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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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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홀구청

미추홀구(彌鄒忽區)는 인천광역시 중앙에 있는 구다. 조선 시대에 인천도호부 청사가 자리 잡으면서 인천의 중심이 되었다. 1883년에 인천항이 개항된 후 여러 차례 행정 구역 개편을 거쳤고, 1960년대 이후 인천의 대표적 주거 밀집 지역으로 성장하여 여러 교육기관과 병원이 들어서 있다.[1]

개요[편집]

인천광역시의 중부, 경도상으로는 동경 126˚ 23' 53"~126˚ 42' 29", 위도상으로는 북위 37˚ 25' 38"~37˚ 28' 56"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남동구, 서쪽으로는 중구, 남쪽으로는 연수구, 북쪽으로는 동구·서구와 접한다. 구의 동쪽 끝은 주안동, 서쪽 끝은 용현동, 남쪽 끝은 문학동, 북쪽 끝은 도화동이며, 동서 간 거리는 6.2㎞, 남북 간 거리는 5.9㎞이다. 면적은 24.84㎢로 인천시 전체 면적의 2.3%를 차지하여 10개 군·구 가운데 동구 다음으로 작다. 행정구역은 21개 행정동(7개 법정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학익 1동이 전체 면적의 20.4%를 차지하여 가장 크고 주안 3동이 1.9%로 가장 작다. 인구는 2018년을 기준하여 42만 5436명으로 인천시 전체 인구의 14.1%를 차지하여 4번째로 많다.

구를 상징하는 마스코트는 삼국 형성기에 인천 지역에 정착하여 미추홀이라 명명하였던 비류(沸流)를 모티브로 하여 수줍으면서도 영민하고 귀여운 모습의 미추홀구 수호신으로 형상화한 '미추'이며, 영문으로는 'meet you(만나서 반갑다)'로 표기하여 언제 어디서나 친절한 미추홀구의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구청 소재지는 숭의 동이다.

미추홀구 본래 명칭은 남구였으나 인하대학교 국어교육과 박덕유 교수의 주도적 역할로 2015년부터 인천 동구와 함께 명칭 교체를 추진해 왔다. 2017년 3월 20일부터 4월 7일까지 전 세대원을 대상으로 최종 우편 설문 조사를 실시한 결과 미추홀구(彌鄒忽區)로 확정되었고, 국회에서 인천광역시 남구 명칭 변경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2018년 7월 1일에 변경되었다. 엄밀히 따지면 비류가 자리 잡았다가 온조 백제에 흡수된 미추홀(彌鄒忽)이 문학산성이라서 지명의 유래가 틀린 건 아니다. 개항 이전의 인천 중심지이기도 했다.

구 서남부는 본래 바다였으나 1960년대에 간척 사업으로 매립했고, 숭의 2동에 미추홀 구청, 용현 5동에 옹진군의 군청, 인천 SSG 랜더스 필드(프로야구 SSG 랜더스) 인천축구전용경기장(프로 축구, 숭의구장)이 있다. 4개 도시철도 노선이 지나고 남쪽으로는 제2경인고속도로가 지난다. [2][3]

자연환경[편집]

지형은 남쪽 연수구와 경계를 이루는 문학산의 줄기가 동서로 뻗어 뚜렷한 산줄기를 형성하는 것을 제외하면, 대체로 낮은 구릉지를 형성하고 그 위에 시가지가 조성되어 있다. 표고 분석에 의하면 0~50m의 평지가 88.26%로 가장 많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가장 높은 곳은 문학산으로 높이는 해발 213m이다. 미추홀구는 대체로 평야로 구성된 지역이다.

주안동에서 발원해 남쪽으로 흐르는 승기천 일대는 하천과 조류에 의해 퇴적된 평야지역이었는데, 현재는 하도가 직선화되어 있고 주변 토지는 공업 및 상업용지로 바뀌고 있다. 경인고속도로 가좌 인터체인지에서 간석동까지 이르렀던 과거의 갯골은 미추홀구의 북쪽 경계를 이룬다. 이 일대 간석지는 간척에 의해 염전과 농경지로 활용되다가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계획과 더불어 공업단지로 변모되었다.

미추홀구의 자연경관은 평탄한 평지에 구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수봉산이 중심에 위치하고, 남쪽으로는 인천시의 상징인 문학산이 위치하고 있으며, 용현 5동과 학익 1동 방향으로는 황해와 인접한 해안지역이라 할 수 있다. 주요 산으로는 수봉산(115m)이 구의 중심에 위치하고 문학산(213m)이 문학동과 연수구 선학동 사이에 있다. 연평균 기온은 12.84℃이고 연평균 강수량은 1,144.5㎜이다.

