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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카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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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년 11월 25일 ~ 1919년 8월 11일)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년 11월 25일 ~ 1919년 8월 11일)는 미국의 철강 재벌이다. 2008년 기준으로 세계적인 철강회사인 US 스틸은 카네기의 철강회사를 투자자인 JP 모건이 합병을 통해 설립한 회사이다.

스코틀랜드계 미국인으로, 존 데이비슨 록펠러 등과 함께 19세기 미국 산업계를 대표했던 기업가이자, 기차역에서 심부름하던 이민자 소년이 근성으로 초대형 철강회사의 CEO까지 올라간 아메리칸 드림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기도 하다.

포브스에 따르면 그의 전성기 때 재산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3,720억 달러로, 한화로 환산할시 약 372조 원의 천문학적인 금액으로 당시 미국에서도 록펠러 다음가는 부자였다. 다만 잔머리 굴리는 사업가라는 인상과는 달리 스스로는 근검절약했다고 한다.

상세[편집]

미국의 산업자본가로 US스틸사의 모태인 카네기철강회사를 설립하였다. 이후 교육과 문화사업에 헌신하였다.

스코틀랜드 출생. 수직공(手織工)의 아들로 태어나, 1848년 가족과 함께 미국의 펜실베이니아주(州) 앨러게니(지금의 피츠버그)로 이주하였다. 어려서부터 방적공 ·기관조수 ·전보배달원 ·전신기사 등의 여러 직업에 종사하다가, 1853년 펜실베이니아철도회사에 취직하였다. 1865년까지 이곳에서 근무하는 동안, 침대차회사에 투자하여 큰 이익을 얻었으며 철도기재제조회사 ·운송회사 ·석유회사 등에도 투자하여 거액의 이윤을 얻었다.

1865년 철강 수요의 증대를 예견하여 철도회사를 사직하고 독자적으로 철강업을 경영하기 시작하여, 1872년 베서머제강법(베서머법)에 의한 미국 최초의 거대한 평로(平爐)를 가진 홈스테드제강소를 건설하였다. 1870년대부터 미국 산업계에 일기 시작한 기업합동의 붐을 타고, 피츠버그의 제강소를 중심으로 하는 석탄 ·철광석 ·광석 운반용 철도 ·선박 등에 걸치는 하나의 대철강 트러스트를 형성하였다.

1892년에는 카네기철강회사(뒤에 카네기회사로 개칭)를 설립하였는데, 이 회사는 당시 세계 최대의 철강 트러스트로서 미국 철강 생산의 4분의 1 이상을 차지하였다. 1901년 카네기는 이 회사를 4억 4000만 파운드에 모건계(系)의 제강회사와 합병하여 미국 철강시장의 65 %를 지배하는 US스틸사를 탄생시켰다.

이 합병을 계기로 카네기는 실업계에서 은퇴하고, 교육과 문화사업에 몰두하였다. 카네기공과대학(현 카네기멜론대학)·카네기교육진흥재단에 3억 달러 이상을 투자하였다. 인간의 일생을 2기로 나누어, 전기에서는 부(富)를 축적하고, 후기에서는 축적된 부를 사회복지를 위하여 투자하여야 한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를 실천한 위대한 인물이었다. 저서에 《승리의 민주주의 Triumphant Democracy》(1886) 《사업의 왕국 The Empire of Business》(1902) 《오늘의 문제 Problems of Today》(1908) 등이 있다.

생애[편집]

1835년 11월 25일 스코틀랜드 던펌린의 파이프 지방의 던펌린에서 출생했고, 1919년 8월 11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레닉스의 섀도 브룩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어린시절[편집]

카네기가 어린 시절 엄마를 따라 식료품 가게에 가게 되었다. 엄마가 물건을 사는 동안 그는 가만히 서서 체리 파는 할아버지 앞에 놓인 체리상자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주인 할아버지가 "먹고 싶으면 한 줌 집어 먹으렴" 이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는 말없이 가만히 할아버지만 바라볼 뿐이었다. 카네기의 어머니도 "할아버지가 허락하셨으니 한 줌 집어도 돼." 라고 말했지만 그는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체리를 한 움큼 집어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그제서야 고맙다고 말하며 두 손으로 체리를 받았다.

