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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페테르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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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페테르부르크
상트페테르부르크 위치

상트페테르부르크(러시아어: Санкт-Петербург, 문화어: 싼크뜨-뻬쩨르부르그)는 러시아의 북서쪽에 있는 연방시이다. 모스크바와 세바스토폴과 더불어 러시아에 3곳뿐인 연방시 중 하나이다. 발트해핀란드만에 접해 있으며 "북유럽의 베네치아"라고도 불린다. 예전에는 '페트로그라드'(러시아어: Петроград, 문화어: 뻬뜨로그라드, 1914년 – 1924년)로 불렀으며 레닌그라드(러시아어: Ленинград, 1924년 – 1991년)로 유명하다.[1]

개요[편집]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북서연방관구에 속하는 연방시로 수도 모스크바에 이은 제2의 도시이자 과거 러시아 제국의 수도이다. 네바강 하구에 있으며 그 델타지대에 형성된 자연 섬과 운하로 인해 생긴 수많은 섬 위에 세워진 도시이다. 인구는 약 560만 명, 주변 도시를 포함한 면적은 1,439㎢이다. 모스크바가 내륙도시이므로 러시아 최대의 항구도시이며, 유럽 대륙에서 이스탄불, 모스크바, 런던에 이어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기도 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발트해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이며 백만 명 이상의 주민이 살고 있는 세계 최북단의 도시이다. 1924년 1월 21일 블라디미르 레닌이 죽자 1924년 1월 26일 그를 기념하여 레닌그라드로 불리게 되었고, 1991년 9월 6일 다시 옛 이름을 되찾았다. 러시아 제국의 차르 표트르 대제가 1703년 만든 이 도시는 1713년 모스크바에서 천도하여 1918년까지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다. 1918년 수도는 다시 모스크바로 옮겨졌다. 이곳에서 공산당 혁명이 세 차례 일어나 러시아 제국과 로마노프 왕조가 막을 내렸기 때문에 ‘3개 혁명의 도시’라고도 한다. 강과 늪지 위에 건설돼 북유럽의 베니스로, 여름철 해가 지지 않아 백야(白夜)의 도시로도 불린다. 모스크바에 이은 러시아의 대공업도시로 복잡한 정밀기계의 제조가 특색이다. 선박, 터빈, 발전기, 디젤 엔진, 트랙터, 공작기계, 계기류(計器類), 각종 장치의 제조공장이 있고, 화학공업(고무제품·과린산비료·화학합성 자재·염료·도료·향료), 섬유공업, 인쇄업 등도 성하다. 다수의 학술 연구기관, 미술관, 박물관 등이 있어 학술·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도심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레닌그라드주와는 분리된 연방시를 이루고 있으나, 레닌그라드주의 행정 중심 도시로 되어 있다. 2003년 5월 29일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300주년을 기념해 다양한 축제가 열렸다. [2][3]

명칭[편집]

도시의 명칭은 처음엔 네덜란드식으로 상트-피터-버치였다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정착됐다. 성스러운(St) 표트르의 도시라는 뜻이다. 1914년 9월 1일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뒤 페트로그라드로 개명했다. 표트르의 도시라는 의미다. 블라디미르 레닌 사망 직후인 1924년 1월26일 레닌그라드로 이름이 바뀌었다. 레닌의 도시란 뜻이다. 1991년 9월6일 주민 투표로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이름이 복원됐다. 현지에서는 짧게 피테르라고 부른다.

러시아인들은 이 도시를 ‘서쪽의 창’ 혹은 ‘유럽의 창’이라고 여겼다. 세계 최북단의 대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늪과 물 위에 건설돼 많은 수로가 있기 때문에 종종 북쪽의 베니스, 또는 러시아의 베니스로도 불린다. 또 다른 별명은 백야의 도시다. 극지방과 가까워 발생하는 백야 현상 때문이다. 여름에 한 달 정도 밤에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는다.

역사[편집]

제국 시대[편집]

1611년 스웨덴 정복자들이 네바(Neva)강 하구 핀란드 민족 가운데 잉그리안 부족이 거주하는 잉거만랜드라는 작은 마을에 니엔스칸스 요새를 건설했다. 잉거랜드 주변에는 니엔이란 마을이 있었다. 17세기 말 항해와 해양 문제에 관심이 있던 표트르 황제가 유럽과 교역할 수 있는 항구를 원했다. 당시 러시아엔 아르한겔스크라는 항구가 있었지만 백해에 있는 이 항구는 위치가 너무 북쪽이었고 겨울이면 항해를 할 수 없었다.