역사[편집]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것이 곳곳에서 발견된 유물, 유적들로부터 입증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1927년 미추홀구 학익동의 옛 소년교도소 서쪽 언덕 위에 있던 고인돌이다. 이것은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발굴했는데, 당시 이곳에서 발굴된 3기의 고인돌은 넓은 탁자 모양으로 그 안에서 토기 조각과 돌 화살촉, 돌칼, 숫돌 등의 유물들이 많이 나왔다. 고인돌은 많은 인력이 동원되어 만들어진 지배 계층의 무덤이므로, 당시 이곳에 많은 구성원을 갖춘 부족 공동체가 살고 있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고인돌은 이곳 외에도 미추홀구 주안동 신기촌 일대와 도화동에서도 발견되었다. 이와 같이 여러 곳에서 고인돌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이미 선사시대부터 많은 부족들이 남구 일대에 거주하였음을 알려준다.

미추홀구는 인천 지역 중 처음으로 사서(史書)에 기록된 인물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나오는 비류왕(沸流王)이 바로 그 인물이다. 아버지는 고구려를 세운 주몽이고, 동생은 백제를 세운 온조왕(溫祚王)이다. 비류는 미추홀(彌趨忽)로 내려와 기원전 18년 나라를 세웠다고 하는데, 미추홀이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론이 있지만, 대체로 지금의 인천을 가리킨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현재 문학산에 있는 문학산성은 비류가 처음 인천에 자리를 잡고 도읍을 만들기 위해 쌓은 성으로 알려져 있으며 미추홀 고성 또는 남산 고성으로도 불린다.

고려 시대의 미추홀구에 관한 구체적 사실은 확실히 알 수 없으며, 다만 인천 전체의 역사 속에서 가늠할 수 있다. 호족이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등장하였던 나말여초를 지나면서 인천 지역에서는 인주 이 씨(仁州 李氏)가 대표적인 호족세력으로 대두하였다. 인주 이씨는 그 시조가 통일신라 경덕왕 때 아찬의 벼슬에 있던 이허기(李許奇)라 전한다. 고려 태조 왕건이 해상무역을 통해 성장한 기반을 바탕으로 고려를 건국하였던 것처럼, 인주 이 씨 역시 해상무역을 통해 축적한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하여 고려의 대표적인 문벌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인천이씨세보(仁川李氏世譜)』에는 이허겸의 아들 눌(訥)과 손자 성간(成幹)이 확인된다. 성간의 부인은 개성 왕씨로서 그 아버지가 왕건으로 되어 있다. 당시 태조가 혼인 관계를 통하여 강력한 호족세력을 통합하고자 하였던 점을 상기할 때, 고려 초의 인주 이 씨는 왕실과의 혼인이 이루어질 정도의 강력한 호족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는 미추홀구가 확고한 인천의 중심지로 떠오른 시대였다. 그것은 1460년(세조 6) 이곳에 도호부(都護府)가 설치되었던 것에서 시작된다. 인주 이 씨의 득세로 고려 후기에 영화를 누렸던 인천은 조선 건국 이후 인천군(仁川郡)으로 지위가 낮아졌다. 그러나 세조는 인천이 자신의 어머니이자 세종의 비(妃)였던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진 외가(陳外家) 지역이라 하여 이곳을 다시 승격시켜 인천도호부로 만들었다. 소헌왕후는 청송 심씨로 아버지의 외가가 지금의 관교동 일대에 살았던 인천 문 씨(仁川 門氏) 집안이었던 것으로 전한다.

인천도호부의 청사가 있던 곳은 바로 지금의 미추홀구 관교동 47번지 문학 초등학교 자리이다. 『인천부읍지(仁川府邑誌)』에 따르면 객사 30칸, 동헌 10칸, 내동헌 33칸, 사령청 9칸, 군관청 7칸, 옥사 4칸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읍지에는 또 당시의 인천부 인구가 2,615호(戶)로 남자 4,533명, 여자 3,466명 등 모두 7,999명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청사의 남쪽에는 청량산과 문학산이 있고, 북쪽에는 주안산이, 북동쪽에는 소래산이 둘러 있으며, 동쪽으로는 바다를 마주보고 있었다. 관아에서 동쪽으로 경신역(慶信驛)을 가면 그곳에서 남쪽과 북쪽으로 각각 안산(安山)과 금천(衿川)으로 가는 육로가 있고, 북쪽으로 소래산을 끼고 성현(星峴)을 넘으면 부평에 이르며, 이를 통해 서울로 가게 되어 있었다. 또 서쪽으로 가서 제물포 나루에 닿으면 영종도나 강화도로 가는 배를 탈 수도 있는 등 사통팔달의 교통 중심지였다. 청사 안에는 군기청 옆에 대지(大池)라 불리던 인공 연못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없어진 상태에서 새로 복원되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도호부 청사 터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문학산 기슭에는 지금도 인천향교가 자리 잡고 있다. 유교를 보급하고 인재를 키우기 위해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만든 향교는 이미 고려 시대부터 있었으나, 조선 시대에 들어와 유교사상이 건국이념이 되자 항교가 더욱 장려되었다. 이곳 인천향교가 처음 지어진 연대와 장소에 대해서는 정확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최항(崔恒)의 중수기(重修記)로 미루어볼 때 1398년(태조 7) 경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 남아 있는 향교 건물은 전란으로 불탄 것을 숙종 대에 다시 중건한 것이라 한다.

