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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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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이탈리아어·라틴어: Roma)는 이탈리아수도이자 최대 도시로, 라치오주의 주도이며, 테베레강 연안에 있다. 로마시의 행정구역 면적은 1,285.31km²이고 대도시의 인구는 400만이 넘지만 밀라노나폴리 대도시에 비해 면적이 3~4배 넓은 편이고 되려 로마시의 면적과 밀라노와 나폴리의 대도시의 면적이 비슷하므로 세 도시 모두 300만 정도로 비슷한 규모의 도시이다. 로마는 '로마 카피탈레'(Roma Capitale, 수도 로마)란 이름으로 특별 코무네 지위에 올라 있[1]

개요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 중부 지역 테베레강 연안에 있는 도시이다. 과거 로마 제국의 수도로서 유럽의 중심이자 '세계의 수도'라고 불린 도시로 세계 역사와 문화를 논할 때 절대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도시이다. 로마가 기원한 티베리나(Isola Tiberina) 부근은 테베레강 하구에서 약 25km 떨어진 곳에 있다. 옛 로마 제국의 기원지로 라틴어의 근원이 된 도시로 유럽의 사회, 문화, 예술, 언어, 건축 등에 영향을 준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고대도시 중 하나이다. 중부 아펜니노산맥에서 발원해 서부 티레니아해로 흘러들어가는 테베레강 하류에 위치하며 주로 홍적 대지로 이루어진 구릉 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로마 건국 신화에 따르면 로마 건국 원년은 기원전 753년으로 2,500여년의 역사를 가진 것으로 얘기되지만, 인류는 3000여년 전에 이 지역에 정착하여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를 형성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초기 로마는 라틴인, 에트루리아인, 그리고 사비니인으로 구성되었다. 한때는 서양 문명을 대표하는 도시로서 로마 제국의 수도였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중심지였으며 그 역사 덕분에 유럽 문명 사회에서는 로마를 가리켜 '세계의 머리'(Caput mundi), '영원한 도시'(la Città Eterna)라고 부른다.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로 로마시는 서서히 교황의 정치적 영향을 받게 되었다. 서기 8세기부터 1870년까지 로마는 교황령의 수도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통일 이후 1871년에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까지 이탈리아의 수도로 자리잡고 있다. 또한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2]

로마는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으로 여름에는 고온건조하다. 원래는 로마의 일부였으나 교황령으로써 독립한 바티칸 시국이 자리잡고 있다. 법적으로는 엄연히 다른 나라이지만 역사, 종교, 문화적으로 이탈리아, 특히 로마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지역은 거리가 좁고 대부분이 테베레 강가의 동쪽에 위치해 있다. 로마의 과거의 영광의 흔적인 기념 석조물의 대부분은 이 지역에 있다. 과거의 민중사학적 믿음과 달리 로마는 파트리키 같은 강자에 호의적이고 빈자나 약자를 혐오했던 국가였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으며 이는 기독교가 빠르게 퍼진 원인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지역은 길거리가 좁은 편이며, 고대 로마의 영광이 담긴 흔적인 석조 기념물들과 함께 대부분 테베레강의 동쪽에 위치해 있다. 현재는 잘 보존된 수많은 역사 유적들로 인해 전 세계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여겨지며, 세계문화유산과 예술과 낭만의 중심 도시로 자리잡았다. 도시의 설립 연대를 로마 신화에 나오는 기원전 753년으로 볼 경우 2047년에 설립 2800주년을 맞이하며, 2247년에 설립 3000주년을 맞이한다. 설립 2000주년은 서기 1247년에 맞이했다.[3]

이름

고대 로마의 기원 설화에 따르면, '로마'라는 이름은 도시의 첫 번째 왕이자 설립자인 로물루스의 이름을 따 지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오히려 학자들은 로물루스라는 이름이 도시 로마의 이름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을 따지고 있으며, 그 외에도 다른 학설들이 존재한다.

