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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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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국기

스코틀랜드(영어: Scotland)는 유럽의 북서쪽에 위치하며 영국을 이루는 네 구성국(스코틀랜드, 잉글랜드, 북아일랜드, 웨일스) 가운데 하나다. 그레이트브리튼섬의 북쪽 1/3을 차지하며 남쪽으로는 잉글랜드와 국경을 공유하고, 동쪽은 북해에 면해 있으며, 북쪽과 서쪽은 대서양에 면해 있다. 또한, 남서쪽은 노스해협과 아일랜드 해와 마주한다. 본토 외에도 북아일랜드와 헤브리디스(Hebrides)를 포함하여 790개 이상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스코틀랜드는 영국 연방의 구성국 중 하나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1707년 연합법을 통해 합병할 당시 서로의 자치권을 보장하며 합병하였다. 교육 제도를 비롯하여 많은 행정적인 면에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분명히 분리되어 있다. 또한 국교도 잉글랜드는 성공회, 스코틀랜드는 장로회로 이 둘은 엄연히 다르다. 자체적인 의회와 행정부, 국화(엉겅퀴)와 비공식적인 국가(플라워 어브 스코틀랜드)가 있으며, 잉글랜드와 대등한 관계에서 영국 연방을 구성하고 있다.

스코틀랜드의 수도는 에든버러이며, 영국 내에서 두 번째, 유럽에서 여섯 번째로 큰 금융도시이다. 또한 스코틀랜드 내 문화 중심지이며, 18세기 스코틀랜드를 유럽의 상업, 지식, 산업의 중심지로 만든 스코틀랜드 계몽주의가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글래스고는 스코틀랜드의 가장 큰 도시이자, 영국 내에서 세 번째로 큰 대도시이며, 대영제국 시대에는 유럽에서 네 번째로 큰 대도시이자 세계에서 가장 큰 산업도시 중 하나였다. 오늘날에는 스코틀랜드인 가운데 41%가 거주하는 글래스고 광역권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스코틀랜드는 북대서양북해에 면해 있으며, 2020년 1월 31일 영국이 브렉시트를 단행하기 전 유럽연합에서 가장 많은 석유가 매장되어 있는 곳이다. 특히 석유 채굴은 스코틀랜드 제 3의 도시이자 유럽의 석유 수도라 불리는 애버딘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스코틀랜드 왕국은 1706년 12월 31일까지는 독립 왕국이었으나 1707년 연합법으로 잉글랜드 왕국과 연합왕국을 이루어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되었다.

개요[편집]

  • 수도: 에든버러
  • 면적: 78,387km²
  • 인구: 5,463,300명(2019)
  • 공용어: 영어, 스코트어, 스코틀랜드 게일어
  • 정치체제: 영국 연방의 구성국
  • 행정수반: 니콜라 스터전
  • 국가원수: 찰스 3세

역사[편집]

고대[편집]

로마 제국 시기에 이르러 브리튼 제도에 대한 기록이 남겨지기 시작했다. 로마의 기록은 대부분 지금의 잉글랜드웨일스지역에 있었던 로마 속주인 브리타니아에 대한 것이다. 브리튼섬 중 지금의 스코틀랜드 지역 대부분을 포함하는 브리타니아 이북의 지역은 칼레도니아라고 불렸으며 로마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이 지역에 거주하였던 민족은 픽트족이었다. 로마 이후 스코틀랜드에는 역사상 중요한 세번의 민족 침입이 있었다.

  • 5세기경 고대 아일랜드어를 사용하는 스코트족이 들어와 달 리아타 왕국을 세웠다.
  • 7세기경 앵글로-색슨족이 고도딘족의 지역인 남부 스코틀랜드로 영토를 확장하였다.
  • 759년 바이킹이 침입하여 오크니 제도, 갤러웨이 등지를 점령하였다.

스코틀랜드의 기독교 전파는 4세기경 성 니니안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러나 픽트족에 대한 기독교화는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후 성 파트리치오와 [[[성 콜룸바]]에 의해 기독교 전파가 다시 이루어졌다.

