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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평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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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평야

부평평야(富平平野)는 인천광역시 부평에서 경기도 부천 지역을 거쳐 서울특별시 영등포까지 펼쳐진 평야이다.

개요[편집]

  • 부평평야는 북쪽에서부터 한강 수로의 남쪽 연안을 따라 김포시 하성면·통진읍·대곶면, 그리고 김포 지역과 서울시 양천구·영등포구·금천구로 이어지는 넓은 평야 지대이다. 한강 최하류 유역에 위치한 이들 평야 지역은 한강 본류와 함께 한강으로 직접 유입하는 봉성포천·걸포천·굴포천·안양천 등의 지류가 만든 충적지의 핵심부에 자리 잡고 있다. 처음에는 갈대밭 사이로 논이 듬성듬성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비로소 농토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1]

부평평야의 유래와 환경[편집]

  • 넓은 황무지를 개척하여 곡창지로 만들었는데, 그 농지가 넓어 수확이 많이 나는 풍요로운 평야라는 뜻이다. 즉 한강 하류 지역의 어느 특정한 곳에 주현 규모의 중심지가 자리를 잡았고, 이 중심지가 관할하는 땅이 넓고 평평하게 펼쳐쳐 있다 하여 부평평야라 부르게 되었다.
  • 부평평야 지역은 지정학적인 입지 상 한강 하류 유역을 확보하기 위한 거점이자 서울의 관문으로서의 전략적 가치가 매우 높았으므로 조선시대에는 부평의 치소(治所)가 이 지역에 자리하였고, 부평의 중심 농지와 취락으로 발달하였다. 그러나 홍수가 나면 한강이 범람하여 부평평야는 물에 잠기곤 하였다. 이에 1923년 조선총독부의 산미 증산 계획에 의해 부평수리조합 설치 인가를 받아 한강 변 둑을 쌓아 수해 대책을 세워 일본인 지주와 한국인 부호들을 중심으로 대농장이 생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 근대 이후에는 경인선 철도가 건설되면서 경인공업지대를 이루었으며, 벼농사와 과수를 비롯하여 각종 채소 재배가 활발했다. 그러나 현재 김포는 경기도에, 양천과 금천, 영등포는 서울시에 편입되었고, 부평과 계양 지역은 아파트와 공장이 빼곡히 들어섰다. 특히, 부천에 속한 중동과 상동 지역의 농지 역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곡창 지대의 부평평야는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한국의 평야[편집]

  • 평야는 형성 원인에 따라 크게 퇴적평야와 침식평야로 나눌 수 있다. 퇴적평야는 하천·빙하·바람 등의 퇴적작용에 의해 형성된 평야를 말한다. 가장 보편적인 퇴적평야는 하천에 의해 형성되는 것으로, 이를 가리켜 충적평야라고 한다. 선상지, 범람원, 삼각주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빙하의 퇴적작용으로 형성된 퇴적평야의 예로는 빙력토 평원(氷礫土平原)이 있다. 침식평야는 하천·빙하·바람·파랑 등의 침식작용에 의해 형성된 평야를 말하며, 대표적인 예로는 구조평야가 있다. 구조평야는 지질구조가 그대로 평야를 이룬 지형을 의미하는데, 과거 지질시대에 형성된 지층이 오랜 기간 지각변동을 받지 않은 채로 하천·빙하·바람 등의 침식작용을 받아 남아있는 평야이다.
  • 한국의 평야(平野)는 주로 한반도의 서부와 남부 해안, 큰 강의 하류 지역에 넓게 형성되어 있다. 교통기관이 발달하고, 평야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오던 중 상공업이 성행하여 도시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평야 지대의 농촌은 일반적으로 북쪽의 낮은 산을 등지고 논과 강을 바라보는 곳에 자리 잡은 경우가 많다. 북쪽의 산은 겨울철의 거센 바람을 막아주며, 남향의 산기슭은 햇볕을 잘 받아 따뜻하게 해준다. 그리고 강물이나 시냇물은 농사를 짓는 데 꼭 필요하다.
  • 한국의 평야는 대부분 논으로 이용되고 있다. 평야의 핵심부는 대개 하천의 토사가 쌓여 이루어진 범람원이고, 평야에서 '들'이라고 불리는 곳은 거의 전부 이러한 범람원이다. 평야 주변의 구릉지, 즉 야산도 기복이 아주 작으면 평야의 일부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곳은 여러 면에서 범람원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하천의 범람에 의한 침수의 위험이 없을 뿐 아니라 대개 기반암의 풍화토인 적색토로 덮여 있고, 밭ㆍ과수원ㆍ목장ㆍ임야 등으로 이용된다.
  • 평야 지역의 농촌에서는 물을 대기 쉬우면 논으로 이용하며, 홍수 때 물에 잠기던 곳을 둑으로 막고 수문을 만들기도 한다. 또한 바닷물을 막아 물을 빼내고 논으로 만드는가 하면 경사진 곳은 층층이 논두렁을 쌓아 논밭으로 개간하기도 하며, 둑을 쌓아 저수지를 마련하기도 한다. 한국의 대표적인 곡창지대는 만경강 유역의 호남평야와 낙동강 유역의 김해평야로서 갈수록 현대화가 추진, 발전되고 있다. 또한 물이 많지 않은 곳에는 밭을 일구어 보리, 감자, 옥수수 등 작물과 배추, 무 등 채소를 재배한다.

