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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 (유흥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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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부당거래'에 등장한 요정의 모습

요정(料亭)은 일반 유흥음식점의 일종으로 유흥업 종사자를 두고 주류와 음식물을 판매하며 가무(歌舞)를 행할 수 있는 접객업소이다. 한국에서 고급 음식점을 의미했고 요릿집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현재는 의미가 변질되어 거의 사용하지 않고, 한정식 식당으로 불린다.

전통 문화를 유지한다는 이미지도 있는지 접대부들이 한복을 입고 일한다는 것도 특징 중 하나이다.

개요[편집]

요정은 여성 접객원이 나오는 고급 한정식 요릿집을 가리킨다.

요정은 객실과 연회석이 마련되어 있고 유흥업 종사자가 손님 옆에 앉아 술시중을 드는 것이 일반대중음식점과 다르다.

예전에 정치인들과 권력자, 기업인들은 여자를 끼고 이곳에서 정치에 관련된 비밀스런 대화를 나누며 접대를 했었다고 한다. 일명 '요정정치'라고도 불린다. 오늘날의 룸살롱에 비견되는 곳이다. 사실은 룸살롱에 비견되는 곳이지만, 지금도 요릿집은 룸살롱보다 가격대는 훨씬 더 높다. 지금이야 룸살롱은 여러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지만 요정은 값이 비싸 고위관료나 대기업 간부들 정도만 이용하는 곳이었다.

사실 요정, 방석집 등 다양한 업소가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전부 룸살롱으로 바뀌면서 일원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끼고 있는 여자가 듣고 있다는 건 넘어가자 꼭 여자를 끼지 않더라도, 이전부터 이런 고급 요릿집이 일종의 안전가옥 역할로서 고급 정보 및 위험한 정보들이 오가는 곳의 역할도 하며 명맥이 이어지기도 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요정에서의 은밀한 접대나 교섭이 많이 이루어졌으며, 1980년대부터 서서히 쇠퇴하여 룸살롱으로 대체되어졌다.

전성기 시절엔 국악전공 대학생들의 아르바이트 장소로 각광받던 곳이다. 물론 접대부 말고 말 그대로 국악기 연주하는 일이 그렇다는 것. 1970년대 기준으로 3~4시간에 십만 원씩도 받을 정도였는데 당대의 평균 급여수준이 월 몇만원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몇달치 급여를 한번에 벌 수 있는 고수입 알바였던 것. 현대에도 이런 아르바이트 자체는 일반 고급 한식당에 남아있긴 하다.

근래에는 룸살롱 이미지에서 탈피하여 고급 한식집으로써의 이미지 변신을 시작, 상당 부분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음식이 아무리 고급이고 맛있다고 하더라도 일반 서민들 주머니로는 살떨리지 않을 수가 없다. 뭐 가격 좀 비싸더라도 질 높은 서비스와 고급 한식으로 나가려고 하긴 하지만, 사실 이 마저도 특급 호텔의 고급 한식당으로 대체되는 분위기인지라, 예전과 같은 고급 이미지는 아니다.

역사[편집]

유래[편집]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료테이라는 형태의 요릿집이 한국에 전해져 생겨나게 되었다. 일본의 료테이는 손님에게 일본의 정찬을 중심으로 하는 고급 요리를 제공하는 식당이었다. 초기 요정은 한국의 정찬이나 궁중요리 등을 제공하는 고급 식당이었으나, 일본의 료테이와는 달리 점차 남자들이 여자들의 접대로 받으며 음식을 먹고, 그 후에 잠자리까지 함께 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그 배경에는 대한제국 말기의 관기 제도 폐지가 있다. 1907년 관기 제도가 폐지되어 기생들은 관청에서 풀려 나와 요릿집에서 일하게 되었다. 요정에서는 기생 조합인 권번에 연락을 하여 기생을 불러 흥을 돋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또한 요릿집에 소속되어 일하는 기생들도 생겨나게 되었다.

요정 3각[편집]

1970년대 말 서울의 북악산에 '요정 3각'이라고 불리는 요릿집들이 있었는데, 청운각, 대원각, 삼청각이었다. 청운각은 1956년 한일회담이 성사된 곳이고, 성북동 삼청각은 1972년 남북조절위원회와 남북적십자회담에 사용되었다. 이러한 요정들은 제3공화국이나 제4공화국의 요인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다.

