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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후

해시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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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후(Yahoo)
야후(Yahoo)
제리 양(杨致远, Jerry Yang)

야후는 미국의 인터넷(Internet) 검색엔진 사이트이다. 1994년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Stanford University) 학생이었던 제리 양(Jerry Yang)과 데이비드 필로(David Filo)가 만들었다. 야후는 한때 세계 최대의 검색 사이트였으나, 구글에게 밀려서 1위 자리를 내어줬다. 2003년 검색광고 대행 회사인 오버추어(Overture)를 인수했고, 2005년 사진 공유 사이트인 플리커(flickr)를 인수했다. 본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Silicon Valley)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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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달] 스마트 호스팅

개요[편집]

야후는 기본적으로 디렉터리(directory) 검색을 전문으로 하지만 동시에 검색엔진도 제공하며 유즈넷(usenet)과 이메일(e-mail) 주소도 검색할 수 있다. 적은 데이터베이스(DB)를 갖고 있으면서도 양질의 검색 결과를 제공하는 검색엔진으로 꼽힌다. 전 세계 (Web) 서버가 분야별, 장르별로 메뉴화되어 있어 원하는 분야를 검색하는 데 편리하다. 알렉사(Alexa) 등의 업체들에 따르면, 야후는 오늘날 4억 1200만 명 이상의 고유 방문자를 보유하며, 2012년에는 야후 전체 네트워크의 하루 평균 페이지뷰는 44억 페이지를 기록한다. 네이버㈜의 지식인 서비스를 벤치마킹한 야후앤서즈(YahooAnswers)는 미국 지식시장 점유율 96%를 달성하고, 2006년 미국 웹 검색시장의 50%를 점유한다. 그러나 인터넷 시장의 경쟁이 심화되면서 야후는 구글에 밀려 2007년 8월 시장점유율이 23.3%까지 내려감에 따라, 경영실적 악화로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 사 및 구글과 인수 합병을 진행한다. 2008년 2월 1일 마이크로소프트 사가 1주당 31달러 규모의 야후 인수를 제안했지만 야후는 가격이 낮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야후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제안은 자사의 가치를 저평가한 것이며 야후의 장래성, 잠재적 가치 등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것이라고 밝힌다. 2006년부터 야후는 40달러 이상으로 거래된 적이 없으나 2014년, 40달러 이상으로 거래된다. 당시 인수 제안이 있기 전 야후의 주가는 19.18달러로 기록된다. 야후 자회사로 오버추어가 있으며, 오버추어는 야후 서치마케팅으로 서비스 된다.[1] 한편, 1997년 후반에 야후와 소프트뱅크(Softbank)의 합작을 통해 야후 코리아(Yahoo Korea)가 대한민국에 동명의 현지법인을 세워 진출하며 상륙직후 순식간에 당시 대한민국 인터넷 포털계 1위이었던 심마니를 제치고 야후 코리아가 1위 사이트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이후 너무 낮은 점유율로 야후 코리아는 2012년 12월 31일자로 모든 서비스가 중단된다.[2]

주요 인물[편집]

창업자[편집]

