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편집하기

이동: 둘러보기, 검색

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아이디(ID)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편집을 되돌릴 수 있습니다. 이 편집을 되돌리려면 아래의 바뀐 내용을 확인한 후 저장해주세요.
최신판 당신의 편집
97번째 줄: 97번째 줄:
  
 
== 역사 ==
 
== 역사 ==
[[파일:마오리족 이주.png|썸네일|300픽셀|마오리족은 타이완에서 멜라네시아까지 이주한 다음, 소시에테 제도를 거쳐 동쪽으로 이동한 사람들의 후예라고 알려져 있다. 70여 년에서 265년 동안 이들의 이주는 멈췄지만, 새로운 이주가 시작되었고 이들의 이주는 뉴질랜드의 발견과 정착화로 이어졌다.]]
 
뉴질랜드는 인간이 정착한 가장 마지막 육지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탈산림화의 증거, 그리고 [[마오리족]] 주민들의 미토콘드리아 DNA 변동성은 동부 폴리네시아인들이 1250년부터 1300년 사이에 뉴질랜드를 처음으로 정착했으며 남태평양의 여러 섬들을 거쳐 장기간 항해를 했음을 알게 해 준다. 수 세기가 지난 후, 이 정착자들은 "마오리"라고 알려진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주민들은 "이위"와 "하푸"로 구별되었고, 이들은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경쟁했으며, 때로는 서로 싸우기도 했다. 어느 순간 마오리족은 오늘날 채텀 제도로 알려진 레코후로 이주했고, 이곳에서 마오리족은 그들만의 모리오리 문화를 발전시켰다. 모리오리 주민들은 1835년부터 1862년 사이에 전멸했는데, 이는 타라나키 마오리가 이 지역을 침범해 1830년대부터 이 지역주민들을 노예로 삼았고, 유럽에서 온 질병들도 모리오리 주민들의 죽음에 영향을 미쳤다. 1862년, 모리오리 주민들 중 101명만이 살아남았고, 순수 모리오리 혈통을 가진 마지막 사람은 1933년 사망했다.
 
[[파일:쿡이 그린 뉴질랜드 해안선.jpg|썸네일|200픽셀|left|쿡이 뉴질랜드 첫 방문 때 그린 뉴질랜드의 해안선. HMS 엔데버의 항해과정도 그려져 있다.]]
 
[[파일:와이탕이 조약이 명시된 종이..jpg|썸네일|200픽셀|left|와이탕이 조약이 명시된 종이.]]
 
뉴질랜드에 처음으로 도착한 유럽인은 1642년에 뉴질랜드를 발견한 네덜란드 탐험가 [[아벌 타스만]]과 그의 승무원이었다. 뉴질랜드에 도착했을 당시, 원주민들은 그들을 적대적으로 대했고, 이 결과 선원 4명이 죽고 마오리족 1명이 산탄총에 맞았다. 유럽인들은 이후 뉴질랜드를 방문하지 않았고, 1769년이 되어서야 영국 탐험가 [[제임스 쿡]]이 뉴질랜드의 해안선 대부분을 지도로 그렸다. 쿡 이후 수많은 유럽인들과 북아메리카 사람들이 포경선, 물개잡이 배, 그리고 무역선을 이끌고 뉴질랜드를 방문했다. 그들은 유럽산 음식과 금속 도구, 무기와 기타 제품들을 목제, 마오리 음식, 공예품, 물 등으로 교환했다. 감자와 머스킷의 도입은 마오리족의 농업과 전쟁을 뒤바꿨다. 감자는 믿을만한 식량 보충원으로 제공되어 더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군사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 했다. 이 결과 벌어진 [[머스킷 전쟁]]에서 1801년부터 1840년까지 600회 이상의 전투가 발생했고, 3만 명에서 4만 명 사이의 마오리족이 사망했다. 19세기 초, 기독교 선교사들이 뉴질랜드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대부분의 마오리 인구가 기독교로 개종했다. 한편, 마오리족의 인구는 19세기 동안 약 40% 감소했는데, 질병이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1788년 [[아서 필립]] 대위가 새로운 영국 식민지인 [[뉴사우스웨일스]]의 총독에 임명되었다. 위원회에 따르면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에는 뉴질랜드도 속했다. 영국 정부는 북부 마오리의 청원으로 1832년 [[제임스 버스비]]를 주뉴질랜드 영국 공사관으로 임명했다.1835년 샤를 드 티에리가 프랑스 정착이 임박했으믈 선언한 이후, 혼란스러웠던 뉴질랜드 부족연합은 [[윌리엄 4세]]에게 뉴질랜드 독립선언서를 제출하고 보호를 요청했다. 불만은 지속되었고, 마오리족에게 땅을 사기 위해 감독관들을 태운 배를 이미 파견한 뉴질랜드 회사의 정착 제안과 뉴질랜드 독립선언서의 미심쩍은 법적 지위로 인해 식민성은 윌리엄 홉슨을 파견하였다. 윌리엄 홉슨은 뉴질랜드의 영유권을 영국이 주장하게 하고 마오리족과 협상을 하기 위해 파견된 것이었다. 1840년 2월 6일 아일랜즈 만에서 와이탕이 조약이 처음으로 체결되었다. 뉴질랜드 회사가 웰링턴에 독자적인 정착촌을 세우려고 하고 프랑스 정착민들이 아카로아에 땅을 구입하자, 마오리족이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와이탕이 조약의 복사본이 뉴질랜드 각지를 돌아다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홉슨은 1840년 5월 21일 영국이 뉴질랜드 전체의 영유권을 소유한다고 선언했다. 와이탕이 조약의 체결과 영유권 주장으로 이민자의 수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뉴질랜드는 '''와이탕이 조약''' 이후에도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의 일부로 남아있었지만, 1841년 7월 1일 왕령 식민지인 뉴질랜드 식민지로 분리되었다. 1843년 와이라우 학살 이후 영유권에 대한 의견 충돌과 땅 문제로 인해 식민지 정부와 마오리족 사이의 전쟁이 발발했다. 주로 북섬에서 발발한 이 분쟁에서 수천 명의 제국군과 영국 해군이 뉴질랜드에 파견되었고 이 전쟁은 이후 뉴질랜드 전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뉴질랜드 전쟁 이후 정착민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마오리족의 땅은 정부에 의해 압수되었다.
 
