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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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물 ==
 
== 건축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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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자정전.jpg|썸네일|300픽셀|'''자정전'''(資政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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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을 구성하는 전각들은 궁궐지, 서궐도안, 서궐영건도감의궤 등의 자료와 유구를 통하여 알 수 있다. [[흥화문]]과 [[숭정문]]은 궁궐의 내외 출입문을 형성하였고, 정전인 숭정전을 비롯하여 융복전, 회상전, 흥정당, 자정전, 장락전, 집경전, 만학정 등 10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있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모두 파괴되거나 이전되었다. 현재의 터에 남아 있는 것은 건물터와 원래의 자리로 다시 이전된 흥화문뿐이며, 나머지는 새로 복원된 것이다.
 
경희궁을 구성하는 전각들은 궁궐지, 서궐도안, 서궐영건도감의궤 등의 자료와 유구를 통하여 알 수 있다. [[흥화문]]과 [[숭정문]]은 궁궐의 내외 출입문을 형성하였고, 정전인 숭정전을 비롯하여 융복전, 회상전, 흥정당, 자정전, 장락전, 집경전, 만학정 등 10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있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모두 파괴되거나 이전되었다. 현재의 터에 남아 있는 것은 건물터와 원래의 자리로 다시 이전된 흥화문뿐이며, 나머지는 새로 복원된 것이다.
  
 
경희궁의 배치 형태와 공간 구성은 다른 궁궐과 달리 매우 독특하다. 정전인 숭정전 영역이 서쪽에, 침전인 융복전, 회상전 영역이 동쪽에 나란히 놓여 있으며, 정문인 흥화문은 궁궐의 남쪽에 있지 않고, 동남쪽 모퉁이에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정문에서 내전으로 진입하는 길은 침전 앞을 지난 다음 북으로 꺾어 정전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경희궁의 배치 형태와 공간 구성은 다른 궁궐과 달리 매우 독특하다. 정전인 숭정전 영역이 서쪽에, 침전인 융복전, 회상전 영역이 동쪽에 나란히 놓여 있으며, 정문인 흥화문은 궁궐의 남쪽에 있지 않고, 동남쪽 모퉁이에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정문에서 내전으로 진입하는 길은 침전 앞을 지난 다음 북으로 꺾어 정전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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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화문'''(興化門) : 광해군 8년(1616년)에 세워진 경희궁의 정문이다. 흥화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 건물이다. 원래 경희궁에는 동문인 흥화문 외에 흥화문 왼쪽에 흥원문, 오른쪽에 개양문, 서쪽에 숭의문, 북쪽에 무덕문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박문사(현재의 장충단 자리)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해 일제가 이전하여 경춘문(景春門)이라 불렀다. 광복 후 장충동 신라호텔의 영빈관 정문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1988년 경희궁터로 다시 옮겨왔다. 흥화문은 원래 경희궁터에 동남쪽 금천교 밖, 지금의 구세군회관 자리에 동향하고 있던 경덕궁 정문이었는데, 처음과 달리 지금 위치에 남향하여 세워졌다.
 
* '''흥화문'''(興化門) : 광해군 8년(1616년)에 세워진 경희궁의 정문이다. 흥화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 건물이다. 원래 경희궁에는 동문인 흥화문 외에 흥화문 왼쪽에 흥원문, 오른쪽에 개양문, 서쪽에 숭의문, 북쪽에 무덕문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박문사(현재의 장충단 자리)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해 일제가 이전하여 경춘문(景春門)이라 불렀다. 광복 후 장충동 신라호텔의 영빈관 정문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1988년 경희궁터로 다시 옮겨왔다. 흥화문은 원래 경희궁터에 동남쪽 금천교 밖, 지금의 구세군회관 자리에 동향하고 있던 경덕궁 정문이었는데, 처음과 달리 지금 위치에 남향하여 세워졌다.
* '''숭정문'''(崇政門) : 숭정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상왕의 승하시 정전이 아닌 정전의 문에서 즉위하는데 경종, 정조, 헌종이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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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정문''' : 숭정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상왕의 승하시 정전이 아닌 정전의 문에서 즉위하는데 경종, 정조, 헌종이 그러했다.
 