인터넷 검색 포털 사이트인 야후의 공동창업자 겸 전 최고경영자이다. 신기술 분야에 투자하는 벤처캐피털(venture capital)인 아메 클라우드 벤처스(AME Cloud Ventures)의 공동창업자이기도 하다. 제리 양은 1968년 대만에서 태어났으며, 2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10세 때 영문학 교수인 어머니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해 캘리포니아주 산호세에서 성장한다. 1990년 스탠퍼드 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입학해 4년 만에 학사·석사 과정을 마친 뒤,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전기공학 박사학위를 받는다. 1994년 스탠퍼드 대학교 박사과정에 있을 때 동료인 데이비드 필로(David Filo)와 함께 재미 삼아 인터넷에 흩어져 있는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해주는 소프트웨어(Software)를 개발하는데 이 프로그램(program)이 세계 최초의 검색 엔진인 야후이다. 그 후 야후가 네티즌의 인기를 끌자, 1995년 제리 양은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인 재일교포 손정의의 도움을 받아 인터넷 포털사이트인 야후를 설립하였다. 이후 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싱가포르·일본에 이어 1997년에는 한국에도 지사를 설립하였고, 2000년에는 야후를 시가 총액 916억 달러의 다국적 기업으로 성장시켰다.1998년에는 미국의 대표적인 시사주간지 타임지가 선정한 사이버 공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50명 가운데 6위에 오르기도 하였다.[3]
제리 양은 1997년 첫 중국 방문 때 알리바바(Alibaba) 창업자를 만난다. 정부 고용 관광 안내원이자 전직 영어 교사인 알리바바 창업자는 제리 양과 웹 성장에 대해 많은 의견을 나누었고, 몇 달 뒤 알리바바를 만든다. 그러다 제리 양의 지시로 2005년 야후는 2007년 최고 경영자로 취임하기 전 알리바바의 지분 40%를 야후 자산 10억 달러에 사들인다. 2012년 야후는 알리바바 지분 일부를 76억 달러에 매각한다. 이는 헤지펀드(hedge fund) 아이언파이어 캐피털(Ironfire Capital)의 설립자인 에릭 잭슨(Eric Jackson)은 야후의 알리바바 투자는 '미국 기업이 중국에 투자한 것 중 최고라고 평가한다 전해진다. 그러던 중 알리바바 투자 한 달 뒤인 2005년 가을에 야후가 2004년 11월 중국 언론인 시 타오(Shi Tao) 체포에 있어 중국 당국과 협력했다는 논란이 전해진다. 시 타오는 야후 이메일 주소를 이용해 미국의 한 민주화 웹사이트에 중국 정부가 1989년 6월 4일 톈안먼 광장 시위 15주년 기념일에 중국 언론에 보도하지 말라고 지시했다는 사실을 익명으로 알린다. 야후는 중국 보안 기관에 발신자, 수신자, 메시지 시간 등의 아이피 주소를 넘겨주고 시타오는 국가의 해외 기밀을 누설한 혐의로 유죄를 받는다. 제리 양은 '중국이나 세계 어느 곳에서든 사업을 하려면 현지 법을 준수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이 조치를 정당화하여 제리 양과 야후는 심한 비난을 받는다.
2008년 2월, 마이크로소프트는 446억 달러에 야후를 사겠다는 자발적인 제안을 한다. 그 당시 야후는 여전히 구글을 따라잡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고, 마이크로소프트는 여전히 인터넷 전략을 찾고 있었다고 한다. 이 제안은 당시 야후의 시장가치에 62%의 프리미엄(premium)이 붙은 것이다. 제리 양은 야후를 매각할 의향이 없었고 협상이 어려워진다. 2008년 5월 협상이 실패로 끝나자 야후의 주가는 폭락한다. 제리 양은 협상 처리에 대해 투자자들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고, 이후 여러 번의 주주 소송과 2008년 7월 타결된 칼 아이칸(Carl Icahn)이 주도한 대리 싸움으로 이어진다. 제리 양이 마이크로소프트 인수와 관련해 구글과 상업적 검색 광고 계약을 맺자는 게 답이었지만 미국 당국이 시장 경쟁 효과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내면서 협상은 종료된다. 2008년 11월 17일 월스트리트저널(The Wall Street Journal)은 제리 양이 다음 최고 경영자를 찾는 대로 자리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보도한다. 야후가 캐롤 바츠(Carol Bartz)를 최고 경영자로 임명한 2009년까지 최고 경영자로 재직한것이다. 그 후로도 제리 양은 이사회에 남아 있던 것으로 전해지다 2012년 1월, 야후는 제리 양이 회사를 그만두고 이사회와 그 외 회사의 모든 직책을 사임할 것이라고 발표한다. 야후를 떠난 후 제리 양은 그의 회사인 아메클라우드 벤처스를 통해 기술 스타트업의 멘토 겸 투자자가 된다. 그렇게 50여 개 스타트업에 자금을 지원했으며, 2014년 알리바바 이사회에 재입사한다. 제리 양은 2015년에 뉴스브레이크닷컴(newsbreak.com)을 설립한다.[4]