[[파일:1863년 호크스베이 지방에 사는 유럽계 및 마오리 주민들의 만남..jpg|썸네일|300픽셀|1863년 호크스베이 지방에 사는 유럽계 및 마오리 주민들의 만남.]]
 
1852년 뉴질랜드 헌법에 따라 뉴질랜드는 대의 정치를 시작하였고, 1854년에는 뉴질랜드 최초의 의회가 개설되었다. 1856년 뉴질랜드 식민지는 자치가 가능해졌고 원주민 정책을 제외한 모든 국내 문제의 책임을 인계받았다. 원주민 정책은 1860년대에 인계되었다. 남섬이 또 다른 식민지가 될 것을 우려하여 뉴질랜드 제4대 총리인 알프레드 도멧은 뉴질랜드의 수도를 오클랜드에서 쿡 해협 인근으로 이전할 것을 제안했다. 웰링턴이 수도의 중심으로 선정되었고, 1865년부터 웰링턴에 의회가 자리 잡았다.
 
 
1891년 뉴질랜드 자유당이 뉴질랜드에서 처음 설립된 정당으로 집권에 성공했다. 리처드 세던이 재임 기간의 대부분 동안 자유당 정부를 이끌었고, 자유당 정부는 뉴질랜드의 중요한 사회적, 경제적 법안을 통과시켰다. 1893년 뉴질랜드는 세계에서 최초로 모든 여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했고 1894년 산업 조정 및 중재법을 제정하여 고용주와 노동연합 간의 중재를 의무화했다.
 
 
1907년, 뉴질랜드 의회의 요청에 따라 에드워드 7세는 뉴질랜드를 [[대영제국]]에 속한 자치령으로 선언하고, 뉴질랜드의 자치 상황을 반영했다. 1947년 뉴질랜드 의회는 1931년 제정된 웨스트민스터 헌장을 채택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영국 의회가 뉴질랜드 의회의 동의 없이 뉴질랜드와 관련된 법을 제정하는 것을 금지했다.
 
 
20세기 초, 뉴질랜드는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고, 대공황을 겪으면서 여러 국제 사건에 관여하게 되었다. 대공황으로 인해 뉴질랜드에서는 노동당 정부가 선출되었으며, 포괄적인 복지국가를 표방하게 되었고 보호무역 경제가 수립되었다. 뉴질랜드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번영하게 되었고 마오리족은 전통적인 삶을 버리고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도시로 이사하기 시작했다. 마오리 항의운동이 발전하였고, 항의운동은 마오리 문화와 와이탕이 조약의 더 넓은 인정을 위해 일하고,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했다. 1975년 와이탕이 조사위원회가 와이탕이 조약의 논란 항목들을 조사하기 위해 설립되었고, 1985년 역사적인 불만의 원인들을 조사할 수 있게 되었다. 뉴질랜드 정부는 와이탕이 조약의 주장과 정착문제에 대해 많은 이위들과 협상을 하고 있지만, 마오리족의 해저 및 해안에 대한 주장은 2000년대 논란이 되기도 했다.
 
 
2021년에는 마오리 신년 축제인 마타리키를 공휴일로 추가했다. 이 날은 뉴질랜드 최초의 음력 (마오리력) 공휴일로, 매년 6월 하순에서 7월 중순 사이에 와서 6월 첫째 주 월요일 여왕 탄신일에서 10월 넷째 주 월요일 노동절까지 5개월 가량 공휴일이 없는 현상을 완화하는 효과를 볼 수 있다. 연휴를 보장하기 위해 항상 금요일에 오게 된다. 첫 마타리키 휴일은 2022년 6월 24일이다. 2022년부터 30년 동안 마타리키는 10번, 7월에 20번 온다고 한다.
 
  
 
== 정치 ==
 
== 정치 ==

해시넷에서의 모든 기여는 다른 기여자가 편집, 수정, 삭제할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해시넷:저작권 문서를 보세요).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