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발바르제도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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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역사==
1194년 노르웨이에서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이 섬에 최초로 도착하였으며, 이들은 이곳을 차가운 해안을 의미하는 스발바르로 명명하였다. 그 후 완전히 잊혀있다가 1596년 빌렘 바렌츠가 북쪽으로 항해하던 도중 이 섬들을 발견하고 뾰족한 산들을 의미하는 '스피츠베르겐'이란 이름을 붙였다. 17세기에는 포경 중심지로 기능했으며 이 무렵 이 섬의 석탄 매장 사실이 알려지기도 하였다. 1619년 네덜란드가 스메이런뷔르흐(Smeerenburg)를 세워 17세기 중반까지 포경 기지로 이용했고, 영국과 덴마크, 프랑스도 작은 기지를 세웠다. 1820년대까지 이 세 나라는 포경을 계속했다. 1899년 노르웨이가 이 섬에서 석탄 채굴을 시작했으며 1906년 미국인 광산 기술자인 존 먼로 롱이어가 최초로 상업적 광산을 열면서 대규모 탐광 작업이 시작되었다. 1920년 이 섬은 노르웨이령이 되었고, 같은 해에 체결된 파리 행정 협정으로 인해 다른 41개 가맹국에서도 이곳의 천연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었다. 이 때까지 유럽 여러 나라에선 이 섬을 슈피츠베르겐이라고 불렀고 러시아는 그루만트(Грумант)라고 부르다 역시 슈피츠베르겐으로 갈아탔지만 노르웨이는 이 동네를 스발바르라고 개칭한다. 1941년, 2차대전으로 이 섬의 주민은 대피했지만 수비대 몇 명이 남아 연합군과 독일군이 지배권을 두고 몇 차례 교전을 벌였다. 미국 및 영국에서 대서양을 통과해 소련의 북극해 항구로 물자를 수송하는 항로가 스발바르섬과 노르웨이 사이의 바다를 지나고 있었으므로 이 섬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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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4년 노르웨이에서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이 섬에 최초로 도착하였으며, 이들은 이곳을 차가운 해안을 의미하는 스발바르로 명명하였다. 그 후 완전히 잊혀있다가 1596년 빌렘 바렌츠가 북쪽으로 항해하던 도중 이 섬들을 발견하고 뾰족한 산들을 의미하는 '스피츠베르겐'이란 이름을 붙였다. 17세기에는 포경 중심지로 기능했으며 이 무렵 이 섬의 석탄 매장 사실이 알려지기도 하였다. 1619년 네덜란드가 스메이런뷔르흐(Smeerenburg)를 세워 17세기 중반까지 포경 기지로 이용했고, 영국과 덴마크, 프랑스도 작은 기지를 세웠다. 1820년대까지 이 세 나라는 포경을 계속했다. 1899년 노르웨이가 이 섬에서 석탄 채굴을 시작했으며 1906년 미국인 광산 기술자인 존 먼로 롱이어[3]가 최초로 상업적 광산을 열면서 대규모 탐광 작업이 시작되었다. 1920년 이 섬은 노르웨이령이 되었고, 같은 해에 체결된 파리 행정 협정으로 인해 다른 41개 가맹국에서도 이곳의 천연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었다. 이 때까지 유럽 여러 나라에선 이 섬을 슈피츠베르겐이라고 불렀고 러시아는 그루만트(Грумант)라고 부르다 역시 슈피츠베르겐으로 갈아탔지만 노르웨이는 이 동네를 스발바르라고 개칭한다. 1941년, 2차대전으로 이 섬의 주민은 대피했지만 수비대 몇 명이 남아 연합군과 독일군이 지배권을 두고 몇 차례 교전을 벌였다. 미국 및 영국에서 대서양을 통과해 소련의 북극해 항구로 물자를 수송하는 항로가 스발바르섬과 노르웨이 사이의 바다를 지나고 있었으므로 이 섬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였기 때문이다.