전해내려오는 신화인 맥알핀의 반란에 의하면 9세기에 케네스 맥알핀이 픽트족을 정복하고 스코틀랜드 왕국을 세웠다고 한다. 초기 스코틀랜드 왕국은 포스 강과 클라이드 강 유역을 중심으로한 스코틀랜드 북부를 영토로 하였다. 스코틀랜드 남서부에는 스트래스클라이드 브리소닉 족이 여전히 존재하였고, 남동부에는 앵글로-색슨족의 초기 잉글랜드 왕국들 중 하나인 노섬브리아 왕국이 있었다. 스코틀랜드 왕국은 지속적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1018년 말 콜룸 2세 무렵 현재의 스코틀랜드와 같은 영토가 되었다.

중세[편집]

1603년 잉글랜드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하자 일글랜드의 왕위는 메리 1세의 아들인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계승하여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로 즉위하게 된다. 제임스 1세의 즉위로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은 동군연합을 이루게 되었다. 당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같은 군주의 지배를 받는 독립된 국가였으나 이러한 동군연합은 후일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을 형성하는 기반이 되었다.

16세기 스코틀랜드에서는 종교개혁이 진행되었다. 16세기초 마틴 루터장 칼뱅의 교의가 스코틀랜드에 파급되었다. 초기에 많은 개신교도가 이단으로 몰려 처형당하였으나 1560년 스코틀랜드의 메리 1세가 프랑스에 있는 사이 스코틀랜드 의회는 스코틀랜드 교회를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한다.

1688년 의회와 국왕의 대립은 결국 명예 혁명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제임스2세는 폐위되어 프랑스로 망명하였으며 그의 딸 메리와 사위인 윌리엄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공동 군주로 즉위하였다. 잉글랜드 의회는 1689년 권리청원을 통해 국왕의 권리를 제한하고 의회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기초를 세웠다.

메리와 윌리엄의 즉위 이후에도 스코틀랜드 고원지대와 북부에서는 여전히 제임스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존재하였다.재커바이트라 불린 이들은 1688년부터 반란을 일으켰다. 제임스의 복위를 목표로 하였던 재커바이트의 반란은 제임스 사후 스튜어트 왕가의 복권을 주장하였으며 하노버 왕가가 들어선 1746년까지 수 차례에 걸쳐 반란이 일어났다.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 이후 동군연합을 유지하고 있던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은 앤 여왕 시기에 이르러 1707년 연합법에 의해 합병되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합병으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세워졌다. 앤 여왕은 스튜어트 왕가의 마지막 군주였다. 앤 여왕의 사후 조지 1세가 왕위를 계승하여 하노버 왕가가 시작되었다.

산업혁명과 스코틀랜드 계몽주의[편집]

18세기 동안 글래스고에든버러는 급속도의 경제적 성장을 보였다. 또한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는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흄, 제임스 보스웰과 같은 거장들을 배출하였다. 과학적 성과를 활용한 기술 발전도 이어졌다. 글래스고 대학교의 기기 제조자로 증기기관을 발명한 제임스 와트를 비롯하여 농학자 제임스 허튼, 전보를 발명한 윌리엄 톰슨 등이 유명하다.

이 시기의 저명한 문인으로는 시인 로버트 번스, 《아이반호》와 같은 역사 소설을 쓴 월터 스콧, 19세기의 시인 조지 맥도널드 등이 있다.

19세기로 들어서면서 스코틀랜드의 저지대는 산업지대로 변모하였다. 글래스고와 클라이드 강 하구는 조선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글래스고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로 성장하여 런던에 이은 "연합왕국의 제2 도시"로 불렸다.

20세기 이후[편집]

제1차 세계대전은 스코틀랜드에 많은 피해를 입혔다. 고지대에서는 많은 젊은이들이 전사하여 인구 불균형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글래스고와 같은 저지대 산업지역에서는 가난한 노동자들이 열악한 환경에 놓여있었다. 1919년 1월 글래스고와 클라이드뱅크를 중심으로한 저지대에서는 존 맥린을 중심으로한 레드 클라이드사이드 운동이 일어났다. 노동자들의 봉기에 경악한 영국 정부는 탱크와 병사를 동원하여 이를 진압하였다. 설상가상으로 1920 - 30년대에 걸친 불황으로 인해 글래스고는 최악의 실업률을 기록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스코틀랜드의 해군 기지와 생산시설은 독일 공군의 표적이 되었다. 글래스고와 클라이사이드는 나치 독일의 독일 공군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었다. 특히 클라이드뱅크는 전쟁 중 일어난 폭격으로 가장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스코틀랜드 고지대에서는 많은 젊은이들이 또 다시 참전 행렬을 이루었다. 로카버에는 특수전과 유격전을 위한 군사학교가 세워져 신병을 양성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스코틀랜드의 조선업은 쇠퇴하였으며 경쟁력을 상실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1970년대 북해 유전이 발견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코틀랜드 독립을 주장하는 민족주의 정당인 스코틀랜드 국민당의 지지가 확산되었다. 그러나 1979년 실시된 자치권 이양 투표는 40%만이 찬성하여 부결되었다.

