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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제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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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제업(縫製業, sewing manufacture)

봉제업(縫製業, sewing manufacture)은 봉제 일을 전문으로 하는 영업, 또는 그런 기업을 말한다. 재봉틀 설비를 가진 공장에서 봉제를 전문으로 하는 2차 가공자이며, 기획・소재의 구입에서 패턴 메이킹, 커팅도 행하여 제품을 판매하고 있는 곳도 있다. 흔히는 상사나 제조도매(어패럴 메이커)의 하청으로 패턴 메이킹 또는 커팅까지 된 것을 받아, 다만 봉제해서 완성을 하는 것 뿐이라는, 설비와 기술과 노동력으로 장사를 하고 있는 곳이 태반이다.

개요[편집]

봉제업은 섬유산업에 있어서 최종 상품가공업의 하나이다.

직물·모피·고분자물 등의 재료를 재단·봉합·가공하여 생산한 것으로서 기성복·속옷·특수복·스카프·머플러 등 광범위한 상품들을 아우른다. 섬유산업 중 기계화의 진척이 가장 어려운 부문으로 노동집약형 산업이며, 중소자본으로 경영되는 경우가 많다. 종업원의 비율도 신규 인력의 유입이 단절되어 4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으로 고령화가 심화되고 있고, 종사자의 성별도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으며, 외국인 노동자들도 많이 종사하고 있다.

봉제업은 한국이 1960년대부터 수출 분야에서 주력하여 온 분야이지만 1980년대 이후 인건비 상승과 생산 인력을 조달하기가 어려워 생산업체들이 중국인도네시아 등지로 이전하였고, 가격 경쟁력의 열세로 수출이 악화되면서 그 수가 크게 줄었다. 봉제업은 인건비가 많이 드는 분야여서 2004년 이후 많은 봉제업체가 상대적으로 인건비를 줄일 수 있고 당일 물류가 가능한 개성공단에 입주하여 제품을 생산하였다. 2011년 6월 개성공단에 진출한 우리 기업은 123개사로, 이 가운데 60%가 봉제업체였다.

역사[편집]

1950년 한국 전쟁 이후, 오랜 침체기를 겪은 한국은 1960년대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섬유, 의복, 가발, 신발 등의 경공업과 조립산업을 중심으로 한 수출주도형 경제 성장 전략을 전개한 것이 그 비법이었다. 이러한 배경에 국내 의류 봉제업은 급격히 성장해, 특히 70년대부터 80년대 초까지 섬유와 봉제 산업은 한국 경제의 중심축을 이루며 경제 성장을 견인하는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중국을 비롯해 저렴한 노동력을 기반으로 한 경쟁국들이 시장에 대거 유입되면서 한국 봉제 산업은 경쟁력을 잃기 시작했다. 특히 중국의 대규모 생산 시스템과 저임금 노동력으로 인해 한국 봉제 산업은 전 세계 봉제 시장의 가격 경쟁에서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국내 봉제 업체들은 생산 비용을 낮추고 품질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강화했지만, 저가 제품에 대항하기 어려워 점차 그 숫자가 줄어들기에 이른다.

갑작스럽게 산업이 축소되면 실업자가 속출하기 마련이다. 봉제 산업의 쇠퇴로 수많은 봉제 업체가 문을 닫게 되자 많은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는 상황이 발생했다. 봉제 산업은 지역사회와 경제에 큰 영향을 준 과거의 영광을 뒤로한 채 점점 그 역할이 축소되기 시작했다. 한국 봉제 산업의 근간이 되었던 뿌리가 마르니, 한국만의 독자적인 봉제 기술은 존폐 기로에 서게된다.