  • Rumon, Rumen은 테베레 강의 옛이름인데, '흐르다'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동사의 어원이기도 하다. 로마라는 단어가 이 동사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 '힘'을 뜻하는 그리스 단어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역사

로마가 세워지기 전

로마에서 무려 14,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나온 바 있다. 후대에 출토된 석기, 무기들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다만 이보다 나중에 만들어진 유적들의 잔해들이 워낙 조밀하게 모여 있기 때문에,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의 유적 연대 구분을 어렵게 하는 부분이 있다. 당시에는 팔라티노 언덕 위에 소규모의 마을들이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형태로 작은 부락이 이루어져 있었으며, 도시의 형태를 완전히 갖추지는 못했다.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 사이에 팔라티노 언덕 위에 있었던 가장 큰 마을을 중심으로 주변 소규모 부족들이 연합하여 점진적으로 로마로 발전해 나갔다는 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은 연합은 도시의 규모를 키워 농업, 수공업의 발전을 가능하게 했고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지들과의 무역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발견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신화에서 나온 것처럼 로물루스가 기원전 8세기에 도시 로마를 처음으로 세웠다는 학설도 존재하고 있다.

로마 설립

고대 로마의 전설에 따르면, 로마는 기원전 753년 4월 21일, 고대 그리스의 영웅인 아이네아스의 선조이자 전쟁의 신 마르스의 쌍둥이 아들로 태어난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가 테베레 강가 동쪽에 위치한 로마의 일곱 언덕 가운데 하나인 팔라티노 언덕 위에 건설했다(로물루스와 레무스는 테베레 강가에 버려져 늑대 젖을 먹고 자랐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이후 형제 사이 불화로 싸움이 일어났고, 형인 로물루스가 동생 레무스를 죽이고 도시의 주도권을 차지했다고 한다. 그 후 로물루스는 자기의 이름을 따서 도시 국가의 이름을 로마라고 했고, 로마의 건국 시조로 추대받고 있다. 다만 고고학적으로는 이 땅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때는 전설에서 말하는 것보다 더 빠르며, 기원전 8세기경, 북방에서 이탈리아반도로 이주해 온 민족이 테베레강 하구에 정착한 게 로마의 시초로 추정하고 있다. 기원전 8세기부터 시작되는 철기 시대 유적은 팔라티노 언덕에서 발견되었지만 전설과 사실은 꼭 일치하지 않는다. 로마는 라틴족의 도시 국가 건설로 출발했다는 게 사실로 여겨지고 있다.

로마 제국

로물루스의 건국 이후 244년 동안 7명의 왕이 통치한 로마 왕정체제를 이뤘다. 기원전 509년에 마지막 왕이 폐위되었고, 이후 로마는 귀족들에 의해 주도되는 로마 공화정체제로 약 450년간 운영되었다. 로마는 기원전 2, 3세기에 세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년-기원전 146년)과 마케도니아 전쟁(기원전 212년-기원전 168년)으로 지중해를 장악했고, 지중해의 가장 강력한 맹주로 떠오르게 된다. 이후 권력층 사이에 권력투쟁이 두드러지면서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사이에 내전(기원전 88년-기원전 80년)이 발발했으며, 이후 스파르타쿠스의 반란(기원전 73-기원전 71)과,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의 제1차 삼두정치(기원전 59-기원전 54)가 뒤따르며 격변이 일어나게 된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기원전 58년-기원전 51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내전(기원전 49년-기원전 45년)의 승리를 통해 종신 독재관으로 권력을 잡지만, 기원전 44년 공화정 지지파인 브루투스등에 의해 암살당한다.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에 의한 제2차 삼두정치(기원전 43-33)가 뒤따랐지만,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을 통해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유일의 권력자가 되어 로마제국시대를 열었다.

기원전 27년부터 서기 68년까지 100여 년간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네로 황제의 자살로 막을 내리고, 네 명의 황제의 해라 불린 서기 68년 내전의 승자인 베스파시아누스에 의해 플라비우스 왕조(서기 69-96)가 열린다. 플라비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암살 이후, 로마제국의 황금기인 오현제 시대(96년-169년) 또는 팍스로마나 시대라 불리는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가 뒤따랐다. 제국 최고의 명군으로 평가받는 트라야누스 황제시기(98년-117년)에, 로마제국의 영토는 최대가 된다. 이 시기 로마의 인구는 100여만 명이 넘어가며 당시 세계 최대의 도시로 성장한다.