집으로 돌아가며 어머니는 카네기에게 왜 할아버지가 집어주기 전까지 가만히 있었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카네기 曰,

"할아버지 손이 저보다 훨씬 크니까요."

이 일화는 주인공을 바꾸어서 유머 소재로 쓰이기도 한다.

스코틀랜드[편집]

카네기가 태어날 무렵엔 산업 혁명으로 기계가 서서히 보급되면서 가내수공업이 설 자리가 좁아졌고, 아버지인 윌리엄 카네기(William Carnegie) 역시 점차 사업이 힘들어졌다. 그 때문에 카네기 역시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일을 조금씩 도와야 했고 이 과정에서 점차 근성을 키우게 되었다.

이웃에 사는 삼촌인 조지 로더(George Lauder)로부터 로버트 번즈(Robert Burns)의 글과 스코틀랜드의 영웅들 이야기(윌리엄 월레스 등)를 듣고 꿈을 키웠다. 카네기네 집은 이웃집 위버네 가족과 공동으로 살 정도였지만 1층 짜리 원룸이었다. 즉, 큰 방 하나에서 작업하고 먹고 잤다는 말. 이때 친구들과 함께 토끼를 키우자고 했는데 여기서 그는 사람을 다루는 데 유능한 재능을 발휘했다. 풀을 뜯어오면 토끼에게 뜯어온 친구의 이름을 붙인다는 조건을 제시한 것이다.

이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가 로더 삼촌이 "나중에 돈을 많이 번다고? 그럼 (창 밖에) 보이는 고성을 사서 시에 기증하면 어떨까?"라고 지나가는 투로 얘기했는데, 말년에 카네기는 정말로 그 고성을 사서 던퍼믈린 시에 기증했다.

아메리칸 드림[편집]

이후 가족의 생계가 힘들어지자 아버지 윌리엄은 친척의 편지를 받고 미국으로 갈 생각을 품게 되었고, 결국 일가족 전체가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때에도 카네기는 동생 톰과 함께 아버지를 도왔다. 이후 용광로에 석탄을 넣는 화부 역할을 하다가 성실성을 인정받아서 전보배달부가 되었다.

또한 글 재주도 있었는지, 동네의 한 유지가 개인 도서관을 열자 편지를 보내서 자신들도 출입 가능하게 해달라고 했고 결국 승낙을 받았다. 도서관을 열 때 조건이 "일하는 소년들을 위해서"였는데 전보배달부는 취급이 아르바이트급이라 다들 우린 안될거야 아마라고 포기하고 있었다. 이에 카네기가 "우리는 직장 없이 일하는 소년들입니다"라고 써서 보낸 덕에 가능해진 것이다. 이때의 고마움을 잊지 않았는지, 카네기는 훗날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 있는 앨러게니 무료도서관 앞에 헌사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대략 내용은 '웨스턴 펜실베이니아의 무료도서관 설립자인 코로넬 제임스 앤더슨에게 바침. 그는 자신의 서재를 일하는 소년들에게 열어 주었고, 토요일 오후에 사서로 활동하며 고귀한 역할을 했다. 지식과 상상력이라는 소중한 선물을 받은 근로 소년 앤드루 카네기가 감사의 마음으로 이 기념비를 세운다.'

이후 전보배달부에서 모스 부호를 써서 전보를 보내는 전신기사로 승진했고, 결국 1853년에 펜실베이니아 철도 회사에 토머스 A. 스콧(Thomas A. Scott)의 비서 겸 전신기사 자격으로 취직했다.

철도회사 시절[편집]

장거리 노선에 침대차를 도입하여 큰 성공을 이루던 도중, 얼마 후 구입한 농장에서 막대한 석유가 터져 벼락 부자가 된다. 보통은 여기까지만 해도 행복한 여생을 보낼 수 있을 정도였지만 카네기는 공업의 기초가 철강 산업임을 예견하고, 석유로 축적한 재산을 바탕으로 철강업에 모조리 투신, '카네기 스틸'을 세워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다. 석탄 채광부터 운송과 생산까지 수직계열화에 성공해 업계 지배력이 대단했다.