한국 전쟁 이후, 한국 봉제 산업의 시작

한국전쟁 이후 지방에서 올라온 이주민과 피난민, 실향민들이 청계천변에 판자촌을 형성하여 모여 살았다. 이 시기의 원단은 지금처럼 좋은 원단들이 아니었다고 한다. 주로 미군들의 옷을 재료 삼아 염색, 수선하는 등 재가공 했다. 이를 계기로 상권이 형성되었지만, 제대로 된 환경은 갖추어지지 않았다. 거리에 재봉틀을 두고 옷을 만들어 팔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1950~1960년대 평화시장과 동대문 일대와 봉제업의 성장

1960년대 의류 제조 산업이 호황을 누리며 수출이 늘어나자 동대문에는 원단과 의류 부자재를 업으로 삼은 상인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큰 사건들을 꼽자면 1958년 청계천 대화재가 있었다. 그 이후 판자촌과 노점상은 밀려나고 청계천 복개가 진행되었다. 1961년 평화시장이 문을 연 후 동대문 일대에는 의류산업단지를 이루는 상가들이 생겨났다. 대화재 이후로 196년 평화시장이 신축되었고, 이를 계기로 이 일대가 비로소 의류 생산과 판매 집적지로 특화되었다. 평화시장은 기존의 맞춤옷에서 기성복으로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과 합섬섬유의 발전에 힘입어 옷을 만들어냈고, 큰 인기를 끌면서 한때 인근 시장들과 함께 한국 기성복의 70%를 생산할 정도로 의류 산업을 선도했다.

평화시장을 세운 상인들 중에는 한국전쟁 때 북한에서 내려온 실향민이 60% 정도로 많은 수를 차지했다. 이들은 조국이 평화 통일을 이루었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담아 시장 이름을 ‘평화시장’으로 지었다고 한다.

1970~1980년대 한국경제를 이끈 섬유 봉제 산업

상가와 함께 있던 봉제공장들은 1970년대부터 동대문과 가깝고 임대료가 저렴한 창신동으로 자연스럽게 모여들었다. 1970년대 동대문 평화시장을 중심으로 생긴 수백 개의 가게와 작업장으로 전국에서 온 어린 소녀들이 몰려들었다. '시다'라는 이름으로 형제자매의 학비와 가족 부양을 위해 고된 일을 하며 재봉기술을 배웠다. 가위 하나만 쥐여주면 ‘시다’를 할 수 있다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전문적인 기술 없이도 시작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반포로 고속버스터미널이 이전하기 전 동대문종합시장 쪽에 버스터미널이 있었다고 한다. 버스에서 내리면 '숙식제공'이라는 문구와 함께 봉제공장의 인력을 구하는 글들이 많이 붙어있었는데, 이는 아는 사람 없이 무작정 상경해서 온 사람들에게 매우 메리트 있는 문구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노동 시작 시간과 끝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은 노동의 굴레에 빠져드는 일이었다.

이 상황을 알리고 싶은 사람이 있었는데, 이는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전태일 열사이다. 전태일 열사는 '시다'에서 재단사로 승진하여 공장에서 일하던 중, 재단 보조 여공들의 질병, 박봉 등 열악한 노동환경에 시달리는 현실에 충격을 받고 노동 현실을 타파하고 개선하고자 한다. 여러 가지 방법에도 노동환경 개선에 대한 관심을 받지 못하자 법전과 자신을 불태우며 노동환경 개선에 대해 소리쳤다.

1970년 열악한 노동환경에 반발한 전태일 열사 분신 사건을 계기로 정부의 단속이 심해지면서 평화시장에 있던 많은 봉제공장이 주변 지역으로 이전하면서 창신동을 비롯한 의류 생산 도심 제조업 지역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쇠퇴의 길

70년대 동대문 평화시장 내 봉제공장이 창신동으로 이전한 이후 지금까지도 창신동에는 크고 작은 봉제 공장들이 밀집해 있다. 80년대 활발한 내수시장 덕에 쏟아지는 물량을 대기 힘들 정도로 번창하던 창신동의 봉제공장은 90년대 중반 이후 중국에서 값싼 제품이 밀려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그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현황[편집]