미국의 사업가이자, 제리 양과 더불어 야후의 공동 설립자이다.회사가 피에이치피(PHP)로 전향하기로 결정하기 전까지는 씨(C) 프로그래밍 언어로 작성된 그의 파일 서버 프로그램이 야후 웹 사이트를 방문하는 다양한 웹 페이지를 유동적으로 처리하는 데 쓰이는 서버 측면 스크립트(script) 소프트웨어(필로 서버 페이지)가 된다.그는 튤레인 대학교(Tulane University)에서 컴퓨터 공학 학사 학위와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컴퓨터 공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이력이 있다.[5] 데이비드 필로는 위스콘신(Wisconsin)에서 태어나 루이지애나(Louisiana)에서 성장한다. 건축가 아버지와 기업체 관리직원인 어머니는 교수가 돼주기를 바라지만, 박사과정 막바지에 제리 양을 만나면서 진로를 수정하게 된다.[6]
  • 팀 쿠글(Tim Koogle, 1951년 7월 5일~ , 위임기간 : 1995~2001년)
팀 쿠글은 워싱턴 디씨(Washington, D.C.)에서 태어나 자라며 1969년 마운트 버논(Mount Vernon)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1973년 버지니아 대학(University of Virginia)에서 기계공학 학사 하위를, 1975년~1977년 스탠퍼드 대학에서 공학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스탠퍼드에 있는 동안, 팀 쿠글은 두 개의 서업체와 레이싱 엔진 제조를 전문으로 하는 자동차 수리 사업과 산업용 로봇을 전문으로 하는 기계 설계 및 시제품 회사 '페이즈2(Phase2)를 설립한다. 팀 쿠글은 1981년에 페이즈2를 모토롤라(Motorola)에 매각하고, 이후 레이싱 엔진 사업도 접으며 1983년, 모토롤라에 입사한다. 1992년, 팀 쿠글은 인더스트리즈 리턴 인터멕(Litton Industry's Intermec) 사업부의 사장이 되며, 웨스턴 아틀라스(Western Atlas)의 수석 부사장으로 겸임한다. 인터멕에서 2년 후 1995년에 팀 쿠글 창업자 제리 양과 데이비드 필로를 처음 만나고 8월에 야후 최고경영자와 사장이 된다.[7] 팀 쿠글은 이사와 인터멕 사장을 거쳐 95년 야후 최고 경영자에 영입된다. 검색 전문 사이트에 지나지 않았던 야후를 전자상거래와 이메일 서비스를 포함한 종합 포털 서비스 업체로 바꾼 일등 공신이다. 그러나 1억8500만명의 이용자에도 불구하고 광고 수입 축소 등으로 경영난이 심화되자 책임을 지기 위해 2001년에 사임한다.[8]
  • 테리 세멜(Terry Semel 1943년 2월 24일~ , 위임기간 : 2001~2007년)
테리 세멜은 2001년부터 2007년까지 야후 주식회사의 회장 겸 최고 경영장을 역임한 미국의 기업인이다. 테리 세멜은 뉴욕(NewYork) 브루클린(Brooklyn)의 유대인 가문에서 밀드레드(Mildred)와 벤 세멜(Ben Semel)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다. 두명의 여동생이 있으며, 아버지는 여성 코트디자이너고, 어머니는 버스회사 임원이었으며, 테리 세멜은 퀸즈 베이사이드(Queens Bayside)에서 자랐으며 23세에 브루클린의 롱아일랜드 대학(Long Island University)의 회계학 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한다. 테리 세멜은 1965년 워너 브라더스(Warner Bros.)에서 수습직원으로 일하기 시작하여 1970~1972년까지 씨비에스(CBS) 법인의 연극영화 제작 회사인 시네마 센터 필름(Cinema Center Films)에서 국내 판매 관리자로 일하게 된다. 씨비에스는 1972년 시네마 센터 필름을 폐쇄하고 이로 인해 테리 세멜은 월트 디즈니 컴퍼니(Walt Disney Company) 옮겨 1975년까지 연극 배급 업무를 담당하게 된다. 1975년, 워너 브라더스로 돌아와서 1979년에 사장으로 위임하며 이후에는 스튜디오 운영을 위해 부사장으로 옮긴다. 그러던 중, 로버트 달리(Robert A. Daly)는 테리 세멜이 자신과 함께 공동 회장 겸 최고 경영자가 될 것이라 발표한다. 이 후 테리 세멜은 1999년 7월 워너 브라더스사에서 사임한다.