부평구(富平區)[편집]

  • 인천광역시의 중동부에 있는 구이다. 인천광역시의 중동부, 경도상으로는 동경 126° 41' 05"~126° 46' 13", 위도상으로는 북위 37° 27' 17"~37° 31' 45"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경기도 부천시, 서쪽으로는 인천시 서구, 남쪽으로는 남동구, 북쪽으로는 계양구와 접한다. 구의 동쪽과 남쪽 끝은 구산동, 서쪽 끝은 청천동, 북쪽 끝은 삼산동이며, 동서 간 거리는 7.47㎞, 남북 간 거리는 6.6㎞이다. 면적은 32.0㎢로 인천광역시 전체 면적의 약 3%를 차지하여 10개 군·구 가운데 동구·미추홀구 다음으로 작다.
  • 부평구는 서쪽에 원적산(211m)·철마산(146m)·함봉산(호봉산, 165m) 등이 서구와 경계를 이루는데, 이들 산지는 예로부터 인천의 해안 지역과 내륙 지역을 가르는 경계이기도 하다. 남쪽에는 부개산(만월산, 187m)·광학산(철마산, 201m) 등이 남동구와 경계를 이루고, 북쪽으로는 경인고속도로가 계양구와 경계를 이룬다. 북쪽의 계양구 계양산과 남쪽의 부개산·광학산·거마산 사이의 분지에 위치하여 대체로 저평한 구릉 지대에 해당하는데, 분지에 발달하여 곡창지대를 이루던 부평평야는 지금은 시가지와 주택지로 변모하였다. 주요 하천으로는 광학산에서 발원하는 굴포천이 북쪽으로 흐르면서 청천천·계산천·귤현천을 비롯한 부평구와 계양구의 지류들과 합쳐져 경인 아라뱃길로 흘러들어 한강으로 합류한다.
  • 예로부터 부평평야를 기반으로 농업이 활발하여 풍물이 발달한 지역으로서 1997년부터 매년 가을에 부평풍물대축제가 열려 구민의 안녕을 기원하는 고유제를 시작으로 사흘에 걸쳐 창작풍물페스티벌과 부평두레놀이 등의 공연, 시민축제와 풍물난장·대동놀이 등의 거리축제를 비롯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어 인천을 대표하는 축제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민속놀이로는 과거에 농사일을 하면서 신명을 돋우던 두레농악이 삼산동 일원에서 전승하여 부평두레놀이라는 명칭으로 인천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부평(富平)[편집]