구한말까지 인천도호부의 부사(府使) 중에는 선조 대의 임영로(任榮老), 인조 대의 이행 건(李行健), 영조 대의 조재박(趙載博) 등과 같이 선정을 베풀어 조선왕조실록에 그 이름이 올라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반면 성종대의 윤인(尹璘)처럼 백성들의 호응을 받지 못해 도중에 물러난 사람도 있다. 그들 중에는 수년 전부터 인천시가 ‘안관당제(安官堂祭)’라는 행사를 조직하여 추모하고 있는 김민선(金敏善) 부사도 있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인천부사로 있다가 병사하였는데, 세간에는 그가 문학산성에서 백성들을 이끌고 왜군을 막아낸 것으로 전해오고 있고 최근 인천시의 추모 행사는 그러한 이야기를 토대로 한 것이다.

조선 시대 미추홀구의 역사에서 또 하나 특기할 만한 것은 수십여 년 전까지 ‘낙섬’이라 불리며 온전히 남아 있었던 원도(猿島)의 존재이다. 조선 시대에는 명산이나 대천 및 바다에 나라와 고을의 안녕을 빌고 복을 구하는 제사를 지내왔다. 바다의 경우 인천과 순천, 강릉 등지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이중 인천도호부에서는 원도에서 서해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원도는 섬의 형태가 원숭이 모양이어서 지명이 그렇게 붙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대부분 매립되거나 도로 개설로 잘려나가 그 모습을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다. 고산자 김정호가 1861년에 제작한 대동여지도에 보면 인천 앞바다에 원도가 표시되어 있고, 1937년 일제가 관광객들을 위해 만든 지도 『경승(景勝)의 인천』에도 이 섬의 존재가 나타나 있다.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되자 정부는 개항장인 중구에 인천부의 행정을 맡는 감리서(監理署)를 설치하고 부(府) 청사의 소재지를 미추홀구 관교동에서 중구 내동으로 옮겼다. 그 뒤 1903년에는 개항장 일대만을 관할하는 부내면이 새로 설치되면서 미추홀구 지역은 수백 년 동안 누려온 인천의 중심지 역할을 중구로 완전히 넘겨주게 된다. 이어 1914년 3월에는 부령 제111호에 따라 인천 부의 일부와 부평군 전체, 남양군 일부, 강화군 도서 일부를 통합해 부천군이 신설되는데, 이때 인천부 (舊邑面)과 서면(西面)이 합쳐져 문학면(文鶴面)이 되고, 사소 면과 주안 면이 합쳐져 그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서 다주면(多朱面)이 생겼다. 이때 지금의 미추홀구 일대는 대부분 문학면과 다주면 일대에 속하게 된다. 관교동, 문학동, 학익동은 문학면의 일부로 들어갔고, 주안동과 도화동, 용현동, 숭의동은 다주면의 일부로 들어갔다. 그 뒤 이들 행정 구역은 여러 차례 크고 작은 변화를 겪으며 8·15광복을 맞게 된다.

1947년 4월 미군 정은 인천부 주안 지청을 설치하여 도화 1동 등 9개 동을 관할하게 했다. 이것은 곧 이듬해인 1948년 8월 남동, 문학, 주안 출장소 등 3개 출장소가 공식 출발하는 것으로 이어져 오늘날 미추홀의 기틀이 된다. 이들 3개 출장소는 1956년 11월 남부, 남동, 문학, 주안 출장소로 분할되었다가, 1967년 3월 법률 제1919호로 「인천시 구(區) 설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된 뒤 1968년 1월 1일 하나로 합쳐졌으며 이때 남구가 만들어졌다.