192년, 콤모두스 황제의 암살 이후 내전이 벌어지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패배하면서 세베루스 왕조(193년-235년)를 열게 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235년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의 암살 이후, 40여 년간 20여 명의 황제가 암살되고 바뀌는 혼란의 군인 황제 시대가 열리는데, 29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사두 정치를 창안하여 제국의 위기를 막으려 했다. 50여 년간의 사두 정치 체계 이후, 330년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때 현 이스탄불 위치에 있는 비잔티움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명명하고 천도하였고, 395년에 로마제국은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 사후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으로 갈라지게 된다.

로마제국의 수도는 사두 정치 체제때 로마시를 벗어나 지금의 밀라노인 메디올라눔, 현 터키지역의 니코메디아, 현 독일지역의 트리어, 현 세르비아지역의 시르미움 네 군데로 나눠 제국을 통치하였고, 이후 동로마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서로마제국은 이후 라벤나로 천도하면서, 로마시는 정치적 중요성을 잃게 된다.

4, 5세기에 훈족이 동쪽으로 이동하고, 서고트족이나 반달족의 약탈을 받으며 서로마제국은 쇠약해지기 시작한다. 410년에 서고트족에 의해 로마가 함락(로마 약탈 (410년))되고, 455년에는 반달족에 의해 로마가 다시 함락(로마 약탈 (455년))된다. 476년, 게르만 용병 장군 오도아케르는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키고, 결국 서로마제국은 멸망하게 된다.

르네상스의 중심지

6세기 이후 동고트 왕족을 정복한 동로마 제국과 랑고바르드 왕국 등 몇몇 게르만족 왕국의 지배를 거쳐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샤를마뉴의 기부장에 따르면 800년 샤를마뉴가 로마 교황청에 로마의 지배권을 주었다고 하나, 오늘날에는 이 문서가 위조된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15세기 중반 이후, 교황령의 수도로서 다시 번창해진 로마는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교황 니콜라오 5세의 치세에는 성벽 개수, 궁전 건설, 교회 수복 공사 등이 이루어졌다. 그에 따라 유명한 예술가나 건축가들이 대거 로마에서 활동하게 되었으며, 15세기 말엽에는 미켈란젤로, 브라만테, 라파엘로 등의 거장들이 교황을 위해 예술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1527년 신성로마제국의 루터교 용병들의 침략을 받아 황폐화되면서(이른바 로마 약탈 사건) 르네상스 시대는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아울러 가옥들이 어수선하고 밀집한 형태를 띤 중세의 도시가 근대화 되기 시작한 때는 16세기 말의 교황 식스토 5세의 시대로, 포폴로 광장에서 도시 중심부로 이어지는 세 개의 도로를 닦았으며, 광장과 샘도 만들어 찬란했던 로마의 모습을 되살려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공사가 끝난 때도 이 시대이다. 대응 종교 개혁 시대 로마의 특징인 바로크 양식은 17세기의 건축물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 시대에 베르니니나 보로미니와 같은 조각가와 건축가들이 로마의 외관을 바꾸어갔다. 18세기에는 교황의 통치 아래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스페인 계단 등에서 볼 수 있는 18세기 전반의 로코코 양식의 건물은 이윽고 신고전주의라는 독특한 건물로 대체되었다. 1797년 나폴레옹 1세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점령, 다수의 귀중한 미술품을 약탈하였다. 나폴레옹 1세가 몰락한 후 빈 회의의 결정에 따라 로마는 다시 교황령이 되었다.