* '''숭정전'''(崇政殿) : 광해군 8년(1616년)에 세운 것으로, 경희궁의 정전이다. 숭정전 일곽은 남향한 경사지에 축대를 조성하여 그 위에 건물이 들어서 있다. 숭정전은 행각으로 둘러졌으며, 뒤로는 자경전이 있다. 동ㆍ서 행각은 남에서 북으로 가면서 바닥과 지붕이 단을 이루며 높아지도록 조성되었다. 숭정전은 이중 월대 위에 세운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이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이건되어 본래 건물은 현재 동국대학교 안에 정각원으로 쓰이고 있다. 현 위치의 건물은 1989년 12월 재건 공사를 시작하여 1994년 10월 주변 행각과 함께 완공한 것이다. 2층 윌대 중 상월대의 답도는 정각원에 남아있고, 하월대의 답도는 복원된 경희궁의 숭정전에 있다. 상월대의 답도는 봉황, 하월대의 답도는 공작무늬이다. 철거전 경복궁못지 않게 큰 규모를 자랑했으나 흥화문,숭정전등 주요 건물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철거되어 경복궁의 10/1정도가 되었다. 경복궁을 비롯한 3대궁은 모두 복원을 시행하고 있으나 경희궁은 그 궁궐들과 함께 이름을 올릴지언정 복원 조차 되지 않았다.
 
* '''숭정전'''(崇政殿) : 광해군 8년(1616년)에 세운 것으로, 경희궁의 정전이다. 숭정전 일곽은 남향한 경사지에 축대를 조성하여 그 위에 건물이 들어서 있다. 숭정전은 행각으로 둘러졌으며, 뒤로는 자경전이 있다. 동ㆍ서 행각은 남에서 북으로 가면서 바닥과 지붕이 단을 이루며 높아지도록 조성되었다. 숭정전은 이중 월대 위에 세운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이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이건되어 본래 건물은 현재 동국대학교 안에 정각원으로 쓰이고 있다. 현 위치의 건물은 1989년 12월 재건 공사를 시작하여 1994년 10월 주변 행각과 함께 완공한 것이다. 2층 윌대 중 상월대의 답도는 정각원에 남아있고, 하월대의 답도는 복원된 경희궁의 숭정전에 있다. 상월대의 답도는 봉황, 하월대의 답도는 공작무늬이다. 철거전 경복궁못지 않게 큰 규모를 자랑했으나 흥화문,숭정전등 주요 건물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철거되어 경복궁의 10/1정도가 되었다. 경복궁을 비롯한 3대궁은 모두 복원을 시행하고 있으나 경희궁은 그 궁궐들과 함께 이름을 올릴지언정 복원 조차 되지 않았다.
* '''자정전'''(資政殿) : 현재 《서궐도안》에 따라 복원되어 있다. 이 건물은 주로 편전으로 쓰였다고 한다. 경희궁의 편전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방형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1617년(광해군 9)에 건립되기 시작했으며 1620년(광해군 12)에 건립되었으며 숙종이 승하한 후에는 빈전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선왕들의 어진이나 위패를 임시로 보관하기도 했다. 그러나 1908~1910년 사이에 경희궁의 몇 안남은 전각들조차 훼손될 때 덩달아 헐렸다가 해방 후 경희궁지 발굴을 통해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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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정전''' : 현재 《서궐도안》에 따라 복원되어 있다. 이 건물은 주로 편전으로 쓰였다고 한다.
* '''태령전'''(泰寧殿) : 태령전은 발굴조사시 유구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서궐도안》의 자정전과 숭정전의 위치를 추정하여 복원하였다. 이 건물은 조선 영조의 어진을 모신 곳이었다. 2000년에 서울시에서 복원하였다. 경희궁의 전각 중 하나로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영조 당시 중수되어 영조의 어진을 봉안했고 영조가 붕어한 후 혼전으로 이용되었다.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던 경희궁 전각 중 하나였으나 일제가 경희궁의 남은 전각 5개 매각할때 같이 매각되었다가 해방 후 발굴, 복원되었다. 복원 이후에는 영조의 진전이었던 점을 반영해 영조 어진 모사본을 봉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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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령전''' : 태령전은 발굴조사시 유구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서궐도안》의 자정전과 숭정전의 위치를 추정하여 복원하였다. 이 건물은 조선 영조의 어진을 모신 곳이었다. 2000년에 서울시에서 복원하였다.
 
