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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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곡은 우크라이나의 민속학자인 파울로 추빈스키(Павло Платонович Чубинський, 1839년 1월 27일 ~ 1884년 1월 29일)가 1862년 발표한 시에 음악가 미하일로 베르비츠키(Михайло Михайлович Вербицький, 1815년 3월 4일 ~ 1870년 12월 8일)[1]가 1863년 곡을 붙이면서 탄생되었다. 추빈스키는 당시 불어닥치던 슬라브 민족주의에 영감을 받아 시를 써내려 갔다고 한다.
 
이 곡은 우크라이나의 민속학자인 파울로 추빈스키(Павло Платонович Чубинський, 1839년 1월 27일 ~ 1884년 1월 29일)가 1862년 발표한 시에 음악가 미하일로 베르비츠키(Михайло Михайлович Вербицький, 1815년 3월 4일 ~ 1870년 12월 8일)[1]가 1863년 곡을 붙이면서 탄생되었다. 추빈스키는 당시 불어닥치던 슬라브 민족주의에 영감을 받아 시를 써내려 갔다고 한다.
  
추빈스키의 시는 쓰자마자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널리 퍼지게 되었으며 1년 뒤인 1863년 르비우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잡지인 메타(Мета)에 실렸다. 곧바로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이 시는 매우 유행하게 되었다. 이에 신부였던 베르비츠키는 시에 어울리는 곡을 만들기로 결심하였고 1864년 리비우에서의 초연을 시작으로 1865년 추빈스키의 시에 베르비츠키의 곡을 붙인 악보가 발간되면서 우크라이나의 국가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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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빈스키의 시는 쓰자마자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널리 퍼지게 되었으며 1년 뒤인 1863년 르비우[3]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잡지인 메타(Мета)에 실렸다. 곧바로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이 시는 매우 유행하게 되었다. 이에 신부였던 베르비츠키는 시에 어울리는 곡을 만들기로 결심하였고 1864년 리비우에서의 초연을 시작으로 1865년 추빈스키의 시에 베르비츠키의 곡을 붙인 악보가 발간되면서 우크라이나의 국가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당연히 당시 우크라이나를 다스리던 러시아 제국의 높으신 분들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이 노래를 심히 불편해하셨다. 곡을 작사한 추빈스키는 1862년 10월 "농민들에게 부정적 사고를 퍼뜨린다."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아르한겔스크로 추방되어 7년 동안 유배되는 등 고생을 하다 말년에는 경제적으로도 파산하는 궁핍한 생활을 하다가 1884년 사망하였다. 러시아 당국은 이 노래를 금지곡으로 지정하였고 때문에 이 노래는 우크라이나 본토보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4]에서 유행하였다.
 
당연히 당시 우크라이나를 다스리던 러시아 제국의 높으신 분들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이 노래를 심히 불편해하셨다. 곡을 작사한 추빈스키는 1862년 10월 "농민들에게 부정적 사고를 퍼뜨린다."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아르한겔스크로 추방되어 7년 동안 유배되는 등 고생을 하다 말년에는 경제적으로도 파산하는 궁핍한 생활을 하다가 1884년 사망하였다. 러시아 당국은 이 노래를 금지곡으로 지정하였고 때문에 이 노래는 우크라이나 본토보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4]에서 유행하였다.
  
처음 국가로 제정된 것은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1917-1920) 시기였고,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외에도 단명한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1918-1919), 1939년 잠시 수립된 카르파티아 우크라이나 공화국이 이 곡을 국가로 사용했었다. 하지만 러시아 내전 결과 소련의 붉은 군대가 우크라이나를 장악하고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설립되면서 이 곡은 다시 탄압을 받게 되었다. 소련을 구성하는 공화국들은 자신만의 국가를 가질 수는 있었으나 이 곡은 민족주의와 분리주의를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지정됐으며 파울로 티치나(Павло Григорович Тичина, 1891년 2월 23일 ~ 1967년 9월 16일)가 작사하고 안톤 레베디네츠(Антон Дмитрович Лебединець, 1895년 1월 7일 ~ 1979년 3월 17일)가 작곡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Державний Гімн Української Радянської Соціалістичної Республіки)가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1989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내건 글라스노스트의 영향으로 해금되었으며, 이듬해인 1990년 4월 9일 해금된 이후 처음으로 공식 연주가 되었다. 당시 연주 영상. 본래 쓰이던 국가로 환원된 것은 독립 직후인 1992년 1월 15일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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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국가로 제정된 것은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1917-1920) 시기였고,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외에도 단명한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1918-1919), 1939년 잠시 수립된 카르파티아 우크라이나 공화국[6]이 이 곡을 국가로 사용했었다. 하지만 러시아 내전 결과 소련의 붉은 군대가 우크라이나를 장악하고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설립되면서 이 곡은 다시 탄압을 받게 되었다. 소련을 구성하는 공화국들은 자신만의 국가를 가질 수는 있었으나 이 곡은 민족주의와 분리주의를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지정됐으며 파울로 티치나(Павло Григорович Тичина, 1891년 2월 23일 ~ 1967년 9월 16일)가 작사하고 안톤 레베디네츠(Антон Дмитрович Лебединець, 1895년 1월 7일 ~ 1979년 3월 17일)가 작곡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Державний Гімн Української Радянської Соціалістичної Республіки)가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1989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내건 글라스노스트의 영향으로 해금되었으며, 이듬해인 1990년 4월 9일 해금된 이후 처음으로 공식 연주가 되었다. 당시 연주 영상. 본래 쓰이던 국가로 환원된 것은 독립 직후인 1992년 1월 15일의 일이었다.
  
 
본래는 3절까지 가창하였으나, 2003년 3월 6일부터 1절만 가창하고 있으며, 가사가 일부 변경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2003년 이전 가사를 훨씬 더 많이 쓰고 있다.
 
본래는 3절까지 가창하였으나, 2003년 3월 6일부터 1절만 가창하고 있으며, 가사가 일부 변경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2003년 이전 가사를 훨씬 더 많이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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