다만 축재의 방법은 당시 대부분의 자본가들과 마찬가지로 독점, 불공정 경쟁, 노동탄압, 정경유착이었다. 록펠러, J. P. 모건 등 당시 상당수 부자들처럼 카네기 역시 미국 남북전쟁 때 미 연방정부에 자본, 물자, 철도, 석유 등을 대면서 엄청난 떼돈을 벌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건 자본주의 초기에는 시대고금을 막론하고 다른나라도 마찬가지이니 사실 딱히 카네기의 문제라고만은 볼 수 없지만, 그가 돈을 모은 방법이 그다지 존경받을 만한 방법이 아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1881년 카네기는 헨리 클레이 프릭(Henry Clay Frick)을 카네기 스틸의 회장으로 임명한다. 프릭은 석탄왕이라고 불리며 경영 능력이 높다고 평가 받던 인물이었지만 돈을 위해서라면 불법도 서슴없이 저지르는 사람이었다.

프릭은 회사의 임금을 삭감했다. 1892년 6월에 카네기의 소유인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 홈스테드 제강소에서 임금협상 중 프릭은 공장 폐쇄를 강행했다. 이에 반발한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자 프릭은 공장을 탈환하기 위해서 용역깡패 '핑커튼 전미탐정사무소'의 용병 300명을 고용했다. 용병단은 공장을 점거한 노동자들과 총격전을 벌여서 3명의 핑커튼 직원과 9명의 노동자들이 사망하는 참극이 벌어졌고 이 사건은 '홈스테드 학살 사건'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용병단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 프릭은 펜실베이니아에 군대를 요청했고, 8천 명의 주방위군이 공장을 보호하는 가운데 노동자들은 일을 해야 했다. 노동자 측의 패배로 인해 미국 철강 노조 결성에 차질이 빚어졌으나 이 소식이 대중 사이에서 확산되면서 노동 인권에 대한 새로운 불꽃을 일으켰고, 스코틀랜드에 머물던 카네기는 장기 체류를 하며 언론의 불꽃이 사그러들기를 기다렸다.

설상가상으로 7월 23일 홈스테드 학살 사건에 분개한 무정부주의자 청년 앨릭잰더 버크먼(Alexander Berkman)이 프릭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치는 사건이 터지면서 카네기는 회사를 지키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프릭은 버크만이 쏜 두 발의 권총탄이 귀와 목을 스치는 부상을 입으면서도 맨손으로 버크만을 제압하고 두들겨 패 거의 죽일뻔 했다.

카네기는 이 사태가 프릭이 일방적으로 저지른 짓이라고 주장했으며, 이에 대한 증거로 자신이 프릭에게 남긴 편지를 들었다. 그러나 카네기가 미국을 떠나기 전에도 카네기 스틸의 파업은 이미 어느 정도 예고된 상황이었고, 실제로 사건이 일어난 후에도 카네기는 실질적으로 프릭을 제지하기 위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이전부터 카네기는 CEO인 프릭에게 전권을 주어 배드캅 역할을 맡기고, 문제가 커지면 자신이 노동자들의 불만을 잠재우는 스타일이었다. 물론 이 경우엔 카네기가 진짜 몰랐다고 항변했지만, 애초부터 카네기는 이미지 메이킹 대비 실제 사원들의 복지엔 크게 신경쓰지 않는 인물이었다.

물론 카네기가 이미지 메이킹을 잘한 건 있었기에, 홈스테드 노동자 총격전이 벌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카네기는 당대 경제계에선 정직한 기업가이며 노동자의 벗이라는 평가도 일견 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 사건을 겪으며 스코틀랜드에서 수수방관했다는 평이 많아지자 이미지가 악화됐다. 실제 이 사태를 기점으로 카네기를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대중매체가 생겨났다. 한편, 웃기게도 프릭은 버크먼의 암살미수 때문에 동정적인 여론을 받게 되었다. 여담으로 이게 미국의 노동운동 역사에도 영향을 끼치는데, 프릭 암살미수 사건을 벌인 버크먼이 노동운동과는 상관없음에도 불구하고 여론은 그 둘의 상관관계를 찾았고, 노동운동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어 1910년대 미국의 노동운동은 그야말로 몰락하게 된다. 게다가 자신의 동의 없이 욕받이 역할을 떠맡은 프릭은 카네기와 갈등을 빚었으며, J. P. 모건에게 카네기 스틸을 매각한 이후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을 정도로 사이가 나빠졌다.