현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항공기의 발달 덕분에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미국 등 비유럽 지역에서도 다수의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파리나 런던, 마드리드 등과 더불어 유럽을 대표하는 관광도시로서 사랑받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로마는 급격히 성장하여, 밀라노를 제치고 이탈리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정치, 행정적 기능이 집중된 행정수도이자 로마 가톨릭교회의 본부격인 로마 교황청이 소재한 바티칸 시국이 위치하고 있으며, 국제기관의 관청이 다수 진출해 있는 등 세계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아베베가 맨발로 뛴 것으로 유명한 1960년 하계 올림픽이 이 곳에서 개최되었다.[4][5]

행정

지역 정부

로마는 로마 카피탈레 (Roma Capitale, 수도 로마)란 이름으로 특별 코무네 지위에 올라 있으며, 이탈리아 전 코무네 8,101개 중에서 면적과 인구 모두 제일 큰 코무네이다. 로마 코무네 행정청은 역사상 로마 행정부의 소재지였던 카피톨리노 언덕의 세나토리오 궁전에 자리해 있다. 흔히 로마의 지방 정부를 가리킬 때 이 언덕의 이탈리아어 이름인 '캄피돌리오'라고 부르기도 한다.

행정 구역 및 역사

로마는 1972년부터 '무니치피오' (municipio, 복수형은 무니치피 (municipi), 2001년까지는 시르코시치오니 (circoscizioni))라는 이름의 행정 구역으로 세분화됐다. 무니치피오는 시내 분권화를 확대한다는 행정 근거를 이유로 설치됐다. 각 무니치피오는 주민이 뽑은 대표와 네 명의 의원이 5년씩 행정을 맡는다. 무니치피오들은 반대로 행정상에 적용되진 않으나 예로부터 전해오는 로마의 각 구역들의 경계와 겹치는 경우가 꽤 많다. 로마의 무니치피오는 처음엔 20개였다가 하나를 제해 19개로 줄었으며 2013년에는 15개로 다시 축소됐다.

로마는 각기 다른 형태의 비행정 구역으로도 나뉜다. 역사 중심부 지역은 22개 리오네로 세분되며, 프라티와 보르고만 제외하면 모두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내에 자리해 있다. 리오네는 고대 로마의 14구에서 출발해 중세에 리오네로 발전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르네상스 시대 교황 교황 식스토 5세 시기에는 다시 14개 지역에 이르렀고, 마침내 1743년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각 리오네의 경계를 획정했다.

나폴레옹 점령 시기에는 새로운 행정 구역이 잠깐 적용됐으며, 이후 체계상의 큰 변동은 없었다. 그러다 1870년 이탈리아의 세번째 수도로 로마가 되었고, 신수도의 필요성은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안팎의 도시화와 인구 폭증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1874년에는 새롭게 도시화된 지구였던 몬티 리오네에서 15번째 리오네인 에스퀼리노가 갈라져 나왔으며,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나머지 리오네들도 속속 생겨났다 (마지막은 1921년 신설된 프라티 리오네로, 교황 우르바노 8세 성벽 외곽에 있는 유일한 리오네였다). 이후부터는 로마 시의 새로운 행정 구역명으로 '콰르티에레 (quartiere)'가 사용됐다. 오늘날 모든 리오네는 제1무니치피오의 일부로 속해 있으며, 이 때문에 제1무니치피오는 역사 중심부 (Centro Storico)의 범위와 완전히 일치한다.

광역 및 지방 정부

로마는 2015년 1월 1일부로 로마 수도 광역시의 행정 중심지가 되었다. 이 로마 수도 광역시는 로마 광역권에 북쪽으로 치비타베키아까지 뻗어나갔던 구 로마현을 대체했다. 로마 수도 광역시의 면적은 총 5,353m²로 이탈리아에서 가장 크며, 리구리아주에 맞먹는다. 이와 더불어 로마는 라치오주의 주도이기도 하다.

행정 수도

로마는 이탈리아의 수도이며 이탈리아 정부의 소재지이다. 이탈리아 공화국 대통령과 이탈리아 공화국 총리의 공식 소재지, 이탈리아 의회의 양원 의사당 소재지, 그리고 이탈리아 헌법재판소 소재지는 모두 로마의 역사 중심부 내에 있다. 국가 행정기관들 역시 시내 전반에 걸쳐 있으며, 대표적으로 올림픽 스타디움 부근 파르네시나 광장에 자리한 이탈리아 외교부 청사를 들 수 있다.

