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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트마르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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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트마르턴

신트마르턴(네덜란드어: Eilandgebied Sint Maarten)은 카리브해소앤​​틸리스 제도 북부 리워드 제도에 있는 세인트마틴 섬 남부에 있는 네덜란드 왕국을 구성하는 지역 중 하나다. 프랑스생마르탱과 섬을 공유한다.

한때 네덜란드령 안틸레스를 이루는 다섯 섬 지역 중 하나였으나, 2010년 해체되면서 주민 뜻에 따라 자치권이 부여된 네덜란드 왕국을 구성하는 구성국이 되었다. 수도는 필립스뷔르흐이다.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위해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온 흑인이 대부분이지만 크리올과 네덜란드계 백인도 있다. 공용어는 영어네덜란드어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언어는 영어. 그외에도 스페인어, 파피아멘토어도 쓰이고 있다.

개요[편집]

역사[편집]

1493년, 이사벨 1세의 허가를 받아 대탐험에 나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 의해 발견되어 스페인어로 산 마르틴 섬을 뜻하는 Isla de San Martín이라 명명되었으나 당시 스페인의 무역망이나 군사망과 연관이 없는 지점이라 사실상 관리를 포기했다.

이 섬에 주목한 것은 프랑스네덜란드로 네덜란드인들은 서인도 회사의 본사를 세우기 위해 네덜란드인들의 도시와 요새를 건설을 시작했다. 무역망과 지리적인 조건이 뉴암스테르담브라질의 중간에 위치해 중간 거점으로 삼기 딱 좋았기 때문이다. 소앤틸리스 제도의 섬 중 이 곳처럼 안정적으로 가공을 하지 않고도 마실 수 있는 식수의 대량 공급이 가능한 섬은 드물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네덜란드는 백여년의 시간을 들여 네덜란드인들을 정착시켰다. 암스테르담 요새(Fort Amsterdam)의 공사를 진행하고 자치구에 얀 클래스젠 판 캄펜(Jan Claeszen Van Campen)을 첫번째 공식 총독으로 파견했다. 스페인은 이것을 방관했고 프랑스는 네덜란드를 조금씩 견제하면서 스페인에서 완전 양도받는 절차를 진행하다 위그노 전쟁이 발발해서 40년 가까이 종교 내전 상황에 처해 네덜란드가 요새와 마을을 만들고 직무관을 보내는 것을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서인도 회사가 본격적인 관리에 나서면서 중계 도시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위그노 전쟁후 프랑스영국은 땅에 들어와 정착촌을 만들었고 소금 무역이 활발해지자 스페인도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네덜란드인들에게 나가라면서 무력 행사를 시작한다. 땅의 가치도 있었지만 스페인과 네덜란드가 80년 전쟁을 치르던 중이라 방해하려던 것도 있었다.

1633년 스페인이 본격적인 무력 행사를 한지 2년 만에 소수인 영국인들과 다수인 네덜란드인들을 모조리 쫓아내고 전략 요충지로 포인트 블란체(Point Blanche)에 요새를 건설해 굳히기에 들어간다. 네덜란드도 여러 방해 공작을 벌였지만 실패했다. 80년 전쟁이 끝나가던 1644년 네덜란드는 5년간의 준비를 거쳐 일으킨 신트마르턴 공방전에서 스페인에게 패배하면서 네덜란드는 신트마르턴의 탈환을 사실상 포기한다. 그러나 신트마르턴 공방전이 끝나고 4년 뒤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종료되었고 동시에 스페인은 카리브 해의 지배력을 상실해 신트마르턴을 포기하게 된다.

이후 네덜란드와 프랑스가 다시 식민지화를 시작한다. 네덜란드는 80년 전쟁 당시 개발해 놓은 항구가 있는 신트외스타티위스(Sint Eustatius)섬을 거점으로 삼았고 프랑스는 스페인이 터를 닦아 놓은 세인트 키츠를 거점으로 삼았다. 문제는 두 섬의 항해루트가 겹쳤고 신트외스타티위스는 스페인이 점거하고 있던 시기에 네덜란드 측이 스페인 측 공격 방어를 위해 개발한 거점이었기 때문에 충돌을 피하기 어려워 네덜란드와 프랑스는 전쟁을 한번 더 치를 각오를 했으나 스페인이 다시 섬에 관심을 가지는 행보를 보이자 1648년 콩코르디아 조약(Treaty of Concordia)을 통해 섬을 양분하는 협정을 맺는다.

이후에도 협정에 사용된 도량형이나 기준이 달랐고 항해로 문제 등으로 분쟁은 사라지지 않았다. 1815년 파리 조약이 맺어지면서 도량형과 기준을 통일해 경계선을 다시 그리는 작업이 이루어져 충돌이 사라졌다.

