 현곡푸르지오 아파트 외에 이렇다 할 개발은 이뤄지지 않고 미분양 상태가 오래 지속될 가능성도 있다.

이 지역을 지나는 4번 국도와 7번 국도는 포항시의 제철소와 울산광역시의 공업단지에 드나드는 차량 들과 시외버스와 고속버스, 그리고 경주시로 오는 관광버스들이 지나다 보니 전국 최악의 사고 율과 사고 치사율로 죽음의 도로라는 악명을 떨쳤으며, 이 고장에서는 많은 주민들이 교통 사고로 불귀의 객이 되거나 큰 부상을 당하고 그 후유증을 겪는 피해를 겪었다. 그러나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경주시 외곽 지역에 세워진 공장들의 생산품에 포항과 울산의 공업 제품과 울산항, 부산항을 통해 수출입 되는 화물 상당수가 7번 국도를 통해 운송되기 때문에 교통량이 제법 많다.

관광[편집]

신라 천 년의 고도로서 찬란한 신라문화의 보고인 경주는 자연박물관이자 세계적인 고적관광도시이다. 1968년 12월에 경주 고적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본격적인 관광도시로 발달하였다. ‘보는 관광지’에서 ‘즐기는 관광지’로 유도하기 위해 1974년부터 계속하여 경주관광종합개발사업이 추진되어오고 있다. 유네스코에 의해 불국사, 석굴암(1995.12.9)과 남산, 월성, 대릉원, 황룡사, 산성 등 5개의 경주역사유적지구(2000.12.2), 양동마을(2010.7.31) 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3개 사적지구(토함산 · 오릉 · 무열왕릉 · 월성 · 남산 · 김유신장군묘 · 미추왕릉 · 황룡사지 · 문무대왕릉 · 금강산 · 명활산 · 괘릉 등)에 대한 문화재 복원 · 보수 · 정화작업이 추진되었으며, 보문지를 중심으로 대규모의 국제적인 위락시설을 갖춘 보문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2009년 현재 문화재는 국보 32점, 보물 82점, 사적 및 명승 2점, 사적 76점, 중요민속자료 16점, 중요무형문화재 2점, 천연기념물 3종, 기타 97점으로 총 313점이며, 전국의 약 4%, 경상북도의 약 22%를 차지한다.

이러한 문화재는 불국사와 토함산 · 금강 · 남산 · 서악 · 송화 등 5개의 국립공원지구에 집중 분포되어 있으며, 특히 기암고봉(奇巖高奉)의 남산(468m)은 30여 개의 깊은 하곡(河谷)에 백여 개의 절터와 기암괴석에 새겨진 불상 · 석탑 등 불교유적이 밀집되어 있다. 남산 서편기슭에는 석불입상 · 석불좌상 · 경애왕릉 · 삼릉 등과 포석계곡 · 선방계곡 · 삼릉계곡이 곁들여져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다.

박혁거세가 태어났다는 나정과 신라의 종말을 알리는 경애왕의 비극이 서려 있는 포석정이 있다. 포석정은 진한 6촌의 시조를 모신 양산재 입구에서 1㎞ 남짓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신라의 종말을 알리는 경애왕의 비극이 서려 있는 포석정, 삼국시대에 조성되어 햇살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미소가 일품인 배리삼존석불, 10곳의 절터와 14체의 석불상이 있는 삼릉골, 병풍바위에 살아 있는 듯 조각되어 있는 마애 삼존 육존불상 등이 볼 만하다.

유물의 수적인 면에서는 뒤지지만 규모나 예술적인 면에서는 단연 독보적인 동편 기슭에는 남산에서 가장 큰 절로 비구니들의 수도처인 보리사와 8세기 말 신라불상의 걸작으로 보물로 지정된 석가여래좌상, 비스듬히 기울어진 바위 위에 조금은 거칠게 조각된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또한 불무사 대웅전 뒤쪽에 자리한 높이 9m, 둘레 30m의 여래상 · 보살상 · 비천상 · 나한상 및 탑과 사자 등 30여 종에 달하는 다양한 형상이 조각되어 있는 부처바위, ‘남산 아줌마부처’라는 별명을 가진 남산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부처인 감실석 불좌상이 있다.

그리고 시내 중심부 황남동의 4만여 평에 천마총을 비롯하여 20기의 능이 자리하고 있는 고분공원이 있다. 인왕동의 반월성 일대에는 첨성대 · 석빙고 · 월지와 신라 천 년의 문화 · 예술 · 역사 · 유물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경주국립박물관이 있다.

구황동에는 황룡사지와 분황사가 있으며 서악동에는 무열왕릉과 진흥왕릉 · 문성왕릉 등의 고분군이 있다. 토함산에는 불국사와 석굴암이 있어 한국적 불교사상과 인공미의 극치를 보여주며, 남동쪽 장항리탑정 계곡에는 자연휴양림이 조성되어 있다.

주요 명승고적으로는 나원리 오층석탑, 통일 신라시대의 것으로 가장 완벽한 묘제(墓制)를 보여주는 괘릉을 비롯하여 부산성(富山城) · 경덕왕릉 · 흥덕왕릉 · 원원사지 · 관문성 · 기림사 등이 있다. 문무 대왕면 봉길리 앞바다의 문무왕 해중릉(海中陵)도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이와 마주한 해변에는 봉길해수욕장이 있다.

안강에서 서쪽으로 7㎞ 되는 자옥산(紫玉山) 아래 절승지에는 1572년(선조 5) 건립된 이언적을 모신 옥산서원이 있고, 외동읍 방어리와 괘릉리에 걸쳐 영지가 있으며, 현곡면 가정리에는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가 출생하고 묻힌 곳인 용담정(龍潭亭)이 있다.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관광명소로는 양동이씨와 경주손씨의 동족 마을인 양동민속마을이 있다. 크고 작은 150여 채의 조선 시대 건축양식의 가옥과 2채의 사당 · 정자 15개소 · 학당 등이 계곡을 따라 여기저기에 자리하여 절로 감탄을 자아낸다. 이 가운데서는 보물 3점, 민속자료 12점, 지방유형문화재 4점이 포함되어 있다.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로는 회재이언적 선생의 선친인 이번이 살던 고택인 무첨당, 회재 선생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할 때 중종이 그의 모친의 병환을 돌볼 수 있도록 배려해서 지은 집인 향단과 조선 중종 때의 청백리 우재손중돈이 분가하여 살았던 관가정이 있다. 많은 민속가옥이 남아 있는 이 마을은 안동하회마을과 더불어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농촌 전통 테마 마을인 안강옥산세심마을은 69호에 155명의 마을주민이 살고 있는 전통적인 한국의 농촌 마을로 농촌진흥청에서 2002년도 농촌 전통 테마 마을로 선정, 자립적으로 농촌 체험 관광을 운영하고 있는 마을이다.

문화행사 및 축제[편집]

지역축제로는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정부지정 문화관광 축제인 한국의 술과 떡잔치, 매년 4월 초 보문 관광단지 일원에서 펼쳐지는 경주 벚꽃 마라톤 대회, 경주 버섯 축제, 문무 대왕 해맞이 대축제와 새해 맞이 토함산기원대축제 등이 있다.

민속놀이로는 마을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는 동제를 비롯해 가배놀이와 사자놀이가 전해온다. 이러한 민속놀이는 10월에 열리는 신라문화제에서 재현된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경주시〉, 《위키백과》
  2. 경주시〉, 《네이버 지식백과》
  3. 경주시〉, 《나무위키》
  4. 경주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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