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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른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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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른베르크 위치

뉘른베르크(독일어: Nürnberg, 영어: Nuremberg)는 독일 바이에른주에 있는 도시이다. 면적은 186.46km², 인구는 약 54만 명이며 바이에른주에서 뮌헨에 이어 2번째로 큰 도시이며 독일 내에서는 14번째로 큰 도시이다. 프랑켄 지방의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이기도 하다. 한때 히틀러 나치의 중심도시이기도 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 전쟁범죄와 인류에 대한 범죄를 처단하기 위해 전범재판이 열렸다.[1]

개요[편집]

뉘른베르크는 독일 남동부에 있는 바이에른주에 속해 있는 도시이다. 마인강의 지류 페그니츠강 우안(右岸)의 해발 3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페크니츠강과 라인-마인-다뉴브 운하가 통과하는 이 도시는 인접한 퓌르트, 에르랑엔시, 바이로이트, 밤베르크와 함께 광역도시권을 이루고 있다. 뉘른베르크 광역도시권에는 인구 355만 명이 살고 있다. 에르랑엔-뉘른베르크대학은 3만 9,000여명의 학생이 다니는데 독일에서는 11번째, 바바리아주에서는 세 번째로 큰 대학이다. 뉘른베르크는 종종 신성로마제국의 ‘비공식적인 수도’라고 불린다. 이는 제국의회와 재판소의 소재지였기 때문이다. 1219년 제국 도시가 되어 제국의회가 열렸으며, 1424∼1796년 제국의 보물이 간직되어 있었으나, 성주에 대한 독립투쟁이 일어나 1427년 시(市)에 성을 매도하였다. 15∼16세기는 예술과 과학의 최성기로서 A.뒤러, 조각가 A.크라프트, V.슈토스, 황동 주조공 P.비셔, 시인 H.작스 등이 활약하였으며, 1525년 종교개혁 때에는 프로테스탄트 쪽에 섰으며, 1532년에는 ‘뉘른베르크의 종교회의’를 체결하는 등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1806년 바이에른령(領)이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연합군에 의한 독일전범의 군사재판이 열렸다. 1945년 전쟁 중에 도시의 90%가 파괴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후 많은 중세식 지역이 재건되었다. 뉘른베르크는 현재는 근대공업의 중심도시이며 교외에는 금속, 전기, 기계, 자동차, 광학기계, 완구, 문방구 등의 공장이 많다. 또 마인강과의 사이에는 운하가 통하여 그 연안을 따라 새로운 공장지대가 형성되었으며 특히 완구박람회가 열리는 도시로 널리 알려졌다. 오랜 제국도시로서 옛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으며, 환상성벽(環狀城壁)과 역사적인 탑, 재건된 성이나 교회가 중세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고딕이나 르네상스의 유명한 건축물로는 화가 A.뒤러의 집과 제바르도스교회, 로렌츠교회, 프라우엔교회 등이 있다. 그 밖에 시청사, 독일자연사박물관, 교통박물관, 천문대, 그리고 경제, 사회과학 학부가 있는 종합대학, 사범대학, 조형미술 아카데미, 응용미술 아카데미 등이 있다. 뉘른베르크 성은 위에 많은 탑이 있는 유럽에서 가장 큰 성 중 하나이다. 뉘른베르크는 2006년 FIFA 월드컵 개최 도시 중 하나였다.[2]

역사[편집]

뉘른베르크는 종종 신성로마제국의 '비공식적인 수도'라고 불린다. 이는 제국의회와 재판소의 소재지였기 때문이다. 뉘른베르크 의회는 제국을 통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재판소의 일이 많아지면서 상업과 무역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11세기 중엽 경 하인리히 3세(Heinrich Ⅲ. 1017~1056)가 뉘른베르크 성과 왕궁을 건조하고 발전했다. 프리드리히 2세 황제는 1219년 뉘른베르크를 황제 직속령으로 인정하고 화폐를 주조할 수 있는 권리와 차별 관세를 부여받는 특혜를 주었다. 도시는 아우그스부르크시와 함께 이탈리아와 북부 유럽 사이를 잇는 주요 무역통로로 성장했다.

