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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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임시정부 국기.jpg|썸네일|300픽셀|'''대한민국 임시정부'''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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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사모아 국기.jpg|썸네일|300픽셀|'''사모아''' 국기]]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는 1919년 발표된 [[3·1 독립선언서]] 및 [[3·1 운동]]에 기초하여 [[일본제국]]의 [[대한제국]] 침탈과 식민 통치를 부인하고 [[한반도]] 내외의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대한민국]]의 [[망명정부]]이다. 간략히 '''임정'''이라고 한다. 1919년 4월 11일 [[중화민국]] [[상하이시]]에서 수립되었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해산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는 1919년 발표된 [[3·1 독립선언서]] 및 [[3·1 운동]]에 기초하여 [[일본제국]]의 [[대한제국]] 침탈과 식민 통치를 부인하고 [[한반도]] 내외의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대한민국]]의 [[망명정부]]이다. 간략히 '''임정'''이라고 한다. 1919년 4월 11일 [[중화민국]] [[상하이시]]에서 수립되었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해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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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민의회]](노령 임시정부)는 1919년 3월 17일(2월 25일이라는 설도 있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군명(제1설), [[문창범]](제2설), [[이동휘]](제3설)의 주도하에 전로한족중앙총회(全露韓族中央總會)를 개편하여 설립한 첫 임시정부이다.
 
[[대한국민의회]](노령 임시정부)는 1919년 3월 17일(2월 25일이라는 설도 있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군명(제1설), [[문창범]](제2설), [[이동휘]](제3설)의 주도하에 전로한족중앙총회(全露韓族中央總會)를 개편하여 설립한 첫 임시정부이다.
  
===상해 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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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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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의 민족지도자들이 [[파리 강화회담]]에 대표를 파견하는 과정에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독립운동 방안을 논의하던 중, 1919년 4월 초 서울에서 망명한 인사들로부터 [[한성정부]] 수립 추진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영향을 받은 상하이 민족지도자들은 1919년 4월 10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金神父路)에서 각 지역의 교포 1천여 명과 신한청년당이 주축이 되어 29인의 임시의정원 제헌의원이 모여 밤새 논의를 시작했다. 그 결과 13도 대표로 [[임시 의정원]]을 구성하였고, 임시 의정원은 한성정부의 각료구성을 수정하는 형식으로 절차를 밟아 나갔다.
[[파일: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jpg|썸네일|200픽셀|'''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
 
 
 
중국 [[상하이]]의 민족지도자들이 [[파리 강화회담]]에 대표를 파견하는 과정에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독립운동 방안을 논의하던 중, 1919년 4월 초 서울에서 망명한 인사들로부터 [[한성정부]] 수립 추진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영향을 받은 상하이 민족지도자들은 1919년 4월 10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金神父路)에서 각 지역의 교포 1천여 명과 [[신한청년당]]이 주축이 되어 29인의 임시의정원 제헌의원이 모여 밤새 논의를 시작했다. 그 결과 13도 대표로 [[임시의정원]]을 구성하였고, 임시의정원은 한성정부의 각료구성을 수정하는 형식으로 절차를 밟아 나갔다.
 
  
 
1919년 4월 11일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민주공화제'를 골간으로 한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채택한 뒤 선거를 통해 국무원을 구성했다. 행정수반인 국무총리에 [[이승만]]을 추대하고, 내무총장에 [[안창호]], 외무총장에 [[김규식]], 군무총장에 [[이동휘]], 재무총장에 [[최재형]], 법무총장에 [[이시영]], 교통총장에 [[문창범]] 등 6부의 총장을 임명한 뒤, 4월 11일 상해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1919년 4월 11일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민주공화제'를 골간으로 한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채택한 뒤 선거를 통해 국무원을 구성했다. 행정수반인 국무총리에 [[이승만]]을 추대하고, 내무총장에 [[안창호]], 외무총장에 [[김규식]], 군무총장에 [[이동휘]], 재무총장에 [[최재형]], 법무총장에 [[이시영]], 교통총장에 [[문창범]] 등 6부의 총장을 임명한 뒤, 4월 11일 상해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한성정부===
 
