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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유전기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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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앤더슨(Robert Anderson)
19세기 스코틀랜드의 전기차 발명자

원유전기마차(crude electric carriage)는 19세기 영국 스코틀랜드의 발명가인 로버트 앤더슨(Robert Anderson)에 의해 발명된 전기차이다. 전기자동차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세계 최초의 전기차로 원유전기마차는 1832년과 1839년 사이에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으며 충전할 수 없는 1차전지에 의해 구동되었다.

1835년 산업박람회에서 전시된 적이 있다. 원유전기마차는 시속 12Km를 달릴 수 있었으며 조종이 다소 번거롭긴 했지만 구동장치는 신형 테슬라의 파워트레인 못지않게 조용했다. 일회용 배터리를 사용했고, 전기를 생산하기 위해 원유가 사용되었다. 이것이 앤더슨이 1886년부터 유명한 세 바퀴의 가스동력 벤츠 페이턴트 모터바겐보다 훨씬 전에 그의 전기차를 도로에서 가까스로 탈 수 있었던 방법이다. 처음부터 자동차가 휘발유로 달리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전기차의 초기 역사[편집]

프랑스와 영국은 전기자동차의 광범위한 개발을 지원한 최초의 국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1832년 영국 스코틀랜드의 사업가 앤더슨이 세계 최초의 원유전기마차를 발명한 뒤 1835년 네덜란드 출신 크리스토퍼 베커는 크기가 작은 전기자동차를 만드는데 성공한다. 뒤이어 1842년, 미국의 토마스 데트와 영국 스코틀랜드의 로버트 데이비슨은 앞서 나온 전기차들보다 실용적이고 더 잘 작동하는 전기자동차를 개발한다. 1865년, 프랑스의 가스통 플란테는 축전지라는 것을 발명하고 이후 카밀 포레는 그 축전지를 더욱 발전시켜 더 많은 저장용량을 가지게 한다. 이 축전지는 전기자동차가 번창하는 것에 크게 기여한다. 이후 냄새가 적고 진동이 적고 소음이 작도록 개발하고, 기어를 바꿀 필요가 없도록 만들어져 특히 여성들에게 많은 관심과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속도가 상당히 느렸다고 한다. 가격이 매우 비싸 상류층만이 사용할 수 있었는데 1900년대에 이르러서는 다른 차량보다도 월등하게 많이 팔렸고, 1912년에는 생산 및 판매에서 정점을 기록했다고 한다. 이후 원유가 대량으로 발견되면서 휘발유 자동차가 전기자동차의 자리를 대체하게 되었다.

당시 내연기관차는 시동 모터가 없어 차 밖에서 크랭크를 돌려 시동을 걸어야 했다. 반면 원유전기마차는 그런 번거로운 과정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초의 전기차인 원유전기마차는 동력원인 전지의 충전이 불가능해 즉각적인 상용화로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이후 축전기가 만들어지고 나서야 보급이 될 수 있었다.

원유전기마차가 사라진 이유[편집]

그런데 이렇게 폭발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원유전기마차는 왜 갑자기 사라져버리고 말았던 걸까? 답은 바로 내연기관차, 즉 가솔린 차에 있다. 1900년대에 이르러 가솔린 차의 엄청난 성장으로 전기차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1908년, 자동차의 왕이라고 알려진 헨리 포드가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한 대량 생산 방식으로 값싸게 가솔린 차를 공급했던 것이다. 배터리가 무겁고, 충전시간이 길며, 값이 비싸다는 단점이 있는 전기차는 순식간에 경쟁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더군다나 1920년, 미국 텍사스에서 대형의 유전이 개발되어 휘발유 가격도 폭락하고 말았다. 기름값이 싸졌으니, 결과적으로 가솔린차의 판매량은 폭증했고 상류층이 주로 타는데다, 비싼 실크나 털을 둘러 귀족차라고 불리기도 했던 전기차는 이에 따라 1930년대에 이르러 완전히 인기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후 우리가 알다시피, 내연기관차가 자동차 시장을 선점했다. 1970년대 오일 쇼크 덕에 잠깐 조명을 받았으나 유가 하락으로 인해 다시 관심에서 멀어졌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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