말년에는 후술되어있듯 교육과 자선사업을 미친듯이 많이 했지만 록펠러처럼 더럽게 번 돈으로 생색낸다며 욕도 많이 먹었다. 악독한 방법을 말하자면, 먼저 국회의원을 매수해 누군가 자신의 사업에 뛰어들면 세금을 왕창 먹이도록 했다. 처음에는 싸게 팔아 경쟁자를 몰락시킨 다음 그 후에는 값을 두 배 이상 받는 이른바 매점매석을 이용한 기업을 트러스트 기업이라고 했는데, 카네기 역시 이런 트러스트 기업의 대표적인 소유주였다. 그의 자서전(Autobiography, 1920)에는 이런 말이 있다.

이른바 자선행위에 쓰는 1000달러 가운데 950달러는 차라리 바다에 버리는 게 낫다. 자선으로 먹여 살리는 주정뱅이 부랑자 또는 무익한 게으름뱅이 하나하나가 이웃을 부도덕하게 감염시킨다. 열심히 일하는 근면한 사람에게 그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더 쉬운 길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감정은 적을수록 좋다. 자선 행위로는 개인이든 인류든 나아질 수가 없다. 드문 예외를 제외하면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오히려 도움을 요구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귀한 사람은 결코 그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실제로 같은 시대의 악덕 재벌이라고 비판받던 록펠러나 밴더빌트, 모건과 달리 카네기의 이미지가 상대적으로 좋은 이유는 기부 문제도 있지만, 카네기 자신이 평소 본인의 이미지 메이킹에 많은 신경을 썼고 노후에 반독점법에 걸려서 욕 먹었던 록펠러와 달리 그의 사업을 물려줄 아들이 없었기에 일찍 사업을 정리해서 말년이 깔끔했던 덕도 크다. 게다가 이 사람은 흑인 및 소수인종 교육에도 관심이 좀 있었기 때문에 전후 인종주의가 판치던 남부에서는 극딜을 당했지만, 오히려 이게 후대에 모범적인 사례가 되어서 욕을 덜 먹게 되었다.

국내에는 카네기의 아들들에 대한 일화가 일부 퍼져 있는데 전술했듯 그에게는 아들이 없다. 다만 후술되어있 듯 늦둥이 딸은 한명 있었다. 하여튼 그의 가족사에 대한 이야기는 본인이나 작가들에 의해서 윤색, 미화된 것이 많기 때문에 가려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래도 평화주의자에 기부를 많이 한 건 사실이니 다양한 평가를 할 수 있는 복잡한 인물이긴 하다.

사업[편집]

  • 1848년 실 제조공장으로 옮겨 증기기관과 보일러를 돌보고 주급 2달러를 받았다.
  • 1850년 전신국에 취직하여 주급 2달러 50센트를 받았다. 능력을 인정받아 전신기사로 승진하여 월급 25달러를 받았다.
  • 1853년 새로운 통신기술을 사용한 덕분에 펜실바니아 철도회사 서부 지부 감독 토머스 스콧의 개인비서 겸 전신기사로 발탁되어 월급 35달러를 받았다.
  • 1856년 지역 은행가로부터 217달러 50센트를 빌려 우드러프 침대차 회사에 투자하여 2년 뒤부터 매년 5,000달러의 배당금을 받았다.
  • 1859년 펜실바니아 철도회사 피츠버그 지부 감독이 되어 연봉 1,500달러를 받았다.
  • 1861년 남북전쟁 때 북군을 위해 철도와 전신선을 연결하는 작업을 했다.
  • 1863년 철로 다리를 만들 것을 목표로 동업자들과 키스톤 교량회사를 세웠다.
  • 1864년 피츠버그에서 레일 제조회사를 세웠다.
  • 1865년 철도회사를 끝으로 월급쟁이 생활을 마감한 후 사업을 시작했다.
  • 1867년 유니언 제철소를 세웠다.
  • 1870년 선철 제조를 위해 루시 용광로를 세웠다.
  • 1875년 펜실바니아주 브래독에 최초의 강철 공장인 에드거 톰슨 공장을 세웠다.
  • 1886년 경쟁업체인 홈스테드 제강소를 사들였다.
  • 1887년 35세 때부터 사귀어 온 루이스 휫필드(38세)와 52세에 결혼했다.
  • 1892년 카네기 철강회사를 설립하여 곧 카네기 회사로 개칭했다.
  • 1899년 제강소 몇 군데를 합쳐 카네기 제강소를 설립했다.
  • 1901년 66세 때 자선사업을 하기 위해 잘나가던 철강 회사를 4억8000만 달러를 받고 J. P. 모건에 팔았다. 이로써 카네기는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기부 및 평화운동[편집]