===한성정부===
1919년 4월 2일 한남수(漢南洙), [[홍진]](홍면희), [[이규갑]](李奎甲), [[김사국]](金思國) 등은 13도 대표들을 비밀리에 인천 각국공원(만국공원)으로 불러 대표자 회의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한성정부 각 책임자 명단을 선정한 후, 4월 8일 강대현을 파견하여 임시헌법초안과 각원 명단을 상하이로 전달하였다. 이후 1919년 4월 중순 홍진과 이규갑 등은 상하이로 건너가 활동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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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 2일 한남수(漢南洙), [[홍진]](홍면희), [[이규갑]](李奎甲), [[김사국]](金思國) 등은 13도 대표들을 비밀리에 인천 각국공원(만국공원)으로 불러 대표자 회의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한성정부 각 책임자 명단을 선정한 후, 4월 8일 강대현을 파견하여 임시헌법초안과 각원 명단을 상하이로 전달하였다.[1] 이후 1919년 4월 중순 홍진과 이규갑 등은 상하이로 건너가 활동을 시작하였다.
  
 
1919년 4월 23일 경성에서 한성정부(한성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날 독립운동가들은 한성정부를 수립하며 결행한 가두시위의 현수막에 적었던 구호는 '공화국 만세!'였다. 이어서 13도 대표 23명의 이름으로 선포문을 발표하고 이승만을 집정관총재, 이동휘를 국무총리총장으로 하는 민주공화 체제 정부를 선언했다.
 
1919년 4월 23일 경성에서 한성정부(한성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날 독립운동가들은 한성정부를 수립하며 결행한 가두시위의 현수막에 적었던 구호는 '공화국 만세!'였다. 이어서 13도 대표 23명의 이름으로 선포문을 발표하고 이승만을 집정관총재, 이동휘를 국무총리총장으로 하는 민주공화 체제 정부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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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 지도체제의 위기 (1925~1927)====
 
====임정 지도체제의 위기 (1925~1927)====
 
[[파일:김구.jpg|썸네일|200픽셀|김구]]
 
 
 
1925년 3월 23일 후임 대통령으로 취임한 박은식은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개헌한 뒤 7월 7일 사임하였다.
 
1925년 3월 23일 후임 대통령으로 취임한 박은식은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개헌한 뒤 7월 7일 사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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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애국단의 활약 (1931~1932)====
 
====한인애국단의 활약 (1931~1932)====
 
[[파일:윤봉길.jpg|썸네일|200픽셀|윤봉길 선서장면]]
 
  
 
[[김구]]는 국내, [[만주]]와 연락이 되지 않자 미주 동포들에게 편지를 써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였다. [[시카고]] 공동회의 [[김경]], 미주의 [[대한인국민회의]] 안창호와 김호 등, 하와이 [[대한인동지회]]의 이승만, [[멕시코]]의 [[김기창]]과 [[이종오]], [[쿠바]]의 [[임천택]] 등을 비롯한 여럿이 모금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미주 동포들의 호응을 바탕으로 1931년 김구는 보다 직접적인 항일 투쟁을 추진하기 위해 특무 조직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였고, 1931년 12월 13일 [[이봉창]]을 한인애국단 제1호 단원으로 가입시켰다.
 
[[김구]]는 국내, [[만주]]와 연락이 되지 않자 미주 동포들에게 편지를 써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였다. [[시카고]] 공동회의 [[김경]], 미주의 [[대한인국민회의]] 안창호와 김호 등, 하와이 [[대한인동지회]]의 이승만, [[멕시코]]의 [[김기창]]과 [[이종오]], [[쿠바]]의 [[임천택]] 등을 비롯한 여럿이 모금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미주 동포들의 호응을 바탕으로 1931년 김구는 보다 직접적인 항일 투쟁을 추진하기 위해 특무 조직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였고, 1931년 12월 13일 [[이봉창]]을 한인애국단 제1호 단원으로 가입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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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월 23일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의 [[북한]] 입국을 유엔 [[소련]] 대표 [[안드레이 그로미코]]가 거부했다. 제2차 미소공위 때 분열됐던 임정 출신 인사들은 이를 기점으로 이승만의 단선단정론(외교적 통일)을 지지하는 측과 김구·김규식의 남북협상론(자주적 통일)을 지지하는 측으로 정리되어 대립하였다. 김구가 단선단정 노선에서 이탈하자 이승만은 자신의 단선단정론을 초지일관 지지했던 [[한국민주당]]과 연대하기 시작했고, [[김성수]]는 언론에 노출된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1948년 1월 23일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의 [[북한]] 입국을 유엔 [[소련]] 대표 [[안드레이 그로미코]]가 거부했다. 제2차 미소공위 때 분열됐던 임정 출신 인사들은 이를 기점으로 이승만의 단선단정론(외교적 통일)을 지지하는 측과 김구·김규식의 남북협상론(자주적 통일)을 지지하는 측으로 정리되어 대립하였다. 김구가 단선단정 노선에서 이탈하자 이승만은 자신의 단선단정론을 초지일관 지지했던 [[한국민주당]]과 연대하기 시작했고, [[김성수]]는 언론에 노출된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 1948년 1월 26일 김구는 김규식을 방문하여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에서 개진할 의견을 협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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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월 26일 김구는 김규식을 방문하여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에서 개진할 의견을 협의하였다.
* 1948년 1월 28일 김구는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에게 '미소양군이 철수하여 군정의 간섭없이 유엔 치안 하에 자유스러운 선거를 치러야 하며, 남북지도자회의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보냈다.
 