1703년 5월 12일 위대한 북방 전쟁에서 표트르 황제는 니엔스카 부족을 포로로 잡은 뒤 요새를 바꿔 버렸다. 북방 전쟁은 1700~21년까지 발트해 연안의 지배권을 둘러싼 스웨덴과 북유럽 국가 및 러시아 연합과의 전쟁이다. 1703년 5월 27일 만에서 안쪽으로 5km에 있는 자야치 섬에 ‘표트르와 폴의 요새’(페트로파블롭스카야 요새로도 불린다)를 세웠다. 신도시의 첫 벽돌 및 석조 건물이다.

러시아 전역에서 징집된 농민들이 도시를 건설했고 수만 명 농노가 건설 과정에서 사망했다. 스웨덴 전쟁 포로들도 동원됐다. 표트르 황제는 1704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수도로 정했고 1712년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1721년 니스타드 평화 조약으로 북방 전쟁을 끝내기 9년 전이다. 처음 몇 년간 도시는 표트르와 폴 요새 근처의 네바강 오른쪽 둑인 트리니티 광장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이어 건축계획이 시작됐다. 1716년까지 스위스 출신 이태리인 도메니코 트레치니는 도시 중심을 바실리예브스키 섬에 두고 직사각형 형태의 운하를 갖춘 도시를 설계했다. 프로젝트는 완료되지 못했지만 거리의 레이아웃에 이 점이 반영됐다.

표트르 대제는 1725년 52세로 사망했다. 대제는 러시아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러시아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혔으며 암살 위협과 아들이 관련된 반역도 겪었다. 1728년 표트르 2세는 수도를 잠시 모스크바로 옮겼지만 4년 뒤인 1732년 안나 황제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다시 러시아 제국의 수도로 복원했다. 이후 1917년 공산당 혁명까지 186년 동안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로마노프 왕조와 러시아 정부의 소재지가 됐다.

1736년~37년 도시는 화재를 겪었다. 1737년 지역 재건을 위한 신계획이 마련됐다. 시를 5개 자치구로 나누고 도심은 네바 강과 판탄카 운하 사이의 동쪽 둑에 있는 해군성 일대로 옮겼다. 1825년 니콜라이가 왕위를 물려받는 다음날 데카브리스트가 상원 광장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1861년 알렉산더 2세의 농노 해방과 산업 혁명에 따라 농민의 수도 유입이 크게 늘었다. 도시 외곽에 빈곤 지역이 나타났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인구와 산업 성장에서 모스크바를 능가했다. 도시는 유럽에서 가장 큰 산업 도시의 하나로 발전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표트르 3세와 폴 1세, 알렉산더 2세 등 세 명의 황제가 암살당했다. 1905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시작한 혁명은 지방으로 급속하게 퍼졌다. 1914년 9월 1일 1차 세계대전이 발생하자 제국 정부는 도시의 이름에서 독일어인 상트(Sankt)와 부르크(Burg)를 빼고 표트르의 도시라는 의미로 페트로그라드로 개칭했다.

소비에트 시대[편집]

1917년 3월 니콜라이 2세를 마지막으로 러시아 군주제와 300년이 넘는 로마노프 왕조의 통치가 끝났다. 10월 혁명 직후인 1917년 11월 7일 레닌의 볼세비키가 겨울 궁전을 급습한 뒤 권력은 소비에트로 이전됐고 공산당이 부상했다. 이후 도시는 ‘세 번의 혁명을 치러낸 도시’라는 수식어를 얻게 됐다. 1917년 9월과 10월 독일군이 서부 에스토니아 군도를 침공했으며 페트로그라드를 폭격하고 공격하겠다고 위협했다. 1918년 3월 12일 소비에트는 정부를 멀리 모스크바로 옮겼다. 이어 내란이 벌어지는 가운데 1919년 유데니치 장군은 상트페테르부르크 탈환을 위해 에스토니아 방향에서 공격을 거듭했지만 레온 트로츠키가 군대를 동원해 퇴각시켰다.

