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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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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5대궁궐 분포

궁궐(宮闕)은 임금과 그의 가족 및 그들의 생활을 돌보는 사람들이 사는 집을 말한다. 궁전(宮殿), 궁실(宮室), 대궐(大闕), 어궐(御闕), 왕궁(王宮) 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들 용어는 넓은 의미로 볼 때 같은 뜻으로 해석되고 있다.

궁전은 때로는 정부 청사나 고위급 간부의 관저로도 쓰인다. 유럽에서는 귀족적 상징으로서 현재까지 많은 관광객을 불러모으는 핵심 요소가 되고 있으며 아시아 건축에서도 궁궐은 빼놓을 수 없는 건축의 핵심이다. 다만 궁궐이란 것은 정부 관저의 의미보다는 고대 혹은 봉건제 왕조가 건축한 양식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현대에 와서 궁전은 각국의 박물관, 호텔 등으로 쓰이고 있다.

동양에서는 궁궐과 궐, 궁, 궁전은 그 의미가 다르다. 궁궐은 "궐"이라고도 부르며, 황제 또는 독립국의 군주가 정무를 보는 정궁을 뜻하며, 그보다 한 단계 격이 낮은 건축물을 "궁"이라고 부른다. 또한 동양에서 궁전은 궁이나 궐 전체보다는 그 안의 전각을 가리키는 명칭이며, 이는 서양에서 일컫는 궁전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개요[편집]

왕권국가에서 임금의 권력은 절대적인 것으로 궁중의 생활은 그를 중심으로 엄격한 규범 아래 행하여져 왔으며, 생활양식도 가장 세련되고 화려하였다.

궁궐이란 용어는 궁(宮)과 궐(闕)의 합성어로서 궁이란 천자나 제왕, 왕족들이 살던 규모가 큰 건물을 일컫고, 궐은 본래 궁의 출입문 좌우에 설치하였던 망루를 지칭한 것으로, 제왕이 살고 있던 건축물이 병존하고 있어서 궁궐이라 일컫게 되었다.

≪사원 辭源≫에 보면 "궁궐은 같은 말로 궁전이라 한다. 궁문(宮門) 밖에는 두 개의 궐이 있어 옛날에는 궁궐이라 하였는데, 그 내용을 말함에는 궁전이라 하고 그 외관을 말함에는 궁궐이라 한다(猶言宮殿 宮門外有兩闕 古稱宮闕 又就其內容言則曰宮殿 就其外觀言之則曰宮闕)."고 정의하고 있다. 궁궐은 지배계급인 제왕이나 영주의 정무(政務) 및 일상생활에 가장 적합한 전유공간(專有空間)으로서 당대를 대표할 수 있는 최상급 건축물이었다.

기능별로는 정사(政事)를 위한 정무건축 공간과 일상생활을 위한 생활건축 공간, 그리고 휴식과 정서를 위한 정원건축 공간으로 대별할 수 있다. 이들 세 공간구역은 시대와 지형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한 궁장(宮牆)구역 안에서 유기적으로 배치하여 건물과 건물 사이를 연결시켜 주는 동선(動線)이 단절되지 않도록 구성하였다.

배치형식은 고대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정사를 목적으로 한 건물군을 앞에 배치하고 생활건축군을 뒤편에 배치하는 전조후침(前朝後寢) 형식이 통례로 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배치법은 중국이나 일본의 궁궐 배치에서도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궁궐의 구성요소에는 궁궐을 둘러싸는 방형(方形)이나 장방형(長方形)의 외벽 설비가 있었고, 이 외벽은 높고 넓은 석담(石墻)이나 토담(土墻)으로 둘러쳐져 있으며, 외벽 4주(四周)에는 궁문(宮門)을 설치하였다. 궁역(宮域)은 정무건축군을 전면 중앙에 배치하여 정전(正殿)을 중심건물로 하여 그 주위에 정방형 또는 장방형의 회랑(回廊)을 세워 4주 회랑에는 각각 문을 설치하였고, 이 정무건축 뒤편에는 침전(寢殿)과 내전(內殿) 등을 두고, 이곳 역시 회랑으로 둘러막는 것이 일반적인 배치형식이었다.

휴식과 정서를 위한 후원(後苑), 즉 정원건축은 누각(樓閣)·정사(亭榭) 등의 건축물과 연못·조산(造山)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위치는 궁역의 동쪽이나 서쪽, 혹은 북쪽에 자리잡아 일상생활 공간과 밀접한 관계를 맺도록 하는 것이 통례였다.

