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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마이바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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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마이바흐(Wilhelm Maybach)
독일의 엔진 디자이너/ 기업가
다임러(Daimler AG)

빌헬름 마이바흐(Wilhelm Maybach)는 독일 초기의 엔진디자이너이고 기업가이다. 1890년대에 세계 자동차 생산의 중심인 프랑스에서 '디자이너의 왕'으로 평가를 받았다.

다임러를 구축한 고틀리프 다임러와 공동으로 내연기관을 개발하여 세계 최초의 사륜구동 자동차를 제작하였으며 아들인 카를 마이바흐와 공동으로 체플린비행선 엔진( Zeppelin engine)을 제조하였다. 베르사유 조약(Versailles Treaty)이 체결된 뒤에 마이바흐 브랜드의 럭셔리 자동차를 제작하여 1920년~1930년대의 유명한 브랜드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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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편집]

어린 시절[편집]

빌헬름 마이바흐는 1846년 2월 9일에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Baden Wurttemberg)주 북부의 하일브론(Heilbronn)시에서 목수장인 크리스티안 마이바흐(Christian Maybach)와 부인 루이제(본가 성씨 단볼프(Dannwolf))의 다섯 아들중에 둘 째로 태어났다. 여덟 살 때 가족을 따라 슈투트가르트로 이사하였으며 열 살(1856년)에 어머니를 잃고 열세 살(1859년)에 아버지를 잃었다. 마이바흐는 로이틀링겐 고아원(orphanage in Reutlingen)에서 자랐다.

1861년부터 고아원부속기계공장 디자인실에서 제도 트레이닝을 받았으며 시립고등학교에서 물리와 수학의 야간수업을 받다가 1865년부터 고아원 부속공장에서 상세설계 디자이너로 지냈다. 1867년에 고틀리프 다임러(Gottlieb Daimler)가 공장관리를 맡게 되면서 빌헬름은 고틀리프의 조수가 되었으며 1869년에 고틀리프를 따라 카를스루에(Karlsruhe)에 있는 대형기관차 업체 마시넌바우-게젤샤프트 카를스루에(Maschinenbau-Gesellschaft Karlsruhe AG)에 건너가 디자인오피스의 제도공으로 일하였다. 1872년에 고틀리프가 쾰른(Cologne)에 있는 고정식 가스엔진(stationary gas engines) 제조업체 도츠AG 가스모토렌패브리크(Deutz-AG-Gasmotorenfabrik)에 건너가 임원 겸 디자인오피스 총괄을 맡은 이듬해에 빌헬름도 따라가 수석 디자이너를 맡았으며 회사의 주주인 니콜라우스 오토(Nicolaus Otto)가 특허를 출원한 오토 사이클 엔진(Otto cycle engine)개발에 참여하였다. 1876년에 미국의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 개최된 세계박람회에서 도츠엔진을 소개하였으며 그 이듬해에 오토가 디자인한 엔진의 리디자인을 추진하였다.

1878년에 마울브론(Maulbronn)우편배달부의 딸이자 고틀리프 아내의 친구인 베르타 빌헬미나 하바마스(Bertha Wilhelmine Habermaas)와 결혼하였으며 이듬해에 아들 카를 마이바흐(Karl Maybach)를 보았다.[1]

다임러 모터스[편집]

1880년부터 고틀리프와 니콜라우스는 의견 차이가 있었으며 이로 인해 고틀리프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별도로 회사를 설립하게 되었다. 고틀리프는 회사에서 특허에 관한 본인과 빌헬름의 보상금 112,000 골드마크에 상당한 주식을 받았으며 빌헬름도 고틀리프를 따라 신규 회사 설립에 가담하였다. 1882년에 빌헬름은 칸슈타트(Cannstatt)로 건너가 고틀리프와 함께 1883년부터 소형 고속 가솔린 엔진 개발을 추진하였으며 그 해 말에 리그로인(Ligroin)을 연료로 사용한 엔진 특허를 출원하고 1984년에 제작한 3대 엔진중의 하나를 사용하여 1885년에 나무 프레임으로 제작한 세계 첫 번째 모터사이클 레이트바겐(Reitwagen)을 개발한 뒤 특허를 출원하였다. 1885년에 현대 가솔린엔진의 선도자로 불리우는 스탠투어 엔진(Standuhr)을 개발하고 카뷰레이터를 개발하였으며 1887년에 라이선스를 해외로 제공하였다.

1889년에 처음으로 자동차를 개발하였으며 그 해 10월에 파리에서 변속기 시스템을 가진 스틸휠 자동차를 런칭하였다.

엔진의 판매는 늘어나기 시작하였으며 주로 네카모터보트(Neckar motorboat)에서 구입해갔고 엔진 라이선스도 세계에 퍼지기 시작하여 1890년에 프랑스의 피나르 르바소(Panhard & Levassor)와 푸조(Peugeot), 1891년에 미국의 스타인웨이(Steinway), 1896년에 영국의 다임러 모터 컴퍼니 오브 코번트리(Daimler Motor Company of Coventry), 1899년에 오스티리아의 아우스토-다임러(Austro-Daimler)에 양도되었다.