이 과정에서 남구의 지명에는 주안과 함께 이 지역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이름인 ‘제물포(濟物浦)’가 생겨났다. 제물포는 원래 중구 중앙동과 항동 일대에 있던 포구를 가리키던 말이었다. 넓은 의미에서는 자유 공원 일대를 중심으로 중구와 동구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고, 그 포구가 있는 동네 이름은 흔히 선창리(船倉里)로 불리었다. 그러나 1963년 1월 당시의 경인 철도 숭의 역이 제물포역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그 이름이 그 뒤로도 계속 쓰이면서 이제는 그 역사(驛舍)가 있는 미추홀구 도화동 일대를 제물포인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1970년 1월 시 조례에 따라 4개 동이 나뉘어져 미추홀구는 모두 28개 행정동을 갖게 된다. 이는 인천시의 시세 확장에 따라 인구가 늘어나면서 이루어진 결과였다. 1985년 11월 인천시 조례에 따라 다시 2개 동이 분동 되어 모두 40개 행정동을 거느리게 된 남구는 지역이 너무 비대해졌다는 판단에 따라 결국 1988년 1월 1일 대통령령으로 신설된 남동구에 13개 동을 떼어 주었다. 그 뒤로도 미추홀의 인구는 계속 증가하였고 인천시가 광역시로 개칭된 1995년 3월 1일에는 연수구가 신설되면서 남구에 속해 있던 8개 동이 분리되었고, 남구에는 23개 동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1996년 3월 관교동과 문학동이 나누어졌고 결과적으로 오늘날에는 모두 24개의 행정동을 관할하고 있다.

2018년에는 옛 지명을 따라 남구에서 미추홀구로 개칭하였다. 2020년을 기준하여 행정구역은 21개 행정동(숭의 1·3동, 숭의 2동, 숭의 4동, 용현 1·4동, 용현 2동, 용현 3동, 용현 5동, 학익 1~2동, 도화 1동, 도화 2·3동, 주안 1~8동, 관교동, 문학동) 7개 법정동(관교동·도화동·문학동·숭의동·용현동·주안동·학익동)으로 이루어져 있다.[4]

산업[편집]

산업구조의 비중은 서비스업을 기반으로 하는 3차 산업이 가장 크다. 지역 내 총생산(GRDP)은 2018년을 기준하여 6조 9764억 원으로 인천시 GRDP의 7.8%를 차지하여 10개 군·구 가운데 6번째에 해당한다. 경제 활동별 부가가치의 비중은 제조업(1조 142억 원)이 15.8%로 가장 크고, 이 밖에 부동산업(13.7%), 교육서비스업(9.9%), 보건업·사회복지 서비스업(9.5%), 사업서비스업(7.2%) 등의 순이다.

2018년 사업체 수는 2만 7927개로 시 전체 사업체의 13.8%, 종사자는 12만 2819명으로 시 전체 종사자의 11.5%를 차지하여 남동구·서구·부평구 다음으로 비중이 크다. 사업체별로는 도소매업체(6558개)가 23.5%로 가장 많고, 이 밖에 숙박·음식점 업체(18.3%), 운수업체(14.1%), 협회·단체 수리 및 기타 개인 서비스 업체(12.1%), 제조업체(7.7%) 등의 순이며, 전체 사업체의 40%가 주안동에 분포한다. 사업체 종사자는 도소매업(14.8%)과 제조업(12.7%), 숙박·음식점업(11.2%), 보건업·사회복지 서비스업(11.1%), 교육서비스업(8.0%)의 비중이 크다. 제조업은 금속가공제품을 비롯하여 식료품, 기타 기계·장비, 전자부품·컴퓨터·영상·음향 및 통신장비, 전기장비의 비중이 크다.

산업단지는 주안동과 서구 가좌동 및 부평구 십정동 일원에 한국 수출(주안) 국가산업단지, 도화동과 서구 가좌동 일원에 인천 기계산업단지와 인천 일반산업단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530개 업체가 입주하여 9460여 명이 종사하고 있다. 전통시장은 주안동에 석바위시장·신기시장·인천 남부종합시장, 용현동에 용현시장·인천 용남시장·토지금고시장, 학익동에 학익시장, 도화동에 제일시장 등이 있다.