* 1948년 2월 9일 김구와 김규식은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의 크리슈나 메논에게 남북한 동시 총선거 성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재차 제안하였다.
 
* 1948년 2월 10일 김구는 통일정부 수립을 절규하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소함》 이란 제목으로 남한 단독 총선거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단독정부를 중앙정부라고 명명하여 자기위안을 받으려하는 것은 군정청을 남조선 과도정부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사은망념(邪恩忘念)은 해인해기(害人害己)할 뿐이니 통일정부 독립만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
 
* 1948년 2월 26일 유엔은 남한 단독 총선거 실시를 가결하였다.
 
* 1948년 2월 28일 김규식은 "남조선 선거에는 물론 불참하겠다. 그러나 남조선 선거에는 반대치 않겠고 이 앞으로 아무런 정치행동에도 불참하겠다"고 말했다. 반면 3월 15일 민족자주연맹은 한독당과 연계하여 선거반대전선을 모색하였다.
 
* 1948년 3월 1일 김구는 '초대 대통령은 나의 숭배하는 선배인 이승만 박사를 추대하나 남한 단독 총선거에는 응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 1948년 3월 12일 유엔 소총회에서 조선에 가능한 지역만에서라도 총선거를 실시하여 조선의 중앙정부를 수립하자는 미국측 제안이 통과되자 김구, 김규식, 김창숙,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홍명희는 이에 반대하여 총선에 불참한다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
 
* 1948년 4월 12일 국민의회는 주석 이승만, 위원 김성수·지청천을 해임하고 의장에 유림 부의장에 엄항섭을 선임였다.
 
* 1948년 4월 19일 김구 일행은 북한으로 출발했다. 4월 21일 김규식 일행은 [[38선]]을 넘어 북행하였다.
 
* 1948년 4월 23일 남북연석회의에서 '조선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와 '전조선동포에게 보내는 격문'이 결정되었다.  
 
  
: 그리고 4월 25일 평양방송은 이 결정서와 격문을 방송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국내 정계에 일대 파문이 일어났다. 발표된 결의서와 격문이 이때까지 남북협상을 추진해 온 근본이념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발견한 김구·김규식 산하 진영은 그 진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4월 26일 연락원을 급파하였으나 소련측의 입국거부로 인하여 빈손으로 귀경하였다. 같은날 4월 25일 이승만은 선출되지 않은 김구와 김규식은 남한 대표의 자격이 없으며, "남북협상은 소련에게 이용당한 결과"라고 혹평했다. 4월 27일 민족진영 각계는 남북협상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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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월 28일 김구는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에게 '미소양군이 철수하여 군정의 간섭없이 유엔 치안 하에 자유스러운 선거를 치러야 하며, 남북지도자회의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보냈다.[212]
  
* 1948년 4월 30일 평양의 [[김두봉]]의 집에서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의 '4김 회동'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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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2월 9일 김구와 김규식은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의 크리슈나 메논에게 남북한 동시 총선거 성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재차 제안하였다.
: 김두봉의 제의 하에 연백평야에 공급하다 중단된 수리조합 개방문제, 남한으로 공급하다 중단한 전력의 지속적인 송전문제, [[조만식]]의 월남허용문제, 만주 [[여순]]에 있는 [[안중근]]의 유골 국내이장문제 등에 관해 논의하였고, 이에 김일성은 수리조합 개방, 전력 송전에 대해서는 즉석에서 수락하였고, 조만식과 안중근 이장문제는 뒤로 미루었다. 그러나 5월 5일 김구와 김규식이 [[서울]]로 돌아와 5월 6일 국민들에게 이 사실을 발표한 며칠 뒤, 다시 수리조합과 전력송전을 중단하고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결국 남북협상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이들 통일정부수립노선을 택하였던 인사들이 배제되는 결과만을 가져왔다.
 