경제

로마가 속한 라치오 주의 1인당 GDP는 4만 달러 정도이며 전체 GDP는 밀라노가 속한 롬바르디아주에 이은 이탈리아 내 2위이다. 다만 대다수의 대도시들과 같이 생산 시설들은 대부분 로마 교외의 라치오주에 위치하며 로마 시내에는 기업 본사나, 금융, 서비스업이 주를 이룬다. 물론 로마 시내가 좁아터져서 이런 생산 시설 지을 장소도 없기도 하고, 로마 시내는 경주시처럼 문화유적 지구이기 때문에 함부로 개발하기도 힘들다. 즉 로마 시내는 이탈리아 정부 기관, 외교공관, 문화유적지로 다 가득찼다.

로마의 경제는 서비스, 제조, 관광 분야가 혼합되어 다양하다. 로마의 주요 산업은 서비스 산업으로 도시 GDP의 약 70%를 차지한다. 로마에서 발달한 서비스 산업은 금융, 의료, 교육, 공공 서비스 부분이다. 로마에는 여러 국제 은행, 보험 회사, 금융 서비스 회사들이 있으며, 이들은 로마의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로마에서 발달한 제조업으로는 식품 가공, 의약품, 전자제품이 있으며 유명 제약회사들 또한 로마에 위치한다. 유명한 로마 기반 회사로는 세계 7대 석유 회사 Eni, 세계 10대 항공우주 산업체 레오나르도 S.p.A., 명품 보석 브랜드 불가리, 명품 의류 브랜드 펜디가 있다.

교통

기차

중앙역은 로마 테르미니(Roma Termini)역이고, 부수역으로 로마 티부르티나(Roma Tiburtina)역이 있다. 그런데 테르미니와 티부르티나가 이름이 비슷해서 혼동하는 여행객이 많은 게 문제. 더욱이 티부르티나역은 테르미니와는 달리 건물도 사람도 없이 그냥 휑하게 비어 있는 건물만 있어서 을씨년스러운 역이라 처음 티부르티나를 찾은 사람들이 적잖게 당황하곤 한다. 이 티부르티나 역이 안 그래도 연착이 많은 이탈리아에서 지하철(B호선 티부르티나역) 타고 이동해야 하는 것도 불편한데, 지하철 통로와 바로 직결된 형태로 되어 있는 플랫폼 안내를 보는 것도 상당히 불편하다.

버스

문화재 보호를 위해 넓지도 않은 바닥을 온통 울퉁불퉁한 돌바닥으로 깔아 놓은 것도 모자라 이탈리아 특유의 이상한 대충대충 정신에, 수많은 무단횡단으로 지연되는 시간, 그리고 수많은 관광객이 버스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어 편하게 가기 매우 힘들다. 더구나 노선 안내도 친절한 편이 아니므로 로마 지리가 낯선 여행객들은 더더욱 골치가 아프다. 시간에 여유가 있다면 시내가 넓지 않으니 구글 지도 켜고 그냥 걸어다니는 것이 편리하다. 절대 다수의 버스가 허브 기착지로 테르미니역 앞의 500인 광장(피아차 친퀘첸토)을 이용하므로 이곳에서 주요 노선을 기억해두면 편리하다. 심지어 이곳 인포메이션에 주요 관광지로 가는 노선 번호를 쭈욱 적어놓은 종이도 붙어 있다. 그리고 제발 묻지 말라는 안내 문구도 함께 있다.

시내버스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무인 발권기나 정류장과 가까운 상점에서 시내버스 티켓을 사야 한다. 100분 이용 기준 1.5유로. 한국과 같은 교통카드 방식이 아니라 시내버스에 타면 티켓 투입구가 있다. 투입구에 완전히 넣으면 인식을 한 뒤 티켓을 돌려준다. 그때부터 정해진 시간 만큼 이용할 수 있다. 한국처럼 앞문에서 타서 뒷문에서 내리는 것이 아닌, 가운데 문에서 타고 양 끝 문에서 내린다.

