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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셀 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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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셀 포드(Edsel Ford)
포드(Ford)

에드셀 포드(Edsel Ford, 에셀 포드)는 미국 자동차 회사인 포드(Ford)의 창업자인 헨리 포드(Henry Ford)의 외아들이며 1919년부터 1943년 사망할 때까지 포드의 사장을 역임하였으며 그의 장남인 헨리 포드 2세가 그의 뒤를 이어 포드의 사장이 되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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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에드셀 포드는 1893년 11월 6일 디트로이트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릴적부터 회사에서 편지 배달부터 경영에 이르는 전반에 관한 훈련을 받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시간 공장에 자신의 사무실을 가지게 되며 1919년 25세일 때 사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자동차 디자인에 두각을 보이며 포드의 세계 진출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1922년 그는 오랜 염원이던 고급 자동차 제작을 위해 링컨자동차회사를 매입하고 V8 모델을 발표하면서 성능이나 스타일 면에서 동시에 만족할 만한 성과를 이루어냈다. 링컨은 에드셀 포드가 경영을 맡으면서 미국의 최고급 차와 대통령 전용차 제조업체로 유명해졌으며 1923년 쿨리지 대통령을 시작으로 1939년에서 1989년까지 6번에 걸쳐 백악관에 특수하게 제작한 대통령 전용차를 납품되었다. 1920년대에 에디슨, 후버 등 유명인과 부호들이 선호하던 링컨은 1936년에 나온 실용적인 모델 제퍼(Zephyr)로 금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에드셀 포드가 직접 디자인한 것으로 유명한 ‘링컨 컨티넨털 카브리올레’는 미국 자동차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자동차로 손꼽히는 걸작품이다. 이후 링컨은 1939년 자동차 역사에 빛나는 V12 4.8L 130마력의 컨티넨털(Continental)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의 활약도 잠시였으며 아버지인 헨리 포드가 자동차를 실용적인 도구로밖에 생각하지 않은 반면 에드셀은 자동차에 예술적인 가치와 미를 부여하길 원하면서 부자 간의 갈등이 깊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갑작스러운 건강 악화로 1943년 49세라는 나이에 위암 수술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후 포드는 다시 아버지인 헨리 포드가 경영권을 맡았고 2년 후인 1945년 에드셀 포드의 아들인 헨리 포드 2세가 경영권을 승계하였다.[2]

주요 사건[편집]

링컨[편집]

컨티넨탈(Continental)

링컨(Lincoln)은 미국의 자동차 제조사 포드의 럭셔리 브랜드이자 캐딜락과 함께 미국 프리미엄 브랜드의 양대 산맥 중 하나이며 20세기부터 성공한 사람이 타는 고급 자동차의 아이콘이며, 우아함과 품격을 갖춘 대표적인 아메리칸 클래식으로 미국에서 사랑과 지지를 받는 브랜드이다. 링컨은 헨리 릴런드(Henly Leland)가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미국의 링컨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1917년에 정식 설립하였지만 계속된 경영악화와 막대한 부채가 발생하여 어려움을 겪었으며 1922년 에드셀 포드에 의해 인수되었고 헨리 릴런드는 링컨 브랜드가 편입된 이후에도 줄곧 포드의 럭셔리카 개발을 담당하였다. 1920년대 링컨은 프리미엄 아메리칸 럭셔리카로 독자적인 입지를 굳게 다졌습니다. 1922년 에드셀 포드는 아버지인 헨리 포드를 위해 링컨 타운카를 제작하였다. 에드셀 포드가 1938년 파리 여행 중 유럽 차들을 보며 받았던 느낌을 반영하여 자신이 타고 다닐 자동차로 링컨 컨티넨탈을 제작하였다. 에드셀 포드는 신차인 링컨 컨티넨탈 개발을 진두지휘하여 고객들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으며 깔끔한 디자인과 역동적이고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였다.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을 설계한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링컨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동차로 꼽았고 뉴욕 현대미술관 역시 탁월한 디자인의 자동차 첫 번째로 링컨을 꼽았다.[3]

머큐리[편집]

에이트(Eight)