궁궐의 역사[편집]

조선시대 이전의 궁궐건축은 지상건축 유구(遺構)가 현존하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문헌에 나타난 궁궐건축의 관계자료와 그들 유지(遺址)에서 밝혀진 조사 내용을 통해 당시의 궁궐건축의 실상을 일부 알 수 있다.

고구려시대의 궁궐[편집]

고구려의 궁궐건축은 만주 통구(通溝)의 국내성(國內城)과 평양안학궁(安鶴宮) 유지에서 그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국내성의 경우에는 일부 초석이나 기와조각만으로는 궁지(宮址) 내용을 확실히 알 수 없고, 평양의 안학궁은 근년 발굴된 조사 내용으로 그 배치형식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궁궐에 대한 기록이 동명성왕·유리왕·봉상왕·광개토왕·평원왕조(條)에 보이고 있으며, 그 내용은 궁궐과 이궁(離宮)을 건설하거나 증축, 수리하였다는 기록이다. 봉상왕조에는 특히 "임금이란 백성이 우러러보는 바이니, 궁전이 장엄하고 화려하지 못하면 어떻게 위엄을 보일 수 있겠는가(君者百姓之所瞻望也 宮室不壯麗無以示威重)."라는 구절이 있어 궁궐의 규모와 내용이 장엄하고 화려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안학궁은 발굴조사 결과 궁역 범위와 전당(殿堂) 및 회랑·문지(門址) 등의 배치형식이 밝혀졌으며, 건물 수도 52개소나 확인되었다. 이곳은 평양 대성산(大城山) 기슭에 위치한 궁궐로 남북 및 동서 길이 약 620m의 방형 궁성을 돌리고, 그 안에 남북 방향의 3개 축(軸)을 기준으로 건물을 배치하였다.

궁의 배치는 3개의 남북축 가운데 중심이 되는 중심축에는 남쪽으로부터 외전·내전·침전 등의 구역을 차례로 배치하고 외전의 동쪽과 서쪽에는 각각 같은 규모의 동·서전을 둔, 중심축 기준의 완전 대칭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궁궐의 동북쪽에는 별도로 동궁(東宮)으로 생각되는 전당이 한 구역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 동궁 앞에는 정원이 마련되고 침전 뒤편 북쪽에는 인공의 조산을 만들어 후원 시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시대의 궁궐[편집]

백제의 궁궐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서기전 4년(온조왕 15) 한도(漢都)에 세웠던 신궁(新宮)이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았다(儉而不陋 華而不侈)."는 기사로 미루어 초창기의 궁궐건축은 소박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391년(진사왕 7)에 궁전을 수리하고 연못을 파서 그 속에 산을 만들고 기이한 금수(禽獸)와 초목(草木)을 길렀다는 기록을 보면 그 당시 궁궐건축의 화려함과 조경술(造景術)의 수준을 알 수 있다.

웅진(熊津)으로 수도를 옮긴 뒤 동성왕은 궁궐 동쪽에 임류각(臨流閣)을 지었는데 그 높이가 50여 척(尺)이었다고 하며, 연못을 파고 기이한 새들을 기르게 하므로, 신하들이 상소로 항의하였으나 왕은 회답하지 않고 오히려 궁문을 닫기까지 하였다는 것을 보면, 궁궐의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538년(성왕 16)에는 사비(泗沘 : 오늘의 부여)로 수도를 옮기고 도성(都城) 안에는 사비궁(泗沘宮)·망해궁(望海宮)·황화궁(皇華宮)·태자궁(太子宮) 등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 그 실상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따르면, 634년(무왕 35) 궁궐 남쪽에 땅을 파고 20여리의 거리에서 물을 끌어들이고 연못 연안에는 나무를 심었으며, 못 안에는 섬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기록들을 통하여 백제에도 고구려에 뒤떨어지지 않는 권위와 장엄함, 그리고 호사함을 갖춘 궁궐건축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신라시대의 궁궐[편집]

신라시대 궁궐건축은 박혁거세가 처음 왕위에 올랐을 때 궁궐을 남산 서쪽 기슭 고허촌(高墟村)에 만들고, 서기전 37년(혁거세 21)에는 금성(金城) 안에 궁궐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101년(파사왕 32)에는 월성(月城)을 만들고 궁궐을 그곳으로 옮겼으며, 249년(첨해왕 3)에는 남당(南堂)이라는 정청(政廳)이 건축되었다. 또 585년(진평왕 7)과 622년에는 대궁(大宮)·양궁(梁宮)·사량궁(沙梁宮)을 만든 뒤, 내성(內省)을 두어 3궁(三宮)을 장악하게 하였다.