2001년 4월, 테리 세멜을 야후에 합류하기 위해 1억 1천만달러 이상의 주식 자본을 부여 받는다. 그러던 중 테리 세멜은 이전에 기밀이었던 야후 정보를 중국 정부에 공개하기 위해 야후가 중국 관리들과 협력하는 것을 승인한다는 논란에 휩싸인다. 결국 중국과 협력하는데 야후의 이러한 행동은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한다.
테리 세멜은 야후에 입사한 후, 회사 창업자인 제리 양과 데이비드 필로는 구글을 인수하는 것에 대해 알아보라고 제안한다. 테리 세멜은 래리 페이지(Larry Page), 세르게이 브린(Sergey Brin)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하며 구글 검색 기술을 연간 700만 달러를 지불하여 구글을 인수하는 것에 대해 제안한다. 그러나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10억 달러를 원했고 그렇지 않다면 팔고 싶지 않다고 답한다. 테리 세멜은 가격에 대해 고민하다 10억 달러 인수에 동의한다. 그러나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이번엔 30억 달러를 제안했고, 테리 세멜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인수를 포기한다. 또 페이스북을 인수하기 위해 마크 주커버그(Mark Zuckerberg)에게 제안하지만 마크 주커버에게 만족하지 않은 조건으로 결국 실패한다. 그러다 2007년 6월 18일, 6년간의 최고 경영자 임기를 마치고 투자자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야후 창업자인 제리 양에게 자리를 내준다. 그 뒤로도 테리 세멜은 64세의 나이로 비상임이사직을 유지하다 2008년 1월 31일 야후에서 비상임이사직에서도 완전히 물러난다. 테리 세멜은 현재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 카운티 미술관(County Museum of Art)의 공동 이사장이다.[9]

역사[편집]

  • 1994~1995년 : 창업
1994년 제리 양은 연구실 동료인 데이비드 필로와 함께 인터넷상의 주요 웹사이트를 주제별로 카테고리화한 뒤 목록으로 엮어서 보여주는 웹사이트를 만든다. 웹사이트의 이름은 "제리와 데이비드의 월드와이드웹 가이드(Jarry and David's Guide to the World Wide Web)". 인터넷 상의 업종별 전화번호부 정도로 보면 된다. 제리 양과 데이비드 필로는 박사 논문 작성에 필요한 사이트를 찾아보기 쉽게 분류해서 만든 것이 목적이었지만, 이 웹사이트는 예상보다 많은 인기를 얻게 된다. 개발한 해 9월까지만 해도 등록된 웹사이트 목록이 2,000개에 불과했으나 그 다음해에는 10,000개 이상을 등록한다. 제리 양과 데이비드 필로는 1994년말에 웹사이트의 이름을 야후로 변경하고, 캘리포니아에서 정식으로 창업을 한다. 창업 후 폭발적인 인기로 인해 트래픽(Traffic)이 폭주하자, 1995년초 야후 사이트는 넷스케이프(Netscape)사의 임시 지원을 받아 서버를 옮긴다. 자금이 필요했던 두 창업자들은 투자 지원을 받기 위해 노력했는데, 첫 투자의 손길을 내민 회사는 벤처캐피털인 세쿼이어 캐피털(Sequoia Capital)이다. 세쿼이어 캐피털은 야후의 장래성을 인식하고 1995년 4월 100만달러를 투자한다. 이후 1995년말 즈음 손정의가 이끄는 소프트뱅크도 야후에 200만달러를 투자하고 다음 해 1996년에 100만달러를 추가 투자한다.[10]
  • 1995~2001년 : 확장