교통[편집]

도로 교통은 제2경인고속도로(고속국도 110호선)가 중구 운서동에서 미추홀구의 학익동·문학동을 거쳐 경기도 성남시까지 이어진다. 이 밖에 일반국도는 중구 북성동을 기점으로 하여 미추홀구의 도화동을 거쳐 강원도 강릉시까지 이어지는 6호선을 비롯하여 42호선(중구~강원도 동해시), 46호선(중구~강원도 고성군), 77호선(부산시 중구~경기도 파주시) 등이 미추홀구를 거쳐 가고, 국가지원 지방도(국지도)는 84호선(강화군~강원도 원주시)과 경기·인천 지역을 순환하는 98호선이 미추홀구를 지나간다. 국도 77호선과 국지도 84호선·98호선이 능해 나들목에서 제2경인고속도로와 접속한다. 관교동에 고속·시외버스를 운행하는 인천종합 터미널이 있다.

철도 교통은 1910년 주안역이 영업을 시작하여 경인선이 운행되었다. 경인선은 1974년에 개통된 서울 지하철 1호선과 직결되었고, 2000년 수도권 전철 1호선에 포함되어 미추홀구의 주안역~도화역~제물포역을 운행한다. 1937년에는 수원~인천을 잇는 수인선(水仁線)이 협궤철도로 개통하여 1995년에 영업을 중단하였다가 복선 전철화 사업을 거쳐 2012년에 운행을 재개하였으며, 2020년에 수도권 전철 수인·분당선에 편입하여 미추홀구의 인하대 역~숭의 역을 운행한다. 1999년 인천도시철도 1호선이 개통하여 미추홀구의 인천터미널역을 운행하고, 2016년에는 인천 도시철도 2호선이 개통하여 미추홀구의 주안역~시민공원 역~석바위시장 역을 운행한다. 주안역에서 수도권 전철 1호선과 인천도시철도 2호선이 접속한다.

관광[편집]

미추홀의 중심지인 문학산은 시민들이 즐겨 찾는 산으로서 인천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정상부에는 삼국시대에 축조한 문학산성(인천 기념물)이 남아 있고, 산 인근에 조선의 지방 행정관 청인 인천 도호부 관아(인천 유형문화재)와 전통 교육기관인 인천향교(인천유형문화재) 및 학산 서원터 등의 역사 유적이 남아 있다. 인천도호부 관아에서는 전통문화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구 중앙에 위치한 수봉산의 수봉공원에는 자연학습원과 어린이 놀이터, 인공폭포, 국궁장(무덕정) 등이 조성되어 도심의 휴식처로 인기가 높으며, 송신탑과 공원 곳곳에 장식된 형형색색의 조명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야경으로 유명하다. 용현동의 인하공업전문대학 교정에는 우리나라 국토 높이를 측정하는 기준점인 대한민국 수준원점(국가 등록문화재)이 있으며, 인하대학교 후문 일대에는 길거리 공연과 프리마켓, 실용음악 공개강좌 등이 열리는 인하대 문화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숭의동에는 30여 개소의 목공예점과 목공소가 밀집한 목공예마을이 조성되어 있으며, 이밖에 관교동의 중앙공원, 주안동의 석바위공원, 주안동·학익동의 미추홀공원 등이 도심의 휴식처로 조성되어 있다. 먹거리 명소로는 용현동의 물텀벙이거리, 학익동의 학익법조타운 먹거리촌 등이 있다.

생활 문화[편집]

2004년부터 매년 9월 중에 주안 일대에서 주안미디어 문화축제가 열려 미디어 퍼포먼스 등 미디어 컨텐츠를 활용한 프로그램과 미추홀 퍼레이드, 미디어 놀이터, 마을극장, 문화공연 등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9~10월 중에는 용정공원과 문학산 일원에서 조선 시대에 지방관이 왕을 대신하여 서해의 여러 섬들의 신에게 지역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던 국가 제사를 재현하는 인천 원도 사제(猿島祠祭)가 열린다. 이밖에 주안역 일원에서 겨울철에 윈터 마켓이 열리고, 제물포역 일원에서는 제물포 영 스퀘어 페스티벌이 열린다. 향토음식으로는 물텀 벙(아귀)에 야채 등을 양념을 하여 조리하는 물텀 벙찜이 유명하다.

문화재[편집]

국가 지정 문화재로는 보물 1점(평양성도 병풍)과 국가무형문화재 1점(은율탈춤)이 있으며, 이 밖에 대한민국 수준원점 등 2점이 국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시 지정 문화재로는 정우량 영정·백련정사 칠성도를 비롯한 인천유형문화재 8점, 단 소장·범패와 작법무(바라춤)를 비롯한 인천 무형문화재 8점, 인천 기념물 2점(문학산성, 이윤생·강씨 정려) 등이 있다. 이 밖에 문학동 고인돌을 비롯한 5점이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미추홀구〉, 《위키백과》
  2. 미추홀구〉, 《네이버 지식백과》
  3. 미추홀구〉, 《나무위키》
  4. 미추홀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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