레닌 사망 5일 후 1924년 1월 26일 페트로그라드는 레닌그라드로 개명됐다. 일부 거리와 다른 지명도 그의 이름을 따서 바뀌었다. 이 도시에는 레닌의 삶과 활동과 관련된 200개 이상의 장소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일부는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그 가운데 10월 혁명의 상징이자 러시아 해군의 가장 오랜 선박인 순양함 오로라가 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외곽의 빈곤 지역이 계획적으로 개발됐다. 주택은 정부가 제공했다. 부르주아의 아파트는 너무 커서 많은 가족이 사용하는 공동 아파트인 코뮤날카로 전환됐다. 1930년대에 도시 인구의 68%가 이런 집에 살았다. 1935년 시를 남쪽으로 확장하는 계획이 수립됐고 건물은 화려한 스탈린식 건축 방식으로 건설됐다.

도심을 핀란드 국경에서 좀 더 떨어진 곳으로 옮기면서 스탈린은 모스콥스키 프로스펙트의 남부 끝자락에 광대한 광장을 끼고 새로운 시청을 건설하기로 했다. 1939년~40년 소련과 핀란드의 겨울 전쟁 뒤 국경은 북쪽으로 올라갔다. 1931년 12월, 레닌그라드는 레닌그라드 주에서 분리됐다. 1934년 12월 1일 레닌그라드의 공산당 지도자 세르게이 키로프가 암살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대숙청이 시작돼 스탈린 시기에 레닌그라드에서만 약 4만 명이 처형됐다.

제2차 세계대전[편집]

1941년 6월 소련을 침략한 독일군은 1941년 9월 8일~1944년 2월 27일의 872일간 레닌그라드를 포위했다. 고립된 레닌그라드에 대한 보급은 라고다 호수를 가로지르는 생명줄을 통해 이뤄졌는데 얼음이 얼기 전에는 불가능했다. 100만 명 이상이 주로 기아로 사망했다. 많이 시민들이 피난해 레닌그라드는 사람 없는 도시가 됐다.

1945년 5월1일 스탈린은 레닌그라드를 스탈린그라드, 세바스토폴, 오데사와 함께 영웅 도시로 명명했다. 브레즈네프 시대인 1965년 5월 8일(대 애국전쟁 승리 20주년 기념일) 레닌그라드를 영웅 도시로 공인하는 법이 통과됐다. 1946년 10월 핀란드만 북부 일부 지역이 레닌그라드 지구에서 레닌그라드로 이전돼 세스트로에츠키 지구와 쿠로르트니 지구가 됐다. 1940년 겨울 전쟁으로 체결된 평화 조약에 따라 핀란드에서 소련으로 이전된 땅이다. 전쟁 전에 수립된 계획에 따라 레닌그라드와 교외의 많은 지역이 전후에 재건됐다. 1948년의 계획은 남쪽뿐 아니라 북쪽도 방사형으로 개발하도록 했다. 1953년 레닌그라드주의 파블로프스키 지구가 폐지되고 파블로프스크를 포함한 일대가 레닌그라드로 합병됐다. 1954년 레바초보, 파르고로프, 페스토치니가 레닌그라드에 합병됐다.

1949~52년 레닌그라드에서는 스탈린의 잠재적 후계자와 관련된 정쟁이 발생했다. 레닌그라드의 지도자들이 대대적으로 숙청됐다. 그 가운데엔 쿠즈네초프 전 시장, 표트르 세르게예비치 포프코프 시장 대행도 포함됐다. 총 23명의 지도급 인사들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181명은 투옥되거나 망명(1954년 추방)했다. 1949년에서 1952년 사이에 레닌그라드에서 약 2,000명의 고위 관리가 축출됐고 그 가운데 1500명이 당과 소비, 무역 동맹, 콤소몰(청년 공산당 연맹) 출신이었다. 에스토니아 당의 지도부들은 구제됐으나 다른 에스토니아 당국자들은 체포되고 기소됐다. 1955년 전쟁 전에 계획된 레닌그라드 지하철이 개통됐다. 8개 정거장은 스탈린 방식대로 대리석과 청동으로 장식됐으나 그의 사후 과장된 장식이 비판되며 철거됐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새로운 주거용 자치구가 외곽에 많이 세워졌다. 기능 위주의 아파트 블록은 변한 것이 없지만 도심의 코뮤날카에서 살던 사람들이 독립 아파트로 이주할 수 있었다.