14세기에 들어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4세가 이곳에서 제국의회를 소집하는 것을 의무화하면서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의 하나가 되었다. 카를 4세는 고딕 양식의 적벽돌 프라우엔키르헤 교회를 짓고 왕가의 교회로 삼았다. 지기스문트 황제가 제국 휘장을 이곳에 영구히 보관하면서 뉘른베르크는 황실과의 관계가 더욱 강화됐다. 1796년 프랑스군의 침입으로 휘장은 결국 오스트리아 빈으로 옮겨졌다. 이 도시는 15, 16세기에 독일 르네상스의 중심지였다. 1532년 개신교 개혁을 받아들였고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평화협정으로 밤베르크 주교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이 협정으로 신성로마제국 내 군주들은 가톨릭이나 루터교회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됐다.

16세기 들어 무역 경로가 다양해지고 사회 위계질서와 법체계가 무너지면서 뉘른베르크의 경제는 축소하기 시작했고 인구가 절반이나 줄었다. 17세기 30년 전쟁으로 도시가 전쟁의 화마에 휩싸이면서 계속 쇠락해갔다가 19세기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다시 성장했다.

1803년 제국의회에서 자유도시로 인정받았다가 1806년 신성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도시의 부채를 분할 상환하는 조건으로 바바리아 왕국에 편입되어 가톨릭과 개신교가 공존하게 됐다. 1835년 독일의 첫 철도인 바바리아 루트비히 철도가 놓였다. 철도가 놓이고 바바리아 왕국이 독일관세동맹인 촐페라인에 가입하면서 뉘른베르크의 경제발전에 가속도가 붙었다.

나치 정권시절 뉘른베르크는 독일의 중앙이라는 지리적 위치와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중요성이 부여됐다. 1934년 이곳에서 열린 나치 전당대회는 레니 리펜슈탈 여성 감독에 의해 영화로 제작되어 나치운동을 선전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됐다. 항공기, 잠수함, 탱크 엔진 등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중심지였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중 폭격을 심하게 받아 도심의 90%가 공습으로 파괴되었다. 1945년부터 1946년까지 2년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소에서 전쟁범죄와 인류에 대한 범죄를 저지른 독일인을 대상으로 전범재판이 열려 나치당과 군부 지도자 일부가 재판을 받고 처형됐다.[3]

뉘른베르크재판[편집]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영어: Nuremberg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또는 뉘른베르크 전쟁범죄수괴 재판(독일어: Nürnberger Prozess gegen die Hauptkriegsverbrecher)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연합국이 국제법 및 전시법에 따라 거행한 국제군사재판이다. 피고들은 나치 독일의 지도층 및 상급대장 및 원수급 군인으로,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여러 전쟁범죄를 계획, 실행 또는 관여한 혐의로 피소되었다. 독일 뉘른베르크 정의궁에서 진행되었다. 이 재판에서 내려진 결정들은 고전국제법과 현대국제법의 분기점으로 평가받는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은 1945년 11월 20일에서 1946년 10월 1일 사이에 진행되었다. 나치 독일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간주된 정치군사지도자 24인이 피소되었다. 그 중 로베르트 라이는 재판 전 목을 매 자살했고 구스타프 크루프 폰 볼렌 운트 할바흐는 질병 사유로 재판이 연기되어 얼마 후 질병으로 사망했다. 심판 대상이지만 피소되지 않은 인물들도 많은데, 아돌프 히틀러, 하인리히 힘러, 빌헬름 부르크도르프, 한스 크렙스, 요제프 괴벨스, 요제프 테르보펜은 체포되기 직전 또는 체포된 직후 자살했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1942년 체코 저항세력에게 암살(유인원 작전)되었기에 제외되었다. 하인리히 뮐러는 실종되어 현재까지 행방이 묘연한 상태이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이후 미군의 점령지에서 미군이 주재한 군사재판들이 열려 국제군사재판에 피소되지 않은 전범들을 기소했다. 이 미군 주도 재판을 뉘른베르크 계속재판이라고 하며, 의사 재판이나 법관 재판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 재판에서 규정하고 심판된 범죄들은 이후 국제연합에서 전쟁범죄, 인도에 반한 죄, 침략범죄에 관한 법학을 발달시키는 기초가 되었으며, 국제형사재판소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재판에서 연합군 측은 사형수의 신분이 현역 정규 군인인 경우(알프레트 요들 상급대장. 헤르만 괴링 공군원수. 빌헬름 카이텔 육군원수)에는 총살형으로 집행하고 그렇지 않은 나머지들은 교수형으로 집행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소련 수석 판사인 육군소장 신분인 이오나 니키첸코 판사가 나치독일을 증오한 나머지 현역 군인들에 대한 총살형으로 사형을 집행하는 것에 대해서 길길이 날뛰면서 반대하고(알렉산드르 볼치코프 대리 판사도 연합군 측과는 같은 입장이였다.) 군인들도 교수형을 집행할 것을 강하게 요구하여 군인 신분 피고들도 나머지들과 마찬가지로 전원 교수형을 집행하도록 결정하였다. 빌헬름 카이텔의 경우 그의 요구대로 연합군 측도 총살형 집행에는 동의했다고 하는데, 연합군 측이 카이텔의 전쟁범죄를 강조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마저도 이오나 니키첸코 판사가 총살형 집행에 반대했기에 카이텔마저도 교수형으로써 처형당하였다.[4]