지하철

승차권을 먼저 개찰구에 넣어야만 하므로 무임 승차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유일한 대중교통. A호선과 B호선이 있는데 살짝 시 바깥쪽으로 돌기 때문에 가는 곳이 테르미니 근처 역으로 정해져 있다. 주로 이용하게 될 역은 A호선의 플라미니오(포폴로), 스파냐, 바베리니(트레비), 그리고 B호선의 테르미니, 콜로세오 정도. A호선의 테르미니와 레푸블리카는 의외로 가까워 걸어갈 만한 수준이다. 현지인들이 지하철을 주로 사용하고 러시 아워인 출퇴근 시간에는 사람이 터져나간다.

문화 유적

관광 도시 하면 절대 빠지지 않는 로마답게 구경거리가 상당히 많은 편이다. 다만 대부분이 규모가 매우 크거나 XX 광장과 같은 형태로 되어 있고, 도시 빈틈없이 구경거리로 꽉 차 있어서 돌아보기가 좀 피곤한 편. 좋게 말하자면 걸어 다니는 곳곳이 죄다 구경거리인 게 로마의 매력이다.

콜로세움(콜로세오)

로마의 대표 랜드마크이다. 라틴어로는 콜로세움이라 읽히고 이 이름으로 많이 알려졌지만 현지어인 이탈리아어로는 콜로세오(Colosseo)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졌다시피, 투기장으로 쓰인 로마 제국 시대의 건축물이다. 상세한 것은 문서 참조. 지하철 B호선 콜로세오역 근처에 있고 입장은 팔라티노와 통합 입장권을 사용하며, 가격은 12유로(2015년 1월 기준)이다. 관광객이 몰리기 때문에 들어가려면 한참 동안(거의 3~4시간) 줄서서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상단에 기재되어 있는 로마 패스를 이용할 경우 대기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시킬 수 있다. 아니라면 가이드를 동반한 투어를 통하여 입장 시간을 줄일 수 있으며 실제로 이런 가이드 투어를 모집하는 호객꾼들을 콜로세움까지 가는 내내 만나게 될 것이다.[6]

팔라티노 황궁 - 포로 로마노

콜로세움 옆에 있는 넓은 사적지로, 고대 로마 제국의 정치적 중심지이자 로마 제국의 황궁이 있던 곳이다. 팔라티노 언덕과 콜로세움 사이에는 로마 제국 시대의 개선문인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 있다. 로마 공화국 시절 건국자인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가 처음 선언한 땅으로 알려져 있다. 여러 낮은 경사의 언덕 사이에 길을 내어 주변에 집을 지어놓은 형태로, 현재는 그 터와 발굴된 일부 구조물만을 관람할 수 있다. 팔라티노 언덕을 지나 바깥쪽으로 향하면 비로소 그럴싸한 건축물들의 집단이 등장하는데 그곳이 포로 로마노(로마 광장)이다. 개인차가 있지만, 일개 사적지 치고는 상당히 넓은 편. 콜로세움과 마찬가지로 티켓 구매 줄이 굉장히 길어지는 경우가 있으며 창구도 달랑 세 개뿐이라 줄이 줄어드는 속도가 답답할 정도로 느리다.[7]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 앞

카라칼라 욕장과 마찬가지로 고대 로마의 목욕탕이었지만, 오늘날에는 교회도 들어서는 등 이래저래 파괴되었다. 오늘날에는 목욕탕 유적보다도 기차역인 테르미니역 바로 앞이라는 데에 의의가 있지만, 욕장 내에서 발굴된 유물을 전시해놓은 박물관이 있다. 레푸블리카 광장에 크고 아름다운 분수가 있다. 레푸블리카 광장이 테르미니 역과 굉장히 가까워서 처음 보게 되는 분수가 이 분수라면 입이 쩍 벌려지면서 놀라겠지만 로마에는 분수가 매우 많다. 여기 분수도 당신이 보게될 수많은 분수 중 하나일 뿐이다.