"통장에 많은 돈을 남기고 죽는 사람처럼 치욕적인 인생은 없다."
"부자로 죽는 것은 불명예스러운 일이다"
- 그의 좌우명

카네기가 이런저런 구설수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사회적 존경을 받는 이유는, 그가 특히 말년으로 갈수록 이미지 메이킹 차원을 넘어 스스로 부의 사회환원에 적극적으로 앞장선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9] 자식도 딸 하나뿐이던 카네기는 딱히 돈에 집착할 필요가 없었던지[10] 1901년 회사를 매각한 뒤 J. P. 모건에 철강회사를 매각한 대금으로 재단을 설립했고, 본격적으로 사회사업을 시작했다.

특히 교육 분야에 기여한 바가 큰데, 1902년부터 시작된 카네기의 도서관 건립 계획을 통해 미국 전역에 2500여 개의 공공 도서관을 건립했고, 모두 사회에 헌납했다. 사회적 소수자 문제에도 나름 관심을 기울였으며, 이후 글로벌 명문 대학교가 되는 피츠버그의 카네기 멜런 대학교도 카네기의 기부금으로 설립된 학교이다. 사업가로 활동할 당시엔 실질적인 노동인권 문제엔 큰 관심이 없던 잔머리 사업가라는 말도 듣던 카네기가 이때 기부하면서 내건 구호가 "노동자 계층 자녀들을 위한 직업훈련학교"였던 걸 보면 묘하다.

미국 내에서 그가 기부한 도서관의 영향력은 그야말로 대단하다. 1920년대에는 미국 도서관의 절반이 그의 기부로 지어질 정도였으니. 또한 인건비를 절감하기 위해서 개가식(일반적인 도서관 이용방법이라 생각하면 편하다. 반대는 폐가식으로, 도서카드를 보고 신청하면 사서가 서고에서 책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도서관을 운영하였다. 도서관을 공공재의 시선으로 보았다는 특징 또한 있다.

카네기가 카네기 홀, 카네기 교육진흥재단, 각종 대학 등에 기부한 총 액수는 3억 달러 이상이었다고 한다. 당시 아시아에서 발돋움하던 신흥국 일본의 1년 국가 예산이 1억 3천만 달러였음을 감안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액수. 그가 사망했을 때 남은 그의 재산은 당시 돈으로 3천만 달러 정도였다고 한다. 실제 전재산 중 대략 90%를 기부한 셈.

1901년에는 카네기 스틸을 J. P. 모건에 매각하고 자선사업을 하며 노후를 보냈다. 포트폴리오가 굉장히 보수적이라 1910년에 설립됐는데도 100년이 넘게 모든 경제위기들을 극복하며 살아남았다.

평화주의와 반제국주의 사상이 강해서 윌리엄 매킨리 당시 대통령과 독대해서 스페인과 하려는 전쟁을 막기도 했다. 이때 한 말이 "전쟁이 벌어지면 미국에서 가장 이득을 보는 것은 저겠지만, 그래도 전쟁은 막아야 합니다."라는 말이었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미국의 외교안보 싱크탱크 가운데 온건, 진보 성향이 강한 '카네기 국제평화기금'(Carnegie Endowment for International Peace)의 설립에도 기여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세워진 국제사법재판소의 건물(통칭 '평화궁')도 그가 기탁한 돈으로 지어진 것이다.