  
* 1948년 5월 2일 북한은 남북협상을 근거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을 채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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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2월 10일 김구는 통일정부 수립을 절규하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소함》 이란 제목으로 남한 단독 총선거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단독정부를 중앙정부라고 명명하여 자기위안을 받으려하는 것은 군정청을 남조선 과도정부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사은망념(邪恩忘念)은 해인해기(害人害己)할 뿐이니 통일정부 독립만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
* 1948년 5월 5일 오후 8시경 김구·김규식 등은 일행 60여명과 같이 서울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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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2월 26일 유엔은 남한 단독 총선거 실시를 가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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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2월 28일 김규식은 "남조선 선거에는 물론 불참하겠다. 그러나 남조선 선거에는 반대치 않겠고 이 앞으로 아무런 정치행동에도 불참하겠다"고 말했다. 반면 3월 15일 민족자주연맹은 한독당과 연계하여 선거반대전선을 모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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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3월 1일 김구는 '초대 대통령은 나의 숭배하는 선배인 이승만 박사를 추대하나 남한 단독 총선거에는 응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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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3월 12일 유엔 소총회에서 조선에 가능한 지역만에서라도 총선거를 실시하여 조선의 중앙정부를 수립하자는 미국측 제안이 통과되자 김구, 김규식, 김창숙,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홍명희는 이에 반대하여 총선에 불참한다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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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4월 12일 국민의회는 주석 이승만, 위원 김성수·지청천을 해임하고 의장에 유림 부의장에 엄항섭을 선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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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4월 19일 김구 일행은 북한으로 출발했다. 4월 21일 김규식 일행은 38선을 넘어 북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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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4월 23일 남북연석회의에서 '조선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와 '전조선동포에게 보내는 격문'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4월 25일 평양방송은 이 결정서와 격문을 방송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국내 정계에 일대 파문이 일어났다. 발표된 결의서와 격문이 이때까지 남북협상을 추진해 온 근본이념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발견한 김구·김규식 산하 진영은 그 진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4월 26일 연락원을 급파하였으나 소련측의 입국거부로 인하여 빈손으로 귀경하였다. 같은날 4월 25일 이승만은 선출되지 않은 김구와 김규식은 남한 대표의 자격이 없으며, "남북협상은 소련에게 이용당한 결과"라고 혹평했다. 4월 27일 민족진영 각계는 남북협상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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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4월 30일 평양의 [[김두봉]]의 집에서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의 '4김 회동'이 열렸다. 김두봉의 제의 하에 연백평야에 공급하다 중단된 수리조합 개방문제, 남한으로 공급하다 중단한 전력의 지속적인 송전문제, [[조만식]]의 월남허용문제, 만주 여순에 있는 [[안중근]]의 유골 국내이장문제 등에 관해 논의하였고, 이에 김일성은 수리조합 개방, 전력 송전에 대해서는 즉석에서 수락하였고, 조만식과 안중근 이장문제는 뒤로 미루었다. 그러나 5월 5일 김구와 김규식이 [[서울로 돌아와 5월 6일 국민들에게 이 사실을 발표한 며칠 뒤, 다시 수리조합과 전력송전을 중단하고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결국 남북협상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이들 통일정부수립노선을 택하였던 인사들이 배제되는 결과만을 가져왔다.[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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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5월 2일 북한은 남북협상을 근거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을 채택하였다.[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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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5월 5일 오후 8시경 김구·김규식 등은 일행 60여명과 같이 서울에 무사히 도착하였다.[230]
  