오진암[편집]

요정이었던 종로구 익선동의 오진암(梧珍庵)은 서울시 음식점 1호 업소로, 1900년대 초 지어진 2천310m²(약 700평) 규모의 단층 한옥건물에 1972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 박성철 제2부수상이 이곳에서 만나 7·4 남북 공동 성명을 논의한 곳이다.

박정희 정부 당시[편집]

박정희 정부 시절 관광요정이 10개 있었고, 최전성기에는 200개가 넘었다. 손님은 내국인뿐만 아니라 일본인도 많았다.

한정식집으로 변모[편집]

1980년대에 요정들은 기생이나 마담이 자취를 감추고 관광 식당으로 변모하였다. 현재의 요릿집들이 이제 요정이라 불리지 않고 한정식집이라고 불린다.

논란[편집]

일명 '기생관광'의 육성을 위해 세금 혜택을 받기도 했는데, 이것이 아직도 유지되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서울특별시의 고급 요정에서 성매매를 한 것이 무더기로 적발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유명 요릿집들[편집]

삼청각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있으며, 건축가 정재원이 설계 후 현대건설이 시공해 1972년에 개장했다. 1980년대 청운각과 함께 서울 최고의 요정이었으며, 요정 정치가 이루어지는 장소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대외적인 긍정적 용도로 사용된 것이라면 7.4 남북 공동 성명 만찬장으로 사용되었다거나, 1970년대 남북적십자회담 장소로 쓰였다거나 하는 등의 역사적 일도 있었다. 하지만 현대로 오면서 룸살롱 시대가 열리자, 요정은 고급 중국요릿집이 되었다가 망해가다가, 서울시의 문화시설 지정을 받은 것을 계기로 요정 이미지에서 탈피해 전통 문화 공간의 이미지로 변하려 노력 중이며, 그 일환으로 전통 혼례 공간으로도 거듭났다. 활옷에 사모관대를 갖추고 전통 혼례 방식대로 결혼식을 올릴 수 있다. 다만 옛날 이미지를 잘 기억하고 있는 어른들의 경우 기생집에서 결혼식을 올린다고 생각해 싫어하는 경향도 있다고 한다. 원래 개인 소유였으며 1999년 화엄건설에 소유권이 넘어가 고급주택 부지가 될 뻔했으나, 2001년부터 서울시가 매입해 공연시설은 세종문화회관에게, 한식당은 한화개발 외식사업부(현 푸디스트)에게 각각 위탁운영했다가 2005년에 소유권이 파라다이스에 넘어갔다가, 2009년부터 현재까지 세종문화회관으로 넘어갔다. 공연 및 전시공간으로도 이용되고 있으며 원래 본업인 고급 한정식집으로 성업 중이다.

선운각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에 있으며, 1980년대까지 밀실정치 3대 요정하면 대원각, 삼청각, 그리고 선운각이었다. 원래 김재규의 내연녀였던 장정이가 1967년 개점했는데, 당시 한옥 몇채를 뜯어와서 그 부속품으로 건물을 지었는데 이 건물 중 일부가 안국동에 있던 안동별궁으로 보인다. 당시 대통령 박정희를 포함해서 정치계 인사는 물론이고, 외국 국빈 대접용으로도 써먹었다고 한다. 유명한 정치사건인 정인숙 살해사건의 정인숙이 근무했던 곳으로도 유명했다. 이 때문에 10.26 사건 이후에 격동이 벌어지면서 중앙정보부와 연결고리가 끊기고, 다른 사업자가 구입해서 한정식 집을 열었다가 망했다. 이후 그 자리를 할렐루야 기도원에서 구매해서 기도원과 사택으로 쓰다가 2021년부터는 다시 '선운각'이라는 이름으로 한옥 카페 겸 결혼예식장으로 쓰고 있다. 미스터 션샤인, 이태원 클라쓰, 부부의 세계 등 유명 드라마의 촬영 장소이기도 하다.

동래별장

일제강점기 동래 온천장에 건립된 하자마 후사타로(迫間 房太郞)의 별장인 박간별장이 기원으로, 하자마는 당시 부산을 기반으로한 대부호로, 식민지 조선인들을 단순 착취의 대상이 아닌,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려 하였던 인물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때는 금강원과 온천장 일대의 근대적 위락시설들의 랜드마크였으며, 일본 황실에서 다녀갈 정도의 호화로움을 자랑하였다. 동래온천과 해방 후 미군 휴양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해방 후엔 여러 요정들과 비슷한 과정을 거치며 일반음식점으로 운영 중이다.