스털링 다리 전투 700주년인 1997년 11월 11일 노동당과 토니 블레어 총리는 스코틀랜드의 자치를 공식 선언하였다. 이로 인해 1999년 스코틀랜드 의회가 다시 개원하였다.

2000년대 초반까지도 스코틀랜드에서는 봉건제가 남아 있어 토지에 대한 봉건 지세가 부과되었다. 이러한 봉건제와 봉건 지세는 2004년 11월 28일에서야 폐지되었다.

2007년 총선에서 스코틀랜드 국민당이 승리하여 앨릭스 새먼드가 자치 수반으로서 자치 정부를 이끌게 되었다. 스코틀랜드 국민당은 여전히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추진 중이다.

의회 및 정부[편집]

1707년 연합법 시행으로 스코틀랜드 의회는 잉글랜드 의회와 통합되어 사실상 폐지 상태였으나, 1998년 스코틀랜드법의 시행으로 1999년에 다시 부활하였다. 새로운 스코틀랜드 의회는 일정범위 안에서 소득세율 변경을 할 수 있고, 복지정책이나 수렵 규제에 관해서 영국 내의 다른 지역과 다른 법령을 제정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고 실제로 이를 행사하였다. 마약억제 및 이민규제 등 전국적으로 관리되어야할 필요가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웨스터민스터에 있는 영국 의회에서 주도적으로 권한을 행사한다.

영국 정계가 보수당(보수주의)과 노동당(진보주의)의 대립 구도인 반면, 스코틀랜드 정계는 스코틀랜드 국민당(민족주의)과 노동당(진보주의)의 대립 구도이다. 스코틀랜드 국민당은 스코틀랜드의 완전한 분리독립(연합왕국으로부터의 탈퇴와 독립국으로의 분리)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정당이다. 2011년 5월 스코틀랜드 의회 선거에서 완전한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스코틀랜드 국민당이 단독과반수를 차지하였다. 현재 스코틀랜드 총리는 스코틀랜드 국민당 대표인 앨릭스 새먼드이다. 스코틀랜드 국민당은 2014년 분리독립을 위한 주민투표를 진행하였으나 부결되었다.

지리[편집]

북서쪽 고원 지대는 하일랜드(Highland), 남동쪽 평야 지대는 로랜드(Lowland)라고 하며, 곳곳에 호수(loch), 협곡(glen)과 권곡(corrie) 같은 빙하 지형이 존재한다. 대표적인 호수로는 로몬드 호수(Loch Lomond, Loch는 스코트어로 호수), 네스 호수(Loch Ness), 테이 호수(Loch Tay) 등이 있다. 하일랜드 동부를 지나는 산맥으로 그램피언 산맥이 있다. 스코틀랜드의 북쪽에는 부속 도서들이 많이 있다. 북서쪽의 여러 섬들을 헤브리데스(Hebrides) 제도라고 하는데, 바깥쪽을 아우터 헤브리데스 제도, 안쪽을 이너 헤브레데스 제도라 하여 따로 구분하기도 한다.헤브리데스 제도는 스카이(Skye) 섬, 타이리(Tiree) 섬, 에리스케이(Eriskay) 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에는 오크니 제도가 있고,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셰틀랜드 제도가 있다. 강으로는 돈 강, 디 강, 네스 강(네스 호에서 흘러나옴), 테이 강(테이 호에서 흘러나옴), 클라이드 강(글래스고를 관통함), 애프턴 강 등이 있다.

북쪽의 셰틀랜드 제도는 거의 북극권 가까이까지 올라가 있다. 그러나 남쪽에서 올라오는 난류인 멕시코 해류의 영향으로 겨울에도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서안 해양성 기후가 나타난다.

지도[편집]

스코틀랜드 섬 지도[편집]

스코틀랜드 주변 지도[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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