 
===대한민국 정부 수립 및 임정 해산 (1948)===
 
===대한민국 정부 수립 및 임정 해산 (1948)===
* 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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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김구와 한국독립당 등 남북협상파는 선거에 불참하였고, 이에 이승만과 독촉국민회 등 단선단정파가 최다 당선자를 배출하였다. 그러나 독촉국민회는 한 목소리를 내는 정당이 아니라 범우익 사회단체였기 때문에 실질적인 국회 제1당은 한국민주당이 되었다.
: 김구와 한국독립당 등 남북협상파는 선거에 불참하였고, 이에 이승만과 독촉국민회 등 단선단정파가 최다 당선자를 배출하였다. 그러나 독촉국민회는 한 목소리를 내는 정당이 아니라 범우익 사회단체였기 때문에 실질적인 국회 제1당은 [[한국민주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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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6월 7일 김구는 대통령 책임제를 지지하면서, 내각 책임제를 거론하는 한국민주당 중심의 국회는 임정 법통계승과 무관함을 시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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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6월 7일 김구는 대통령 책임제를 지지하면서, 내각 책임제를 거론하는 한국민주당 중심의 국회는 임정 법통계승과 무관함을 시사하였다. "대통령을 군주같이 앉혀놓고 수상이 모든 일에 책임을 진다는 것은 비민주제도일 것이다. 민중이 대통령을 전출한 이상 모든일을 잘하던지 못하던지 대통령이 책임을 지고 일을 하여나가야 할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231] 이날 이승만도 기자회견에서 대통령 책임제와 임정 계승을 언급하였다. "현재의원 형태(내각 책임제)로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아무 조건도 없다고 본다."[232] 그리하여 제헌 헌법은 대통령 책임제를 기초로 하는 것으로 조정되었다.
: "대통령을 군주같이 앉혀놓고 수상이 모든 일에 책임을 진다는 것은 비민주제도일 것이다. 민중이 대통령을 전출한 이상 모든일을 잘하던지 못하던지 대통령이 책임을 지고 일을 하여나가야 할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날 이승만도 기자회견에서 대통령 책임제와 임정 계승을 언급하였다. "현재의원 형태(내각 책임제)로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아무 조건도 없다고 본다." 그리하여 제헌 헌법은 대통령 책임제를 기초로 하는 것으로 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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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7월 17일 제정된 제헌 헌법에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라고 명시되었고, 제헌 국회 의장 이승만은 국회개원식 축사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의 임정 계승을 확실히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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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7월 17일 제정된 제헌 헌법에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라고 명시되었고,[8] 제헌 국회 의장 이승만은 국회개원식 축사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의 임정 계승을 확실히 밝혔다.[9]
*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해산하였다. 임정 초대 대통령이자 마지막 주석이었던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이시영]]이 초대 부통령이 되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함을 천명하고 연호를 '민국 30년'으로 기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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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해산하였다. 임정 초대 대통령이자 마지막 주석이었던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이시영이 초대 부통령이 되었다.[10]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함을 천명하고 연호를 '민국 30년'으로 기산하였다.[233]
  