현재의 국내 봉제 공장의 상황에 대해 보다 자세히 살펴보자면 먼저 국내의 봉제 공장들은 대부분 영세 업체로 그중에서도 가족 생계형의 소규모 공장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대부분의 봉제 공장들은 봉제 임가공 수준에서 하청 생산에 주로 의존하여 봉제 공장의 80% 이상은 브랜드 동대문 시장과 같은 유통업자가 기획하고 디자인한 옷을 주문받아 단순히 제조 납품(OEM)한다고 한다. 따라서 원청 기업의 오더가 없으면 경영이 마비될 정도로 어려운 곳들이 많다 특히 봉제 공장의 비수기로 꼽히는 혹서와 혹한기에는 월평균 공장 가동 일수가 101일에 그칠 정도이다. 여기에 봉제업에 전망이 없다는 부정적인 인식이 더해져 봉제업계에 젊은 신규 인력의 유입은 사실상 단절되었으며 과거 봉제 산업의 성장을 일군 봉제 장인들의 고령화로 인해 어쩌면 몇 년 후에는 더 이상 국내에서 봉제 공장을 찾아보기 힘들지도 모른다.

현재 한국 봉제 산업의 실황은 상당히 우려스럽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전국 봉제 업체 수는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2015년에는 약 2만 5천여 개였던 봉제 업체의 수가 2019년에는 약 2만 3천여 개로 감소했으며, 종사자 수도 2015년에는 약 14만 5천여 명이 있었으나 2019년에는 약 12만 4천여 명으로 크게 줄었다.

사업의 규모가 축소되는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봉제 업체 중 종사자 20~49인의 중소업체 비중은 3%조차 되지 않고, 5인 미만 가족 생계형 업체의 비중이 80%가 넘는다. 업체의 규모가 작다 보니 해외 봉제 공장과 같이 자동화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도 쉽지 않고, 객공이나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도 녹록지 않다.

업체의 수와 규모, 종사자 수의 감소는 봉제 산업의 현실적인 어려움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보여준다. 해당 산업의 임금 수준은 낮고 근무 환경은 열악한 편이니 젊은 세대의 유입이 거의 없고, 그 결과 노동 인력 고령화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실제로 2021년 한국섬유산업연합회가 발표한 봉제 업체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50대 이상의 노동자가 봉제 산업에서 77%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30대 이하 노동자는 전체 노동자 중 10% 채 되지 않는다. 의류 봉제는 더 심각해 50대 이상이 83%에 달하고 30대 이하는 5%에 불과하다. 당장 현장에서 60대 초반의 봉제사는 젊은 축에 속하고, 70대를 찾아보는 것도 어렵지 않다고 하니 봉제 산업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우려는 앞으로 마주할 현실이 아닌, 이미 맞닥뜨린 난제가 되었다.

한국 봉제산업의 중요성[편집]

한국의 봉제 산업이 생존하고 성장해 나가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해외 관광객들, 특히 중국인 관광객 사이에서 K-패션 아이템에 대한 선호가 크게 높아지며 한국을 여행하고 쇼핑하는 동기가 커지고 있다. 그러나 K-패션에 대한 선호는 디자인, 소재, 제조 과정 모두 우수한 품질과 기술력을 갖춘 한국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기대하는 마음에서 기인한다. 국내 봉제업이 무너지면 해당 관광객과 해외 도매상의 발길이 줄어들게 되는 결과는 불가피하다.

생산 공정이 해외로 이동하면 K-패션의 디자인적 우수성 측면에서도 부정적인 영향이 야기된다. 소량 생산을 담당할 수 있는 봉제 시장이 국내에서 유지되지 않으면 간단한 샘플 제작조차도 중국이나 베트남과 같은 해외 봉제 시장에 의존하게 된다. 이는 해외 업체들이 국내 패션 시장의 획기적인 디자인을 미리 알고 유사품을 무분별하게 생산하는 결과로 이어져 국내 패션 시장의 디자인적 경쟁력을 낮추는 결과를 낳는다.

국가 경쟁력과 문화적 가치 면에서도 봉제 시장은 매우 중요하다. 도심 중심의 창신동 봉제 시장은 동대문 패션 시장의 생산기지로써 국내 패션 산업을 지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즉, 이 지역의 상실은 패션 중심지로의 동대문 경쟁력을 약화할 수 있다. 유럽의 디자이너들이 우수한 제조업 기반을 갖춘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과 미국에서 패션 기업들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리쇼어링 정책을 펼치는 것은 모두 도심 제조업의 기반이 패션 산업에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증명한다. 창신동 봉제 시장의 유지가 동대문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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