  • 1881년 그는 맨 먼저 고향 스코틀랜드의 던펌린에 도서관을 기증했다. 그는 아버지가 고향 던펌린에서 얼마 안 되는 장서를 모아 불우한 이웃들에게 열람할 수 있도록 최초의 도서관을 세웠다는 것을 평생 자랑으로 여겼다. 또 그는 전보배달 소년으로 일할 때 토머스 스콧 감독이 400여 권의 장서를 자신 같이 불우한 소년들에게 개방한 것을 큰 은혜로 여겼다.
  • 1900년 카네기가 출연한 100만 달러와 피츠버그시가 기증한 토지를 기금으로 Carnegie Technical Schools가 설립되었는데, 그 후 몇 단계를 거쳐 1967년 Carnegie Mellon University가 탄생했다.
  • 1901년 525만 달러를 출연하여 뉴욕 시에 68개의 공공도서관과 분관을 세웠다. 얼마 후 브루클린 지역에 20개의 분관을 더 세웠다. 그는 평생 모두 2,507개의 도서관을 세웠는데, 무료 공공도서관을 '대중대학(people’s university)'이라고 생각했다.
  • 1902년 1,000만 달러를 출연하여 워싱턴에 카네기협회를 만들었다. 미국 대학의 연구 지원을 위해 출범한 이 기구는 1904년 의회의 의결을 거쳐 법인으로 발족했다.
  • 1902년 피츠버그 탄광 사고를 계기로 500만 달러를 출연하여 "동료를 구하려고 영웅적인 행동을 한 사람들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영웅기금을 조성했다.
  • 1905년 1,500만 달러로 대학 교수들의 노후를 위한 카네기교육진흥재단을 세웠다.
  • 1910년 평화를 위한 기금을 조성하여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을 설립했다.
  • 1911년 남은 돈 1억2500만 달러로 카네기재단을 설립했다. 이 재단은 대학과 전문대학, 기술학교, 학문적인 목적의 연구·조사에 연구비를 지원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저서[편집]

  • '승리하는 민주주의(1886)'
  • '부의 복음(1889~)': 다만 저서라기보단 A4 용지 5~6장 분량의 일종의 기고문에 가깝다.
  • '오늘의 문제: 부 노동 사회주의(1907)'
  • '자서전(1920)' 등이 있다.

개인적인 특성[편집]

  • 그는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잠시도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세상에는 카네기만큼 노력하는 사람들도 수없이 많다.
  • 그는 쉬지 않고 저축했다. 그는 항상 지출이 수입을 초과하지 않도록 돈을 관리했고, 나머지는 저축했다. 이런 사람들도 세상에는 수없이 많다.
  • 그는 저축한 돈으로 열심히 투자했다. 그는 철도회사 스콧 감독의 권유로 집을 담보로 500달러를 빌려 애덤스 익스프레스 주식을 샀다. 그는 10달러의 배당금을 받고나서 “내가 땀 흘리지 않고 자본을 통해 벌어들인 최초의 수입이었다. 나는 ‘유레카(eureka)3)! 여기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있다!’고 외쳤다”고 썼다. 투자를 통해 돈 번 사람들도 세상에는 수없이 많다.
  • 그는 운이 좋았다. 그는 철도회사 직원이었을 때 침대차를 발명한 우드러프를 우연히 만나 지역 은행가의 도움으로 217달러 50센트를 빌려 침대차에 투자했다. 이로부터 그는 큰 돈을 벌었다. 운이 좋아 돈을 많이 번 사람들도 세상에는 수없이 많다.
  • 그는 돈 관리에 철저했다. 그는 한 번만 그렇게 했을 뿐 투기 목적으로 주식을 사거나 팔아본 적이 없다. 이런 사람들도 세상에는 수없이 많다.
  • 그는 목재 대신 처음으로 철로 튼튼한 교량을 만들기로 하고 키스톤 교량회사를 설립했다. 기업가정신을 발휘한 경우다. 이런 경우도 세상에는 수없이 많다.

기타[편집]

비서에 따르면 화를 낼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해피한 기분을 유지하는 편이었다고 한다. 우울증에 자주 시달린 록펠러와 대조되는 부분.

표트르 차이콥스키가 미국 여행 중에 카네기를 만난 적이 있으며 카네기홀 개장식 때 축하연주회 지휘를 했다.