야후는 본격적인 경영을 위해 1995년 8월 팀 쿠글을 최고 경영자(CEO)로 선임한다. 팀 쿠글은 야후를 테크기업이 아니라 미디어(media) 기업으로 키우겠다는 비전을 제시하고, 온라인(online) 광고와 스폰서십을 주 수입원으로 하는 사업적 토대를 닦는다. 그 결과 1996년 4월 나스닥(NDX)에 주당 13달러로 성장하던 야후는 불과 4년 후인 2000년에 시가총액이 1250억 달러에 달하게 된다. 이는 주당 237달러를 기록한 것이다.1997년에는 한국에 야후 코리아 법인을 설립한다. 당시 한국은 다음의 전신인 한메일넷(hanmailnet)이 무료 웹메일 서비스를 선보이면서 인터넷 시장이 서서히 형성되고 있었는데, 일찍이 한국 포털 시장을 선점한 야후는 1999년 국내 최초로 2000만 페이지뷰를 돌파하며 한국 인터넷 태동기를 이끌었다. 야후는 필요한 기능을 신속하게 갖추기 위해 끊임없이 타 기업들을 인수한다. 사용자들이 사이트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도록 하기 위해서 로켓메일(RoketMail)을 인수하여 메일 서비스를 제공하고, 온라인 오디오(audio) 및 비디오(video)에 대한 관심이 커지자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는 브로드캐스트닷컴(Broadcast.com)을 인수한다. 또한 야후의 위치를 미디어 기업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자체적인 검색 엔진을 개발하기보다는 외부 업체와 계약을 맺어 검색 엔진을 사용하게 된다. 최초로 채택한 외부 검색 엔진이 바로 구글(Google)이다. 훗날 이 선택은 야후에게 전략적 실패로 판명된다.[10]
  • 2001~2007년 : 위기
2001년 닷컴버블(dot-com bubble)이 터지면서 거래 첫날 주가가 154% 폭등하고 1250억달러라는 시가총액을 기록하며[11], 그해 3월 팀 쿠글이 사임한다. 새로운 최고 경영자로 워너브라더스(Warner Brothers)에서 오랫동안 일한 테리 세멜이 된다. 전임인 팀 쿠글과 달리 테리 세멜은 인터넷이 뭔지도 잘 모르는 사람이어서 야후 내부의 불안이 커지기 시작한다. 그의 경쟁력은 뛰어난 협상력에 있었는데, 그가 최고 경영자가 된 이후 다양한 전략적 제휴를 체결하여 온라인 광고 일변도의 수익원을 다각화하는데 애쓰게 된다. 이 시기에 테리 세멜은 향후 야후를 뒷받침해주는 중요 거래를 성사시킨다. 2002년 12월 검색엔진인 잉크토미(Inktomi)를 인수한 데 이어 2003년 7월 유료 검색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오버추어를 16달러에 인수한다. 오버추어의 유료 검색 결과를 야후의 검색결과에 노출시키고 수익을 얻는 것이었는데, 이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판명된다. 당시에는 매우 조그마한 중국 기업에 불과했던 알리바바(Alibaba)의 지분 40%를 10억 달러에 인수하는데, 이 거래는 지금까지 야후를 생존할 수 있게 해준 결정적인 선택이 된다. 야후는 경쟁 업체에 대한 대응이 전반적으로 약했는데, 2004년 구글을 야후의 검색엔진에서 배제하는 결정을 내리지만, 구글은 이미 2002년에 검색엔진 사용률에 있어서 야후를 추월한 상태를 보여준다. 2002년 구글, 2006년 페이스북 각각 10억달러 인수 제의 등 당시 뜨고 있던 기업들을 아예 인수하려 하지만, 공격적인 가격을 제시하지 않아 실패한다. 2006년에 유튜브(Youtube)인수를 시도하지만 구글에게 뺏기고 만다. 2006년 말에는 야후가 인터넷의 전 분야에 걸쳐서 서비스를 하고는 있으나 제대로 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비판한 내부 문건이 유출되어 파문이 일기도 한다. 결국 2007년 6월 수익악화에 따른 주주들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테리 세멜이 퇴사한다.[10]