 
:이 전각의 뒤편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큰 바위가 있는데 서암(瑞巖)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바위다. 원래는 왕의 기운이 서려 있다고 해서 왕암(王巖)이라고 불렀고 이 때문에 광해군이 이 자리에 경희궁을 지었다는 설도 전해진다. 현재 이름인 서암은 숙종이 상서로운 기운이 서린 곳이라는 의미를 담아 왕암을 서암으로 고쳤다고 한다.
 
 
* '''방공호''' : 1944년 초, 경성중앙전신국의 피폭에 대비하여 중요 통신 유지를 위해 설치된 지하전신국 겸 방공호이다. 왕과 왕비의 침전인 융복전과 회상전이 있던 자리에 콘크리트를 이용해 방공호를 만들었다. 방공호 건설에는 당시 체신국 직원들과 경성중학교의 근로보국대 학생들이 동원되었다. 경성중학교 내에 방공호를 조성할 것이 결정된 뒤 경성중학교 학생들 대부분은 교내 방공호 조성에 투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발파작업은 조선군사령부 공병대가 담당하였고, 작업이나 실무 행정은 전부 체신국에서 담당했다. 서울특별시청은 방공호를 서울역사박물관의 근현대유물 수장고로 활용하기로 하고 2014년 수장고 준공을 계획하였으나, 2013년 수립된 '경희궁지 종합정비기본계획'에 따라 철거 후 융복전과 회상전을 복원할 계획이다.
 
* '''방공호''' : 1944년 초, 경성중앙전신국의 피폭에 대비하여 중요 통신 유지를 위해 설치된 지하전신국 겸 방공호이다. 왕과 왕비의 침전인 융복전과 회상전이 있던 자리에 콘크리트를 이용해 방공호를 만들었다. 방공호 건설에는 당시 체신국 직원들과 경성중학교의 근로보국대 학생들이 동원되었다. 경성중학교 내에 방공호를 조성할 것이 결정된 뒤 경성중학교 학생들 대부분은 교내 방공호 조성에 투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발파작업은 조선군사령부 공병대가 담당하였고, 작업이나 실무 행정은 전부 체신국에서 담당했다. 서울특별시청은 방공호를 서울역사박물관의 근현대유물 수장고로 활용하기로 하고 2014년 수장고 준공을 계획하였으나, 2013년 수립된 '경희궁지 종합정비기본계획'에 따라 철거 후 융복전과 회상전을 복원할 계획이다.
 
* '''융복전'''(隆福殿) : 광해군 12년(1620년)에 경희궁 창건 때 세운 것으로, 경희궁의 침전이었다. 현종 시기 승하한 인선왕후 장씨의 빈소로도 사용했고 숙종이 승하한 장소이기도 했다. 1829년(순조 29년) 10월에 회상전에서 일어난 화재로 경희궁 내전 일곽 대부분이 불 탈 때, 함께 소실되어 1831년(순조 31년) 4월에 재건했고 이 때 기존과는 약간 변화가 생겼다. 1860년대 고종 시기 경복궁 중건을 위해 경희궁 건물들을 거의 전부 헐어 자재로 사용할 때 철거되었다. 서궐영건도감의궤을 보면 정면 6칸으로 되어있었고 지붕이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無樑閣) 형태로 되어있었다.
 
* '''융복전'''(隆福殿) : 광해군 12년(1620년)에 경희궁 창건 때 세운 것으로, 경희궁의 침전이었다. 현종 시기 승하한 인선왕후 장씨의 빈소로도 사용했고 숙종이 승하한 장소이기도 했다. 1829년(순조 29년) 10월에 회상전에서 일어난 화재로 경희궁 내전 일곽 대부분이 불 탈 때, 함께 소실되어 1831년(순조 31년) 4월에 재건했고 이 때 기존과는 약간 변화가 생겼다. 1860년대 고종 시기 경복궁 중건을 위해 경희궁 건물들을 거의 전부 헐어 자재로 사용할 때 철거되었다. 서궐영건도감의궤을 보면 정면 6칸으로 되어있었고 지붕이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無樑閣) 형태로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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