 
== 기타 일화 ==
 
== 기타 일화 ==
 
===민족진영 3영수(이승만·김구·김규식) 재결합의 노력과 김구 피살 (1948~1949)===
 
===민족진영 3영수(이승만·김구·김규식) 재결합의 노력과 김구 피살 (1948~1949)===
* 1948년 초 단선단정론과 남북협상론의 노선 차이로 인해 틀어졌던 이승만과 김구·김규식의 관계는 우여곡절을 거쳐 점차 회복되었다. 한편 단선단정 노선 하에 반 년 가량 연대하던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의 관계는 1948년 7월 대한민국 초대 내각 인성 과정에서 이승만이 김성수 천거를 무산시키고 한민당계를 내각에 배제함으로써 파탄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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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초 단선단정론과 남북협상론의 노선 차이로 인해 틀어졌던 이승만과 김구·김규식의 관계는 우여곡절을 거쳐 점차 회복되었다. 한편 단선단정 노선 하에 반 년 가량 연대하던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의 관계는 1948년 7월 대한민국 초대 내각 인성 과정에서 이승만이 김성수 천거를 무산시키고 한민당계를 내각에 배제함으로써 파탄이 났다.
* 1948년 8월 14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하루 앞두고 김규식은 점진적 통일을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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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9월 6일 장제스는 이승만과 김구·김규식의 합작을 희망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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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8월 14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하루 앞두고 김규식은 점진적 통일을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다.[234]
* 1948년 12월 12일 [[유엔]] 총회 결의 제195(III)호(The problem of the independence of Korea)에서, 대한민국 정부(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를 "한반도에서 유엔 임시위원단의 감시와 통제 아래 대다수 주민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선거가 치러진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그러한 합법 정부"임을 결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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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12월 15일 민족진영 3영수(이승만·김구·김규식)의 합작운동 태동이 보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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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9월 6일 장제스는 이승만과 김구·김규식의 합작을 희망한다고 밝혔다.[235]
* 1948년 12월 16일 김구는 "금번 유엔에서 대한민국정부가 48 대 6이라는 절대 다수로 승인되었는데 금후에 있어서도 법통을 주장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세계 각국이 모두 현정부를 승인하였다고 하더라도 현재 분열되고 있는 만큼 법통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여 대한민국 정부의 임정 법통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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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9년 1월 1일 김규식은 신년인사차 [[경무대]]의 이승만을 방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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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2월 12일 유엔 총회 결의 제195(III)호(The problem of the independence of Korea)에서, 대한민국 정부(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를 "한반도에서 유엔 임시위원단의 감시와 통제 아래 대다수 주민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선거가 치러진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그러한 합법 정부"임을 결의했다.
* 1949년 5월 19일 민족진영 3영수(이승만·김구·김규식)의 재결합이 가시화되었다. 5월 20일 김구는 "일반국민들이 3영수의 재합작을 간절히 바란다는 것은 현 시국에 비추어 있음직한 일이나 본래부터 대통령과 김박사와 나의 사이에는 별반 간격은 없었던 것이므로... (중략) 과거 우리들의 노력방법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시간과 공간은 차차로 이러한 차이를 해소하고 합일점으로 도달케 할 것을 의심하지 않는 바이다. (중략) 대통령과 金박사와는 앞으로도 종종 만날 기회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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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2월 15일 민족진영 3영수(이승만·김구·김규식)의 합작운동 태동이 보도되었다.[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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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2월 16일 김구는 "금번 유엔에서 대한민국정부가 48 대 6이라는 절대 다수로 승인되었는데 금후에 있어서도 법통을 주장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세계 각국이 모두 현정부를 승인하였다고 하더라도 현재 분열되고 있는 만큼 법통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여 대한민국 정부의 임정 법통을 강조하였다.[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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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1월 1일 김규식은 신년인사차 경무대의 이승만을 방문하였다.[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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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5월 19일 민족진영 3영수(이승만·김구·김규식)의 재결합이 가시화되었다.[239] 5월 20일 김구는 "일반국민들이 3영수의 재합작을 간절히 바란다는 것은 현 시국에 비추어 있음직한 일이나 본래부터 대통령과 김박사와 나의 사이에는 별반 간격은 없었던 것이므로... (중략) 과거 우리들의 노력방법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시간과 공간은 차차로 이러한 차이를 해소하고 합일점으로 도달케 할 것을 의심하지 않는 바이다. (중략) 대통령과 金박사와는 앞으로도 종종 만날 기회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라고 말하였다.[240]
  
그러나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이승만은 남북통일에 앞서서 민족진영을 재결합하는 데에 실패했고, 반민특위는 친일청산의 정신적 지주를 잃었다. 이득을 본 것은 오직 공산당과 친일파와 민주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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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이승만은 남북통일에 앞서서 민족진영을 재결합하는 데에 실패했고, 반민특위는 친일청산의 정신적 지주를 잃었다. 이득을 본 것은 오직 공산당과 친일파와 민주당이었다.
  
1949년 6월 27일 김구의 장례는 국민장이 결정되었다. 이날 오후 5시부터 김규식·최동오·조소앙·안재홍·명제세 등이 회합하여 '고백범김구선생국민장의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에는 오세창, 부위원장에는 김규식·조완구·이범석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묘지는 김구의 유언대로 효창공원 3열사묘 서록에 안치하기로 되었으며, 장일은 7월 5일로 결정되었다. 이승만 부부는 7월 4일 오전 9시 40분경 조문하였다. 김구의 국민장은 광복 이후 3의사(이봉창·윤봉길·백정기)에 이어 두번째 국민장이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국민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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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6월 27일 김구의 장례는 국민장이 결정되었다. 이날 오후 5시부터 김규식·최동오·조소앙·안재홍·명제세 등이 회합하여 '고백범김구선생국민장의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에는 오세창, 부위원장에는 김규식·조완구·이범석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묘지는 김구의 유언대로 효창공원 3열사묘 서록에 안치하기로 되었으며, 장일은 7월 5일로 결정되었다.[241] 이승만 부부는 7월 4일 오전 9시 40분경 조문하였다.[242] 김구의 국민장은 광복 이후 3의사(이봉창·윤봉길·백정기)[243]에 이어 두번째 국민장이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국민장이었다.
  