1938년 포드의 사장인 에드셀 포드는 링컨과 포드의 격차를 줄이기 위한 틈새시장 브랜드로 머큐리(Mercury)를 발표하였으며 제네럴 모터스의 고급 자동차 브랜드인 뷰익과 비슷한 성격의 브랜드였다. 설립 이후 1939년 처음으로 머큐리 에이트를 선보였으며 포드 95마력 플랫 헤드 3.9L 엔진을 장착하고 큰 차이면서도 경제적인 타이틀을 가지고 등장했다. 1941년 페이스 리포트된 2세대 모델을 선보였다. 머큐리는 2000년대에 들어서 판매대수가 계속 감소하였으며 판매 감소를 만회하기 위해 밀란, 마리너등의 신차들과 하이브리드 차량들도 출시하여 판매를 하였으나 결국 2010년 5월 포드 모터 컴퍼니는 머큐리 브랜드의 폐기를 공식 선언하였으며 2010년 말에 머큐리 브랜드로 팔리고 있었던 밀란, 그랜드 마퀴스, 마리너, 마운티너 등 4개 모델을 단종 밎 생산을 중단하였으며 2011년 1월 4일에 마지막 1대 생산분이었던 그랜드 마퀴스를 끝으로 머큐리라는 브랜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현재의 머큐리 생산 라인은 링컨의 생산 라인으로 모두 대체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기아자동차가 포드 모터 컴퍼니와 제휴 관계를 맺었을 때 중형 세단인 세이블 모델을 1986년부터 1996년까지 대형 세단인 링컨 컨티넨탈 (링컨 타운카)과 함께 기아자동차 브랜드로 OEM 방식으로 수입 밎 국내생산으로 판매하였다. 또한 그랜드 마퀴스도 1990년대에 병행 수입업체를 통하여 대한민국에서 병행수입 판매하였다.[4][5]

포드 에드셀[편집]

에드셀(Edsel)

에드셀 포드가 사망하고 헨리 포드 2세가 사장으로 취임한지 10년째인 1950년대 미국은 이미 포드, 크라이슬러, GM에서 다양한 종류의 차를 내놓으면 자동차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특히 포드는 스포츠카 선더버드가 큰 성공을 거두었고 증시 상장 등으로 분주하였다. 하지만 GM은 포드도 부러워하는 생산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쉐보레, 폰티액, 뷰익, 올즈모빌, 캐딜락, GMC 와 같은 6개 모델을 갖추고 생산하는 GM에 비해 포드는 포드, 머큐리, 링컨 3가지뿐이었다. GM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모델이 필요했던 헨리 포드 2세는 중저가 차량을 개발하게 된다. 그 결과 획기적인 디자인, 선진적인 기술이 접목된 차가 만들었다. 1957년 9월 애드셀 포드의 아들 헨리 포드 2세는 아버지의 이름을 인용한 브랜드 에드셀을 발표하였다. 에드셀은 차체 라인업 4가지를 갖춘 것은 물론, 온갖 상태에 대비한 경고등을 갖춘 속도계와 핸들 중앙에 장착된 버튼식 변속기, 스튜드베이커 이후로 최초로 적용되는 자동조 절식 브레이크와 인체공학적으로 설계된 조작 설계 등의 혁신들이 있었으며 당시에는 옵션으로 나오던 안전벨트가 기본으로 장착하였며 열쇠 없이 열리지 않는 아동 보호가 가능한 뒷문 도어락도 설치되었다. 디자인의 경우, 포드의 디자인 팀에서는 당대 미국차들과 차별화될 수 있는 디자인을 구상하고 기존의 일자형 크롬 범퍼의 중앙을 뚫고 지나가는 세로 형상의 임팩트 링 그릴로 강해 보이는 인상을 주려고 하였지만 디자이너들의 생각과는 달리 비평가들과 소비자들의 반발이 심했으며 생산도 포드와 머큐리 공장 7곳을 오가는 상황으로 품질이 균일하지 못했다. 에드셀은 못생기고 비싸며 기계장치만 쓸데없이 많다는 혹평 속에서 예상 생산 수량 20만대 중 6만대 정도를 판매하는 엄청난 흥행 실패로 첫해를 마감했으며 1959년식과 1960년식은 더 처참한 실적을 거두고 1959년 11월 판매 부진을 이유로 포드는 에드셀의 생산 중단을 선언하였다. 이로 인해 포드 측에서는 엄청난 손해를 보았고 적잖은 대리점들이 문을 닫았다.[6]

각주[편집]

  1. "Edsel Ford", "Wikipedia"
  2. 김기동, 〈(자동차를 빛낸 사람들) 에드셀 포드〉, 《세계일보》, 2007-11-23
  3. 강홍구, 〈미국의 포드자동차 이야기〉, 《타고》, 2020-12-07
  4. 머큐리(자동차)〉, 《위키백과》
  5. 싼마차, 〈포드 머큐리의 첫 번째 모델, 머큐리 에이트〉, 《네이버 블로그》, 2017-05-11
  6. 포드 에드셀〉,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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