네덜란드의 신트외스타티위스 식민지의 일부가 된 신트마르턴은 서인도 식민지로 취급되다 1845년 이후 진행된 카리브 네덜란드 통합 절차에 따라 퀴라소의 식민지로 통합된다.

이 시기 신트마르턴의 주요 산업은 설탕 정제 산업이다. 설탕 정제 산업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서부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 노예들의 가혹한 중노동으로 유지되는 산업이었다. 1848년에는 프랑스가, 1863년에는 네덜란드가 노예제의 폐지를 선언하면서 이런 형태의 중노동은 사라지게 된다.

신트마르턴은 1939년에 면세 항구를 선언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무관세 무역으로 많은 이득을 얻었다. 한편 신트마르턴에서는 제국주의 해체의 물결을 타고 독립의 여론이 일었고, 네덜란드도 식민지의 자치권 확대를 추진했다. 1951년부터 자치가 허용되었고, 1954년에는 신트마르턴이 속해 있던 퀴라소와 속령 식민지(Kolonie Curaçao en onderhorigheden)는 네덜란드령 안틸레스(Nederlandse Antillen)로 이름을 고쳤으며, 네덜란드령 안틸레스는 네덜란드의 식민지가 아닌 네덜란드와 동등한 지위로 외교 및 국방을 제외한 분야에서 완전한 자치권을 누리게 되었다. 자치권을 얻은 후 관광 사업에 주력해 외화 벌이로 외부 자본이 대량 유입되어 카리브에서 가장 이용자 수가 많은 프린세스 줄리아나 국제공항이 만들어지는 등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983년에는 신트마르턴의 일부로 취급되던 사바, 신트외스타티위스가 별도의 행정구역으로 분리되었다.

2000년 6월 23일 진행된 독립 투표에서 거주민들이 네덜란드의 지역으로 남는 것을 선택해 독립이 부결되었고, 6년이 지난 2006년 6월 1일 다시 한번 진행된 투표에서 네덜란드령 안틸레스 탈퇴가 결정된다. 3년의 준비 과정을 통해 2010년 10월 네덜란드령 안틸레스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지리[편집]

신트마르턴섬의 남쪽 절반에 위치해 있다. 중앙에 국경선이 그어져 있어서 남쪽 절반 네덜란드의 지역을 영어로 더치 사이드(Dutch Side)라고 부르고 북쪽 절반 프랑스의 지역을 프렌치 사이드(French Side)라고도 부른다.

산악 지형이고 언덕과 하천이 많으며 모래톱이 발달해 많은 석호를 가지고 있다. 더치 사이드 북단(섬의 거의 중앙), 프랑스와의 경계에는 신트마르턴의 최고봉인 플라그스타프 산(Flagstaff, 386m)이 있다. 서부에는 심슨 베이 라군(Simpson Bay Lagoon)이 있고 모래톱에는 프린세스 줄리아나 국제공항이 있다. 동남부에는 그레이트 솔트 연못(Great Salt Pond)이 있다. 그레이트 베이와 그레이트 솔트 연못을 가르는 모래톱 위에 수도 필립스뷔르흐(Philipsburg)가 있다. 해양성 열대 기후고 북동 무역풍이 분다. 기후는 온난하고 연평균 강수량은 1,500mm이다. 7월에서 11월까지 허리케인 시즌이다.

정치[편집]

국가 원수는 현 네덜란드 국왕으로 국왕이 직접 임명한 총독이 수장 역할을 한다. 자치 의회가 있고 선출된 총리가 내정을 주도하므로 내정에 관해서는 완전한 자치권을 가지고 있고 국방권과 외교권은 네덜란드 정부가 가지고 있다. 네덜란드령 안틸레스의 해체에 앞서 2010년 7월 21일 신트마르턴의 새로운 헌법이 섬 협의회에서 채택되었다. 입법 기관인 의회(Estates of Sint Maarten)는 기존의 섬 협의회를 개편한 것으로 의원 수는 15명이다.

경제[편집]

관광업은 신트마르턴의 주요 산업이고 노동 인구의 4/5가 관련 부문에 종사한다. 신트마르턴을 방문하는 관광객은 매년 100만 명이 넘는다. 농업과 어업은 활발하지 않고 식량은 수입에 의해 조달한다. 조세 피난처의 한 곳으로도 알려졌다. 설탕과 리큐르(liqueur)를 수출한다.

지도[편집]

참고자료[편집]

소앤틸리스제도 같이 보기[편집]

소앤틸리스제도
리워드제도 1
리워드제도 2
윈드워드제도
리워드 앤틸리스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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