그 뒤 651년(진덕왕 5)에는 조원전(朝元殿)에서 왕이 백관의 하례를 받았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어, 중요한 의식행사를 하던 궁궐이 건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유구(遺構)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통일신라시대의 궁궐[편집]

통일신라시대의 궁궐건축은 삼국을 통일한 통일국가답게 더욱 융성, 발전되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674년(문무왕 14) "궁내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짐승을 길렀다."고 하며, 679년에는 궁궐을 중수하였는데 매우 장려하였다고 한다.

궁궐건축의 이름을 보면 임해전(臨海殿, 674)·강무전(講武殿, 677)·좌사록관(左司祿館, 677)·우사록관(右司祿館, 681)·숭례전(崇禮殿, 687)·영창궁(永昌宮, 727)·서란전(瑞蘭殿, 800)·동궁만수방(東宮萬壽房, 804)·평의전(平議殿, 811)·월지궁(月池宮, 822)·월정궁(月正宮)·내황전(內黃殿)·요석궁(瑤石宮)·나궁(古奈宮) 등이 있고, 문루(門樓)로는 임해문(臨海門)·인화문(仁化門)·귀정문(歸正門)·현덕문(玄德門)·무평문(武平門)·준례문(遵禮門)·월상루(月上樓)·망은루(望恩樓)·명학루(鳴鶴樓)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궁궐건축은 현존하지 않으며, 유지로서 확인된 것은 1975년 발굴조사된 안압지(雁鴨池) 주변 유적뿐이다. 안압지 주변에서는 총 30개소의 건물터가 확인되었는데, 건물의 배치는 남북 중심축을 기준으로 하여 좌우대칭 형식이었다. 연못가의 건물터는 연못과의 조화를 위하여 대칭을 약간 변형시킨 특징을 가지고 있으나 궁궐 배치의 좌우대칭 기본형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고려시대의 궁궐[편집]

고려시대의 궁궐건축은 개성 만월대(滿月臺)에 남아 있는 궁궐터의 초석과 석축유구 자료를 기초로 문헌과 비교하여 대략의 형식을 알 수 있다. ≪고려도경 高麗圖經≫에 따르면, 궁궐은 송산(崧山)에 의지하여 고목이 우거져 있어 원경이 악묘(嶽廟)나 산사(山寺)에 가까운 느낌이 있고, 담담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또 궁성 주위에는 13개의 문이 있어 광화문(廣化門)이 정동(正東)의 문으로 긴 거리와 통하고, 전문(殿門)은 15개인데 신봉문(神鳳門)이 가장 화려하다고 하였으며, 외전의 중심건물인 회경전(會經殿)을 비롯하여 장화전(長和殿)·원덕전(元德殿)·건덕전(乾德殿)·연영전각(延英殿閣) 등을 설명하고 있다.

만월대의 궁궐 특징은 평지가 아닌 구릉지대에 건물을 배치한 점이며, 궁궐의 중심이 되는 외전·내전·침전 등의 건물군이 남북의 동일 중심축에 배치되지 않은 점이다. 즉, 회경전을 중심으로 한 외전 일곽과 장화전을 중심으로 한 내전 일곽 및 뒤편의 침전 일곽이 지형에 맞추어 축을 달리하고 있다. 건축의장은 건물에 단청이 되어 있고 구리로 꽃무늬를 만든 동화(銅花)로 꾸며져 웅장하고 화려하였다고 한다.

후원의 조경도 괴석(怪石)을 모아 선산(仙山)을 만들고, 물을 끌어들여 샘과 연못을 만들었으며, 이름난 꽃과 기이한 나무를 심어 매우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었다. 특히 ≪고려사≫에 보면, 의종은 왕궁 동쪽에 이궁(離宮)을 만들고 태평정(太平亭)·관란정(觀蘭亭)·양이정(養怡亭)·양화정(養和亭) 등의 누정(樓亭)을 지었으며, 양이정에는 청자기와를 덮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당시 궁궐의 화려함을 짐작할 수가 있다.