1890년에 경제상황의 어려움으로 고틀리프 다임러와 빌헬름 마이바흐는 외부 투자를 유치하여 그들의 사업을 주식회사 다임러 모토렌 게젤샤프트(Daimler Motoren Gesellschaft, Daimler Motor Corporation 약칭 DMG)로 전환하고 소형 고속 엔진의 제조와 판매를 주요 사업으로 하였다. 그 때 빌헬름은 회사의 수석 디자이너를 맡았다.[1]

DMG 시절[편집]

회사 사업구조의 변경으로 회사 경영전략을 수립할 때 고틀리프와 빌헬름의 의견으로 회사전략을 수립하는것은 아니었다. 경영진에는 기존의 엔진업무를 확장하여 사업을 이끌어나가자는 의견과 자동차생산을 추진하자는 의견이 부딪혔으며 고틀리프와 빌헬름은 자동차생산을 추진하는게 소원이었다. 하지만 이사회는 엔진업무에 제한하는걸로 결론이 나왔고 고틀리프와 니콜라이스의 의견분기를 무시하고 DMG와 도츠의 합병을 추진하려 하였다. 이에 불만을 가진 빌헬름은 경영진 멤버의 직위를 거절하고 1891년 2월 11일에 회사를 떠났으며 고틀리프의 지원을 받아 디자인오피스를 설립하였다. 1892년말에 디자인오피스는 17명의 직원을 고용하였으며 그 중의 다섯 명은 고틀리프가 급여를 지급하였다.

1894년에 빌헬름은 고틀리프와 그의 아들 폴(Paul)을 포함한 팀을 이끌어 그의 세 번째 엔진 포이닉스(Phoenix) 엔진을 개발 완료하였으며 처음으로 자동차에 4기통 엔진을 탑재하여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19세기 말에 빌헬름이 개발한 엔진은 전 세계 어떤 자동차제조사나 어떤 모델을 물론하고 없어서는 안 되는 제품으로 되었으며 빌헬름 본인도 프랑스 초기 자동차산업의 백본(backbone)으로 되어 "디자이너의 왕"이라 불리웠다.

1893년에 고틀리프도 DMG 기술총괄 직위를 박탈당하면서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하지만 영국의 기업가 프레더릭 심스(Frederick Simms)가 1894년에 35만 마크의 가격으로 포이닉스 엔진의 권리를 구입면서 고틀리프와 빌헬름의 복귀를 조건으로 달고 이 자금이 회사의 자금상황 안정에 큰 영향을 미칠수 있는데 비추어 회사는 고틀리프와 빌헬름의 복귀를 인정하였으며 1895년에 빌헬름을 기술총괄로 임명하였다. 1900년에 고틀리프가 심장병으로 별세한 뒤 빌헬름은 1903년까지 기술총괄로 임직하다가 1907년에 회사를 떠나 아들 카를과 합자회사를 차렸다.[1]

가족회사[편집]

1908년에 페르디난트 폰 체벨린(Ferdinand von Zeppelin) 백작은 체벨린 비행선 제조회사 로프트시프바우 체벨린(Luftschiffbau Zeppelin, 영어 Airship construction Zeppelin)을 설립하였다. 1909년 3월 23일에 빌헬름과 카를은 로프트시프바우 체벨린과 계약을 체결하고 엔진 자회사를 구축하기로 하였으며 프리드리히스하펜(Friedrichshafen)으로 회사를 옮겨 루푸트파조익 모토렌 게엠베하(Luftfahrzeug-Motoren-GmbH)로 리브랜딩하였다. 카를이 상속하는 조건으로 카를과 빌헬름은 20% 지분을 보유하였으며 1912년에 마이바흐 모토렌바오 게엠베하(Maybach-Motorenbau GmbH, 영어 Maybach Engine Construction Company)로 다시 사명을 변경하였다. 1916년에 160마력의 엔진을 개발하였으며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하기 전에 2000대를 판매하였다. 1916년에 빌헬름 마이바흐는 슈투트가르트 기술대학교의 명예박사로 인정받았다.

1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뒤 1919년 베르사유 조약(Versailles Treaty)에 따라 독일에서 항공기 생산의 추진은 금지되었다. 이에 비추어 마이바흐는 고속 디젤엔진을 제조하여 해군과 철로용으로 하고 가솔린엔진을 제조하여 자동차용으로 하였으며 자동차생산은 하지 않았다. 1921년에 마이바흐는 완성차 시장에 진출하기로 하고 마이바흐 리무진을 개발하였으며 같은 해 독일의 베를린에서 개최된 자동차 박람회에 전시하였다. 1928년까지 300대를 판매하였으며 그 뒤에 시속 135km 마이바흐 W5를 개발하여 1927년부터 1929년사이에 250대를 판매하였다. 그 뒤에 V12 모델을 개발하였으나 전후 독일의 경제위기로 몇 십대밖에 판매를 못하였으며 1930년에 DS7-체벨린(DS7-Zeppelin)을 개발하였다.

1929년 12월 29일에 빌헬름 마이바흐는 83살의 나이로 독일의 슈투트가르트에서 별세하였다.[1]

마이바흐 모토렌바오 게엠베하[편집]

빌헬름의사업인 마이바흐 모토렌바오 게엠베하는 프리드리히스하펜에서 지속되었으며 1945년 뒤에는 풀 레인지 디젤 엔진을 생산하였다. 1960년대 초반에 라리선스 조건으로 대형 다임러 벤츠 엔진을 생산하게 되면서 다임러 벤츠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1960년대 중반에 마이바흐 모토렌바오 게엠베하는 마이바흐 메르세데스 벤츠 모토렌바오 게엠베하(Maybach Mercedes-Benz Motorenbau GmbH)로 되었으며 83%의 지분은 다임러 벤츠로 넘어갔다.[1]

각주[편집]

  1. 1.0 1.1 1.2 1.3 1.4 "Wilhelm Maybach", Wikipedia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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