폐업한 유명 요릿집[편집]

  • 대원각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있으며 1951년 개장. 시인 백석의 연인이었던 김영한이 운영했던 곳으로, 1997년에 법정 스님에게 시주해서 길상사란 절로 바뀌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 청운각

1956년 조차임이 이시영의 사저인 종로구 청운동 자택[4]을 빌려서 개장. 청운각의 전성기에는 다른 요정은 다 아래에 있었다고 할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다고 한다.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이 이곳에서 맺어졌다. 그러나 이후 조차임이 암에 걸리자 자산을 정리해서 '우산육영회'란 이름의 장학재단을 만들면서 없어졌다.

  • 오진암

1953년 개장했으며, 서울시의 첫 등록 식당이기도 하다. 3대 요정이라느니 하는 유명세는 다소 떨어지지만 그 바로 다음으로 언급될 정도의 위치에 있으며 요정정치하면 여기도 그렇게 밀리지 않는다. 김두한의 단골집 중 하나였으며, 이후락이 북한의 박상철과 만나서 7.4 남북 공동 성명을 사전 논의한 곳이기도 하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완전히 몰락해서, 2009년 성매매 알선하다가 적발되었다는 대표적인 곳이 여기다. 결국 2010년 망했고, 2014년 종로구가 여기 이름을 안평대군의 자택터인 무계정사로 옮겨서 무계원이라고 해서 전통문화공간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원래 종로구 익선동에 있었는데, 무계정사는 부암동이라서 그냥 이름만 가져다 붙인 형태일 뿐이다.

  • 명월관

1909년에 마지막 대령숙수였던 안순환이 현재의 동아일보 사옥 자리에 세운 요정으로, 밑의 태화관의 본점 격인 곳이다. 1918년에 화재로 한 차례 소실되었다가 종로구 돈의동(현재 피커디리 극장 자리)에 다시 세웠다. 경성부의 고위층 인사들이 단골[5]이었으며 6.25 전쟁 때 파괴되었다. 야인시대에서는 김두한과 설향이 만나는 곳으로 유명하다. 여담으로 시트콤 오포졸에서 나오는 기방의 이름도 명월관이나, 작품 설정상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 관련이 없다. 명월관이 1909년에 세워졌다는 것은 잘못된 정보이다. 명월관의 개업일은 1903년 9월 17일이다.

  • (신) 명월관

일제강점기 명월관의 이름만 똑같이 따온 곳이었지만 역시 유명했는데 왜냐하면 유명한 건달 이화룡의 누이가 운영했었기 때문이다. 많은 정치인들과 유명인사들이 들락거렸으며 1960~70년대를 관통한 요정정치의 주역이었다.

  • 태화관

명월관의 분관인데, 아주 복잡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원래 세종의 손녀 길안현주가 살았던 집인데, 세도정치 시절 안동 김씨 일가의 소유가 되었고, 헌종이 승하한 뒤 헌종의 후궁이었던 경빈 김씨가 이곳에 머무르면서 순화궁이 되었다. 경빈 김씨가 1907년 사망한 후에는 이완용의 형 이윤용의 소유가 되었고, 1911년 이완용이 형으로부터 사들여 1913년까지 살다가 이사를 갔는데, 명월관의 주인 안순환이 이곳을 빌려 태화관이라는 이름으로 개업한 것. 당시 크고 작은 방이 많아 서울의 부호와 조선총독부 관리 등 친일파들이 즐겨 찾는 서울의 명소였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바로 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그래서 아주 골치가 아파진 이완용은 이 건물을 감리교 교단에 매각해버렸다. 기존 임차인이었던 명월관 기생들이 이것에 항의하면서 밖에서 노래를 부르니, 이번엔 감리교 교인들도 맞받아서 찬송가(...)를 부르는 노래 시가전이라는 엽기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쨋든 소유권이 넘어갔기에 1921년부터 이 건물은 '태화 여자관'이라는 이름으로 감리교 포교지이자 여성 복지 사회재단이 되었고, 이후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이라는 이름으로 변했다. 다만 종로구 인사동에 위치했던 본래 건물은 1935년에 개축을 위해서 헐렸고, 태화복지재단으로 변한 재단은 훗날인 1995년 강남구 수서동으로 이전하게 된다. 이 태화재단에 이 건물에 대해서는 순화궁이었고 독립선언서 발표되었다는 소리는 있지만, 이완용에게서 구매했다거나 기생집이었다는 이야기는 없다고 한다. 현재 서울 종로타워 뒤 태화빌딩 자리이다.

  • 춘앵각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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