  • 2007~2009년 : 돌아온 창업자
이사회의 요구에 따라 창업자 제리양이 최고 경영자로 복귀하나, 주주들의 기대와 달리 제리 양에게는 야후를 회생시킬 만한 비전과 전략이 없다 판단한다. 2008년 마이크로소프트는 야후에게 450억달러에 달하는 인수를 제안한다. 상당히 큰 금액이었지만 적정가격이 아니라고 생각한 제리 양은 이를 거절한다. 그러자 기업 사냥꾼으로 유명한 칼 아이칸(Carl Icahn)이 나선다. 칼 아이칸은 야후의 현 상황을 볼 때 매우 합리적인 가격의 인수 제안이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절하여 주주의 이익을 침해하고 있다 주장한다. 이후 칼 아이칸의 적대적 인수 공격에 대한 방어에 급급한 상황이 지속되면서 결국 미래를 위한 전략 고민은 하지도 못하게 되면서 2008년 10월 15,000명의 직원중 10%를 해고해야만 했고, 제리 양은 11월 사임한다.[10]
  • 2009~2012년 : 몰락
제리 양이 사임한 이후, 야후는 손쓸 틈도 없이 나락으로 떨어진다. 2009년 1월 오토데스크(Autodesk) 최고 경영자를 역임한 캐롤 바츠를 최고 경영자로 영입한다. 캐롤 바츠는 직원들을 해고하고 수익이 안나는 사업부문을 폐쇄하는 등 비용절감에 집중하지만, 비용절감만으로 회사 성장은 당연히 실패한다. 심지어 캐롤 바츠는 야후의 주요 투자결정 중 가장 잘한 것으로 평가받는 알리바바와의 관계를 원만하게 조정하지 못하고 2009년에는 자사의 검색엔진을 없애고 마이크로소프트 빙(Microsoft Bing)과 제휴를 맺는 전략을 채택한다. 2010년에는 페이스북마저 야후를 방문자수에서 앞서고, 재무실적이 더 악화되자 2011년 9월 캐롤 바츠는 해고된다. 급하게 최고 재무 관리자(CFO)였던 팀 모스(Tim Morse)가 최고 경영자로 지명되었다가, 2012년 1월 페이팔(PayPal) 사장을 역임한 스캇 톰슨(Scott Thompson)을 최고 경영자로 임명한다. 그러나 스캇 톰슨은 학력 허위 기재 혐의로 4개월만에 물러난다. 스캇 톰슨을 대신하여 야후 미디어 책임자였던 로스 레빈스(Ross Levinson)가 최고 경영자를 맡는다.[10]
  • 2012~2016년 : 야후의 마지막
2012년 7월 야후 이사회는 마지막 승부수를 띄우는데, 구글에서 고위직을 역임한 마리사 메이어(Marissa Mayer)를 최고 경영자로 영입한다. 마리사 메이어는 야후 회생을 위해 과감한 인수 전략을 채택한다. 또한 미디어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스타 앵커인 케이티 커릭(Katie Couric)을 영입하고 검색 기능 강화에도 노력한다. 그러나 마리사 메이어의 정책은 대부분 실패로 귀결된다. 시장점유율은 계속 하락하고 광고 단가도 올라가지 않게 된다. 마리사 메이어가 11억달러를 주고 인수한 텀블러(Tumbler)는 절반 가까이 상각처리해야 할 만큼 추락한다. 회사 내에서는 분란이 일어났다. 대규모 영업손실은 지속적으로 발생한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행동주의 투자자로 알려진 스타보드 밸류(Starboard Value)가 경영에 간섭을 하게 된다. 이후 마리사 메이어는 애초 영입된 목적과 달리 주주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야후 매각에 전념한다. 그결과 금년 7월 24일, 버라이즌이 야후를 48억달러에 인수하기로 합의한다. 이로써 야후는 20년간의 여정에 마침표를 찍는다.[10]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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