조선시대의 궁궐[편집]

조선시대 궁궐건축으로 대표적인 것은 경복궁·창덕궁·창경궁·덕수궁(일명 경운궁) 등이다. 경복궁은 이들 궁궐 중 정궁(正宮)으로서 주위에 궁장을 쌓아 전체 평면이 남북 방향으로 긴 장방형이며, 정남 중앙에 광화문(光化門), 동쪽과 서쪽에 건춘문(建春門)과 영추문(迎秋門)을 세우고 북쪽에는 신무문(神武門)을 배치하였다.

정남의 광화문을 들어서면 홍례문(弘禮門)이 있고, 영제교(永濟橋)를 지나 외전 정문인 근정문(勤政門)에 다다른다. 근정전(勤政殿) 일곽을 회랑의 보간이 2칸인 복랑(複廊)이 장방형으로 둘러막아 외전공간을 만들었으며, 그 내정(內庭) 북쪽으로 치우쳐 궁궐 정전(政殿)인 근정전이 남향해서 자리잡고 있다.

이 근정전 일곽 뒤편에는 사정전(思政殿) 구역과 강녕전(康寧殿)·교태전(交泰殿)이 자리잡고 있어, 광화문에서 교태전까지의 중요 건물이 남북 중심축상에 배치되고 좌우 일곽들이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강녕전 이북의 건물은 일제 강점기에 헐려 현존하는 것이 없다.

현존하는 건물은 근정전 일곽의 건물들, 사정전·천추전(千秋殿)·자경전(慈慶殿)·경회루(慶會樓)·수정전(修政殿)·함화당(咸和堂)·집경당(絹敬堂)·향원정(香遠亭)·집옥재(集玉齋) 등이며, ≪궁궐지 宮闕志≫에 보이는 160여 전각(殿閣)의 7,300여칸의 규모는 그 유지만이 남아 있다. 경복궁의 후원은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누어 배치하였는데, 그 하나는 궁역 서쪽의 경회루 지역이며, 다른 하나는 궁역 북쪽의 향원정 지역이다. 경회루 지역은 왕실의 권위를 과시한 대외적 정원이며, 향원정 지역은 대내적 정원으로 꾸며졌다.

창덕궁은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에서 가장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별궁이다. 1405년(태종 5) 이궁으로 창건되고,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 하여 일명 동궐(東闕)이라 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전소된 것을 1611년(광해군 3)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창덕궁은 다른 궁궐과는 대조적으로 자연적인 지형과 산세(山勢)에 따라 전각을 배치하고 자연과 인공을 무리없이 조화시킨 점에 그 특징이 있다.

궁궐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을 들어서면 동북쪽으로 정전인 인정전(仁政殿) 일곽이 있고, 이 일곽 동서 양쪽에는 비대칭으로 선정전(宣政殿)과 선원전(璿源殿)을 배치하였으며, 침전은 인정전 일곽의 중심축과 다른 보조축을 만들어 선정전 동북쪽에 배치하였다. 그러나 중심축과 보조축의 결합과 연결은 합리적으로 조화되었으며, 동선상의 무리가 없도록 하였다.

특히 후원인 비원(祕苑)의 누각과 정사(亭榭)들은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며 선경(仙景)에 가까운 비경(祕景)으로 만들어 자연순응의 법칙을 최대한 발휘한 조선시대 궁궐의 대표적 정원이다.

창경궁은 1483년(성종 14) 고려 수강궁(壽康宮)터에 세운 궁궐로 임진왜란 때 전소한 것을 1616년(광해군 8) 다시 중건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창경궁은 정전인 명정전(明政殿) 일곽이 궁궐 배치의 기본형식인 남향 배치가 아닌 동향이고, 중심축인 동서축보다 남북축이 더욱 긴 것이 특징이다.

궁장으로 둘러싸인 궁역은 동쪽 중앙부에 위치한 중층누문(中層樓門)인 홍화문(弘化門)을 통하여 출입하고, 이 문을 지나 옥천교(玉泉橋)를 건너면 정무구역의 입구인 명정문(明政門)에 다다르게 된다.