나폴레온 힐(Napoleon Hill, 1883-1970)과의 일화가 있다. 당시 기자였던 나폴레온 힐은 운 좋게 카네기와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나서 힐의 포부를 들은 카네기는 그에게 자신이 아는 부자 507명('자동차 왕' 헨리 포드(Henry Ford, 1863-1947), '전화 왕' 알렉산더 그래험 벨(Alexander Graham Bell, 1847-1922), '발명 왕' 토머스 에디슨(Thomas Edison, 1847-1931) 등)과 연을 대줄테니 그들과 인터뷰를 해보라고 했다. 대신 보수는 "0". 힐은 잠시 망설이다가 승낙했고 20년간 무보수로 거부들과 인터뷰를 하고 자료를 모았다. 카네기는 힐에게 한푼도 줄 수 없는 이유를 나중에서야 이야기해줬다는데, 그 이유는 이렇다. "나는 성공의 노하우를 당신에게 직접 가르쳐 주었다. 게다가 성공한 많은 사람들과 그 방면의 대가와 당신은 앞으로 오랜 세월 서로 협력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당신이 성공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힐은 카네기와 약속한 지 정확히 20년 후인 1928년 전8권으로 된 [성공의 법칙(The Law of Success)]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카네기는 이미 9년 전에 사망했지만, 힐은 카네기와의 약속을 동력 삼아 20년간 성공학에 몰두한 끝에 그 나름의 대작을 내놓은 것이다. 그는 카네기가 원했던 수준 이상의 작업을 통해 '성공학 전도사'의 입지를 탄탄히 굳힐 수 있었다. 1930년대 대공황 시절엔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1882-1945) 대통령의 보좌관으로 일하는 등 정관계에도 영향력을 미치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후 힐은 [성공의 법칙]의 보급판 책의 집필에 착수해 1937년 [생각하라, 그러면 부자가 되리라(Think and Grow Rich)]를 출간하였고 2023년까지 전 세계 1억 2천만 부가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의 한국어 번역판 제목은 [놓치고 싶지 않은 나의 꿈 나의 인생]) 이후 나폴레온 힐 재단을 설립해 많은 사람들에게 성공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가르쳤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나폴레온 힐의 '성공 방적식' (주제가 있는 미국사, 강준만),

카네기의 어머니가 비를 피하느라 가구점 처마 밑에 서 있다가, 친절한 가구점 직원 덕분에 가구점 안에 들어가 비가 그칠 때까지 가구 구경을 하며 편안하게 시간을 보냈다. 나중에 카네기가 자기 업체에서 쓸 많은 가구를 그 가구점에서 주문해서, 가구점이 큰 이익을 보았다는 일화가 있다.

결혼을 굉장히 늦게 했다. 아버지 사망 후 홀로 된 어머니를 돌본다며 결혼하지 않다가, 어머니가 사망한 뒤인 52세의 나이로(재혼도 아닌 첫 결혼) 22세 연하의 여성인 루이스 휘트필드와 결혼했다. 평균수명이 짧았던 당시 기준으로는 할아버지가 되어서 결혼한 셈이다. 평균수명이 길어지고 만혼이 잦아진 현대 기준으로도 충분히 늦은 결혼이니, 현대로 치면 70대에 결혼한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당시 기준으로는 결혼을 늦게 해서인지 둘 사이에 자녀는 딸인 마가렛 카네기 밀러 하나뿐이었는데, 이 딸은 카네기가 무려 62세, 휘트필드가 40세일 때인 1897년 태어났다.

인간관계론을 만든 데일 카네기와 이름이 비슷해서 이 카네기가 인간관계론을 만든 걸로 착각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이 부분은 데일 카네기도 노린 점이며, 앤드류 카네기의 유족들도 저런 착각이 나쁘지만은 않았는지 별다른 대응을 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우스갯소리로 카네기가 직원들을 불러놓고 너무 근무를 많이 했으니 이제 휴가를 가져야겠다고 말하자 직원 가운데 한 명이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와 신난다, 마귀가 없는 동안 낮잠을 실컷 잘 수 있겠네!".

원예명이 변경주이며, 흔이 사구아로로 알려진 선인장의 속명(Carnegiea)의 유래이다.

마마보이였다는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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