  • 인천 부평구 부평동(富平洞) 일대를 부르는 말이다. 수출공업단지가 들어선 후로 급속히 발전한 곳으로, 인천의 동쪽 끝에 자리하여 부도심의 기능도 수행한다. 공업단지가 조성되어 도시화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해발고도 20m 이하로 김포평야의 일부를 이루는 곡창지대였다. 넓은 대지를 쉽게 얻을 수 있는 데다 경인선(京仁線)전철 ·경인고속도로 등이 통과하여 영등포공업지대와 인천임해공업지대 ·주안(朱安)공업지대와 부천 ·영등포를 잇는 경인공업지대의 중심지가 되었다.
  • 공업단지 내에는 대규모 자동차공장을 비롯하여 섬유제품 ·전기기기 ·전자기기 ·플라스틱제품 ·합성수지제품 ·금속제품 및 자동차부속품을 제조하는 공장이 밀집해 있고, 생산품 가운데 많은 양이 인천항을 통해 수출된다. 공업의 발달로 인구도 급증하여, 인천에서 인구증가율이 가장 높은 지역의 하나이다.

부평평야 지역의 역사[편집]

  • 부평(富平)은 원래 너른 을 중심으로 발전한 곳이다. 부평평야가 말해주듯, 곡창지대로 유명했다. 넓은 농지에서 수확을 많이 내는 풍요로운 평야다. 한강 하류 중심지의 땅이 평평하게 펼쳐쳐 있어 '부평평야'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그만큼 농경문화가 널리 발달한 지역으로 꼽힌다. 1914년 부천군 부내면에, 1940년 인천부에 편입되는 등 소속 행정도 여러 차례 바뀌었다.
  • 부평이 변신을 꾀한 계기는 1940년 인천육군조병창 문을 열면서다. 그 무렵 계속되는 전쟁으로 일제엔 병기와 군수품 보급이 절실했다. 이때 일본 육군은 조병창 부지로 부평을 선정했다. 부평은 경성과 인천을 잇는 지리적 위치와 공장 부지로 사용할 만한 넓은 터를 갖고 있어 군수기지 조성에 안성맞춤이었다. 인천조병창은 한반도에서 가장 큰 무기제조 공장. 소총·총검·탄환·포탄·군도·차량 등을 생산하며 전쟁 물자를 조달했다.
  • 미군부대 주변엔 이들을 상대로 한 각종 상권이 풍성했다. 팝송 유행에 인기 가수들을 모으며 서양 음악 산실 역할도 톡톡히 했다. 한국전쟁 이후 부평은 1960년대엔 공업지대로 변모했고, 인구증가를 가져왔다. 1970년대 들어선 주한미군 방위협약에 따라 부평지역 내 많은 병력이 다른 곳으로 단계적 이전을 실시했고, 이후 축소된 미군 주둔 지역엔 '캠프마켓(Camp Market)'을 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부평엔 역사를 되돌아 볼 수 있는 자산이 많다.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담은 '역사적 공간'으로 평가된다.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사택과 관사 등 주거 시설이 21개로 가장 많았다. 상업시설 9개와 산업·종교·군사 시설, 일제 강제 징용 노동자 숙소인 영단주택과 검정사택, 부평철도관사, 부평지하호 등도 포함됐다.
  • 부평평야(富平平野)는 특별히 부평광야(富平廣野)라고 불렀다. 인천지역에서 이렇게 넓은 들은 좀처럼 없었다. 그러나 '경인일여'를 표방할 때부터, 부평평야 앞에는 공장, 건설, 공장지대란 말이 붙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서 부평평야의 육천에 이르는 소작 농가는 졸지에 경작할 땅을 잃게 됐다. 해방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김포평야(金浦平野)와 김포 쌀을 잘 안다. 그러나 부평평야와 부평쌀이란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지금은 거의 없다. 김포(金浦)가 그 이름처럼 물이 드나들던 포구라면, 부평(富平)은 매우 비옥한 평야를 뜻한다. 항도인천엔 응봉산, 주안염전엔 수봉산, 부평평야엔 계양산이 있다. 일제가 미신(迷信)으로 몰아세워도, 조선사람들은 특별한 날이면 여기에 모여서 산신제(山神祭)를 올렸고, 거기엔 풍물이 함께했다. 기우제(祈雨祭)를 지낼 때면 인천의 일본 관리도 여기에 동참을 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부평평야〉, 《향토문화전자대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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