명정문 좌우에는 장랑(長廊)이 길게 남북으로 놓여 동서 방향의 회랑과 만나고, 명정문을 들어서면 명정전 앞에 내정이 펼쳐지고 서북쪽에 정전인 명정전이 동향으로 위치하여 정무구역을 형성하고 있다. 정침(正寢)인 환경전(歡慶殿)과 경춘전(景春殿)을 비롯한 내전들은 정전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내전들의 뒤편에는 멀리 성밖의 시가지가 보이고, 남산을 비롯한 산천이 바라보이는 밝고 높은 언덕인 통명전(通明殿) 언덕과 북쪽의 환취정(環翠亭)을 중심으로 후원이 형성되어 있다.

정궁인 경복궁의 남쪽에 위치한 덕수궁은 처음부터 궁으로 조성된 것이 아니고 왕족의 사저(私邸)로 쓰이던 것을 궁으로 개조한 것이다. 이곳이 본격적으로 궁의 모습을 갖춘 것은 고종이 궁궐로 사용하면서부터이다. 덕수궁의 배치를 보면 남북 중심축상에 정전인 중화전(中和殿)·중화문(中和門)을 비롯하여 석어당(昔御堂)·즉조당(卽祚堂)·대한문(大漢門) 등이 있는데, 다른 궁궐에 비하여 궁장을 두른 기지(基地)나 내전의 여러 전각 배치가 산만한 느낌이 있다. 이는 덕수궁이 원래 민간 가옥이었던 것을 궁궐로 용도를 바꾼데다가 임진왜란 때 피난에서 환도하여 임시궁궐로 거처하였던 탓이라 생각된다.

그 밖에 조선시대의 궁궐로는 경희궁을 들 수 있다. 현재는 그 광대한 궁궐터가 완전히 변하여 옛 모습을 확인할 길이 없고, 다만 궁의 석축과 계단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전시대(全時代)를 통해 볼 때 우리 나라 궁궐건축의 중추적 공간은 배치와 건물 형태에 있어서 유가적(儒家的) 사상이 기본이 되어 엄격한 위계성이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이후로는 부속공간 구성이 도가적(道家的) 사상에 더욱 접근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이 두 사상이 결국 구체적으로 조형예술과 건축 등의 대상을 통해 구현되었다.

조선 5대 궁궐 소개[편집]

경복궁 전경
창경궁(昌慶宮) 전경
창덕궁(昌德宮)
현재 남아있는 경희궁 전경

궁궐은 정치, 외교, 문화의 중심이자 왕실 가족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한 나라의 도성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조선은 유교적 정치이념과 풍수지리 사상에 바탕하여 수도와 궁궐터를 정했다. 조선의 수도인 한양백악산, 목멱산, 타락산, 인왕산을 경계로 하고 있다. 백악산 아래 법궁인 경복궁 이외의 다른 궁궐들도 이후에 조성되었으며, 왕은 시대적 상황이나 필요에 따라 여러 궁궐을 옮겨 가며 사용하였다.

서울에는 조선의 5대 궁궐인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이 있다. 궁은 임금과 신하들이 만나 나랏일을 보고 임금과 그 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을 말한다. 궐은 궁을 지키기 위해 에워싸고 있는 담장과 망루, 출입문 등을 일컫는다. 궁궐은 기능과 역할에 따라 크게 세 개의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조정의 관료들이 업무를 보는 관청이 있는 외조, 임금이 신하들과 정치를 행하는 구역인 치조, 왕비 등 임금과 그 가족이 생활하는 공간인 연조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의 임금들은 왕릉에 참배하러 갈 때나 특별한 행사를 제외하고는 궁궐 안에서 대부분의 주요한 일을 처리했다. 그런 의미에서 궁궐은 조선 왕조사를 거의 다 담고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의 궁궐은 나름의 독창적인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또 궁궐을 짓고 수리를 할 때마다 백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검소하게 지어야 함을 강조한 조선 임금들의 애민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5개 궁궐 중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전된 창덕궁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동아시아 궁전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인 궁으로 주변 자연환경과의 완벽한 조화와 배치가 탁월하다고 평가했다.

대한민국 수립 후 정부는 궁궐을 원형대로 복원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일제가 경복궁의 정전인 경복궁 근정전을 가로막아 지은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헐린 전각과 문루들을 단계적으로 복원하였다.