기후[편집]

뉘른베르크는 해양성 기후이나 대륙의 영향으로 습한 기후의 특징도 보이고 있다. 도시의 기후는 내륙의 위치와 높은 고도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겨울은 온화하거나 추운 날로 변화가 있다. 겨울 평균 기온은 영하 3°C~4°C이며 여름은 대체로 따뜻하고 밤에는 대부분 13°C~25°C이다. 2월과 4월은 강수량이 적어 다소 건조하고 7월은 강수량이 많은 편이다.[5]

교통[편집]

뉘른베르크-인골슈타트-뮌헨 노선과 뉘른베르크-에르푸르트 노선의 고속철이 운행되고 있다. 도시의 전차(트램)시스템은 1881년 시작되어 현재 총 36km 길이의 6개 노선을 갖추고 있다. 이와 함께 지하철 U-반과 교외철도 S-반이 대중교통을 분담한다. 2008년 이래 세계 최초로 운전자 없는 전철 운행이 시도되고 있다.

네덜란드-프랑크푸르트-뷔르츠부르크-빈을 잇는 A3 고속도로가 동북쪽을 따라, 베를린-뮌헨 고속도로가 동쪽에서, 프랑스-자르브뤼켄-프라하를 잇는 A6 고속도로가 도시 남쪽을 지나간다. 뉘른베르크 공항은 독일과 유럽의 주요 도시를 잇는 항로가 운행되고 있다.

경제[편집]

뉘른베르크 하면 아직도 생강 쿠키, 소시지, 수제 장난감을 연상하는 사람이 많지만 일찌감치 수공업이 발달했다. 열쇠 및 시계 기술자인 페터 헨라인이 16세기에 세계 처음으로 회중시계를 발명해 이곳에서 생산했는데 이 회중시계는 ‘뉘른베르크 달걀’이라고 불렸다. 18세기 말 19세기 초 수작업이 많이 필요한 금속과 유리 제조업 위주로 산업화가 시작됐다. 그 뒤 지멘스나 만(Man)같은 중공업 분야 기업들이 바바리아주에 자리를 잡으면서 본격적인 산업화가 이뤄졌다. 현재 이 도시는 중부 및 동부 유럽 권역에서 전기 장비, 기계, 광학제품, 차량, 출판, 문구 등의 분야의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뉘른베르크 국제 장난감박람회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장난감 박람회로 꼽힌다.

관광[편집]

독일인은 물론 외국인도 많이 찾는 관광도시로 뉘른베르크 성, 성 로렌츠 교회, 나치 전범재판소등이 관광 명소로 꼽힌다. 3개의 타워를 비롯해 여러 개의 건축물로 이뤄진 뉘른베르크 성(일명 제국의 성)에 오르면 뉘른베르크 도시 중심에 위치한 역사적인 건축물을 굽어볼 수 있다. 이와 함께 예술, 문화, 역사, 과학, 기술, 가족 등을 주제로 하는 54개의 박물관이 있어 르네상스시대의 독일 미술품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지구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재를 구경할 수 있다. 미식가의 천국으로 레프쿠헨(크리스마스 쿠키), 지역 맥주, 뉘른베르크 소시지 등 뉘른베르크만의 음식을 즐길 수 있다.[6]

지도[편집]

서유럽 국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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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뉘른베르크〉, 《위키백과》
  2. 뉘른베르크〉, 《나무위키》
  3. 뉘른베르크〉, 《요다위키》
  4.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위키백과》
  5. 뉘른베르크(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6. 뉘른베르크(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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