  
 
1944년 9월, 나치 독일은 하우디겐 작전을 실시하여 스발바르 제도의 무인도인 북동섬(Nordaustlandet)에 비밀리에 기상관측소를 설치했다. 이 관측소에서는 빌헬름 데게 박사와 11명의 독일군 병사들이 기상 관측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동년 5월에 갑자기 독일이 항복했다는 마지막 무전과 함께 연락이 끊기고 만다. 전후 혼란통에 본토 독일군은 외딴 기지로 파견나간 스발바르 제도의 병사들을 완전히 잊어버렸고, 보급을 담당하던 유보트도 연합군에 격침되어 스발바르 제도의 병사들은 완전히 고립되게 된다. 조국으로부터 잊혀진 병사들은 그 후에도 충실히 계속 기상관측 임무를 수행하다가, 결국 버티다 못해 연합군에 평문으로 구조 요청을 보낸다. 마침내 태평양 전쟁도 끝나고 20일이 지난 1945년 9월 4일, 연락을 받고 정박한 노르웨이 어선에 항복을 한다. 이에 따라 스발바르 제도의 독일군들은 제 2차 세계대전에서 마지막으로 항복한 독일군이 되었다. 당시를 회상한 글을 보면, 기지에 맥주 빼고는 모든걸 갖추고 있었다고 하며 전투활동은 없었다고 한다. 다만, 혹독한 기후에서 살아남는게 문제였기 때문에 순록을 사냥해서 식량을 조달했고, 기상학자이자 소대장인 빌헬름 데게 박사의 지휘 아래 소대원들이 역사, 문학, 수학 교육도 받았다고 한다. 도착한 노르웨이 어부들은 데게박사로부터 권총을 넘겨 받아 독일군의 항복식을 진행한 뒤 독일군들과 함께 기념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이때, 데게 박사와 노르웨이 어선 선장 루트비히 알버센이 이미 안면이 있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이나 긴장 없이 항복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독일 병사들은 이후 노르웨이로 이송되어 잠깐 포로생활과 조사를 마치고 모두 독일로 귀국했다. 관측대의 투항 후, 하우디겐 관측소는 긴급 피난 대피소로 전용되었고, 2010년에는 노르웨이 당국에 의해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이후 소련은 스발바르 제도를 노르웨이와 소련이 공동통치하자고 제안했으나 거부당했다. 그럼에도 러시아인은 이 섬에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가 소련 붕괴 이후 감소했다. 항공운항편이 없었던 시절에는 마지막 배편이 10월에 떠나면 다음해 5월까지 육지와의 교통이 완전히 끊겼었다고 한다. 그 동안 섬의 주민들은 영하 20℃ 이하의 혹한 속에서 생활하는데, 이게 감기 바이러스도 살 수 없는 추위라 이 기간 동안 감기에 걸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음 해 5월이 되어 첫 배가 들어오면, 감기에 걸린 선원으로부터 섬의 주민이 감기에 옮아 주민들 사이에 유행하기도 했다고 한다.
 
1944년 9월, 나치 독일은 하우디겐 작전을 실시하여 스발바르 제도의 무인도인 북동섬(Nordaustlandet)에 비밀리에 기상관측소를 설치했다. 이 관측소에서는 빌헬름 데게 박사와 11명의 독일군 병사들이 기상 관측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동년 5월에 갑자기 독일이 항복했다는 마지막 무전과 함께 연락이 끊기고 만다. 전후 혼란통에 본토 독일군은 외딴 기지로 파견나간 스발바르 제도의 병사들을 완전히 잊어버렸고, 보급을 담당하던 유보트도 연합군에 격침되어 스발바르 제도의 병사들은 완전히 고립되게 된다. 조국으로부터 잊혀진 병사들은 그 후에도 충실히 계속 기상관측 임무를 수행하다가, 결국 버티다 못해 연합군에 평문으로 구조 요청을 보낸다. 마침내 태평양 전쟁도 끝나고 20일이 지난 1945년 9월 4일, 연락을 받고 정박한 노르웨이 어선에 항복을 한다. 이에 따라 스발바르 제도의 독일군들은 제 2차 세계대전에서 마지막으로 항복한 독일군이 되었다. 당시를 회상한 글을 보면, 기지에 맥주 빼고는 모든걸 갖추고 있었다고 하며 전투활동은 없었다고 한다. 다만, 혹독한 기후에서 살아남는게 문제였기 때문에 순록을 사냥해서 식량을 조달했고, 기상학자이자 소대장인 빌헬름 데게 박사의 지휘 아래 소대원들이 역사, 문학, 수학 교육도 받았다고 한다. 도착한 노르웨이 어부들은 데게박사로부터 권총을 넘겨 받아 독일군의 항복식을 진행한 뒤 독일군들과 함께 기념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이때, 데게 박사와 노르웨이 어선 선장 루트비히 알버센이 이미 안면이 있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이나 긴장 없이 항복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독일 병사들은 이후 노르웨이로 이송되어 잠깐 포로생활과 조사를 마치고 모두 독일로 귀국했다. 관측대의 투항 후, 하우디겐 관측소는 긴급 피난 대피소로 전용되었고, 2010년에는 노르웨이 당국에 의해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이후 소련은 스발바르 제도를 노르웨이와 소련이 공동통치하자고 제안했으나 거부당했다. 그럼에도 러시아인은 이 섬에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가 소련 붕괴 이후 감소했다. 항공운항편이 없었던 시절에는 마지막 배편이 10월에 떠나면 다음해 5월까지 육지와의 교통이 완전히 끊겼었다고 한다. 그 동안 섬의 주민들은 영하 20℃ 이하의 혹한 속에서 생활하는데, 이게 감기 바이러스도 살 수 없는 추위라 이 기간 동안 감기에 걸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음 해 5월이 되어 첫 배가 들어오면, 감기에 걸린 선원으로부터 섬의 주민이 감기에 옮아 주민들 사이에 유행하기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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