조선의 시작과 끝, 경복궁[편집]

경복궁(景福宮)은 태조 1년인 1395년 9월, 조선 건국 후 가장 먼저 지어진 궁궐이다. 조선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한양에 새로운 도읍을 만들었다. 경복궁 주변에 국가의 근간이 되는 종묘와 사직을 세웠고 정신적 지주가 되고 교육을 담당할 문묘, 성균관도 만들었다. 하지만 제7대 임금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후 창덕궁으로 옮겨갔고, 후대 임금들도 경복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한양의 모든 궁궐은 다 폐허가 되어버렸다. 전쟁 후 다른 궁궐들은 재건하였지만 경복궁은 길하지 않은 곳이라는 의견이 있어서 제26대 임금 고종이 즉위할 때까지 그대로 방치되었다.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나라의 체통을 바로잡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1895년 경복궁에서 을미사변이 일어났고 이후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다. 이때부터 경복궁은 궁궐로 쓰이지 않았다.

자연친화적 궁궐, 창덕궁과 창경궁[편집]

조선 제3대 임금 태종 때 지어진 창덕궁(昌德宮)은 가장 많은 임금이 머문 궁궐이었다. 창덕궁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애초 지형 위에 지어진 자연 친화적 궁궐이다. 창덕궁의 낙선재는 대한제국 황실의 최후를 함께 한 장소이다. 마지막 황제 순종은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후 주로 낙선재에서 살았고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와 순종의 동생 영친왕의 비 이방자(李方子) 여사,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가 이곳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창덕궁의 후원은, 언덕과 물길, 숲 등 자연물은 인위적으로 바꾸지 않고 거기에 정자 등 휴식 공간을 세워 아름다움을 더한 정원이다. 자연 친화형 정원으로, 한국 전통 정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창경궁(昌慶宮)은 조선 제9대 임금 성종이 세 명의 대비를 위해 지은 궁궐이다. 대비는 대부분 현재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이다. 창경궁은 임진왜란을 비롯한 전란과 몇 차례의 화재 때문에 불타버리고 다시 짓는 일을 거듭해야 했다. 창덕궁처럼 지형의 높고 낮음을 그대로 두고 거대한 암반도 살려서 집을 앉히고 자연적인 정원을 꾸몄다. 1908년에는 한반도를 강제점령한 일본에 의해 전각들이 철거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 자리에 동물원, 식물원 등이 세워지고 일본의 국화인 벚꽃이 가득 찬 일본식 공원이 되고 말았다.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놀이공원으로 남아 있던 창경궁은 1986년에야 다시 궁궐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굴욕의 현장이었던 덕수궁[편집]

덕수궁(德壽宮)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원래 왕족의 집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궁궐이 불타버려서 돌아갈 곳을 잃은 선조가 이 집에 들어와 살았고, 광해군도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광해군은 새로 지어진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이곳에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지어주었고 이후 궁궐 대접을 받게 되었다.

덕수궁이라는 이름은 1907년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을미사변 이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은,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이후 고종은 환구단(圜丘壇)을 세우고 대한제국 황제로 등극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일본은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이에 고종은 다른 나라에 억울함을 호소하려 1907년 헤이그에 밀사를 보냈다. 그런데 일본은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물어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을사늑약과 헤이그 밀사 파견도 모두 경운궁 안에 있는 중명전에서 이뤄졌다. 일본은 새로 즉위한 순종을 창덕궁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이때 순종은 아버지가 사는 경운궁의 궁호를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덕수'는 아버지의 덕을 찬양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다.

명맥만 유지된 경희궁[편집]

1623년에 완성된 경희궁(慶熙宮) 터에는 원래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의 개인 집이 있었다. 그런데 선조의 둘째 아들이며 제15대 임금이었던 광해군은 정원군의 집에 왕의 기운이 서린다는 말을 듣고 그 집을 빼앗아 그 자리에 궁궐을 지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새로 지은 궁궐에서 살아보지도 못하고 왕의 자리에서 쫓겨났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새 왕이 된 사람은 정원군의 아들(인조)이었다. 그런 이유로 많은 사람이 경희궁 터가 정말 '왕기가 서린 곳'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인조는 즉위 초기 창경궁에 머물렀는데 이괄의 난 때 몽진에서 돌아온 인조는 불탄 창경궁 대신 경희궁으로 들어갔다. 이후 경희궁은 조선 후기의 이궁(離宮) 역할을 하게 되었다. 경희궁은 조선의 궁궐 가운데 가장 많이 훼손된 궁궐이다. 일제강점기에 아예 없어졌다가 1980년 이후 일부만 다시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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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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