 
== 역대 수반 ==
 
== 역대 수반 ==
 
====국무총리제 (1919. 4 ~ 1919. 9)====
 
====국무총리제 (1919. 4 ~ 1919. 9)====
* 1대 국무총리 [[이승만]] (1919년 4월 11일 ~ 1919년 4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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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 국무총리 이승만 (1919년 4월 11일 ~ 1919년 4월 23일)
* 국무총리 대리 [[이동녕]] (1919년 4월 30일 ~ 1919년 5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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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총리 대리) 이동녕 (1919년 4월 30일 ~ 1919년 5월 9일)
* 국무총리 대리 [[안창호]] (1919년 6월 28일 ~ 1919년 8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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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총리 대리) 안창호 (1919년 6월 28일 ~ 1919년 8월 27일)
 
====대통령제 (1919. 9 ~ 1925. 7)====
 
====대통령제 (1919. 9 ~ 1925. 7)====
* 1대 대통령 [[이승만]] (1919년 9월 11일 ~ 1925년 3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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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 대통령 이승만 (1919년 9월 11일 ~ 1925년 3월 23일)
* 대통령 대리 [[박은식]] (1924년 12월 11일 ~ 1925년 3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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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대리) 박은식 (1924년 12월 11일 ~ 1925년 3월 23일)
* 2대 대통령 [[박은식]] (1925년 3월 23일 ~ 1925년 7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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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대통령 박은식 (1925년 3월 23일 ~ 1925년 7월 7일)
 
====국무령제 (1925. 7 ~ 1927. 4)====
 
====국무령제 (1925. 7 ~ 1927. 4)====
* 1대 국무령 [[이상룡]] (1925년 7월 7일 ~ 1926년 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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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 국무령 이상룡 (1925년 7월 7일 ~ 1926년 2월 18일)
* 2대 국무령 [[홍진]] (1926년 7월 7일 ~ 1926년 12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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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국무령 홍진 (1926년 7월 7일 ~ 1926년 12월 9일)
* 3대 국무령 [[김구]] (1926년 12월 10일 ~ 1927년 4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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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국무령 김구 (1926년 12월 10일 ~ 1927년 4월 11일)
 
====국무위원제 (1927. 8 ~ 1940. 10)====
 
====국무위원제 (1927. 8 ~ 1940. 10)====
* 1대 주석 [[이동녕]] (1927년 8월 19일 ~ 1933년 3월 6일), 주석 겸 법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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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 주석 이동녕 (1927년 8월 19일 ~ 1933년 3월 6일), 주석 겸 법무부장
* 2대 주석 [[송병조]] (1933년 3월 6일 ~ 1933년 12월 30일), 주석 겸 재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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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주석 송병조 (1933년 3월 6일 ~ 1933년 12월 30일), 주석 겸 재무부장
* 3대 주석 [[양기탁]] (1933년 12월 30일 ~ 1935년 9월 1일), 주석 겸 군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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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주석 양기탁 (1933년 12월 30일 ~ 1935년 9월 1일), 주석 겸 군무부장
* 4대 주석 [[이동녕]] (1935년 11월 2일 ~ 1940년 3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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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주석 이동녕 (1935년 11월 2일 ~ 1940년 3월 13일)
 
====주석제 (1940. 10 ~ 1948. 8.)====
 
====주석제 (1940. 10 ~ 1948. 8.)====
* 1대 주석 [[김구]] (1940년 10월 9일 ~ 1944년 4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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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 주석 김구 (1940년 10월 9일 ~ 1944년 4월 22일)
* 2대 주석 [[김구]] (1944년 4월 24일 ~ 1947년 3월 3일[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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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주석 김구 (1944년 4월 24일 ~ 1947년 3월 3일[10])
* 3대 주석 [[이승만]] (1947년 3월 3일[10] ~ 1948년 4월 12일[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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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주석 이승만 (1947년 3월 3일[10] ~ 1948년 4월 12일[220])
  
 
== 참고자료 ==
 
== 참고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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