현대[편집]

1991년 6월 12일 러시아 대통령 선거와 동시에 시 당국은 시장 선거와 도시 이름에 대한 주민 투표를 했다. 투표율은 65%였는데 총투표의 66.13% 찬성으로 아나톨리 소브차크 시장이 직접 투표로 선출됐다. 경제 상황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1940년대 이후 처음으로 식량 배급이 도입됐고 시는 해외로부터 인도주의 식량 원조를 받았다. 경제는 21세기 초 들어와 개선되기 시작했다. 1995년엔 북부 지역을 달리는 키로프스크-비보르그스카야 전철 라인이 홍수로 차단돼 10여 년간 도시의 기능이 일부 장애를 일으켰다. 1996년 6월 13일,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레닌그라드 오브라스치, 트베르 오블라스치와 함께 연방 정부와 권력 공유 협력에 서명했고 자율권을 부여받았다. 이 협정은 2002년 4월 4일 폐지됐다.

1996년 새 시장에 블라디미르 야코블레프가 당선됐다. 직함도 시장에서 지사로 바뀌었다. 2000년 야코블레프는 재선됐는데 2004년 임기 만료를 1년 앞둔 2003년 돌연 사임했다. 발렌티나 마트비엔코가 뒤를 이었다. 주거상황이 어려워지고 부동산 가격이 크게 오르면서 도시의 역사적 장소들을 보존하는 것과 관련해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도시의 중심은 유네스코 지정 건축물(약 8,000개)이 됐지만 보존은 논란을 일으켰다. 2005년 이후 오래된 건물 철거가 허용되었다. 2006년 가즈프롬사는 스몰니 반대편에 403m 높이의 마천루 오흐타 센터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도시 전망을 해친다는 반대가 커졌다. 2010년 12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상트페테르부르크시가 프로젝트를 위한 보다 적절한 장소를 모색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해 도시의 북서부 라흐타에 부지를 마련했다. 건물은 라흐타 센터로 불리게 됐으며 2012년 10월 시공돼 2018년 1월 완공됐다. 462m 높이의 센터는 모스크바의 오스탄키노 방송탑에 이어 러시아와 유럽에서 두 번째로 높은 마천루가 됐다.[4]

기후[편집]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날씨는 습한 대륙성 기후다. 발트해 저기압의 영향으로 따뜻하고 습하며 여름은 짧고 겨울은 길다. 핀란드 헬싱키의 날씨와 비슷하지만 동쪽에 더 치우쳐 있어 겨울에는 더 춥고 여름에는 더 따뜻하다.

7월 평균 최대 온도는 23°C이며 2월 평균 최소 온도는 –8.5°C다. 2010년 북반구 여름 혹서때 37.1°C까지 올랐었다. 1883년 겨울 최저 기온은 영하 35.9°C를 기록했다. 연간 평균 연간 온도는 5.8°C다. 네바 강은 보통 11~12월에 얼고 4월에 녹는다. 12월에서 3월까지 평균 118일간 눈에 덮이고 2월까지 평균 눈 깊이는 19cm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모스크바보다 북쪽에 있지만 핀란드만의 영향 때문에 약간은 따뜻하다. 연평균 강수량은 660mm지만 도시 구역마다 다르다. 늦은 여름에 가장 비가 많이 온다. 날씨가 서늘해 증발량이 적어 토양 수분이 늘 높게 유지되며 대기 습도는 평균 78%다. 흐린 날은 연평균 165일이다.[5]

교통[편집]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주요 교통 중심지다. 최초의 러시아 철도가 1837년 개통됐다. 광범위한 대중 교통 네트워크(버스, 트램, 무궤도 전차)노선이 있다. 지하철은 1955년에 개통됐다. 현재 5개 철도 터미널을 연결하고 5개 노선 69개 정거장이 있다. 5개 철도역은 발티스키, 핀란드스키, 라도즈스키, 모스코브스키, 비텝스키다. 헬싱키, 베를린 및 많은 구소련 공화국과 국제철도로 연결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국제 유럽 자동차 노선이 있는데 E18은 헬싱키 방향, E20은 탈린 방향, E95는 프스코프· 키이브·오데사 방향, E105는 페트로자보츠크·무르만스크·키르케네스(북쪽) 및 모스크바와 하르키우(남쪽)로 간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노선에는 고속열차 삽산이 운행된다.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 철도는 1851년 오픈됐고 651km다. 2009년 5월 2일 러시아에서 최고 기록인 281km를 세웠고 2009년 5월 7일 시속 290km기록을 세웠다. 풀코보 국제공항과 3개의 소규모 상업 및 화물 공항이 있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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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상트페테르부르크〉, 《위키백과》
  2. 상트페테르부르크〉, 《나무위키》
  3. 상트페테르부르크(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4. 상트페테르부르크〉, 《요다위키》
  5. 상트페테르부르크(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러시아유럽 같이 보기[편집]

러시아유럽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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