퀴리날레 궁

이탈리아 통일 이후 사보이아 왕조의 정궁이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왕정이 폐지되면서 지금은 이탈리아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고 있다. 2달 전부터 열리는 인터넷 예약을 통해 입장할 수 있으나 1시간 20분이 소요되는 이탈리아어 가이드 투어의 압박 때문에 한국인이 들어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이탈리아어 설명을 무시한 채 사진만 찍고 나오겠다면 예약하고 들어가도 상관없으나 예약은 성수기와 비성수기를 불문하고 거의 첫주차에 마감된다. 매일 오후 3시에 근위병 교대식이 열린다. 그러나 오와 열은 잘 맞추지 않는다. 대통령의 관저로 쓰이기 때문에 지금도 '퀴리날레'라고 하면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항을 결정한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퀴리날레 궁전을 방문하려면 언덕을 올라가야 하는데 언덕위의 계단까지 올라가면 넓고 휑한 광장이 있고 오벨리스크와 분수대가 당신을 반겨줄 것이다. 트레비 분수 근처에 있기 때문에 트레비를 방문하고 퀴리날레에 오는 경우가 많은데 막상 이곳에 오면 정말 넓고 휑한 광장밖에 없어서 화려한 궁전을 기대했다면 조금 실망할 수 있다.

트레비 분수(폰타나 디 트레비, Fontana di Trevi)

말 그대로 '삼거리 분수'라는 의미. 베네치아 광장에서 판테온으로 가는 방향으로 약간 골목 안쪽 들어간 방향에 자리하고 있다. 1453년 교황 니콜라오 5세가 과거 로마에 있었던 처녀의 샘을 복구하라는 지시를 내려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분수답게 대양의 신인 오케아노스를 중심으로 양옆에 트리톤이 있는 형태의 조각이 모여 있다. 이곳에서 오른손으로 동전 쥐어 왼쪽 어깨 너머로 던져 안쪽 저수지 안에 들어가면 다시 로마로 돌아온다는 속설이 있으며 오래된 영화인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이 아이스크림 먹는 신이 유행 타는 바람에 주변에 수많은 젤라토 집이 지금도 성업 중이다. 분수 자체는 멋있지만 목에 카메라를 걸고 다니면서 사진을 찍어 주겠다며 귀찮게 접근해대는(당연히 찍은 후 돈 요구) 사람들 때문에 눈쌀을 찌푸리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보통 "no"라고 거절하면 물러나지만 특히 동양인 여성들에게는 집요하게 달라붙는 경우도 있으니 주의. 퍽 오프라고 하면 알아서 꺼진다. 트레비 분수는 낮에 봐도 아름답지만 해지는 시간인 5-6시경에 방문하는 것이 괜찮다. 그 시간대면 사람도 낮보단 좀 빠졌고 해지면서의 풍경이 매우 아름답기 때문이다. 사람이 많은 곳이기에 소지품 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

베네치아 광장

로마 관광 제2의 중심지이다. 어지간한 중심을 향하는 버스들은 이곳에서 정차하기 때문에 자주 들르게 될 것이다. 로마에 왜 베네치아 광장이 있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옛날에 이탈리아가 여러 국가로 쪼개져 있었을 때 이곳에 베네치아 공화국 대사관이 있어서 그렇게 이름 붙여졌다. 흰색의 크고 아름다운 건축물이 유난히 눈에 띄는데, 이탈리아 통일 역사를 기록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이다. 내부를 둘러보는 건 무료이나, 꼭대기에 올라가려면 별도의 입장료가 필요하다.(1인당 8유로) 유독 유명한 쿠폴라가 없는 로마 특성상 쿠폴라 역할을 하는 곳이다. 로마의 중심이라고 불리는 베네치아 광장은 교통의 요지이므로 차가 굉장히 많이 다닌다. 여기서는 차를 조심하도록 하자. 콜로세오를 보고 오른쪽 길로 쭉 걸어 올라오면 베네치아 광장이 바로 보인다. 버스를 타고 갈 수도 있고 걸어갈 수도 있는 접근성이 좋은 지역이기에 교통수단은 딱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콜로세움까지 도보 10분 정도 소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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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1. 로마〉, 《위키백과》
  2. 로마〉, 《나무위키》
  3. 로마(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4. 로마〉, 《요다위키》
  5. "Rome", Wikipedia
  6. 콜로세움〉, 《위키백과》
  7. 포룸 로마눔〉, 《위키백과》

참고자료

같이 보기

서유럽 같이 보기

서유럽 국가
서유럽 도시
서유럽 지리
지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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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럽 주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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